*감상음악 : Mi Noche triste -- Tango -- Orquesta Serenata Tropical
One of the most historic and classic tango, in the version of Orquestra Serenata Tropical published about year 1960.
클릭 : http://www.youtube.com/watch?feature=player_embedded&v=iMYWIup_a7c
-------------------------------------------------------------
진상들
맑은 샘
공원카페 앞 은행나무들에
찬바람이 불어 낙엽들이 쓸려간다
휘이익 한번 불어 나무의 낙엽들이 날아가고
휘리릭 두번 불어 또 날아간다
세번, 네번 불어도
푸르게 자랐던, 단풍의 옛날이여
허접한 상상(想像)은
노오란 것들을 파아랗게 회덧칠 했을 뿐
낡은 트랜지스터를 틀며 달려 있는 것들
찬바람이 불어도
아직 썩은 채로 대롱대롱
악만남아 매달린 녀석들
녀석들은 악취의 쓰레기통이나 고양이 시체와 함께
쓸쓸한 비닐봉투로 갈 것이다
회자정리(會者定離)를 알리없는,
찬바람이 불면
날아가야만 하는 것을 모르는 것들
썩은 욕망(慾望)은 찬바람을 더 분노(憤怒)케 하고
보는 새들의 화면을 치졸(稚拙)하게 한다
그렇게 매달린 들, 고드름이나 될런지
철지나 썩어도 원래 노오랗던 그들
가지는 물관(管)을 닫는다
죽어서 무얼 가져갈까
*"나는 시인이 못됨으로 시를 모른다"고 말했던
행려노인이 훔쳤던 소주 두병처럼
맑은 회오리에 빨려들지만
늦가을 모든 스펙의 새들과 다람쥐들은
따뜻한 움속에 웅크린 채 외면하며
내면(內面)을 돌아보는 시간으로 향할 뿐
찬바람이 불지만
*보비오가 먹던 짝퉁 *리코타 치즈는
이제 곰팡이 마저 피어
짙은 루으즈 쓸쓸하게 바른 늙은 마담의
가을탱고 스텝을 꼬이게 한다
네 번이나 정과 몸 다 주었건만
네 번이나......
코트의 깃을 쓸쓸히 여미며
*진상들이여
이제 그만 가라
----------------------------------------------------------------
* 주 : *노베르토 보비오 : 이탈리아의 현대 법철학자. 썩어빠진 이탈리아 정계를 막무가내로 도려낸 좌파 검사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도 좌파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다. 마르크스로는 틀렸다며 최초로 "참여"라는 말을 유행
시키기 시작했다. (필자의 신좌익사상 비판 연재물 중 칼럼방 "노베르토 보비오" 편 참조)
노무현 시대의 '참여"라는 말도 여기에서 근원한다고 나는 보고 있다. 그러나 국민의 진심을
외면한 이번 보궐선거에서도 민주당은 네번째 쓰라린 패배를 맞보고 있다.
悶朱唐, 구제불능 아닌가?
*리코타 치즈 : 이탈리아산 치즈
*진상 : 쓰잘데없는 찐드기라는 뜻의 화류계 여인들의 은어(隱語)
*나 : 시인 김종삼을 지칭
*첨가 에세이 : 필자의 문학 토론방 연재물 - 시창작의 비법은 없다. 1
---------------------------------------
맑은샘의 시창작강의 (5), 시창작의 비법은 없다.
인간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방황하는 것이라고 괴테는 말했다. 언뜻 읽으면 모순되는 말 같지만 결코 모순된 표현이 아니다. 방황한다는 의미는 쓸데없이 헤매며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것을 찾아서 모색하는 것이며, 어느 한 곳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탐구하는 자세를 말하기 때문이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아직 등단하지 않은 습작생들이나 남들이야 필자가 좀 큰 문학상까지 탄 시인이니 좀 부러워할 수도 있겠지만 필자의 마음은 전혀 그렇지 않다. 필자는 처음 시를 알고 쓸 때나 좀 지나면서나 지금이나 시를 쓸 때는 여전히 같은 설레임과 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의 고민을 반복하고 있다. 물론 지나서 보니 그동안 여러졸작들을 쓰는 과정에서 필자도 여러창작 경험과 더 괜찮은 작품을 써 보려고 남의 시도 읽고 여러 창작기법의 책도 보고 평론집들, 이론서들을 읽어가고 언론사 기자를 거쳐 간부의 직업인으로써 바쁜 와중에도 무엇보다 "사상감상시(思想感想詩)"라는 내 나름의 쟝르를 만들기 위해 문학이외 다른방면의 서적들도 보면서 자유주의 입장에서 사회참여의 문제로 수많은 거리 캠페인,시민운동을 주도하기도 하며 졸시와 졸에세이들을 써왔다.
하지만 필자는 아직 제대로 성취한 창작업적은 하나도 없는 것 같고 이제 겨우 시작이라는 느낌, 지난 10여년 세월이 이제 겨우 좀 제대로 작품을 쓸만한 기초작업의 시간이라는 생각만 든다. 이런 낙서를 쓰다가 저런 졸작을 쓰다가 고마운 인연으로 등단했다가 그래도 본인인 필자가 관계된 것이 아니라 다른 분들께서 주시는 우리 세계한인동포들의 큰 상을 받았으니 대단한것 같지만 사실 필자는 고개를 들지 못할 정도로 부끄러울 따름이다. 역시 문단이라는 넓은 강호에는 숨어있는 고수(高手)들도 많으며 오늘도 남몰래 뜨거운 창작의 땀을 흘리고 있으리라.... 역시 시인에게는 賞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예술세계와 작품이 더욱 중요하다. 나는 원래가 우리 문단의 무슨 무슨 시인 이름들이 붙은 문학상(文學賞)이라는 賞들에 대하여 관심이 별로 없었으며 그리 큰 비중을 둔 사람도 아니었다. 매우 교만하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 문학상(文學賞)들을 타기 위한 오늘날의 매우 부끄러운 메커니즘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한 것이었다.
이번에 필자에게 賞을 주신 분들께서 오해없으시기를 바란다. 필자는 아직도 갑작스러운 수상소식에 얼떨떨하며 "세계한인 대상,(문학-시)부문 "을 수상하기로 허락한 것은 부끄러운 필자에게 賞 자체가 큰 영광이며 필자는 몰지각하고 오만하기 짝이없는 저 프랑스의 "쟝 폴 샤르트르"처럼 주시는 賞을 거부하는 교만한 인간은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의 신좌익사상 비판 연재물 "샤르트르" 편 참조) 나는 이 賞 자체가 조국을 떠나 해외에서 수많은 고통과 좌절들을 딛고 성공하시는 것도 힘든데 그것을 넘어 사랑하는 조국에 희망과 꿈을 선사하는 우리 귀한 교포들이 주시는 賞이라서 과연 필자가 받을 자격이 있는지 숙연하고 송구할 따름이었다. 더욱 분발하라는 채찍질로 여기며 더 무거운 책임을 느끼고 무한한 감사와 영광으로 알고 받았다. 하여튼 시인, 예술가라면 더 낳은 작품, 더 괜찮은 작품을 위해 끊임없이 전진하는 것을 괴퇴는 '방황'이라는 단어로 말한 것 아니겠는가?
지난 시간 "시창작이란 무엇인가" 에 이어 지금 이어지는 "시창작의 비법은 없다"는 연작물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이제 시창작을 설레이는 마음으로 시작하는 미래의, 미지의 詩大家들에게 드리는 필자의 편지이며 필자 나름대로의 "시창작 강의" 초안 원고의 서론격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것이다. 미리 밝혔듯 이 연작은 필자가 맨 처음 시를 쓸때 읽었던 故조태일 시인의 글을 원론으로 하고 필자 나름대로의 여러 창작경험과 간간히 기타 시 창작에 도움되는 이론이나 좋은 생각들이 첨가되어 "빤스가 날아간다 (노벨문학상 수상자들의 소개)" 연작 시리즈와 함께 발표될 것이다.시를 10여년 이상 썼고 주제넘게 큰賞도 받았으나 필자도 앞으로 창작의 갈길은 멀지만 후배들을 위해서 이정도는 무료봉사해야 되지 않나 싶다. 강호의 제현들께서는 혜량들 하시라....! 무엇보다 글은 쓰고 싶을 때 써야 맛이 나지 않겠는가?
일생동안 시 창작의 길을 걸어와 그 쪽 분야에선 제법 달인의 경지에 섰을 법한 시인들도 한결같이 "시는 쓰면 쓸수록 어렵다"고 말한다. 필자도 마찬가지다. 한 평생을 시만 쓰신 원로 시인들께서의 이런 말씀들은 지나친 겸손 같기도 하고 엄살을 떠는 것 같지만 이말은 괴퇴의 그것과 같은 의미로서 시 쓰기 역시 죽을 때까지 부단한 자기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일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성급하게 시 창작의 비법을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물음에 대한 해답이 없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법은 없다 하더라도 좋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데생연습을 쉴새없이 하는 것처럼 시를 쓰기 위한 기초닦기나 준비운동쯤은 있을 것이다. 시창작을 하려는 지망생들은 창작의 비법을 알아서 지름길로 가려는 생각을 버리고 소와 같은 우직한 걸음으로 자기의 모든 생활습관부터 시 창작을 위한 기초를 닦아 가야 할 것이다.
필자는 여러분이 바라는데로 흔희 "무슨무슨 왕도"니 "무슨무슨 비법"이니 하는 따위의 제목을 붙이는 사람이 아니다. 그런 제목들은 여러분들의 순진함을 꾀는 매우 유치하고 저급한 출판상술일 뿐이며 적어도 인생과 세상의 가장 진실한 아름다운 면을 찾고 추구하는 시인이 창작기법이라고 "무슨무슨 비법"이니 "왕도"니 하는 유치한 제목을 달 수 있겠는가? 시세계 뿐만 아니라 필자의 직장경험에서도 그런 저열한 짓은 어림이 없다. 하지만 이런 유치한 짓도 지금 우리문단에서는 비일비재하니 슬플 따름이다. 그런 비법을 원하는 습작생이라면 이글을 읽지말고 그냥 가시기 바란다. 나는 그런 얼빠진 제자 두는 사람이 아니며 당신들에게나 맞는 저급한 권위선생들이나 찾아 가시라....특히 문예창작을 전공하지도 학위를 받지도 않았는데 무슨 강의안이냐 나도 고민을 많이 했지만 이 글은 오늘날 무슨 신춘문예 당선의 권위잃은 브랜드로 돈을 받고 장사하거나 문예창작 박사학위를 받고도 영리출판의 목적으로 쓰는 시인의 글이 절대 아님을 미리 밝힌다. 그런 짓이 부끄럽지도 않는가?
필자는 이제 좀 강의를 해달라는 요청들이 들어오고 해서 장소,시간 낭비할 필요없이 필자의 온라인 인터넷 카페를 통해 그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나름대로 주고자 하는 취지일 뿐이다. 내 또래 젊은 시인의 문예창작학과 박사학위? 솔직히 말하면 전공자들에게는 매우 미안하고 몇몇 훌륭한 교수님들에게도 죄송하지만 필자는 하나도 아쉬울 것도 없으며 필자주위도 지나가는 뭐가 웃을 일이다. 필자는 언론인이면서 동시에 등단시인이지 詩장사치는 아니다.
1. 문학체험을 많이 해라
좋은 글을 쓰기 위하여 구양수(毆陽修)가 말한 삼다(三多)가 필요하다. 그 중의 첫째가 다독인데 풍부한 독서가 시 창작에서도 예외가 될리 없다. 좋은 시를 쓰기 위한 기초로서 독서체험을 풍부하게 가져야 하는 것은 시 창작의 필수조건이다. 독서체험은 실제의 체험에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것은 단순히 다른 사람의 글을 읽는 행위가 아니라 글쓴이의 체험, 사고, 감정, 인격
,사상 등의 총체적인 것과의 만남이 되며 새로운 세계를 접해 볼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실제로 우리들이 부딪치는 세계의 폭은 좁고 한정되어 있다. 당연히 경험도 거기에 비례해서 비좁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우물안 개구리식의 자기 생각이나 세계를 뛰어 넘어서 더넓은 세계로 우리의 사고와 정신을 이끌어 갈 수 있는 것이 바로 독서이다. 그러므로 독서는 우리의 정신세계를 살찌우고 풍요롭게 한다. 또한 사물을 보는 방법이나 시각을 다양하게 만들고 사고를 깊게 한다.
동시에 자기의 직접적인 체험을 새롭게 인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흔히 독서를 마음의 양식이라 하는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특히 문학경험은 시 창작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소설이나 시를 읽고 감동을 받을 때 자신도 그와 같은 작품을 쓰고 싶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이러한 충동이 창작의 씨앗을 만들기도 한다. 또 작품을 읽는 동안 자기의 내면 속에 감추어져 있거나 잊혀졌던 무수한 감정들과 생각들이 이끌려 나와서 해후하게 되고 거기에서 자기만의 새로운 것을 탄생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이글을 쓴 故조태일 시인도, 필자도 글을 쓰다가 생각이 막히면 그만 손을 떼고 다른 사람의 시나 소설, 수필 등을 읽으셨고 읽는다. 그러다 보면 막혔던 생각들이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경우가 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글을 모방해서가 아니라 글을 읽는 동안 잠재해 있던 그 무엇들이 샘솟고 글을 통해 새로운 것들이 연상되기 때문이다. 좋은 글이 좋은 글을 낳고, 좋은 시가 좋은 시를 낳는다는 말처럼 문학경험은 창작의 훌륭한 활력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또 무수한 작품을 접해 봄으로써 훌륭한 작품을 볼 줄 아는 안목을 기르고 지금 쓰고 있는 자기 작품에 대해서 객관적인 잣대를 갖다 댈 능력도 키우게 된다. 19세기 영국의 비평가 헤즐리트는 "시는 오직 상상의 언어"라고 했다. 이 말은 상상력 없이는 쓸 수 없는 것이 시라는 의미이며 실제적으로도 시는 어떤 글보다 상상력을 필요로 하는 문학이다. 따라서 시를 쓰려는 지망생들은 상상력을 풍부하게 키워야 하는데 , 문학체험이야 말로 이것을 위한 좋은 방법이다. 수많은 상상들이 집약되어 나타난 것들이 문학작품이기 때문에 무수히 문학작품들을 접해 봄으로써 자신의 상상력을 키울 수 있다. 특히 시야말로 상상력의 산물이므로 부지런히 시를 읽어야 한다.
나무를 다루는 목수는 그 나무의 재질을 알고, 돌을 다루는 석공은 그 돌의 성질을 잘 파악해야 하는 것처럼 시를 쓰려는 사람은 우리말에 능통해야 한다. 시는 극도의 언어예술이며, 언어의 정수(精粹)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어떠한 문학보다도 언어에 대한 감각과 언어를 다루는 솜씨를 필요로 한다. 처음부터 이것을 타고난 사람도 있겠지만, 후천적인 자기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문학체험은 이 언어에 대한 감각을 키우고 언어의 속성이나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수많은 작품을 읽는 과정 속에서 우리말이 지닌 섬세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몸으로 느껴 봐야 한다. 그리고 숱한 어휘까지 자기 것으로 만들어서 그것들이 어느 자리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일 수 있는가를 스스로 감지할 수 있어야 한다.
좋은 창작은 기존의 것을 바탕으로 해서 이루어진다. 창작은 무엇보다도 새로움을 찾아서 나아가는 것이지만 선배들이 쌓아올렸던 기존의 작품들을 밟아 본 후에 자신의 새로운 발자국을 낼 수 있을 것이다. 늘 한결같으면서도 늘 새롭고, 늘 새로우면서도 한결같다는 뜻으로, 즉, 옛것을 모범삼아 새로움을 창조한다는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따라서 풍부한 문학체험은 자신의 시를 창작하고 자신의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가는데 있어서 반드시 필요한 통과제의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 사고를 깊고 풍부하게 하라
'사고'는 창작의 바탕이며 밑천이다. 텅 비어 있는 돼지 저금통에서 돈을 꺼내 쓸 수 없는 것처럼 자신의 생각이 들어 있지 않고서는 시를 쓸 수가 없다. 시 창작은 어떠한 것보다도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며, 개성과 독창성을 발휘하는 창조적인 예술이다. 그런데 이 창조성과 개성의 근원은 다름 아닌 자신의 '사고'로부터 흘러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시 창작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모든 오피니언 리더들의 차장급 이상의 좀 괜찮은 직업에서도 당연한 일이라고 나는 본다. (그렇다고 이것이 습작생 시절의 기존의 좋은 전통과 훌륭한 선배들의 업적을 깡그리 무시한 채 어린 골방 시절 책 몇권 읽고 미쳐 날뛰는 아주 교만하고 건방진 주장들은 아니다. 그것이 소중하다면 그 소중한 만큼 나중에 빛을 보게끔 숨기고 가꿀 줄도 알아야 하리라....! 시창작 뿐만 아니라 대게 공학과 벤쳐경영창업 부분에서 이런 일을 나는 많이 보았는데 자신은 새로움에 기뻐 날뛰지만 알고보니 남이 먼저 써 먹었던 일이 허다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똑같은 사물을 보더라도 각자가 보는 것은 틀리며, 느끼는 것이 다른 까닭은 품고 있는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남과 구별되는 자기만의 고유한 생각이 한 인간의 개성을 만들어 내고 창조적인 글쓰기의 핵심을 형성해 내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글은 그 사람의 인격을 반영한다" 라든지 "글은 곧 그 사람이다" 라는 말을 주위에서 듣곤 한다. 이 말은 글 속에 들어가 살고 있는 글쓴이의 '사고'가 그 사람의 정신과 인격 등의 총체적인 모습을 드러나게 해 준다는 뜻일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시창작에서도 마찬가지다. 시의 차이는 '사고'의 차이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사물과 세계에 대한 통찰이 달라지고 시의 성패가 좌우된다.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식지 않는 시간, 삭은 산천을 돈다
燈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리
난 동으로 사십리
--------- 조병화, <오산 인터체인지> 전문 ----------
어떠한 만남이든지 그 만남은 이별을 동반하게 마련이다. 친구간의 만남이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인연이든 영원한 만남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이별의 운명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오히려 영원히 함께 있기를 맹세하고 갈망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안타까운 소망에도 불구하고 태어나면 언젠가는 죽어가야 하는 것이 우리들의 운명인것 처럼 이별 역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불가(佛家)에서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을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더구나 무수한 만남들로 얽힌 인간들의 관계는 제 아무리 친절하고 가까운 관계에 놓일지라도 인간은 하나의 개체일 뿐이며 엄밀한 의미에서는 단독자이다. 그것은 마치 서로를 알아보기 힘든 짙은 안개 속에 각기 떨어져 있는 사물과도 같아서 자신의 외로움을 혼자서 짊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들이다.
위에서 인용한 시는 이러한 우리들의 운명과 고독을 담담하고도 편안하게 노래하고 있다. 안개와 서로 교차되는 오산 인터체인지라는 일상의 사물을 여유롭게 응시하면서 시인은 그 사물들을 통해서 인간이 지닌 고독함을 짚어보고 그것을 넉넉히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깊이는 시인의 이러한 통찰, 즉 '사고'의 깊이에서 우러나오고 있다. 시 창작에서 사고란 어떤 심오하고 거창한 사상만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위에서 인용한 시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자기 삶과 주변의 사물들을 함부로 보아넘기지 않고 거기에서 새로운 깨달음과 진실을 발견하도록 하는 생각의 힘을 의미하는 것이다.
시인이란
옥타비오 파스 (Octavio Paz)
The Nobel Prize in Literature 1990
홀로 독백하는 외로운 산책자이다
시인이란 숭고하면서도 괴상하고 가련한 악마이며
타고난 채플린이다
사소한 것, 가까이 있는 것, 친근한 것에 대한
미적 향수자이다
즉 일상적 언어가 갖는 비밀스런 호흡이며, 힘이다
하나의 독백 속에
반성과 서정, 노래와 아이러니 산문과 운문이 뒤섞이고
분리되며, 관조하고 또다시 합일된다
그것은 노래의 단절이다
더듬거리는 독백이며, 그것은 침묵의 여백으로 끊긴다
시는 노래의 단절에서 비평의 체계로 변했다
여기에 엉뚱한 이미지와 상투어 같은
말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결국 노래일 수밖에 없으며
포퓰리즘(대중)의 공유재산이
아니라
고독한 자의 사유재산이다
옥타비오 파스 로사노(Octavio Paz Lozano, 1914년 3월 31일-1998년4월 19일)는 멕시코의 시인, 작가, 비평가 겸 외교관이었다. 멕시코 시티 출신인 그는 진보적인 문화인이었던 할아버지의 영향으로 인해 문학에 관심이 높았으며 19세 때에 자신의 첫 시집인 《야생의 달 (Luna Silvestre)》을 발표했다. 그는 1937년에 내전이 한창이던 스페인에서 열린 반(反) 파시스트 작가 회의에 참가했으며 1938년에 멕시코로 귀국, 멕시코의 신세대를 대표하는 작가로 활동하기 시작한다. 그는1944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갔으며 1945년에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갔다. 1946년에 외교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시집 《가석방 상태의 자유 (Libertad bajo palabra)》와 《독수리인가? 태양인가? (¿Águila o sol?)》 ,《격렬한 계절 (La estación violenta)》,《일장석 (Piedra de sol)》,《도롱뇽 (Salamandra)》을 비롯, 수필집 《고독의 미궁 (El laberinto de la soledad)》 과 《활과 리라 (El arco y la lira)》 (1956년 작), 《느릅나무에 열린 배 (Las peras del olmo)》(1957년 작) 등을 발표했다.
그는1962년에 인도 주재 멕시코 대사로 임명되었지만 1968년에 멕시코 정부가 급진파 학생들이 일으킨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한 것에 대한 항의의 뜻으로 사퇴했다. 이후 그는 케임브리지 대학과 텍사스 대학, 하버드 대학교 등에서 교수로 근무하면서 문학 활동을 전개했으며 시집 《하양 (Blanco)》과 《동쪽 비탈길 (Ladera este)》 ,《공기의 아들들 (Hijos del aire)>>을 비롯, 수필집 <결합과 분리 (Conjunciones y disyunciones)》 ,《원숭이 문법학자 (El mono gramático)》 등을 발표했다. 그는1981년에 세르반테스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에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파스는 중남미에서 당대를 대표하는 시인이자 지식인이다. 그의 저서 (활과 리라)는 시론(詩論)으로써 1990년 노벨문학상을 받게한 계기가 된다. 그는 시대적으로 참여논쟁에 휘말리게 되는데 역사의 이름으로 내면적 진실을 희생시켜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취했다. 공교롭게도 논쟁의 상대는 거장이며 자신의 후견이었던 '파블로 네루다"였다. 같은 슈르 레알레슴 계열 시인들이었지만 파블로 네루다는 좌파였다. 순수문학의 입장이었던 파스는 "참여진영"에서 철저히 소외당하고 좀 숨을 쉬기위해 국외로 가는 계기가 되었다. 파스의 (활과 리라)는 단순한 시론(詩論)이 아니라 인간과 역사를 꿰뚫는 안목을 열어주는 문학고전이다. 그의 글은 정교하고 치밀하면서도 매우 시적이어서 존재의 내밀하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옥타비오 파스는 이 책에서 '인간과 시'라는 현상에 대해 철저하게 파고들고 있다.
|
깨뜨리고 깨뜨리고 또 깨뜨려야만 했던 일이 있었다. 구원이란 이 대가를 치러야만 얻어지던 일이 있었다.
대리석 안에 떠오르는 나체의 얼굴을 파괴하는 일 모든 형태 모든 아름다움을 망치로 깨뜨리는 일.
완성이란 문턱인 까닭에 이를 사랑하는 것 그러나 알려지면 곧 이를 부정하고 죽으면 곧 이를 잊어버리는 것.
미완성이 정상(頂上)이다. |
|
| |
|
|
| |
L'imperfection est la cime
Il y avait qu'il fallait detruire et detruire et detruire, Il y avait que le salut n'est qu'a ce prix.
Ruiner la face nue qui monte dans le marbre, Marteler toute forme toute beaute.
Aimer la perfection parce qu'elle est le seuil, Mais la nier sitot connue, l'oublier morte,
L'imperfection est la cime

21세기 작품들이 있는 콘서트
라이너 쿤체
우리에게 허여되었다,
수천 년이 술렁이며 물 흘러갔어도
음악 앞에서 사는 일이
그렇지만 벌써 넘겨 들을 수가 없다
음악이 끝난 후의
이 술렁임을
KONZERT MIT WERKEN DES 21, JAHRHUNDERTS
Reiner Kunze
Uns war vergo"nnt zu leben
nach dem jahrtausenderauschen
vor der musik
Doch unu"berho"rbar schon
das rauschen
nach der musik
위 시들을 가만히 읽어 보라 ...첫번째 시 '미완성이 정상이다'는 필자가 좋아하는 프랑스의 시인 '이브 본느푸아
의 시다. 시인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넘치는 상상력과 군더더기 없는 평범한 낱말들의 오묘한 조합 속에서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풍부한 은유를 통해 지극히 현실적인 세상 속에서도 시공을 관통하는 ‘가치’를 찾아내는
시의 달인이다. 그의 상상력은 철저히 현실을 기초로 한다.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 현실세계와 극한으로 대립되는
비현실적인 꿈 사이의 갈등을 유발하고,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허물어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또한 그의
시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의 시 속에서는 ‘돌’들도 추상적인 개념 속에 머물지 않고 개성을 지니는 인격체들이
된다. 뛰어난 그림에서 많은 영감을 받은 본느푸아는 단순히 그림을 예찬하는 것을 넘어 그 속에 이야기를 부여하고, ‘읽는 그림’으로서의 시를 창작한다. 뿐만 아니라 셰익스피어와 예이츠의 영시가 본느푸아에 의해 프랑스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프랑스어와 영어 리듬의 다른 특성들이 시의 형식을 다르게 하는 기본 요인임을 알게 해
프랑스 시 작법 이론을 재조명하게 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대표적 시인 말라르메로부터 영향을 받으면서도
다양한 경험을 통한 자신만의 독창적인 시세계를 구축한 이브 본느푸아의 시학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두번째, 현존 최고의 독일 시인 '라이너 쿤체'의 '21세기 작품들이 있는 콘서트'도 얼마나 간결하게 언어를 깎고
다듬었는가? 필자는 몇년전 서울대에 회사일로 인터뷰를 간 적이 있는데 그때 모 독일인 교수님으로부터
'라이너 쿤체' 시인을 소개받고 그 시집을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위의 시 말고도 시인의 다른 시를 읽을 때 마다
필자는 "이야 시어, 언어를 다듬고 깎는 세계적 달인이다" 라는 느낌을 많이 받는다. 시인의 시 특징은 매우 간결한데 예술적 자유의 심미성,진실의 아름다움도 세계 정상의 수준이었다. 전체정치 구동독체제에서 탈출, 독일통일의 거대한 체험들을 통한 사랑의 노래는 깎고깎고 또깎은 그의 언어세공이 빛을 더한다. 흔히 대가(大家)의 시는 거창할 것 같지만 역시 대가(大家)의 시는 최고로 맑은 어린아이처럼 소박했다. 그러나 엄청난 창작내공이 읽혀지는 것이다. 마치 세계 최고의 명품들을 자랑하는 독일의 정밀기계, 자동차들의 향기를 품은 독일인의 예술 장인정신이 '라이너 쿤체' 시인의 시에서도 느껴지지 않는가? 쿤체 시인은 한국을 사랑하여 몇번 방문하신 적도 있다. 라이너
쿤체 시인은 섬세한 언어에 따뜻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식과 성찰을 담은 작품을 써 온 시인이다. 가장 맑은 순수함
이 빛나는 서정적인 형식에 수렴된 그의 예리한 사회비판은 구동독 시절 많은 정치적인 어려움을 야기했다. 1933
년 구동독 욀스니츠에서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철학과 언론학을 전공했으며 강의도 맡았다. 정치적 이유로 학문을 중단하고 자물쇠공 보조로 일하다가 1962년부터 시인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76년 동독작가 동맹에서 제명 당하여 1977년 서독으로 탈출했으며 1988년과 89년에는 뭰헨과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시학
강의를 하였으며 지금은 독일 파시우 근처 작은 마을 에를라우에서 시작에 전념하며 노익장을 과시하고 있다.
진공의 가을에
산해천
진공의 가을에
움직이는 모든 것은
시간으로 가는 길목에서 멈출 수 밖에 없다
아니, 이 가을에
멈추고 싶을 것이다
소멸되는 나뭇잎들은
화려했던 계절을 무심코 보내기만 한 나를 향하여
붉은 탄성을 지른다
그 소리 소리에
흩어지고 모아지는 빛으로
가을은 진공을 만든다
이 시간에
애써 냉정함을 찾은 차가운 바람이 불면
그 바람에게 마음을 풀어 놓는다
그리고는 이내
하얀 가루로 부서져 내리는 꽃
그 꽃이
진공속에서 아름다운 춤을 춘다
그것을 보는 것은 아무런 가식이 없다
그렇게 만드는 것이 이 진공의 가을이 아닌가
이 가을에
미래의 날개를 달고
가장 친하고 가장 기쁘고
가장 탐스럽게
모든 것을 유혹하고 싶다
유혹에 무너지는 희열을 본다
뒤로 넘어지며 보이는 푸른 희열이
진공의 지붕이다
날개를 쭉 펴면 그 푸른 지붕에
아름다운 미아가 될 것이다
날아다니는 진공의 미아
미아는 또 다른 날개를 가진 이들과
부딪히며 영혼의 깃털을 뿌린다
깃털
진공속의 붉은 탄성을 찾아 낸
어머니의 땅 위에 내려앉는다
푸른 하늘에서
모성의 줄을 잡은 채 빙빙 돌고
우리는 사랑스럽게 아래를 내려다 본다
멀리 멀리 있어 보이지 않는 연줄로
모두 진공의 가을속에 엮어져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가지런히 정열된
진공의 시작에서 진공의 끝으로 가며
우리는 미소 지으며 날고 있다
소리내지 않아도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열망의 소리를 듣는다
만남이라는 시공의 시작과 끝이 하나로 된다
진공의 가을은 하나의 울림으로
하나의 소리를 울린다
지금 나는 이런 진공속에 있는 것이다
그림자 없는 투명속에
무색의 슬픔과 무색의 기쁨과 무색의 그림자의 나는
황홀한
진공의 가을에 떠 있다
이렇게
분열의 시를 그리는 나는
하나의 분열인으로
가을의 진공속에서
수 없이 아름다운 깃털을 뿌리며
날개짓을 하고 싶은 것이다.
산해천님의 시도 그냥 순수하게 쓰신 것 같지만 필자정도 전문가의 눈에는 절대 그렇지가 않다. 필자도 요즈음 미술 전시회에 관심이 많은데 수많은 미술평론과 감상을 통한 풍부한 내용의 독특한 서정시라고 본다. 왜냐하면 미술작품 감상에 대한 단계의 수준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위의 여러가지를 보더라도 시창작에서 요구하는 '사고'는 한 사물의 개념을 파악하는 수박 겉핡기식의 사고가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그것은 사물마다 지닌 진실과 그 속에 갖고 있는 아름다움과 가치를 찾아내어 관습적이고 기계적인 우리들의 삶에 새로운 충격과 깨달음을 주도록 하는 '사고'인 것이다. 따라서 어떤 틀에 박힌 생각, 사물의 거죽만 보는 피상적인 생각에서 벗어나 사물을 넓고 깊게 보는 것이 시 창작에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요즈음 필자는 어느 사이트 습작생의 시에서 매우 언어를 간결하게 쓰는 좀 독특한 습작시도 보았는데 내가볼
때는 전혀 노력과 내용없는 개인의 감상적인 허접 넋두리만을 가지고 그냥 중요 단어만 퉁퉁 던지고 있었다.
대게 메타포나 상상력의 이미지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툭툭 중요시어만 던지면 모르는 사람이 처음 볼 때는 내용
에 따라서는 좀 무게가 있어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메타포나 이미지, 연,행의 계산,운율, 기타 창작기법 요소등을
하도 사용해 보아서 싫증이 난 프로들 이야기이지 무성의하게 그것을 흉내내어 한두번 독자를 속일 수는 있어도
매일 반복된다면 그것이 도대체 무슨 장난, 농락, 시간낭비란 말인가? 시인의 그런 행태를 알고나면 매우
꼴불견이다. 우리가 시의 언어를 매우 세밀하게 다듬고 간결하게 깎는 것도 성실한 노력과 多作, 多讀, 풍부하고
진실하며 고뇌에 찬 인생의 경험을 통한 자신의 이야기를 담아 그것을 자신의 독창성으로 대패질 하듯 깎고 또
깎으며 도자기 빚듯 진주를 탄생시키려 하는 것이지 아무런 노력없이 하찮은 단어들을 퉁퉁 던지면서 시라고
"자칭"하며 독자들을 농락하는 일이 분명히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한 장난은 위 시들처럼 도저히 한행들만
가지고도 여러가지 다양하고 깊은 해석이 나올 수 없으며 간결하지만 창작내공 자체만으로도 독자들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시를 쓰면서 얼마나 사고를 깊이있게 풍부하게 해야 하는 노력을 해야겠는가?
21세기의 미래 詩大家들이여 !
자기도취 ,싸구려 자기감상에만 머물러 있지 말라 ! 자신의 소중한 정서와 삶의 체험을 한 편의 시로 표현하는
일은 마치 첫날밤 사랑의 교합을 하는 부부처럼 최선(最善)과 최고(崔高)의 소중한 마음으로 치루는 값진
예술적 행위로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시는 자신의 자식과 같다. 시 창작과 시 사랑에는 그 내용도 그 기술도 점점 발전하는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
현재에 안주하려 하지 말라 !
국내의 명시(名詩)들을 먼저 공부하라!
현존하는 시大家 선생들의 시들을 먼저 해부해 보라 !
동시에 외국의 명시(名詩), 특히 현존하는 최고의 해외 시인들의 작품을 찾아 읽어 보라 !
그리고 그 사고의 깊이를 배우라 !
한국이 낳은 글로벌 명시인(名詩人)이 될 당신의 작품에
날개를 달아 줄 것이다. |
*다음편 예고 : 시창작의 비법은 없다 2.
쓰고 또 써라
관찰하는 눈을 가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