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선조의 아들은 14명이나되었지만 정비의인황후 박씨는 줄곳 병석에 누워 있어 선조의 나이 40세를 넘기자 별수없이 광해군을 선택 하니 이는 정비 소생이 아니라 왕의 칭호를 받지 못하고 광해군으로 등극하여 1608년 2월 ㅡ1623년 3월 까지 15년 1개월을 비교적 오랜 왕위를 유지 하였으며 개혁정치를 꿈꾸었으나 고질적인 사색당파의 심화로 불행한 왕위 생할인 유배생활 18년 끝에 결국 풀려 나지도 못하고 인조반정이 일어나 광해군은 폐위 되고 유배생할중 죽고 인조가 등극하게 된다
2. 임징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는 북쪽으로 쫒겨 가는 몸으로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했다. 하지만 세자책봉 문제는 당시 상국인 명의 인준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1594년 윤근수를 파견하여 세자책봉을 주청했지만 명에서 당시 장자격인 임해군이 포악 하여 연산군을 왕으로 책정하여 인준을 청하였으나 명에서 임해군이 있다는 이유로 인준을 거절 하였다 명의 인준을 받지 못하엿지만 전시체제라 모든 대신들이 광해군을 세자로 받들었다
하지만 전란이 끝나고 1602년 인목황후가 계비가 되고 영창대군을 낳고 조정은 다시 당파들의 갑론 을박속에 영창대군을 거론하지만 선조는 현실성이 없다고 광해군에 선위 교서를 내리고 죽는다
왕위계승권이 인목대비에 넘어가자 당시 영의 정이었던 유영경이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 할것을 주청 하였지만 인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 우여곡절끝에 즉위 시키니 15대 광해군 으로 나이는 34세 였다
3,왕으로 등극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파탄에 이른 국가재정을 회복하는데 전력을 기울이고 남인의 이원익을 등용시키고 전란중에 타버린 궁궐을 개수하여 왕권의 위엄을 살리리고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생을 구제 했다
1608년 명나라에서 조선에서 세자 책봉과정에 대한 진상조사단을 파견하자 광해군은 서둘러 대북파의 건의을 받아들여 임해군을 유배 시켰다
이는 광해군이 왕위 계승권을 반대하던 소북파가 명나라에 사신을 보내어 현장실사을 요청한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에 대북파 정치인들이 권력을 독점하기 위하여 정적을 제거 해야 한다고 선조에 종용하자 선조는 광해군은 왕권 안정책으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어 정적을 소탕했으나 이로 인해 더 많은 정적들이 생겨 나게 되었다
1611년 정인홍 이언적. 이황의 문묘를 반대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는데 이과정에서 성균관 유생들이 유생의 이름이 올려져 있는 청금록에 정인홍의 이름을 삭제하는 사건이 발생 하였는데 광해군은 이사태에 직면하자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 유생들을 모두 성균관에 쫒아 내는 조치를 치루었으나 이때문에 유생과 등을 지고 마는 대사건이 발생하게 된다
1612년 소북파 100여명이 숙청 당하는 대옥사가 발생한다 이옥사는 김경립이 군역을 회피하기 위하여 어보 고난이를 위조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는데 모진 고문과정속에서 사건이 겉잡을수 없이 확대되어 결국 역모사건으로 결론나고 말았다
1613년 칠서의 옥이 발생하여 인복대비의 부친인 김제남이 사사되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전락시켜 강화에 위안리치( 집주위에 울타리를 치고 박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조치) 했다가 증살((방안에 가두고 장작불을 지폐 그열기로 죽게 하는것)한편 한편 선조의 유명을 받던 신하를 파직시키는 사건이다
1616년 능창군 추대 사건이 발생 하자 광해군은 능창군을 추대 하려는 신경희 등 일파을 제거한다
1617년 폐모론자가 대두하자 이를 반대하던 이항복.기자헌. 정홍익 등 반대파를 제거하고 인목대비 존칭을 폐하고 서궁으로 유배시키어 왕원을 이협하던 모든 세력을 성공하지만 오히려 폐룬행위를 일삼으면서 오히여 반전의 명분을 제거하고 결국 인조반정으로 좇게 나는 결과을 얻고 말았다 ...
4, 광해군은 1608년 선혜청을 설치하고 경기도에 대동법을 실시하여 민간세금구조를 일원화 시키고 세무부담을 줄였다, 1611 농지를 조사측량하하여 실제 작황을 점검하는 양전제도를 도입하여 국가 재원을 확보했다 .1608년 창덕궁 준공하고 1619년에 경덕궁1621년에 인경궁을 중건하는등 왕실의 권위 회복하기도 했다. 이무렵 여진족 세력이 커져 후금을 건국하자 광해군은 대포를 수주하고 평양감사에 박엽.만포천사에 정충신등을 임명하여 국방을 강화하고 명나라 원병 요청에 강홍립 1만명의 기병을 주어 응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차싸움에서 명나라가 패하자 적당히 싸우는 체 하다가 후금에 투항해 누르하치와 화의을 맺도록 하는 이중외교를 능란한 외교술을 발휘 하기도 하였다 강홍립은 후금에 억류되어 있으면서 후금에 대한 정보를 광해군에 밀서를 보냄으로서 후금에 대한 정보를 파악하여 후금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예방하기도 했다
1609년 송사약조를 체결하고 대일외교를 재개 하였으며 1617년 회답사를 파견함으로서 일본과 관계를 회복하고 전쟁위기에서 벗어날수 있게 되었다
광해군은 새로운 도읍지로 파주의 교하로 옮겨 경제와 무역 부국 안정정책을 기도하는 실리정책을 기도했으나 원군파병문제등 현안문제에 부딛쳐 실현 하지 못햇으나 여러가지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는 기발한 착상이었다 .파주의 교하는 당시 농업사회에 의존하던 조선시대에 철저한 실리주의 획기적인 발상으로 파주 교하는 위치적으로 임진강을 끼고있는 곡창지대로 식량및 세수증대을 깨할수 있었고 . 중국과 해상교통이 가능한 곳으로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 적당했다.군사적으로 보아 한성보다 북쪽에있어 일본의 위험에 조금이라도 벗어날수 있었고 또한 주위에 산이 낮아 산성을 쌓아 방어하기 적당한 곳이었다.중국과 해상로가 가까워 수군에 의한 위험이 있는 곳이나 근본적으로 중국은 해상전에 약한 국가 이기에 그다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이러한 천도계획은 명의 원군 파병하는 문제등 여러 현안문제에 부딪혀 실현하지 못하고 축성작업에 동원된 백성의 원성만 높히는 결과를 초려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기발한 천도계획은 당시상황으로서 매우 기발한 착상이었다 요컨데 광해군은 밖으로 철저한 실리노선을 걸었고 안으로 강력한 왕권체제하에서 부국강병의 길을 모색 했던 것이다
이밖에도 병화로 소실되었던 서적간행에 박차를 가하여 신증 둥국여지승람. 용비어천가.동국신속.삼강행실도등을 재편찬하고 임란에 소실된 사고을 복원하여 임진왜란때 소실된 네곳의 사고를 대신했다
이시대의 문학으로 허균의 홍길동전 허준의 동의 보감이 편찬 되었는데 동의 보감은 최근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 된바 있다
공해군 15년 기간동안 정권을 장악한 대북파는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정적을 제거했는데 정적들은 서북파들이었다 .
이들은 기회를 타 1623년 김류.이귀.김자점등 사대주의자들이 능창군을 수장으로 모시고 창덕군의 이르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반정에 성공 능창군이 인조가 등극하니 이른바 이사건이 인조 반정이라 칭하고 있다 . 반정 명분은 광해군이4대를 거부하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유폐 했다는 이유에서 였다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폐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이배되어 무려 18년간 생을아주 초연한 자세로 연명했다가 1641년 67세의 일기로 죽음을 맞게 되었던 것이다 .광해군 재위 15년동안 2명의 부인에게 자녀도 세자질과 웅주 2명을 얻었을뿐이었다
능은 경기도 양주 적성동에 있는 공빈 김씨의 묘 아래 쪽에 있다
조선사에서는 광해군을 폭군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 명분론자들이 자신의 반란을 합리한 측면이 강하다. 외히려 광해군은 대명 사대주의자에 밀려 자신의 실리적인 외교론 현실감각에 바탕을 둔 정치이론을 완전히 꽃피우지 못하고 자신이 왕의 재위기간보자 유배생할을 많이 하다 죽은 가장 비극적인 임금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할것이다 .당시 임진왜란으로 나라 국정은 극도한 피폐해 져 있었다 .전란의 와중으로 우여곡절 끝에 등극한 광해군은 지난 임진왜란을 거울삼아 나라을 부강케 하고 아울러 왕권 강화책으로 실리외교를 펼치면 기울어가는 명을 버리고 명을 대신하고자 하는 청과 양면외교를 펼쳐서 중국과 군신관계에서 벗어나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을 맞고 있었다. 광해군은 이점을 읽어내고 중립노선을 걸었지만 대명 사대주의에 뿌리깊은 이들이 계속해서 대명사대주의를 걸어 결국 둿날 청에게 굴복하여 무뤂을 끓고 군신관계를 맺는 대치욕을 당하게 된다
광해군은 비록 영창대군과 인목대비등 일부 반대파 정적을 제거하기는 하였으나 조선시대 성군이라 일컫는 태종이나 세조처럼 철저한 보복정치는 하지 않았다. 광해군은 인목대비을 죽여야 한다는 대북세력을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인목대비를 강등 시키는데 국한해서면 영창대군을 죽이는 것도 반대한 인물이다
조선에 반정이 두번 일어났는데 연산군의 폭정으로 일어난 중종반정과 인조반정 두사건을 말한다
연산군은 철저한 폭군이요 패륜아 였다면 공해군은 일부 사대주의자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었다 .게다가 중종은 반전으로 추대 받은 경우지만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이끌고 혁명을 이르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등극하는 반정이다 대역 사건이다 물론 실패하면 9족을 멸하게 되는 참형이다
광해군이 폐위되자 인조세력 정치적 목적과 인복대비의 철저한 복수심에 의하여 광해군 .패비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 박씨 등 강화도에 위리안치 시켰다 .
광해군과 유씨는 강화도의 동문쪽에 폐세자와 세자빈은 서문쪽에 각각 안치 시켰다
당시 20대중반이었던 세자빈은 담밑에 구멍을 뚷어 바깥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 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 이내용의 편지가 무엇인지 알수 없었지만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평양감사와 모의하여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 였을 것이다 이때문에 반정세력과 인목대비는 그들을 죽이려 했고 이소식을 들은 세자질과 세자빈 박씨는 스스로 목숨을끊고 자결했다
이렇게 해서 장성한 아들과 며느리를 잃은 광해군은 1년이 조금 지난후 아내 유씨도 사별하게된다 .광해군의 중립정책을 이해할수 없는 처사라하면서 대명 사대주의를 주청하기도 했다
그러나 광해군이 폐위 되자 궁궐후원에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화를 위한 것이라고 비판 했다 .그러나 유배생할이 시작되면서 홧병으로 유배생할1년 7개월 만에 1624년 10월에 비극적인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태안으로 이배 시켰다가 난이 평정되자 다시 강화도로 이배 시켰다 1636년 청나라가 처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겟다고 공언하자 다시 그를 교동으로 안치 시켰으면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고 암시를 내리지면 경기수사는 오히려 그를 보호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이듬해 완전히 조선이 청에 굴복한뒤 그의 복위에 위협을 느낀 인조는 그를 제주도로 귀향 보냈다
제주도에서 초연한 자세로 기나긴 세월을 이어가다 그는 1641년 귀향생할 18년 수개월만에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때 광해군의 나이 67세였다
그리하여 인조가 등장하자 철처한 보복을 가하여 18년간 유배시키어 죽게 하는 조선왕조 일대 사건이라 말할수 있을 것이다
.인조또한 사대명분론에 열연하여 국방을 게을리 하다 병자호란을 당하여 명을 뒤엎고 등장한 여진족인 청에 남한산성에 굴복하여 군신관계를 굴욕을 당하고 마는 비운을 당하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