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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과 길에서의 풍자와 비판의식
-김철교 시집 『사랑을 체납한 환쟁이』
이 혜 선(시인, 문학평론가)
1.
소동파蘇東坡는 당나라 때의 시인이자 화가인 왕유王維의 그림을 시중화 화중시詩中畵 畵中詩라 하여,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는 문학과 미술의 혼연일체를 지적했다. 이 시집의 저자인 김철교 시인은 시를 쓰면서 시중화詩中畵 뿐만 아니라 실제의 시서화詩書畵를 다 욕심내고 그 세 분야를 모두 공부하고 섭렵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학부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동인활동을 하였던 문학도였다. 그러나 대학 졸업 후 국제그룹에 근무하다가 그룹의 해체로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후 대학에서 경영학 교수로 많은 제자를 양성하고 정년퇴직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신학을 공부하고(신학 석사) 심리학과 상담에도 관심이 많아 상담 전문가과정을 수료한 다양한 이력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분야에서 모두 뛰어난 업적을 쌓고 많은 저서를 출간했지만 그가 가장 심혈을 기울이고 필생의 업으로 삼는 분야는 시 쓰기인 것 같다.
월간 『시문학』에 유럽 미술관 순례기 <화폭에서 시를 읽다>를 연재하면서 ‘그동안 시詩 서書 화畵의 기본을 갖추기 위해 수 년 동안 붓글씨와 사군자에 열심을 내었고 인사동 경인미술관에서 두 번의 그룹전을 가진 바 있다. 또한 <예술의 전당> <서울시립 미술관> <겸재미술관> 등을 비롯하여 국내 여러 미술관에서 동서양 미술사를 공부하여왔는데’ (『시문학』2013.9월호) 라고 그동안의 공부과정을 토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러한 과정 모두가 오로지 좋은 시와 수필을 쓰기 위해서라는 고백도 하고 있다.
“문학, 미술, 음악은 영원할 것인데 그 중 제일은 문학이라” 최근 경작하고 있는 내 삶의 문패라 할까. 내가 가고 있는 길을 안내하는 지도요 나침반이다.
나는 참으로 많은 분야에 관심을 가지고 프로츄어Proteur 즉, 프로professional 같은 아마츄어amateur를 지향해왔다. 여러 분야를 섭렵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시인으로서 수필가로서 충실한 작품을 쓰기 위해서라고 해야 할 것이다. 마치 대학에서 전공을 공부하되 또한 교양 과목도 못지않게 중요한 것처럼, 한평생 전공인 시와 수필을 위해 많은 교양과목을 섭렵한 셈이라고 하면 해명이 될까.
수필집『아침 화단의 행복』의 ‘여는 글’에서 읽을 수 있는 시인의 고백이다. 시인은 2014년 2월에 위의 시집과 수필집을 동시에 출간하면서, 직장을 퇴직하고 시인의 길에 매진하겠다는 결심을 곳곳에서 밝혀놓고 있다. 그는 이미 2001년에 수필로 2002년에 시로 등단한 시인이며 수필가로, 5권의 시집과 6권의 산문집을 펴낸 바 있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새로운 창작열과 사명감에 불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
전술한 바와 같이 김철교 시인은 시를 쓰는 한 편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서 다양한 예술방면으로 분야를 확장시키고 있다. 이 시집의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사랑을 그림으로 그리는 화가’와 ‘언어로 그리는 시인’ 즉 둘 모두를 ‘그리는 것’으로 생각하여 자신을 ‘환쟁이’라 명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를 쓰는 대상에 있어서도 시인의 관심분야가 당연히 ‘그림’에 있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직접 그림을 그리는 대신 언어로 그림을 그려 이 시집을 엮었다는 뜻이다.
문학의 오랜 전통 속에서도 그러했지만 특히 모더니즘modernism 이후 시에 있어서의 회화성은 가장 중요한 표현 기법으로 더욱 중시되어오고 있으며, 이미지image를 통한 형상화에 실패하면 시적인 완성도를 인정받지 못할 정도가 된 지 오래다.
김철교 시인은 이 시집에서 시 창작에 있어서의 회화성과 묘사적 기법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동서양의 그림들을 찾아 나서서 그 그림들을 재해석하여 언어의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우리나라와 서양의 그림들을 직접 부제로 삼아 시를 쓰고 있으며 그에 더하여 서양문화와 문물을 이해하기 위하여 현지를 여행하며 길 위에서의 시를 쓰고 있다. 그런데 이런 방면에 모두 나타나는 특징은 풍자와 해학을 통한 비판의식이다. 이미 역사가 된 지 오래인 역사 속의 그림과 역사적 고장과 유적을 현대와 연결시켜 현대적 관점으로 읽어내며, 그에 더하여 풍자하고 비판하여 독자에게 깨달음을 주고자 한다.
시집 『사랑을 체납한 환쟁이』는 모두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부 하늘을 나는 물고기’와 ‘제4부 나그네의 지팡이’가 주로 여기에 해당된다. ‘제2부 시를 읽는 아침’은 13번까지 연번으로 ‘시의 정의’라는 부제를 붙이고, 바벨탑, 고려청자, 삼베옷, 바리데기, 에스프레소 등 다양한 객관상관물을 통해 시인 자신의 시 사랑과 시를 쓰는 자세와 소망을 그려내고 있다.
제3부에서는 기도와 신앙 속에서 자신의 시가 ‘마법의 지팡이’가 되고 ‘투명한 빛으로 만들어’지기를 소망하고 있다. ‘그 별은 내게로 점차 다가와/ 마침내 나와 하나가 되고/ 온 세상이 환한 빛 덩어리로 변한다’(「기도 속으로」) 처럼 세상의 빛이 되겠다는 시인의 각오와 의지를 표출하는 시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제5부 시극을 위하 아리아’는 영문학을 공부한 시인답게 시극을 위한 시도인데, 다양한 소재와 상상력이 동원되어 있어 앞으로 통일성을 주는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3.
이 시집을 관통하는 특징은 풍자와 비판의식으로 볼 수 있다. 시인은 그림을 그냥 그림만으로 보지 않고 현대의 부조리하고 모순된 세태와 연결지어 풍자하고 비판한다. 한 편으로 그림만 보고 시를 쓰는 정태적 창작에서 벗어나 직접 여행길에 올라 유럽의 미술관을 순례하고 그 기록을 『시문학』에 연재할 정도로 적극적인 시 쓰기에 나서고 있다. 여행지에서도 시인의 의식은 해학과 풍자를 곁들인 날카로운 비판의 칼날로 번득인다.
까불던 졸부 자식, 훈장에게 매 맞으니
친구들이 쌤통이다 웃고 있구나
스승은 멍청한 자식을 둔
부잣집 애비가 고소해서 체통도 없이 키득거린다
저 펼쳐진 책 속에 무엇이 들어 있을까?
가난해도 배부를 수 있는 합리화 법칙?
세상 권력에 눌려 살아도 천국을 차지하는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이 시대 고관대작 글 보따리에 가득한
자식을 위해 위장 전입한 두툼한 기록과
육법전서 속에서만 살고 있는 정의라는 단어와
빛바랜 강남 땅 개발 예정 보물지도가
청문회 때만 되면 튀어나와
매문賣文하는 주인을 고발하고 있다
-「매 맞는 강남 부자 아들놈」부분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을 소재로 새로운 그림읽기를 시로 쓴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물신주의物神主義가 만연해 있는 현대의 한국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 <서당>에서, 매 맞는 아이는 숙제를 안 해 와서 매를 맞는지, 혹은 (왼쪽에 앉아 있는 첫 번째 아이가 손으로 가리고 뭐라고 알려주려 애쓰는 것으로 봐서) 훈장의 물음에 대답을 못하고 매를 맞는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시인은 오늘이라는 시각으로 그림을 읽으면서 매 맞는 아이가 부모의 재산만 믿고 ‘까불던 졸부 자식’으로 단정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아니꼽게 보던 친구들도 ‘쌤통이다’하고 웃고 있으며, 매를 때린 스승도 ‘멍청한 자식을 둔/ 부잣집 애비가 고소해서’ 키득거린다. 물론 가르치는 입장의 스승이 그래서는 안 되겠지만 이러한 표현 속에는, 갑자기 ‘졸부’가 되어 황금만능주의에 젖어 우쭐거리는 이 시대의 부정적인 면을 꼬집는 비판의식이 담겨 있다. 한 편, 아이들의 앞에는 두툼한 책이 펼쳐져 있는데 시인은 여기에도 풍자의 눈길을 보내면서 ‘이 시대’의 실용적 가치관과는 먼 거리감을 가진 고전에 대해 비아냥거리는 어투를 보여준다. 이어서 3연에서는 ‘청문회 때만 되면 튀어나’오는 ‘이 시대 고관대작’들의 비양심적인 행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저질러지는 불법행위와 부정부패를 열거하면서 소위 말하는 지식인과 가진 자들의 ‘매문賣文’하는 행위를 고발하고 있다. 한 폭의 그림을 보면서 쓴 한 편의 시 속에 이 시대의 바람직하지 못한 풍속과 현실을 싸잡아 꼬집는 비판의식이 강한 작품이다.
저 불룩한 치마폭에는
얼마나 많은 남자들의
그림자를 담고 있으랴
그러나 사랑이 담길 가슴은
빈약하기만 하구나
퍼주고 퍼 주어도
돌아오지 못할 사랑으로 메말라가고 있으니
-「썩지 않는 사랑 」부분
신윤복의 풍속화 <미인도>를 소재로 쓴 작품이다. 조선시대는 사대부의 여인이나 여염집 아낙네를 그림으로 그릴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머리에 얹은 트레머리 등으로 보아 <미인도> 속의 여인은 기생일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시인도 ‘저 불룩한 치마폭에는/ 얼마나 많은 남자들의/ 그림자를 담고 있으랴’하고 노래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이어서 다음 연에서는 ‘빈약한 가슴’에 대해 ‘돌아오지 못할 사랑으로 메말라가고 있’다고 노래한다. ‘퍼 주고 퍼 주어도’ 받을 수 없는 사랑을 할 수 밖에 없는 조선시대 남성 중심, 양반 사대부 중심의 세태를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는다. 그러나 마지막 4연에서는 ‘수많은 세월이 흘렀어도 아직/ 젊은 자태로 있는 것은/ 사랑은 썩지 않기 때문일까’라는 반전으로 긍정적 결말처리를 하고 있다. ‘고고히 누구를 꼬나보는’ 조선시대 <미인도> 속의 여인을, 노류장화路柳墻花로, 사랑의 상대성이 없는 당시의 시대상을 꼬집다가도, 마지막에 가서는 ‘썩지 않는 사랑’으로 사랑의 본질을 노래하는 표현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빨래터에 가면
가슴의 한을 씻을 수 있어요
마을 소식들을 돌려 가며 듣고
나만 억울하지 않음을 알고는
가슴을 쓸어내리지요
( 중 략)
두 명의 젊은 부인은
시댁 흉보느라
얼굴에는 어둠이 켜켜이 쌓여 있네요
저기 좀 늙수그레한 세 아주머니들을 보세요
엉덩이 펑퍼짐한 수다쟁이-아마 매파인가 봐요
이 마을 저 마을 소식 전하느라 빨래도 잊고 있네요
옆 아주머니들은 그저 듣고만 있지요
아침 며느리 투정이 가슴에 거슬려
사실은 누구 말도 들리지 않아요
-「빨래터에서 한恨을 씻다 」부분
<빨래터>는 단원의 풍속화처럼 현대의 화가 박수근이 그린 풍속화이다. 시인 역시 이 그림에서 40-50년 전의 한국의 풍속을 읽어낸다. 고단한 여인의 삶을 살아내느라 켜켜이 쌓여가는 한을 그때그때 씻어내고 다시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 씩씩한 어머니와 아내가 되는 카타르시스와 치유의 장이 곧 우리네 빨래터였다. 사람은 누구나 억울한 일이나 힘 든 일을 당하면 자기 혼자만 힘들고 억울한 줄 알고 괴로워하기 마련인데, TV도 신문도 없던, 스마트 폰은 더구나 없던 그 어렵던 시대에 마을의 우물이나 빨래터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와 사정을 들을 수 있는 유일한 장소로서 ‘마을 소식들을 돌려가며 듣고/ 나만 억울하지 않음을 알’고 다소의 위안을 얻을 수 있는 장소로 기능하였다. 즉 ‘프로이트가 제일로 치는 상담실’이며 ‘남들의 고난에서 위로를 얻는’ 힐링의 장소가 빨래터였던 것이다. 시인은 이처럼 박수근의 그림 <빨래터>에서 화가가 그림으로 보여주는 속내를 나름의 시각으로 짚어내어 가난하고 힘들었던 조상들의 삶의 한을 씻어내는 ‘상담실’로 만들어주고 있다.
마음을 활짝 열면
물고기는 하늘을 날고
꽃가지는 땅으로 내려와
팍팍한 세상의 장독대를 닦으시는
우리 어머니 어깨에 얹혀 있는
고단함을 주물러 준다
사슴을 쫒던 사냥개도
이제는 서로 친구가 되고
벤츠에 골프채 싣고
돌아오는 망나니 아들을
어서 오라고 손짓하는
아버지의 뭉툭한 손가락엔
아직도 닳아빠진 괭이가 들려 있다
서울 마천루 숲 속 컴퓨터는
차곡차곡 돈과 명예와 권력이 쌓여
지독한 냄새 가득한 거름통이 되었지만
한라산 하늘 닿은 곳엔
아직도 물고기가 날고 있다
-「하늘을 나는 물고기」전문
김철교 시인의 시의식이 현실의 바람직하지 못한 면을 풍자하고 비판하는 데에만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니다. 현실이 어둡고 부조리하고 사는 것이 팍팍하면 할수록 그것을 넘어서는 새로운 세계, 누구나 꿈을 지니고 살 수 있는 이상적인 세계를 꿈 꿀 것이다. 시인은 그것을 이왈종의 그림 <제주 생활의 중도>에서 발견하고 있다. 그림의 제목 그대로 ‘제주생활’에서는 물고기가 하늘을 날고 꽃가지가 땅으로 내려올 수도 있는 꿈이 있다.
사슴과 사냥개도 친구가 되고, 다른 곳에서라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아들’의 철없고 이기적인 행동도 제주의 푸근한 자연과 인심 속에서라면 어서 오라고 손짓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아버지의 손톱은 ‘뭉툭’하게 닳아 있고 그의 손에는 쉬임 없는 노동을 의미하는 ‘닳아빠진 괭이가 들려’ 있다 해도. 시인은 이러한 이상적인 세계와 대비한 현실비판을 이 작품에서도 잊지 않고 장치해 두었다. ‘서울 마천루 숲 속 컴퓨터’와 그 속에 ‘차곡차곡 돈과 명예와 권력이 쌓여’가는 일과, 그래서 ‘지독한 냄새 가득한 거름통’이 되어가는 도시인들, 현대인들의 삶의 어두운 면을 꼬집으면서 그와 대조적으로 아직도 물고기가 날고 있는 ‘한라산 하늘 닿는 곳’을 이상향으로 제시한다.
샤갈의 유화 <도시 위에서>를 노래한 「사랑은 꿈으로 날다」에서도 내포하고 있는 같은 의미를 읽을 수 있다. 도시의 하늘 위를 날고 있는 행복한 연인을 노래하면서 ‘일상은 가까이할수록 쓰레기통 속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지키기 위해/ 하늘을 날고 꿈꾸기를 포기할 수 없다’라고 하여, 쓰레기통 속 같은 현실을 벗어나서 사랑과 이상을 찾아 그것을 가꾸며 살아가려면 꿈꾸기가 가장 필요하다고 ‘사랑의 색깔’을 제시한다.
렘브란트의 유화 <탕자의 귀향>을 노래한 「신神의 인내」에서도 ‘여의도 서쪽 거대한 무덤 속을 들여다보면/ 또다시 노아는 방주를 만들어야 하지만’ 이라고 현실의 어두운 면을 비판하지만, 그래도 ‘어둠을/ 빛으로 그려내는 붓질이 있어/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고 ‘아들의 허물을 덮’어 주는 아버지의 두 손을 ‘환한 등불’에 비유하고 그 아버지는 다시 ‘하나님’에 비유되어 긍정적인 뉘앙스를 만들고 있다.
이로서 미루어 보면 김철교 시인은 바람직하지 못한 현대인의 삶을 꼬집어 풍자하고 비판하면서도 결국에는 희망과 기대를 잃지 않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 시의식을 가진 시인이다.
4.
‘제 4부 나그네의 지팡이’에서는 우리나라 각지와 중국과 유럽의 미술관과 유적지를 순례하며 얻은 시상을 시화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도 역시 시인은 현대인의 삶을 비판하면서 역사 속의 인물과 역사적 진실을 통해 현대인의 삶을 비춰보는 다양한 시각을 보여준다.
하늘까지 가겠다며 바벨탑을 쌓는다
야리한 물안개는
농익은 산허리를
보일 듯 가릴 듯 감싸고 있다
( 중 략)
숱한 절벽을 돌고 돌아
하늘문에 오른 듯 정상에 서도
저만치 떠가는 구름에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어차피 지상엔
하늘문이 없는 거였어
-「천문산天門山 하늘문」부분
불사조가 되고 싶어도 확신이 서지 않아
옥좌에 오르면서부터
무덤을 쌓기 시작한다
사후에 거처할 또 다른 황궁을
손이 타지 않는 곳에 짓고 있는 게지
많은 군마에 둘러싸여 저세상 가는 길은
외롭지 않겠네
(주식과 채권과 부동산으로
우리는 성을 쌓고 있다
언젠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불안한 성벽)
한창 나이에 저승에 갔으니
거기서나마 불로초를 씹으며
아방궁에 두고 온 여인들의
아, 그 부드러운 살놀음을 잊을 수 없어
더욱 나날이 괴롭겠네
(텔레비젼에서는 아이돌스타의 현란한 춤이
우리 관능을 더욱 뒤틀리게 한다
예술은 뭔 놈의 예술
그저 안고 빨아야 할 대상에 불과한 걸)
-「우리의 진시황릉」부분
「천문산天門山 하늘문」에서는 ‘하늘까지 가겠다며 바벨탑’을 쌓는 사람들을 꼬집는다. ‘야리한 물안개’가 산허리를 보일 듯 가릴 듯 감싸고 있어서 어쩌면 하늘문에 오르는 것이 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산 이름을 ‘하늘문’이라 지어놓고 하늘에 오르고 싶은 많은 사람들을 유인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파른 백팔 계단을 헉헉대며’ 숱한 절벽을 돌고 돌아 오르고 또 올라도 하늘은커녕 떠가는 구름에도 미치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지적한다. ‘어차피 지상엔/ 하늘문이 없는 거’라며 인간의 헛된 욕망을 비판하고 있다.
「우리의 진시황릉」에서도 진시황의 헛된 욕망에 대해 노래하면서, 비판 받아야 할 과거와 현재를 교차시키는 구성 속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인간의 동질성을 꼬집는다. 아득한 옛날 중국의 진나라 시황제의, 아무리 노력해도 채워지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열망과 욕구와, 오늘날 문명 발달의 첨단을 가는 시대의 인간의식과 채울 수 없는 욕구를 등가성으로 놓고 진단하고 비판한다. 역사 흐름 속에서, 넘을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통시적 안목으로 읽어내는 시인의 안목이 돋보이면서 읽는 재미를 주는 작품이다.
영국의 가마에서 구워진 도자기들은
그리스신화를 입고 나온다
가식을 벗어 버린 여인들
부드러운 곡선의 몸뚱이는
숱한 사내들의 눈과 손길에 닳고 닳아
촉촉하다
청나라 도자기 속 여인들은
치렁치렁한 옷 속에 감추어진
육체의 맛을
훔치듯
얼굴에 수줍게 담아내고 있다
은근히 전하는 비밀스런 이야기창고
그래서 더욱 맛깔스런
사랑이 차곡차곡 쌓여만 간다
2% 부족하여 허虛한 사상을
항상 동양에서 찾아나서는
흰둥이들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빛깔이
감추어진 듯 얼비치는 심연에는
파내고 퍼내어도 다다를 수 없는
그래서 더욱 갈증을 느끼는
알 수 없는 향기가 서려 있다
-「도자기 속의 여인들」전문
‘대영 박물관에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 작품에서 시인은 서양과 동양의 도자기를 대조하며 문화와 관습과 사랑에 대한 인식의 차이점을 지적한다. ‘2% 부족하여 허虛한 사상을/ 항상 동양에서 찾아나서는/ 흰둥이들의 배고픔을 채워주는 빛깔’로 청나라 도자기 색깔을 들고 있다. 은근히 감추어서 더욱 깊은 심연이 되는 동양사상(우리나라를 포함하는)을 ‘파내고 퍼내도 다다를 수 없는’ ‘알 수 없는 향기’라고 하는 표현 속에서 약간의 찬양을 읽을 수 있다.
황실 중매시장에서
영토와 물물거래되는
단두대의 단골손님, 아름다운 모가지여
행복은 짧아도 짜릿한 권력에 맛 들여
‘설마’를 항상 밥상에 올리고 살았다
목에 걸었던 ‘아프리카의 별’은
칼날을 피해 박물관에 남아
기웃대는 여행객 주머니를 털어
오늘도 백성을 먹여 살린다
-「단두대의 아름다운 모가지」부분
‘런던 다리는 무너지고 있다’
팔짝팔짝 뛰는 어린아이의 고무줄놀이
시구詩句 속에 숨어 있는
슬픈 사연을 아는가
다리를 건너고 있는 차 안에는
지배자에 대한복수를 유전인자로 받은
각양각색 수입 인종들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에
보이지 않는 분노가 번득이고 있다
무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정복자에 대한 원망, 아니
아무리 애써도 손에 잡히지 않는
애처로운 희망
-「또 다시 무너지는 런던 다리」부분
영문학을 공부한 학자답게 김철교 시인의 작품 속에는 영국의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많이 보인다.「단두대의 아름다운 모가지」도 영국의 역사와 현재의 상황을 꿰똟어 보는 안목 속에 씌여진 작품이다. 왕실과 왕실 간에 정략적으로 이루어졌던 결혼, 그런 정략으로 인해 평생 고통과 불안 속에서 일생을 보내야 하는 왕녀들, 그러다가 변화하는 정치적 역학 속에서 희생되어야 했던 여인들의 삶이 영국왕실에는 있어왔다. 비명에 간 여왕들이 남긴 보석은 박물관에 남아 오늘도 전 세계 여행객들의 눈요기꺼리가 되어 슬픈 역사를 되새겨준다. 되풀이 되어서는 안 되는 역사의 아이러니가 지금도 형태를 달리한 채 세계 곳곳에서 자행되고 있지는 않은가, 시사하는 바가 많은 작품이다.
「또 다시 무너지는 런던 다리」에는 다소 긴 각주가 있다. 템즈강 최초의 다리인 런던다리London Bridge의 역사와 함께 ‘런던 지하철을 타면 각양각색의 인종들이 가득하다. 마치 인종 전시장 같다. 옛 영국의 식민지에서 유입된 인종들이 런던을 움직이고 있다’라는 설명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보아, 지금 영국을 이루고 있는 ‘각양각색의 수입 인종들’의 마음속에는 다양한 심리상태가 혼재할 것이라는 시인의 의식이다. 영국의 역사와 전래동요와 그 구성요소인 인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지식을 바탕으로 해야 쓸 수 있는 작품이다. 역사는 다르지만 다문화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나라도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할 것을 암시하고 있다.
몽롱해야 살 수 있다, 현대는
유전자 지도와 가족관계증명서에 나와 있는 부모가
서로 다른 기생 오래비들은
이름도 읽기 어려운 포도주를
그럴싸한 에티켓으로 포장하며 무의미를 홀짝이고 있다
종잡을 수 없는 뉴스에서는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자신의 비리를 덮기 위해 국민과 정의를 위하겠다고 악을 쓰고 있다
TV 드라마는 동물농장 이야기를 연방 개작해 내놓으며
모두의 넋을 빨아들이는 강력한 블랙홀이다
이미 우리는 원격 조정되는 로봇이 되고 있다
-「세 〜 상에」부분
위의 시에서는 정신과에서 상담하는 환자의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를 메모해서 잡지에 보냈더니 ‘월평’에서 극찬을 받고, 이해되지 않는 독일 철학책을 몇 구절 베껴서 잡지사에 보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무슨 상을 주겠’다고 하는 끝에 ‘몽롱해야 살 수 있다, 현대는’ 이라고 직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이어서 바탕도 없고 알맹이도 없이 겉으로만 신사인 척 하는 도시민의 진실과, ‘사회 지도층 인사’들의 표리부동한 행동을 보여주며 ‘이미 우리는 원격 조정되는 로봇이 되고 있다’고 한다.
조지 오웰의 미래소설 「1984년」처럼, 원격 조정되고, 비밀이라고는 없는 사회에 우리는 살고 있다. 곳곳에 CCTV가 있어서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하고 있으며 신용카드는 물론이고 버스카드나 지하철 카드도 기록에 남아서 한 개인의 동선을 알려줄 수 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편리한 삶이라는 구실 아래 개인의 사생활이 침범 당하는 아이러니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정말 ‘세 〜 상에’ 라고 탄식하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인의, 편리함 속에 잊어버리고 사는 ‘로봇’의 삶을 돌아보게 되는 작품이다.
5.
이상에서 살펴본 바 김철교 시인은, 바람직하지 못한 현대인의 삶을 꼬집어 풍자하고 비판하면서도 결국에는 희망과 기대를 잃지 않는 긍정적이고 미래지향적 시의식을 지니고 있다.
그는, 자기를 버린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온갖 고행을 견디고 불사약을 구해내고 마침내 죽음을 관장하는 신이 된 ‘바리데기’이야기를 쓰면서 ‘이미 죽어버린 시詩도 다시 살아나/ 모두의 가슴에 둥지를 틀고/ 만신萬神의 왕이 될 수 있는 꿈’을 꾸며 ‘바리데기 되어’(「바리데기」) 시를 쓰고자 한다.
오로지 좋은 시와 수필을 쓰기 위해서 시서화詩書畵를 다 욕심내고 그 세 분야를 모두 공부하고 섭렵하고 있다. 그는 ‘고흐가 27세에 그림붓을 들기 시작하여 37세 생을 마감할 때까지 단 10년 동안 그림 그리기에 미쳐서 위대한 작품을 남겼던 것처럼, 나 자신도 나에게 주어진 나머지 이 세상에서의 시간들을 시 쓰기에 미쳐야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또 다진다.’ 라고 (『시문학』2013년 9월호) 시작에 임하는 결심을 밝히고 있다.
지금까지도 좋은 시와 수필로, 그림으로 많은 독자에게 감동을 주고 경종을 울려주었지만, 이러한 큰 각오와 의지로 시작詩作의 길에 정진하는 시인의 앞길에 더 큰 시세계의 성취가 있기를, 그리하여 그가 스스로 체납했다고 느끼는 ‘사랑’을 다 갚고, 그에 더하여 넘치는 ‘사랑’을 타자他者와 세계世界에 쏟아 부을 수 있기를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