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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김교신 2011.5.8(일) 오후2시 일심회관 7층
김정옥 010-4879-8853
1. 먼저 저의 소개를 하겠습니다.
이름 : 金 正 玉 1932.1.30일생 80세. 음력 1931.12.23 염소띠 81세
김교신의 四女 광주광역시 남구 방림2동 556 모아 APT 106동 604호
2. 남편 김학준의 이력
결혼할 당시 신랑은 광주시청 서무과 서무계장 28세, 서울 출장 간다니까 박석현 선생님이 같이 가자 노평구 선생 서울대병원에 문병 간다고 동행했다.
노 선생님 병실에서 말이 나와 서로 간에 선도 안 본채 약혼하고 귀광.
위로 딸 둘. 아래로 아들 둘. 4남매 중 셋이 미국에 살고 한국에는 장남 1명뿐.
현재 91세, 효성청소년문화재단 이사장으로 매일 사무실에 나감.
3. 아버지 김교신 (1901년辛丑생)
본은 경주, 시조로부터 61세, 중시조인 덕재(德載)할아버지는 이방원이가 아버지 이성계에게 보낸 박순 함흥차사와 동행했던 병조판서의 22세손이다.
아버지께서는 3살에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께 극진히 효도 했지만 효자가 아니시란다. 왜냐구? 어머니보다 먼저 가셨기 때문.
부모님 슬하에 8남매, 딸 6, 아들 2,
첫째 = 鎭述(1916-2014). 거동불편, 과거 용인군 3천석 지주여서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도 음으로 양으로 도움 많이 받음, 장남은 미국에서 목사, 3남 1녀 모두 잘 살고 있음.
둘째 = 始惠(1926). 10년만에 얻은 딸이라도 은혜로 시작 됐다 하여 이름이 시혜. 남편은 처남 처제들이 어리고 식구는 많아도 일 할 사람이 없다 하여 자기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처가살이 하면서 도왔다.
셋째 = 正惠(1929). 아버지 돌아가실 때 고등여학교 4학년 (졸업반) 졸업하자마자 결혼, 경제적으로 돕다, 동생들 대학 공부도 돕고.
넷째 = 正玉(1932). 저는 제일 먼저 소개했다. 할머니께서 아들을 기다리셨는데 또 딸이 나오니 아시를 빨리 볼려고 유모를 들여 일찍 젖을 뗐다.
다섯째 = 장남 正孫(1933) 유달영씨 사위, 45세 사망 아들 둘, 딸 하나. 미망인 L.A거주.
여섯째 = 딸 正福(1936). 산호세 거주 딸 3, 아들1, 남편 이경철 목사
일곱째 = 차남 正民(1939). L.A거주 아들 셋이 의사, 변호사, 회계사. 성서조선 영문으 로 번역, 인터넷에 올리고 있다. 시대별로 차례로 번역 중.
여덟째 = 正愛(1945). 유복녀, 어려서 할머니께 구박 많이 듣다. 아버지 대신 세상에 나왔다고. 하지만 8남매 중 제일 큰 복 줌. 아들이 미국에서 대학 입학 예비고 사 1600점 만점 하버드 법대 입학. 변호사 자격증 있어도 안하고 고등학교 선생, 딸은 고2 에 시카고대학 입학, 남편 박헌주 사장.
어머니는 의지하던 셋째 딸이 미국으로 모셔가 93세까지 장수하시다가 돌아가시니 공원묘지에 모셨지만 외롭지 않게 아들 사위 가까운 곳에 모셔져 미국 이민 2세들에게 큰 위안이 되고 있음.
④ 할머니 양신(楊愼)1882년 壬午생
부유한 집안에서 몸종까지 데리고 시집 오셨지만 남편이 일찍 세상 떠나는 바람에 집안의 남정네들이 재산 불려준다고 가져가 빈털터리. 아버지 일본 유학 가실 때도 부자인 시동생은 딸까지도 일본 유학을 보내면서 우리 아버지에게는 애비도 없는 놈이 농사나 지으라고 농업하교를 보내셨죠. 농업학교 졸업하던 해에 3.1만세운동이 일어났다. 나라없는 설움에 내 설움이 북바쳐 남보다 더 큰소리로 만세를 부르다가 일본인 이시가와 검사에게 기소당해 불기소로 풀려나기는 했어도 일본으로 도망갈 여비가 없어, 하는 수 없이 할머니께서 친정 오빠한테 사정하여 전답 20마지기를 주셔서 피신시킨 것. 결국은 동경고등사범학교에 진학, 우찌무라 간조 선생을 만나게 됐다.
우리 할머니는 마음만 좋으신 것이 아니라 몸매도 8등신 현대 미인이셔요. 아들 둘 일본으로 유학 보내놓고 며느리 둘에게는 독선생을 들여서 집에서 글을 가르치셨죠. 우리 초등학교 다닐 때 어머니한테 한자 배웠거든요, 일찍 혼자 되셔서 글을 깨쳐서 고전 이야기책을 많이 읽으셔서 우리들에게 이야기도 자주 해주셨는데 그것이 언제까지냐 하면 우리 아버지 일본 경찰에게 잡혀가시기(성서조선사건) 전 까지에요. 그 이후로는 우리 집에서 웃음이 끊겼지요.
16살에 한 살 아래인 신랑한테 시집와서 22살에 혼자되셨으니 햇수로는 6년이래도 신랑 만난 날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죠. 그 시절에는 양반입네 하고 어른들이 합방을 허락하는 날에만 견우와 직녀처럼 만날 수가 있었으니까요. 서방님 숨 거둔 방에도 산달이라고 해서 어른들이 못 들어가게 했어요. 그래서 실컷 울어보지도 못 했답니다, 그리고 10일만에 작은 아들(교량)을 낳으셨어요. 22살에 서방님(남편) 앞세우고 64살에 아들(교신) 앞세웠으니 팔자가 기구하지요, 82세에 생을 마감 하셨죠. 딸이라도 하나 있었으면 한 것이 손녀가 6명이나 돼요.
⑤ 아버지의 말년 행적
1940년도 일기에 보면 3월 22일까지 양정학교에 근무하시고 사표 내고 그날 밤 기차로 부산 경유 동경에서 다른 일도 보셨겠지만 <성서조선>에 올렸던 '권두문'을 모아 친구분한테 한권의 책으로 내 달라고 맡긴 대목까지는 나왔는데 그 책이 나왔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직업도 없이 <성서조선> 잡지 내는데만 열중하시며 총독부에 검열 받으러 가셨다가, 동경고사 선배인 ‘이와무라’ 경기중학교 교장을 만났는데 그 인연으로 경기중학교에 부임하셨습니다. 창씨도 신사참배도 거절, 출석은 고유명사라고 하며 조선말로 부르지 형사는 그림자처럼 따라다니지, 도저히 피차간에 피곤하여 견딜 수 없어 또 쫓겨났다는 말이 맞을 겁니다.
1941년 개성에 있는 송도중학교에 부임했어요. 교장이 양만영씨라고 외삼촌이었어요. 제가 초등 4학년, 정손이 1학년에 아버지 따라 개성 고려초등학교에 전학했죠. 아버지는 개성에 직장이 있어도 잡지일로 주말이면 자주 서울로 올라다니셨지요. 그냥 글을 써서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총독부에 검열 받으러 다니는 일이 더 머리 아팠을 겁니다. 쓰고 싶은 말을 못쓰는 심정을 헤아려 행간을 읽으라고 독자들께 부탁도 하셨죠. 요즘 잡지 내시는 분들 미안한 말씀이지만 호강인줄 아십시오. 식민지 지배하에 살고 있지 않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새벽 4시면 어김없이 송악산 기도터에 올라가 하나님께 떼도 써봤다, 실컷 소리내어 울며 하소연도 해보고 몸부림 치시다가 내려오시면 언제 그랬냐는듯이 출근 하셨죠. 나중에는 유달영 선생이 기도터에 동행 하셨습니다.
그 때는 1년 중 새 학기가 4월 1일이었어요. 3월 31일에 있을 교직원 회의에 참석하시고자 30일에 혼자서 개성에 가시다가 개성역에서 기다리던 고등계형사가 덜컥 잡아 수갑을 채울까 망설이는 것을 예수님 생각하며 법대로 하라고 하니 수갑을 채워 그길로 경기도 경찰국 고등계 (당시 1급 정치범 수용소 고문도 제일 심한 곳. 함석헌 유달영 두 분 선생님은 그런 곳에 안 가심.)
5학년에 갓 올라간 나는 유달영 선생댁에, 정손이는 송도중학교 양만영 교장댁에 맡기고 어머니는 서울로 올라가셨죠. 잡혀가더라도 어디로 잡혀가는지를 알아야 하겠기에, (참고로 함선생은 5월에, 송두용선생은 5월25일, 유선생은 6월12일에 잡혀감) 우리 아버지는 잡혀가신지 만 1년, 그러니까 365일만에 13명이 함께 풀려났으니까 다른 분들은 만 1년이 못 됩니다.
그 시기는 전시인지라 젊은이는 징병으로, 직장이 없고 노동력 있는 청.장년은 무조건 징용으로 끌려가던 때라 석방 후 요시찰 인물이 취직은 엄두도 못 내고 농사를 대규모로 지으면 징용은 면했으니까 사과 과수원을 구입하려고 물색하던 차, 힘에 맞는 (수종, 수확 시기, 금액 등) 과수원을 발견했어요. 헌데 소유주가 일본인이었죠. 흥남질소비료주식회사 용흥공장 공장장 소유 과수원이었죠. 주인이 말하기를 "조선인에게 소작을 주었는데 계약기간이 아직 1년 남았으니 기다리는 동안에 우리 공장에 와서 같이 일 합시다" 하여 징용도 면할 겸 다니시게 됐지요.
처음부터 취직하려고 이력서 내고 원해서 들어간 것은 아니었소.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인줄 압니다. 그 공장은 이름대로 본래는 비료공장이었는데 전시 비상시국이다 보니 군수물자 만들어내는 공장으로 전환된 것이죠. 전국에서 운이 좋은 사람들이 징용으로 끌려와서, 사택도 주고 월급도 주어 가족이 함께 살았죠. 징용 온 노무자 5000명의 주택 관리를 맡은 거지요. 전시에 급조해 지은 집이라 상하수도 시설도, 화장실, 공중 목욕탕등 턱없이 부족했어요. 학교, 유치원도 차근차근 세우고 주민의 복지를 찾아 나갔죠. 1944년 7월에 입사해서 1945년 4월에 돌아가셨으니 10개월 다니셨죠. 우리 어머니 일생동안에 그 10개월이 제일 행복 했을 겁니다. 이유는 잡지도 안 내시니 부부간에 대화할 기회도 있었을테니까요. 시집살이도 풀리고 친정도 가깝고.
4.18 생일날 12시에 조퇴하셔서, 21일 입원, 25일 별세했죠. 아버지를 일주일간 간호하시던 박춘서씨의 말, 상사였던 일본인 고다마 과장과의 사이를 이렇게 증언하다.
“두 분은 민족이 다르고, 신앙이 다르고, 학교도 다르다. 반드시 회사의 사업관계로만 그렇게 아끼는것 같지는 않다. 김선생이 서본궁의 5000명 노동자를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무조건 적극적으로 원조를 한다니 놀라운 일이다.”
일본인 상사 고다마 과장의 조사 (원고도 없이)
『나는 평소에 김계장을 회사에서 직장의 계급으로 보면 차급이었지만 나의 유일한 선생님으로 대해왔었다, 나는 김선생을 만나면 만날수록 그 인격에서 배우는 바가 많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를 단 하루도 만나지 못하면 그리워졌었다. 그래서 매일 선생이 나를 찾아오거나 안 오면 내가 찾아가곤 했다. 우리의 우의는 이러했다. 선생은 참으로 책임감이 강하였다. 유행 감기와 같은 것은 개의치 않고 출근했다. 나는 무리하지 말고 정양하라고 충고도 여러번 했지만 듣지 않고 일에만 전력하다가 이런 일을 당하게 된 것이다. 내가 이렇게 존경하는 선생을 잃게 되어 슬픔은 한이 없다.』 조객으로 아니 우는사람이 없었다.
고다마 과장이 남은 식구가 살아야 한다며 순직으로 처리해서 장례식도 모든 절차를 공장에서 처리해주어 물자 귀하고 차도 없던 시절에 끝까지 보살펴 주었다. 1945년 5월은 전쟁 막바지라 군수공장이 있는 흥남이 먼저냐 서울이 먼저 폭격이냐 할 때인데 우리 식구를 걱정없이 서울까지 보내줬어요. 나는 나이는 어렸지만 그때 알았다. 민족과 민족은 적대시 해도 개인과 개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서울로 돌아왔지만 아버지 없는 우리 가족 생활은 한마디로 비참했죠 , 나와(중2) 정손(장남, 초등5)은 학교에 휴학계를 제출하고 큰언니 집에 피난 보내졌고 (용인군 민속촌 일대 임야 전답이 거의가 언니네 땅), 그곳에서 8.15해방을 맞고 9월 하순에 학교 문이 열려 학교 갈려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수원까지 걸어와서 (그때는 수원에서 여주까지 기동차가 다녔음) 기차를 타려는데 사람이 미어터지려고 해서 나와 정손이는 유리창으로 밀어 넣고 형부는 가까스로 기차문에 매달려 서울역에 도착했지요. 개학해서 학교에는 갔어도 교과서가 없지요, 중학교 1학년부터 4학년까지 “한글 첫걸음”이라는 책을 배웠어요.
식구가 8명, 갑자기 수입 없는 빈털터리 가장이 되신 어머니. 거기다가 8월 11일에 유복녀 해산까지 하셨으니 노산에 먹을 양식도 없지 몸조리 할 엄두도 못 내셨지요. 다행히 밭이 있어 여름에는 감자, 옥수수 호박등 심어서 구호물자로 배급주는 밀가루로 수제비, 칼국수, 호박전, 감자, 부침개, 그래도 우리집 메뉴는 다양했죠. 해방 전후의 우리나라 국민들 거의가 가난했으니까 부끄러운 것도 없습니다 그해는 쌀 1되와 팥 고봉 1되 가격이 같았으니까 쌀보다는 팥이 더 양이 불거든요.
밭에다 배추와 무를 심었는데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면 무는 뽑아다가 한테 모아놓고 가마니로 덮으면 안 얼지만 배추는 소금에 절여야 안 어는데 소금이 없어 독에다가 배추를 담고 그냥 맹물 붓는 것을 보았습이다. 그 때 일은 지금도 안 잊히고 혼자 사는 과부들의 고충을 알기 때문에 다시 쳐다보게 됩니다.
셋째는 1946년 학교 졸업하자마자 시집갔고 나는 1948년 10월에 전라도로 시집 아닌 귀양살이 왔지요. 1949년 새학기가 지난 즈음 친정에 갔더니 학교에 갔어야 할 시간에 다섯째 딸 정복이가 집에 있어서 어쩐 일이냐고 물었더니 어머니 말씀 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돼서 못 보냈다고 하십니다. 이게 웬일이냐고, 그 길로 남편 친구가 교감으로 있는 정신여중에 대리고 가서 입학 시험도 입학식도 다 지난 다음에 데려다 1학년 교실에 앉혀 놓고 온것이 서울 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 했습니다.
장남 정손이는 어른들이 밭에서 일하면 한창 뛰어놀 13살 어린 것이 저도 같이 일 하는거에요. “야 너는 공부를 해야지?“ 하면 ”숙제도 다 했어요” 하여 “그러면 중학교 시험 한번 봐보자,“ 요즘 같으면 검정시험 제도라도 있지만 교장선생님더러 6학년 마친 것으로 치고 중학교 원서를 써 달랬더니 안된다고 거절, 하는 수없이 5학년 성적표로 중앙중학교에 시험친 결과 1000여명 중에 6등으로 합격하여 천재라는 말 들었죠. 매일 가족예배 보고 성경 읽은 것이 도움이 됐나 봅니다. 또 중학교 5학년에 6.25동란으로 해군에 “입대하여 상이군인 제대하여 서울 상대에 합격, 졸업장은 건너 뛰고 뛰어 대학교 졸업장 밖에 없어요.
일곱 번째 차남 정민은 7살에 아버지 돌아가시고 6.25동란때 광주 우리(넷째) 집에 피난와서 초등학교 5학년, 6학년을 마치고 국가고사에서 월등한 좋은 성적으로 경기중고, 서울상대 졸업하고 미국으로 이민 갔고.
여덟째 아버지 못 본 유복녀 정애. “신랑하고 어떻게 만났니?" 고등학교를 서울사대부속고등학교를 다녔는데 하루는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 오빠랑 무슨 이야기 끝에 오빠 말 "내가 존경하는 선생님이 한분 계신데 돌아가셨어" “그분이 누구신데?” 하고 물었더니 "김교신 선생님"이라고 하더래요. “어머!! 그분이 우리 아버진데” 이렇게 해서 인연이 되어 결혼하게 됬고 그 친구는 시누이가 된거죠. 어머니 미국 들어가시기 전날 결혼식 올리고 시집 가는 초행길도 언니들이 데리고 가고 해산을 해도 큰언니가 돌봐주고 언니가 많다보니 많은 위로를 받았죠.
⑥ 우리 어머니 (韓梅) 1897년 丁酉생
어머니 형제는 오빠 세분, 언니1, 여동생1, 3남 3녀 중 5번째. 외갓집은 함흥에서 기동차로 멀지않은 주북이라는 곳, 오빠 세분 언니 한분이 한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고 계셨죠. 우리가 흥남에 살 때 따라가 보았는데 과수원 하는 집에서는 사과를 요즘 1톤 트럭 같은 짐차로 가득 실어다 주시면 둘 데가 없어서 벽장에 모래 붓듯 퍼 놓으면 추운 겨울에 돌처럼 언 사과를 찜통에 가득 담고 삶아서 먹었죠. 언 사과를 이빨로 긁어 먹고 남은 사과 똥은 영낙없는 토끼똥 같았어요. 또 바닷가에 배가 있는 집에서는 갓 잡은 동태를 마차에 가득 실어다가 목간통에 내려놓고 가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그걸로 명란젓 창란젓을 담고, 생선은 2층 벽돌집 벽에다 못을 박고 걸어 놓으면 자연산 황태가 됐지요,
어머니 12살, 아버지 8살에 정혼을 하셨죠. 시아버님은 신랑 3살 때 돌아가셨고 시할아버지 되실분이 성화를 하셔서 규수감을 물색하여 사람을 시켜 알아보게 했는데, 다녀와서 집안은 어떻고 생김새 눈 코 입 귀 할것 없이 보고했어요. “한 집에 딸 둘이 나란히 크는데 언니는 12살, 동생은 9살, 언니는 방에서 바느질을 하고 있고 동생은 홋치마 바람에 마당에서 뛰어 놀더이다“ 라고 보고하니, 그럼 "언니가 낫겠다" 하여 우리 어머니가 낙점된 겁니다. 왜 4년이나 미뤘느냐? 그동안에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셔서 3년 상 치른 후에 결혼을 했어요. 일본놈이 들어와 단발령을 내리는 바람에, 우리 아버지는 장가 가려면 상투를 틀어 올려야 해서, 학교도 못 가고 대문밖에도 못 나갔어요. 나가면 상투를 잘리니까. 장가든 뒤에 머리 자르고 소학교 농업학교를 다니고 졸업한 해가 1919년 3.1만세운동 나던 해. 아버지 일본 가신 후 우리 할머니가 며느리 둘을 곱게 머리 빗겨 주시고 독선생 데려다가 글 가르쳤어요. 서방님한테서 편지오면 누구한테 가서 읽어 달라느냐 하시며 기어이 가르치셨지요.
홀시어머니 모시고 내가 알기로는 언제나 학생 하숙을 치셨죠. 김씨 일가 친척중 서울에 와서 학교 다닐려면 우리집 거쳐간 걸로 압니다. 외갓집 일가들도 내가 알기로 여러명이고, 양정학교 학부형의 권으로, 또는 문제아 단속으로도 맡았죠.
<성서조선> 잡지 내면서 처음에는 6인 동인지라고 했지만 다 떨어져 나가고 혼자서 감당하시기에 너무 벅차서 살림에 보태기 위해서도 하숙을 했을 겁니다. 비공개 일기(<김교신일보>)에 보면 집에 쌀이 떨어져 얼마 꾸어 쌀 샀다는 말이 나오고 하지만 크고 작은 금전 출납은 할머니 몫이었고, 우리 어머니는 아예 돈은 모르다시피 사셨죠. 하루 아침에 빈털터리 가장이 된 우리 어머니는 어린 우리들을 앞에 놓고 “여자 나이로 50에 과부된 것은 괜찮다만 어린 너희들을 어떻게 할거냐?" 울음도 안나는 거에요. 우리들은 그저 효도하는 셈 치고 시집 가라면 갔고 시집 갈 때도 무엇이 필요하다는 말을 못해 보았죠. 어머니 마음 상할 말은 아예 하지를 않고 살았죠.
큰아들 13살에 아버지 돌아가셨는데 20살이 되니 든든해서 걱정이 줄고 셋째 딸이 경제적으로 많이 도와서 항상 모세의 지팡이라고 했죠.
⑦ 교우관계
함석헌 선생님은 부유한 집안에서 귀공자 처럼 자랐고 부모복을 타고나서 유학도 제대로 가셨지만 우리 아버지는 집안은 부유했지만 3살 때 부친 잃고 아녀자들이 재산 관리 모르던 때라 남정네들이 재산 불려 준다고 갖다 다 없애고 빈털터리였어요. 우리 집에 무슨 큰 행사라도 있으면 유영모 선생님은 자하문 밖에 사셔서 아침 식사도 안 하시니 일찍 북한산을 넘어 오셔서 건넌방에 정좌하고 계시고, 함 선생님, 송두용 선생님 모두 모두 오시는데 어린 우리 눈에 비치기에 우리 아버지가 시작하시면 뒤치다꺼리는 언제나 송두용 선생님 몫이었죠. 사회도, 식사 기도, 장소 물색도 송선생님이었어요. 유영모 선생님이나 함 선생님은 그저 손님만 같았죠. 함 선생님은 우리 8남매 중 4명의 결혼 주례를 해 주셨지요. 유달영 선생님은 우리 아버지 돌아가신 후에 사돈이 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제자이고 또 큰아들처럼 대했죠. 아버지 유품도 유달영 선생이 정리, 처리 했고요. 우리 아버지 앨범도 간직했다가 2010년 그 아들 유인걸 씨가 자기네 물건이 아니라고 나에게 보내 주었죠. 또 우리 아버지 100주년 기념식때 흥남에서 갖고 온 유품이라고 하시며 서재에 걸었던 두루마리 족자하고 천로역정(天路歷程) 책을 갖고 나오셨는데 차마 우리 아버지 유품이니 달라고는 못했습니다. 왜? 유달영 선생님 딸이 우리 아버지 큰 며느리 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없다네요.
⑧ 2010년 일본이 강제병합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에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에서 유품 전시회를 가졌는데 민족문제연구소가 적극 나서서 그런대로 섭섭하지 않게 잘 치렀습니다. 2010년 3월1일 3.1절 특집방송에 함흥편이 방영 됐는데 글쎄 김교신이란 이름 석자가 일본인 이시가와 검사가 기소한 명단책에 3회나 나오는 것을 국내에서만 본 것이 아니라 미국에서도 형제들이 보았다네요. '신하 신(臣)'자가 특이하다 보니 여러사람 눈에 띈 거에요. 독립기념관에도 주기철목사하고 나란히 사진전시해 놓고 설명에 일제시대 성서조선사건과 7개월 후에 일어난 한글학회 사건을 양대 사건이라 소개 했더군요. 서대문 형무소역사관 상설 제일 전시실에도 성서조선 사건을 크게 전시해 놓았으니 기회있으시면 가 보시지요.
선생님 나 지나간 쓰라린 과거 들춰내고 싶지 않아 이제껏 아껴 두었는데 여러분들이 궁금해 하셔서 66년이란 세월을 더듬어 적어 보았습니다. 나는 그저 명이 길어서 오늘날까지 살았다고 하지요. 배고픈 경험도 해 보았고 산에가서 나무도 해보았고 남이 하는 것은 여러 가지 해 보았네요. 못 배운 한을 풀려고 지금 대학교에 다니고 있어요, 사회복지학과 1학년1111142학번이에요. 아버지 돌아가셨어도 국립묘지에 유골이 없다고 묘도 없지요. 자식들이 모두 늙어서 유가족으로서 국가에서 혜택 받을 자식도 없지 하여 표적으로 내가 대학교에 다닌답니다. 괜히 시작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늙으막에 편히 살건데 이제 배워서 어디에 쓸려구. 띄어 쓰기 철자법 틀린 것 용서하시고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11.5.13 광주에서 김정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