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장로의 이야기 房 132번째
아주 어려서는 강아지를 많이 키웠습니다. 반려견이니 애완견이니 하는 사치스런 개념 보다는 집도 지키고 남은 음식물도 적절히 처리해 주는 존재로서의 의미가 컸습니다. 그렇다고 강아지를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강아지는 물론이고 토끼도 몇마리 길렀으며 돼지도 한마리 내몫으로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싸리가지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주시고 값이 좀 나가는 물건 이었지만 농사짓던 우리집에는 아주 흔했던 목화(木花) 솜이불을 어머니가 할애해 주셔서 강아지와 토끼를 귀하게 대접하며 키웠습니다.
그렇게 정성과 애정으로 돌보던 애완 동물들에게 먹이려고 학교가 파하고 나면 하교(下校)길에 다양한 풀을 뜯어 책가방 사이에 쑤셔 넣고 일부는 묶어 들고 다니기도 했습니다. 비교적 여유롭던 집안 형편 덕에 무진장한 옥수수니 감자.고구마나 싱싱한 배추를 마구 따고 뽑아 내 새끼들에게 맘껏 먹이니 살이 토실토실 하게 잘 자라주었고 추억컨데 녀석들도 작은 소년이었지만 주인하나는 잘 만난 셈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좋아하던 동물들을 멀리하게 된 데는 제 각각 슬픈 사연이 있습니다. 웬만하면 그냥 쫑이라고 이름 붙인 금쪽같은 강아지가 쑤욱 자라면 울고 불고 할 것이 뻔한 늦둥이 막내인 내가 학교 간 사이에 감쪽같이 개장수에게 팔아 버리는 부모님과 집안 살림을 꾸리시던 둘째 형님의 그시절 철없던 내 생각 안에서는 야만적이고 탐욕적인 상행위(商行爲) 때문이었습니다.
어느날 둘째형수의 친정 아버님이신 나의 사돈 할아버지가 오셨는데 역시 내가 없는 틈을 타서 금쪽같은 토끼를 잡아 볶음으로 대접한 사건에는 경악을 넘어 나의 울음보가 3일을 넘기고 끝내 패악질의 지경에 이르렀지요. 참 어려운 관계가 사돈이신데 귀하신 어른 버들유(柳) 성(姓)에 연자(字) 팔자(字) 되시는 분의 뒤를 학교도 않가고 3일간 화장실 까지 쫓아 다니며 토끼 살려 내라고 떼를 썼습니다. 민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에 안절 부절하면서도 차마 매질 한번 않하시던 어머님과 형수의 안스런 얼굴이 지금도 생생 합니다.
사돈 어른이 돌아 가시기 전 어린 사돈 총각 성깔을 보니 뭘해도 한자리 할 만하다고 덕담(德談)을 남기셨다는데 큰 자리는 못 맡아 보고 살았지만 불행한 자리나 불의한 자리를 피하고 산 것 만 해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강아지와 토끼에 비해 덩치가 큰 돼지는 몰래 사라지는 것에 일정부분 양해를 했습니다. 이웃집 경.조사나 마을 잔치에 아끼던 나의 돼지는 제 몸을 바쳤습니다. 강아지나 토끼나 돼지가 사라지는 사건을 마무리 하느라 식구들은 울다가 지쳐 눈이 퉁퉁 부은 내게 뇌물로 답을 하며 달랬습니다. 입막음용으로 사다주시는 밑바닥(Outsole)이 찰진 살색 고무로 만들어진 축구화나 아폴로 11호 달나라 착륙기념 점퍼 (한국말로 티샤쓰)가 그것인데 못 이기는 턱 하며 품에 받아 안은 뇌물이 주는 기쁨이 솔직히 말하면 토끼와 강아지를 잃은 슬픔보다 컸습니다. 스스로 야비하고 계면쩍어 방에서 한참을 못나오고 표정을 관리 하던 그시절이 지금도 피식 웃음을 자아 냅니다
어찌됐든 그때 이후 애완견이나 동물은 키우거나 보살피지 않았으며 가까이 하는 것도 별로 내켜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8살때 등교길에 느닷없이 국수집 부엌에서 뛰쳐 나온 정체불명의 세퍼트(Shepherd)에게 허벅지를 물린 이후론 덩치의 대소를 막론하고 개를 무서워 하고 있습니다. 공포의 그때 기억 때문인지 식욕이 아주 좋은 편이지만 보신탕 (사철탕)은 입에 대 본적이 없습니다. 동물 애호가라기 보다는 충격에 의한 트라우마가 맞는 말이겠지요.
서양인들의 삶의 모습을 여러모양으로 설명하겠지만 애완견 또는 반려동물이 많다는 것이 눈에 뜨임니다. 호주에서도 견공(犬公)의 대접은 유별 납니다. 개들의 전용 공원도 있고 대소변을 처리하는 쓰레기통도 따로 있습니다. RSPCA (Royal Society for the prevention of Cruelty to Animals) 라는 공공기금으로 운영되는 왕립동물 학대 방지 사회기구도 있습니다. 동물의 존엄성 (Dignity)을 지켜주고 바른 사육(Care)을 돕기도 하며 무엇보다 동물학대를 철저히 감시하고 관리 합니다.
유기동물이나 부상당한 야생동물을 치료.보호하기도 하며 원하는 가정에 애완동물을 입양해 주는 징검다리 역할도 하고 있으니 사람이 살기좋은 나라로 지구상 톱 3의 명성을 든는 호주에서는 동물도 사람 만큼이나 살만하다고 보겠습니다. 그래서 애완동물이 많습니다.
우리집에 2마리의 강아지가 있는데 양옆에 이웃은 물론 앞뒤집에도 여지없이 한두마리의 개나 고양이와 동거하고 있습니다. 동물 학대나 관리소홀로 사람에게 위해를 입히면 해당 동물보다 주인이 심각한 법적제재는 물론 인신(人身)의 구속까지도 당합니다. 지금이야 한국도 웬만한 가정에는 애완동물이 다 있는것으로 알고 있지만 우리가 어릴 적 만 해도 솔직히 살만한 집에나 있던 작고 앙증맞은 서양개를 특별히 애완동물이라고 불렀습니다.
그 시절 내가 읽은 사회학 서적 내용 중에 명징(明澄)하게 동의가(同意) 되는 분석이 있어서 지금껏 똑똑히 기억하고 있는데 다름아닌 유독 애완견을 곁에 두기를 좋아하는 서양인의 심리 상태를 따져 논리로 갖춘 글이 었습니다.간단히 요약하자면 부모와 살을 부댖끼며 자라지 못한 서양인들이 애완동물을 통해 결핍된 애정을 채우는 방편을 삼는다는 요지입니다.
한국인은 아이를 낳으면 안고 얼르는 양육방법도 있지만 많은 시간 등에 업고 포대기로 감싸 묶어 기릅니다. 엄마와 스킨쉽이 따스한 체온을 통해 자연스레 오고 갑니다. 성격이 형성되는 4세 이전에 많이 업혀 키워진 아이들이 느끼는 무한한 애정과 사랑은 누군가 나를 지켜 준다는 안정감을 심어주고 두려움에서 멀어 지게 돕는다고 합니다.
부족한 시간이나 생활형편으로 인해 아이를 질끈 동여 업고 부엌으로 들판으로 시장으로 뛰어 다니며 생계와 양육을 동시 다발적으로 지탱해야 만 하는 고단하기 그지없이 흔들리는 엄마의 등짝이지만 아이는 행복과 동질감을 엄청나게 가슴에 쌓아 간다는 논리 입니다. 옛날에는 좁은 방에서 식구 여럿이 살을 부비며 먹고 잠드는 형편 이었음에도 불편함과 외로움 보다는 오히려 피붙이 간에 돈독함을 덤으로 얻고 산 셈 이었지요.
반대로 서양아이들의 상황을 그림으로 떠 올려 봅니다.처음엔 요람 (Cradle)에서 키웁니다. 아이가 조금 성장하면 부모와 같은 침대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물론 독립된 공간에서 혼자 잠이 듭니다. 불을 끄고 인사를 건네고 방을 나가는 엄마의 어둑어둑한 뒷모습에서 아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해 봅니다. 서양 아이들이 16세가 되면 웬만한 일은 도움없이 자발적으로 처리하는 탈의존성(脫 依存性)과 독립심에서 한국의 동년배들보다 앞선다는 것이 오랜 이민 생활에서 내가 내린 결론입니다.
유아기 부터 몸에 밴 독립적 공간에서의 생활 습관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매너와 에티켓으로 포장된 국물도 없는 합리성과 인정머리가 없어(Cold Blood) 보이는 서구인의 인성도 역시 혼자 견딘 수많은 어린시절에 구축된 자기보호 본능이 진화된 개인주의의 모습이라고 단언 합니다. 한국인은 왁자지껄 모이기를 즐겨하는 패거리 문화에 만족하고 혼자 있으면 알수 없는 부족함을 느껴 견디지 못하는데 반해 서양인은 혼자서도 적적해 보이지 않고 무엇인가 꾸준하며 짜임새 있게 이런 저런 일을 계획적으로 해내는 것을 많이 목도(目睹) 했습니다.
누군가 내곁에 있으면 좋겠네 라는 가사(歌詞)가 있는 가수 조영남의 노래처럼 불꺼진 방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며 잠을 구걸 하며 성장한 서양인과 언제나 곁에서 체취를 함께 들이키며 자란 한국인의 차이가 애완동물의 많고 적음에서 대비 되는 것이 흥미가 있습니다. 물론 요즘에야 한국인의 의식주가 서양식으로 둔갑한지 오래이고 보니 신세대의 애완동물 선호는 삶의 일부가 된 서양과 다름 없이 돼 버린것도 사실입니다. 성장과정은 인격형성에 매우 중요한 것을 알수 있습니다 .
동물을 아끼고 기르던 유.소년기를 제외하면 40년이상을 멀리하던 강아지를 기르게 된건 순전히 아이들의 성화와 애원에 동의했기 때문입니다. 몇번을 실패 했습니다. 집을 뛰쳐나간 강아지가 귀가하지 않아 잃어 버린 적도 있고 심하게 말썽을 일으켜 이웃에게 줘버린 경우도 있었는가 하면 알수 없는 이물질을 먹고 죽은 강아지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6년째 같이 살게 된 킹찰스 까발리에 (King Charles Cavalier)는 큰아들이 맘 먹고 구입한 얌전하고 순종적인 식구로 온 가족에게 사랑을 듬뿍 받고 있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 (Alice)란 이름이 불리는 강아지가 세마리의 새끼를 낳은것은 두주 전 이었습니다. 검정.베이지.검은점 바둑이 이렇게 세마리를 낳았습니다. 함께 신앙 생활하는 아끼는 후배 황집사가 선물로 준 깜장색 숫컷 푸들이 우리집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이방인을 쓴 작가 까뮈의 이름을 붙여 주었습니다 . 우리집 입장에서는 이방견 (異邦犬) 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암컷 엘리스와 숫놈 까뮈가 같이 산지 6개월만에 엘리스는 배가 부르기 시작했고 앞서 말한 대로 예쁜 강아지를 셋이나 선물 했습니다.
아이들 셋이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며 새끼들을 아끼고 바라 봅니다. 강아지 세마리가 제 부모보다 앞전입니다. 아이들이 잠든 늦은 시간엔 나도 은근슬쩍 잠든 강아지들을 바라 보면서 재미지고 신기하고 마음이 따뜻해 져서 여간 좋은 것이 아닙니다. 품에 안고 쓰다듬으면 생명체의 신비와 온기가 전해 오고 부드러운 털과 겨우 눈을 떠서 어리버리하긴 해도 엄청나게 귀여운 얼굴을 마주하면 내얼굴에도 저절로 흐믓한 미소가 번집니다.
강아지 엄마인 엘리스는 젖을 물리고 연신 두발을 이용해 강아지를 품으로 쓸어 담느라 고단해 보입니다. 강아지를 슬쩍 빼앗으면 불안하고 애절한 눈으로 나를 빤히 쳐다봅니다. 맘 같아선 세마리를 다 기르고 싶은데 너무 많기도 하고 아내가 펄쩍 뜁니다. 밥주고 똥치우고 이불 말려 깔아주고 하는 허드렛 뒷바라지는 오롯이 아내의 몫인걸 아는 처지인지라 서둘러 미안한 맘을 전합니다. 더 큰 문제는 강아지가 태어 나기도 전부터 찜하고 기다리는 아들 친구 지인들에게 팔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강아지 엄마인 엘리스의 처연한 눈망울을 차마 상상하기 힘듭니다. 어릴적 야만스럽고 매몰차던 어머니와 작은 형과 꼭 같이 나도 탐욕스런 어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강아지를 사랑하는데 중독증세를 보이는 조카 민지는 벌써 부터 우울해 합니다. 애완동물도 식구가 되면 기른 정이 무섭습니다.들이기 보다 보낼 때가 어려 운건 사람이나 매 한가지 입니다. 정작 고민과 걱정은 엘리스를 볼 때마다 미안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젖 떼자 마자 멀리 떠날 새끼들을 향한 말못하는 동물의 아린 마음은 상상속이지만 사람과 틀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린 결정했습니다. 중성화 수술( Neutralization) 입니다. 흔히 디섹스라고 하는 바로 그것인데 더 이상은 엘리스의 임신과 강아지와의 이별을 동시에 막자는 방책이지요. 그것밖엔 할 수 있는게 없습니다. 개장수 오토바이 뒷자리 철망안에 갇혀 내게 눈길을 멈추고 낑낑거리던 그 옛날 쫑이 눈에 선합니다.
아직 미혼이지만 서른이나 된 아이들이 강아지를 이처럼 미친듯이 좋아 할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업어주고 품어 주고 쓰다 듬으며 한껏 베풀어 키우지를 못해 애완견을 통해 결핍한 아내와 내가 주지 못한 사랑을 채우려고 온통 강아지에 눈과 마음을 강탈 당하고 돌아서 있는 것만 같은 애들의 뒷모습에서 할 수 있는 한 넉넉한 사랑을 베푸는 마음으로 여생을 살아가야지 하고 다짐해 봅니다.
첫댓글 엘리스 이름이 참이쁘네요 호주에는 강아지가 한가족으로 대우받는거같아요 얽힌 사연들 잘읽었습니다
"유독 애완견을 곁에 두기를 좋아하는 서양인의 심리 상태.... 부모와 살을 부댖끼며 자라지 못한 서양인들이 애완동물을 통해 결핍된 애정을 채우는 방편을 삼는다는 요지....." 정말 공감이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