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제산*****( 해발; 712m , 전남 보성군 벌교읍 )
존제산은 성벽처럼 웅장하게 솟구쳐 있는 벌교의 진산이다.
해발 704m로 군내에서 웅치면 제암산에 이어 두번째 높은 산으로서 해발 300m 이상의 고지가 무려 65㎢나 되어 가장 넓은 산지를 형성하고 있다.
남·북의 이데올로기가 빚어낸 비극의 현장으로 유명한 산이며, 소설 태백산맥의 중심무대로 외지에 더 알려진 존제산 자락을 작가 조정래는 그의 소설[태백산맥]을 통해「그만 그만한 높이의 산들이 줄기를 뻗고 그 줄기들이 겹쳐지고 이어지면서 원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건 산들이 손에 손을 맞잡은 강강술래 춤이거나 어떤 성스러운 것들을 받들어 올리고자 하는 산들의 어깨 동무였다.」 고 존제산의 산세를 역사적인 사실과 연관지어 풀이하고 있다.
존제산은 고려 충렬왕(忠烈王)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산은 불교와 연관된 지명이 많은 산이다. 존제산 북쪽 유신리의 갓바위 윗등에 염주를 목에 건 불상모양의 바위, 부처님이 하느님과 만나던 곳이라는 천치(天峙), 죽으면 한 줌의 흙이 된다는 뜻의 진토재, 승려들이 모여 문장을 자랑하던 곳이라는 석거리재 등은 모두 동쪽 기슭에 있었던 신라 고찰인 징광사와 관련된 지명들이다.
벌교읍, 조성면, 율어면에 둘러싸인 존제산의 능선은 거의 밋밋하게 높이가 계속되고 정상에 오르면 멀리 무등산, 모후산, 백운산 그리고 여자만과 고흥반도가 한눈에 들어 온다.
존제산은 뛰어난 산세와 많은 설화가 깃들어 있는 호남 명산이지만, 정상에 군사시설물과 주 능선상에 한국통신 중계소가 들어서 있어 일반인들의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때문에 벌교읍과 율어면을 잇는 818번 지방도로상의 고개인 주릿재에서 정상까지 약 6㎞ 구간이 비포장도로가 뚫려 있기는 하지만, 2㎞ 지점에 위치한 백림농장까지 밖에 오를 수 없다. 결국 백림농장에서 동쪽으로 벌교읍내와 남해바다를 내려다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산이다.
소설 태백산맥은 8.15해방이후 6.25전쟁까지 민중의 고난사를 적나라하게 조명한 소설로서 그 무대가 보성군 벌교읍시내와 존제산 일원인데, 소설속의 무대였던 현부자네 고가, 양조장, 남도여관, 홍교, 벌교고막등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현부자네 고가에서 출발하여 홍교를 거쳐 존제산에 올라 주릿재까지 답사를 하자면 우리나라의 암울했던 역사를 반추해 볼 수 있을 뿐만아니라, 소설속의 주인공들이 금방 뛰어 나올것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
***** 주릿재*****
한자로 ‘주로치(周老峙)’라고도 한다.
벌교읍 추동리 대판이 마을 서쪽에서 존제산(尊帝山)을 넘어 율어면 유신리에 이어지는 고개이다.
긴 밧줄을 풀어놓은 것처럼 구불구불한 모양새라고 하여 주릿재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고개 왼편으로는 벌교읍내에서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백동(栢洞)마을이 있고, 정상에는 쉬어가는 정자와 조정래 대하소설 ‘태백산맥 문학비’가 세워져 있다. 문학비에는 조정래의 필체로 ‘징광산과 제석산은 태백산맥이라는 거대한 나무의 실가지에 피어난 잎들이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 석거리재*****
전라남도 순천시의 서쪽 외서면 장산리 한산 마을에서 보성군 낙성리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동북쪽의 백이산에서 서쪽으로 뻗은 산줄기에 있는 재이다.
27번 국도와 15번 국도가 지나간다. 북사면에서 송관천 지류가 발원한다.
석거리재는 원래 '섶거리재'로 이 고개에 섶나무가 많았던 데서 유래하였다는 설이 있다. 섶거리재를 한자화해 신거치(薪巨峙), 혹은 신치(薪峙)가 된 것으로 보인다.
『해동지도』(낙안), 『호남지도』에 '신치(薪峙)'가 백이산 서쪽, 주로치 북쪽에 묘사되어 있어 조선 시대에 지명이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이후 『조선지지자료』(순천)의 외서면에는 신치(薪峙)가 '간산리(間山里) 남쪽'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며 한글로 '석거리재'라고 수록되어 있다. 『조선지형도』(순천)에 간산리 남쪽, 백이산 서쪽에 '신거치(薪巨峙)'로 기재되어 있다.
이번 구간에서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백'의 主무대를 밟는다는 기대와 설렘에 출격의 발걸음도 마음만큼 가볍고 빠르다.
들머리, 오도재에서 주월산까지는 비교적 넓은 마루금길이 편안하게 이어진다.
허나 방장산 시멘트 임도길이 완만한 오름이라 쉽지 않게 어둠의 '방장산' 정상에 당도한다.
약 1시간여, 주월산까지의 맥길이 肉山길로 뻥 뚫려 편안하게 이어지며, 넓은 활공장인 시원한 새벽 공기에 젖은 정상에서 환상적인 黎明을 배경으로 인증샷이 작품으로 만들어지기를...
무남이재로의 내림길에 여명과 일출이 좁은 시야에서도 몇번을 잡아본다.
무남이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약 30여분의 된오름으로 광대코재에 오르니, 右측으로는
득량만,고흥만,고흥지맥 등, 진행방향으로는 이번 구간의 主山인 '존제산'이 멀지않다.
左右측 바다(海)를 끼고 이어지는 '고흥지맥'의 종주도 기획해 볼 만함의 욕심도 일어난다.
광대코재를 지나 철쭉군락 直前, 아침밥상을 차린다.
夜間 선두, 晝間 후미 팀이 모여 진수성찬으로 즐건 朝食이다.
朝食後 후미조로 출발하여 571봉 직전 철쭉군락을 지나다 , 오늘의 대형사고인 '딸벌의 기습공격'을 당한다.
가끔 '벌의 공격'으로 대형사고를 당했다는 뉴스를 접할 때마다, 남의일이라고 무심히 지나쳤던 사건이 나에게도 졸망간에 덮친다.
바로 앞의 산우가 한방을 쏘이고, 바로 뒤의 나에게는 순간에 4방을 찌른다.
바로 後 정신이 환각상태인 것 처럼 몽롱해지며, 발바닥을 바늘로 찌르는 것 처럼 찌릿하며
熱이 나기 시작하다가, 약 2-3분후 실신하며 쓰러진다.
가을벌의 毒이 최고조이며, 순간 중추신경을 마비시키고, 1) 의식불명 2) 호흡곤란 3) 혈압이 떨어지며 4) 맥박/경동맥의 느려짐 5) 사지의 전율 6) 오한 등으로 상당하게 위험한 지경에 이른다.
특히 산문님의 전문적인 응급처치를 받고, 119신고 등의 후미팀 산우들의 기민한 처리로 '벌교삼호병원'으로 119 구깁차로 후송되어 약 1시간여의 병원의 처치로 응급실을 나서나, 아직 가슴의 답답함은 남아있다.
마침 다행이도, 사고지역에서 조금 의식을 회복한 後 , 119 구급차로 간신히 내리막 이동을 시작하던 中 , 엄청남 量의 대변을 배설하니,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안심을 갖는다.(퇴원후 날머리 휴게소에서도 '설사'를 본다. 독침에 쏘인 후, 토하거나 대변을 보면 거의 '간'이 맹독을 이겨낸 증상이다.)
이날까지 살아오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다는 말을 쉽게는 할 수는 있을 수 있겠으나, 실지로 경험한 경우는 확률상 찾기가 어려울 것이다. 남의 경우는 이겠거니 가볍게 간과해왔던 대형사고가 나에게도 언제나 있을 수 있슴을...... 실감한다.
사고中 옆의 산우들께서는 초상을 치를 것 같은 긴박한 상황에 황망해 했으며, 生과死의 갈림길이 '백지장 한장' 차이임을 모두 허무하게 실감을 한다.
이번 사건으로 다음의 깨우침을:
1) 나홀로 산행은 반드시 피한다. 어떠한 위기 상황이 산행中에 언제나 나에게도 상존함을 .....
2) 산행에는 언제나 겸손하게 철저한 사전준비를 해야된다. 계절에 따른 예측가능 사고에 사전 예습이 필요하다.
3) 사고시 응급조치에 대한 개인습득도 중요하지만, 멤버中에 전문직인 '의사' 산우님이 동행함이 최악의 상황을 피할 수 있슴이다.
4) 건강한 체력관리로 면역력을 키우고 유지하도록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
생애 최초 '죽음의문턱'까지의 위기의 상황을 겪었지만
인생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건강한 여생을
모든 것을 배려하며,사랑하는 겸손함으로 거듭나기를
오히려, 이번 기회에 몸속의 나쁜 모든 독소가 말끔히 세척되어
더욱 건강한 심신이 되기를 바라는 위안으로 삼아본다.
현재 옆에 있는 사람이 소중함을 비로소 마음으로 느껴본다.
(19구간 남은 코스는 오는 겨울에 절친 도연과 땜빵을 할 예정이다)
鏡 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