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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연합회 서장Ⅱ 특강 4강-3 (2013. 11. 11.)
答 劉寶學 彦修
往往에 士大夫가 多於不如意中에
得箇瞥地處라가 却於如意中에 打失了하나니 不可不使公知라
在如意中하야 須時時以不如意中時節로 在念하야
切不可暫忘也어다
但得本이언정 莫愁末하며 但知作佛이언정 莫愁佛不解語어다
遮 一着子는 得易守難하니 切不可忽이어다
須敎頭正尾正하야 擴而充之然後에 推己之餘하야 以及物이니
左右所得이 旣不滯在一隅하야 想於日用中에 不着起心管帶하며
枯心忘懷也리라 近年以來에 禪道佛法이 衰弊之甚일새
有般杜撰長老는 根本이 自無所悟하고 業識이 茫茫하야
無本可據하며 無實頭伎倆으로 收攝學者하니 敎一切人으로
如渠相似하야 黑漆漆地로 緊閉却眼하야 喚作黙而常照라하나니
彦冲이 被此輩에 敎壞了라 苦哉苦哉로다 遮箇話를 若不是左右가
悟得狗子無佛性이런들 徑山도 亦無說處니라
千萬捺下面皮하고 痛與手段하야 救取遮箇人하라 至禱至禱하노라
往往(왕왕)에 士大夫(사대부)가,
우리 식으로 하면 사실 에자가 필요 없습니다. 往往에 士大夫가,
多於不如意中(다어불여의중)에 得 箇瞥地處(득개별지처)라가,
흔히들 不如意한 가운데서, 여의치 못한 가운데, 시끄럽다든지ㆍ바쁘다든지ㆍ일이 많다든지ㆍ어떤 대상, 경계가 아주 어지럽다든지 하는 그런 상황 속에서는 得 箇瞥地處라, 瞥地處를 얻다가, 그 말입니다. 그 瞥地處를 얻다가, 일개 瞥地處를 얻다가, 箇자를 소화하려면 ‘일개 瞥地處를 얻다가,’ 그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瞥地處라고 하는 것은 공부가 제대로 되는 곳. 공부가 제대로 되다가,
却於如意中(각어여의중)에 打失了(타실요)하나니,
오히려 如意한 가운데서, 조용한 가운데, 환경이 좋다든지 그런 가운데서, 쳐서 잃어버리게 되나니, 不可不使公知(불가불사공지)라.
불가불 公으로 하여금 알아야 할 것이다.
在如意中(재여의중)하야, 如意한 가운데 있다가
須時時以不如意中時節(수시시이불여의중시절)로 在念(재념)하야,
고요한 가운데서 모름지기 때때로 不如意中時節로 = 不如意할 때, 여의치 못할 때, 공부가 잘되던 그러한 시절로서 마음에 두어서, 생각에 두어서
切不可暫忘也(절불가잠망야)어다.
간절히 잠깐도 잊어버리지 말지어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에서 잘되든지 그 잘되는 상황이 있다면, 잘되지 않을 때, 그 잘되는 상황을 이끌어다가 하면 될 것 아니냐?’ 이런 말이지요.
반대로 고요할 때 잘된다면 ‘그 잘되는 것을 시끄러운데도 이끌어다가 그렇게 하면 될 것 아니냐?’ 그런 표현입니다. 우리가 다른 일도 역시 원융할 수 있는 내용이지요.
但得本(단득본)이언정 莫愁末(막수말)하며
但知作佛(단지작불)이언정 莫愁佛不解語(막수불불해어)어다.
그랬습니다. 다만 근본을 얻을지언정 枝末(지말). 枝末을 근심하지 말며, 그렇지요. 무엇이든지 근본이 중요합니다. 先後(선후)를 알면, 일에는 先ㆍ後가 있습니다. 先後를 알아서 처리할 줄 알면 그 일은 완성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하는 그런 유교말도 있습니다. 本ㆍ末을 알면,
본과 枝末을 알면 그 일은 완성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但知作佛이언정 莫愁佛不解語어다.
이것도 유명한 말입니다. 다만 부처 지을 줄 알지언정, 부처가 될 것을 알지언정 부처가 되어서 말할 줄 모를까 근심하지 말라. 그 말입니다.
부처가 되어서 말할 줄 모를까 근심하지 말라. 그렇지요.
‘부처가 되면 설법을 잘해야 되는데...’ 부처도 되기 전에 그것 걱정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말하는 것부터 배우고, 부처 되는 것은 공부 안하면 이것이 앞뒤가 안 맞지요. 先ㆍ後가 안 맞고, 本ㆍ末이 안 맞는 겁니다.
顚倒(전도)된 것이지요. 일하는데 知所先後면 卽近道矣(지소선후면 즉근도의)리라. 先과 後를 알면 곧 도에 가깝다. 그 말이 있습니다.
知所先後면 卽近道矣라. 도에 가깝다.
제가 가끔 이야기하는 것 가운데,
옛날에 제가 걸망지고 다닐 때 아주 어려울 때, 개인적으로 책을, 서점에 가면 으레 그 책을 몇 권씩 사서 걸망에 넣어가지고 만나는 도반들마다 나눠준 책이 있었는데요. 그것이 일본사람, 요시다라고 하는 스님이 썼는데 한 5ㆍ600년 전 스님입니다. “徒然草(도연초)” 라고 하는 책인데 우리나라에 일찍이 번역 됐었습니다. 책이 조그만 하고 양도 얼마 안 됩니다.
일본 교과서에도 많이 나오고 그것가지고 일본에서 박사 학위 받은 사람들도 많고 그래요. 한 5ㆍ600년 전 글이다 보니까요.
거기에 어떤 젊은 스님이 출가를 해서 절에 와서 ‘내가 뭘 하면 좋을까?’ 하고 선배들 하는 것을 가만히 보니까 법사가 아주 근사해 보이거든요.
어디서 법문 딱~ 청해오면 말 탁~ 타고, 그 때는 말 뿐이었으니까요.
말 타고, 말 모는 사람 있고, 그래가지고 가서 대접받고, 법문하고 대접받고, 그리고 그 때 절분위기는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 글에 보면 노래도 한 자리 불렀다고 하네요. 요즘 같으면 게송 읊는 것을 두고 하는 소리 같기도 하고 그래요. 노래도 한 자리 불렀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 젊은 사미가 가만히 보니까 근사해 보이거든요. ‘법사가 되면 좋겠다.’ 싶은 겁니다.
‘법사가 되면 노래도 부를 줄 알아야 되고, 말도 탈줄 알아야 된다.’ 이 생각부터 한 겁니다. 그래서 노래 부르는 것 배우고, 말 타는 것 배우고 그랬어요. 실컷 말 타는 것 배우고 나니까 정작 법사가 해야 할 공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일생을 망쳤다. 하는 그런 이야기가 그 도연초에 적혀 있습니다.
참~ 그것 가끔 생각하는 일이지만 知所先後면 卽近道矣라.
먼저 해야 할 것과 뒤에 해야 할 것을 우리가 제대로 알고한다면, 그것이 참 거의 도에 가깝다. 그런 말을 했는데, 예를 들어서 법당을 하나 지으려고 하더라도 무엇부터 준비해야할지 뻔하잖아요. 그런데 ‘법당 지으면 내가 신도들에게 뭘 어떻게 해야지...’ 법당도 짓기 전에 그것부터하면 그것이 앞뒤가 안 맞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제대로 공부만 해놓으면 말은 저절로 그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이지, 뭘 말하는 방법이 어디 논리학이 따로 있겠습니까? 부처 돼서 쓰는 논리가 뭐가 따로 있겠습니까? 깨달음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지요. 莫愁佛不解語. 부처가 말할 줄 모를까 근심하지 말지어다.
遮一着子(자일착자)는 得易守難(득이수난)하니,
이 一着子. 一着子라고 하는 것은 말하자면, 우리가 쉽게 이해하기로 하면, 한 마음 깨닫는 것.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得易守難이라. 얻기는 쉬우나 지키기는 어렵다. 요즘도 이런 말하지요?
守城(수성)이 어렵다. 회사를 일으키는 일은 쉬워도 그 회사를 이끌고 가고 유지해 가기는 어렵다. 守城이 어렵다. 그런 표현을 씁니다. 지키기는 어렵다.
切不可忽(절불가홀)이어다. 간절히 가히 소홀히 하지 말지어다.
須敎 頭正尾正(수교두정미정)하야,
모름지기 머리를 반듯이 하고, 또 꼬리까지 반듯하게 바르게 해서
擴而充之然後(확이충지연후)에,
확대시키고 거기서 또 채운 然後에
推己之餘(추기지여)하야,
자기 것을 미뤄가지고, 자기의 나머지를 미뤄가지고서,
以及物(이급물)이니, 중생에게 미치게 할지니, 그 말입니다.
이 참, 우리가 수행 하는데 있어서ㆍ자기 인격완성에 있어서, 뭐 라고 표현해도 좋습니다. 頭正尾正 = 머리를 바르게 하고 꼬리를 바르게 해요.
先ㆍ後를 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擴而充之라. 보다 더 자기 자신을 좀 더 확대시켜라.
차츰차츰 넓혀가고 그 넓힌 곳에 채워요. 넓힌 곳을 자꾸 채워라.
우리는, 일단 불교인은 불교부터 먼저 알아야 됩니다. 불교도 알기 전에 뭐 불교 이외에 것 안다고? 물론 여력이 있으면 다른 어학도 여러 가지 것 할 줄 알고ㆍ다른 기능도 익히고ㆍ뭐도 하고ㆍ뭐도 하고해서 포교에 여러 가지 방편으로 활용하면 좋지요. 그렇지만 보다 더 우선하고 근본적인 것은 불교인은 불교부터 아는 겁니다. 승속을 막론하고, 스님은 더 말할 것도 없고요. 일반 불교신도들도 불교부터 잘 알아야 됩니다. 그 외에는 나머지, 推己之餘하야, 자기의 나머지를 미뤄서, 以及物이라.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미치게 하는 것. 그렇게 해야지요. 그 아주 짧은 구절에 우리의 인격완성에 대한 그런 이야기가 다 포함돼 있습니다.
左右所得(좌우소득)이, 그대의 얻은 바가
旣不滯在一隅(기불체재일우)하야,
이미 한 모퉁이에 滯在해있지 않다. 막혀있지 않다. 말입니다.
이 사람은 능력이 상당히 뛰어난 사람입니다.
想於日用中(상어일용중)에, 생각하건데 아마도 日用가운데
不着起心管帶(불착기심관대)하며,
마음을 일으켜서 관리해나가지도 아니할 것이고,
枯心忘懷也(고심망회야)리라. 枯心忘懷도 아니할 것입니다.
바싹 마른 마음으로 생각을 잊어버리는, 생각을 잊는, 그것은 말하자면 나무처럼 무심한 경계되는 그런 입장도 아닐 것입니다.
起心管帶ㆍ枯心忘懷. ←이것이 묵조선의 두 가지 병이거든요.
起心管帶 = 마음을 일으켜서 계속 마음을 예의주시하는 겁니다.
예의주시. 요즘 “사띠” 라고 하나요? 마음관리ㆍ예의집중. 요즘 그야말로 묵조선이 들어와서, 그것은 지금 묵조선하고는 약간 물론 다르지만, 비파사나가 아주 유사합니다. 그것이 여기서 표현한 그 내용 그대로입니다.
起心管帶. 뭘 보든지, 어떤 사물을 대하든지 그대로 예의주시한다.
내가 밥을 먹으면 밥 먹는데 예의주시하고, 내가 밥을 먹거나ㆍ반찬을 먹거나ㆍ국을 마시거나, 숟가락을 들었구나ㆍ놨구나. ←이것을 일일이 놓치지 말고 예의주시하라. 이렇게 가르치잖아요. 그것이 말하자면 起心管帶입니다. 관리하여 지니다 = 管帶. 관리하여 지니다.
내가 하는 행위를 예의주시하는 것. 화장실에 가면 화장실에 가는 일. 나오면 나오는 일. 일체 것을 예의주시하는, 管帶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起心管帶. 그 다음에
枯心忘懷 = 마음작용을 멈추는 일.
마를 고자잖아요. 마음을 바싹 마르게 해가지고 작용을 멈추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각을 잊는 것. 사실은 이것 되지도 않는 일입니다.
枯心忘懷는 되지도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르치거든요.
그렇게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요즘 묵조 사선들의 병통인데, 아마 당신은 그런 정도수준은 아닐 것입니다.
近年以來(근년이래)에
禪道佛法(선도불법)이, 선불교 禪道佛法이
衰弊之甚(쇠폐지심)일새. 아주 쇠퇴하고 폐단이 아주 심할 세.
有般杜撰長老(유반두찬장노)는, 일반 어떤 종류의 杜撰長老는
根本(근본)이 自無所悟(자무소오)하고,
근본이 스스로 자기가 깨달은 바가 없고,
業識(업식)이 茫茫(망망)하야, 그런데 業識은 또 망망해요.
하~ 업 덩어리입니다. 업둥입니다.
종단에서 무슨 회의 같은 것 한번 해서 요즘 어린행자들 들어오는 것.
어린행자가 아니지요. 막 들어온 행자들보고 어떤 스님들이 그러더라고요. “하~~ 저 업둥이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대체 모르겠다.” 자기들은 어려서 들어와서 전생 업은 어쩔지 몰라도, 금생 업은 그래도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들어왔는데, 요즘 들어온 사람들은 자기가 보니까 완전히 업둥인 겁니다. 업둥이. 그래서 “저 업 덩어리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막연하다.” 는 겁니다. 그렇게 탄식하는 스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도 아마 나기는 날겁니다. 業識이 茫茫하다는 것이 그런 뜻입니다.
無本可據(무본가거)하며, 근본 가히 의거할 것이 없으며,
無實頭伎倆(무실두기량)으로, 실다운ㆍ실다운 재주도 없는 것으로써
收攝學者(수섭학자)하니, 공부하는 사람들을 收攝하니,
자기도 깨달은 바도 없고, 또 지 業識은 茫茫해요. 가득해요. 업 덩어리입니다. 그래서 아무 근거도 없어요. 실다운 기량도 없어요. 무슨 경전을 제대로 공부해서 경전의 이론을 안다든지 그런 것도 아무 것도 없으면서 學者를 收攝해요. 야~ 요즘 이런 사람들 더러 많을 겁니다. 이 시대에는 더 할 겁니다. 공부하는 사람을 받아들여요. 신도도 받아들이고 제자도 받아들이고 해서 나름대로 자기의 그 알량한, 개인 소견이지요. 그것 가지고 막 해요. 그런데 그것이 또 통하는 시대입니다. 와서 배우는 사람은 그보다 더 못하니까요. 그보다 더 못하니까 그거라도, 아무 다른 생각 없이 그거라도 그냥 열심히 배우는 것이지요.
敎一切人(교일체인)으로, 일체 사람들로 하여금
如渠相似(여거상사)하야, 그 사람과 같이, 자기와 같이 相似케 해서
黑漆漆地(흑칠칠지)로, 새카만,
黑은 검다는 뜻이고, 漆은 옻 칠자 아닙니까? 검은 것 가운데 더 검으며,
漆漆 = 새카맣게 검은 것으로. ←이런 뜻입니다. 형용사니까요.
緊閉却眼(긴폐각안)하야, 아주 긴밀하게 눈을 딱~~ 감고,
혹시 누가 눈이라도 뜨게 할까봐 아주 꽉 눈을 감고는
喚作黙而常照(환작묵이상조)라하나니,
그러면서 부르기를 “나는 黙而常照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좋은 말입니다. 黙而常照. 黙照라고 하는 말 자체는요. 왜냐하면 우리근본마음은 묵묵한 자리입니다. 그러면서 활발발하게 또 한편 작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 순간도 쉬지 않고 작용하는 것. 그것이 照입니다.
常照 = 항상 비춘다. 黙照라는 말이 말 자체는 의미가 참 좋습니다.
그것을 黙照다. 라고 이렇게 여긴다 이 말입니다. 그런데,
彦冲(언충)이, 여기 彦冲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彦冲이, 이 사람은 지금 彦修. “장주” 라고 그렇게 흔히 표현하는데 말하자면 편지의 주인이 彦修이고, 그 동생이 彦冲입니다. 이 사람은 아주 대단한 기질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실은 이 사람 제도하기 위해서 彦修, 劉寶學이라는 사람에게 사전 편지를 보내는 것입니다. 전체를 읽어보면 그 상황이 그래요.
彦冲이
被此輩(피차배)에, 이러한 무리들에게
敎壞了(교괴료)라. 가르쳐서 무너진 바가 되었다.
무너짐을 입었다. 무너져 버림을 입었다. 그 사람들 가르침에, 묵조 사선의 가르침에 그냥 넘어가버렸다. 그래서 당신 동생, 언충이가 완전히 깡그리 무너지듯이 무너져 버린 상황이다 이 말입니다.
苦哉苦哉(고재고재)로다. 참 안 됐고 안 됐다. 苦哉苦哉로다.
이런 것, 한 마디씩 배워가지고는 또 도반들하고 잘 써 먹습니다.
苦哉苦哉라. 자기도 별 수 없으면서 상대가 조금 허점이 있으면, “참 苦哉苦哉다. 니 그래가지고 어쩔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 가서 공양주한테 한 마디 쓰세요. 한 마디 써 먹으세요. “아이고 苦哉苦哉다.” 하하하하하하하하
遮箇話(자개화)를, 이 이야기를
若不是左右(약불시좌우)가 悟得狗子無佛性(오득구자무불성)이런들,
이러한 이야기를 그대가 狗子無佛性 화두를 깨닫지 못했더라면,
徑山(경산)도 亦無說處(역무설처)니라.
나도, 대혜스님 자신을 徑山. 경산사 누구 가본적 있어요?
항주에서 차타고 한참 산중으로 들어간 곳이 경산이라는 산이고,
경산사. 거기 대혜스님이 오래 사셨던 곳입니다. 그래서 자호를 그냥 徑山이라그렇게 말합니다. 亦無說處니라. 또한 말할 곳이 없을 것이다.
千萬捺下面皮(천만날하면피)하고,
千萬 = 부디. 捺下面皮 = 안면몰수. 부디 안면몰수하고
痛與手段(통여수단)하야, 아프게, 아주 심하게 手段을 주어서,
아주 냉정하게, 형제, 그까짓 것 생각하지 말고 법을 논하고, 앞으로 큰 안목을 열어서 出格丈夫(출격장부)가 되는 그런 일인데, 무슨 ‘형제다. 하는 그런 인정에 끄달리지 말고,’ 이런 뜻이 숨어있습니다.
痛與手段하야 救取遮箇人(구취차개인)하라.
이 사람을 구제하도록 하라.
至禱至禱(지도지도)하노라. 지극히 빌고 지극히 비노라.
然이나 有一事하니 亦不可不知니라 此公이 淸淨自居하야
世味澹泊이 積有年矣라 定執此爲奇特이리니 若欲救之인댄
當與之同事하야 令其歡喜하야 心不生疑하야사 庶幾信得及하야
肯轉頭來하리니 淨名의 所謂先以欲으로 鉤牽하고
後令入佛智是也라 黃面老子云觀法先後하야 以智分別하며
是非審定하야 不違法印하고 次第建立無邊行門하야 令諸衆生으로
斷一切疑라하시니 此乃爲物作則이며 萬世楷模也온 况此公의
根性이 與左右로 逈不同하니 生天은 定在靈運前이요
成佛은 定在靈運後者也라 此公은 決定不可以智慧攝이요
當隨所好攝하야 日月磨之하면 恐自知非하야 忽然肯捨를
亦不可定이니 若肯轉頭來하면 却是箇有力量底漢이라
↑4강-3
↓4강-4
左右도 亦須退步하야 讓渠出一頭라사 始得다
然(연)이나 有一事(유일사)하니 亦不可不知(역불가불지)니라.
그런데 동생을 제도하겠다고 그렇게 나서는 것은 좋지만, 꼭 알아야 할 것이 한 가지가 있다.
此公(차공)이 淸淨自居(청정자거)하야,
이 사람은 淸淨自居. 아주 깨끗하게 스스로 살아왔어요. 비록 거사지만 아주 대단한 그런, 수행자로서 아주 모범으로 살았다. 그런 뜻이지요.
世味澹泊(세미담박)이,
세상의 맛은 아주 澹泊해졌어요. 세상의 맛은 아무 재미가 없어요.
世味는 澹泊해서 積有年矣(적유년의)라. 몇 년이 되었다 이 말입니다.
해를 쌓음이 있다. 여러 해됐다.
定執此爲奇特(정집차위기특)이리니,
결정코 이러한 삶을 집착해서 기특함을 삼을 것이다. 사실은 그것도 어려운 일입니다.
若欲救之(약욕구지)인댄→ 구진댄,
만약 그 사람을 구제하고자 한다면
當與之同事(당여지동사)하야,
마땅히 그로 더불어 同事해서, 같이 일해야 된다.
四攝法(사섭법)중에 同事攝(동사섭)이 제일이지요.
令其歡喜(영기환희)하야,
그로 하여금 歡喜케, 자기하고 같이 공부하고, 자기 관심사를 같이 관심 있게 생각하면, 누구든 다 좋아하지요. 사실은 자기하는 일에 관심보이는 것 같이 기쁜 일은 없습니다. 그것이 제일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同事攝이 제일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로 하여금 歡喜케 해서
心不生疑(심불생의)하야사, 마음이 의심을 내지 않게 하여야
庶幾信得及(서기신득급)하야, 거의 틀림없이 믿어서, 믿게 되어서
肯轉頭來(긍전두래)하리니, 기꺼이 머리를 굴려서,
머리를 돌이켜서 올 것입니다.
淨名(정명)의, 유마거사가 말하기를
所謂 先以欲(소위선이욕)으로 鉤牽(구견)하고,
먼저 그 사람이 하고자하는 것, 그 사람이 뭘 필요로 하는가? 뭘 좋아하는가? 그것으로써 이끌어오고,
後令 入佛智가 是也(후령입불지시야)라.
뒤에는, 그 뒤에야 비로소 부처님 지혜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
정명경에 = 유마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그렇지요. 먼저 그 사람이 좋아하는 선물도 갖다 주고, 한번 갖다 줘서 안 됩니다. 여러 번 갖다 줘요.
그 전에 어느 절에 있는데, 어떤 보살이 계속 그 절에 계속 꽃을 가져 오는 겁니다. 항상 꽃을 가져와서 꽃을 올리고, 스님들께 친절하게 한 1년쯤 그러더니 나중에는 보험 들라고 하더라고요. 보험 들라고... 야~ 그런 사람 봤습니다. 틴허스님 화엄경 교역할 땐데요. 그 때 기계가 몇 대 있고, 사식기계가 여러 대 있고, 직원이 여럿이고 그래서 핑핑 돌아가고, 앞으로 할 일은 태산 같이 밀려 있고 그랬습니다. 그래서 보험 하는 사람이 그것을 보고는 한참 드나들더라고요. 先以欲으로 鉤牽하고 後令入佛智가 是也라. 후에 佛智에 들어가게 하니, 뒤에는, 보험에 들게 하는 것이 이것이다.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인간사는, 어떤 출세간사나ㆍ세간사나 원리는 같으니까요. 원리는 결국 같으니까...
黃面老子云(황면노자운), 황면노자가 말하기를
觀法先後(관법선후)하야, 법의 선후를 잘 관찰해서
以智分別(이지분별)하며, 지혜로서 분별하며,
是非審定(시비심정)하야, 옳고 그른 것을 잘 살펴 정해서,
不違法印(불위법인)하고, 法印을 어기지 말고
次第建立無邊行門(차제건립무변행문)하야,
次第로 無邊行門. 가없는 수행의 문을 건립해서
令諸衆生(영제중생)으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斷一切疑(단일체의)라하시니.
일체 의심을 끊게 하라. ←이렇게 부처님께서 가르쳤다 이 말입니다.
그러니까 앞에서도 있었지만, 知所先後면 卽近道矣라. 先과 後를 알면 곧 도에 가깝다. 라고 하는 말씀과 같은 뜻이지요.
此乃爲物作則(차내위물작측)이며,
이것은 중생들을 위하는ㆍ중생들을 위하는 법칙을 짓는 것이다.
세상이치가 다 그러니까요. 중생을 위하는 爲物作則. 중생을 위하는 법칙을 짓는 것이며,
萬世楷模也(만세해모야)온, 그랬습니다.
만세의 본보기다. 만세의 모범이고 본보기다. 이 말입니다. 세상만사 다 그런 이치로 돌아가니까요.
况此公(황차공)의 根性(근성)이 與左右(여좌우)로 逈不同(형부동)하니,
하물며 이, 此公의 근성이, 根性 = 일본말로 하면 곤조.
根性이 與左右로, 그대로 더불어 逈不同하니, 멀리, 같지 아니하다 이 말입니다.
두 형제인데도 불구하고 성격이 아주 판이하게 달라요.
어떤 경우인가하면
生天(생천)은 定在靈運前(정재령운전)이요
成佛(성불)은 定在靈運後者也(정재령운후자야)라.
이것은 무슨 말인가 하니, 옛날 송나라 회계산 태수. 맹의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불사를 열심히 아주 잘하고, 신심이 장해요. 일반적인 신심이 아주장해요. 그런데 그것하고, 말하자면 벼슬하는 비슷한 라이벌 관계에 있는 사령운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사영운이라는 사람이 있는데요. 사령운, 이 사람은 그런 불사를 못 해요. 안 해요. 돈도 없는지 아무튼 안 해요. 그런데 맹의라는 사람은 불사를 잘 해요. 신심이 장해요.
사령운이라는 사람하고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는데요.
사령운이라는 사람이 그 사람보고 뭐 라고 하는가 하면,
生天은 定在靈運前이라. “당신은 복을 많이 지으니까 천상에 나는 것은 나보다 앞서 날거야. 하지만 나는 안목이 투철해. 당신보다 안목이 뛰어나고 소견이 아주 남달라. 그러니까 成佛은 定在靈運後라. 당신은 그래봤자 성불은 나보다 뒤에 할 거야.” 신심 있는 사람한테 이렇게 한 겁니다.
“당신은 복이야 잘 지어서 천상에 갈지는 모르지만, 성불은 나하고 게임이 안 돼.” 이래 버린 겁니다. 그 기개가 아주 대단하지요? 그리고 점잖은 관계에, 그리고 정치적 라이벌 관계에 있는 사람이, 또 불교에 “내노라.” 하는 신심은 다 가지고 있는데, 이런 막말을 해버린 겁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당신 복이나 잘 지어서 천상에 갈지는 몰라도 성불은 내 꽁무니도 못 따라올 거야, 이런 식으로 표현해 놨으니... 그런데 언충이라는 사람이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기고만장하고ㆍ아무도 갈 볼 수가 없고ㆍ총명하고ㆍ그냥 말발세고, 그런 사람이다 이 겁니다.
定在靈運後者也라.
者也라고하는 놈 者자. 이것이 그 사람을 가리키는 겁니다.
결정코 靈運. 사령운보다 뒤에 있다고 하는 “그러한 사람이다.”
언충이라는 사람이 그와 같은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此公(차공)은
決定不可以智慧攝(결정불가이지혜섭)이요.
결정코 가히 지혜로써 포섭할 사람이 못돼. 왜냐? 지혜는 뛰어나니까요.
하도 머리 좋고 아주 똑똑하고 하니까요.
當隨所好攝(당수소호섭)하야,
마땅히 좋아하는 바를 따라서 포섭을 해서
日月磨之(일월마지)하면, 날과 달로 연마할 것 같으면
恐自知非(공자지비)하야,
아마도 스스로 자기가 그른 줄 알아서, 잘못 된 것을 알아서
忽然肯捨(홀연긍사)를, 홀연히 기꺼이 자기 공부하던 것 버리기를
亦不可定(역불가정)이니, 또한 가히 정할 수는 없다.
기대할 수는 있지요. 기대할 수는 있지만 꼭 그런다고 보장은 안 된다 이 말입니다. 그 만치 이 사람이 기개가 센 사람입니다.
若 肯轉頭來(약긍전두래)하면,
그런데 그런 아주 기개가 센 사람이, 기꺼이 머리를 돌이켜서 오기만 한다면
却是箇 有力量底漢(각시개유력량저한)이라.
도리어, 오히려 불교에 큰 力量을 끼칠, 그런 아주 力量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力量底 漢이라고 그랬잖아요. 역량 있는 놈이 될 것이다.
이런 표현을 했습니다. “역량 있는 놈이 될 것이다.” 그렇습니다.
노지심이 그냥 천하에 아주 몹쓸 짓을 하는 108 그런 두령중의 한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어느 순간 저~ 기 전단강의 물결소리, 조수 물소리 척~~ 듣고, 한 순간에 앉아서 견성 척~~ 해버리잖아요. 수호지에 그 장면이 아주 하잖아요. 천하에 몹쓸 노지심. 주장자 들고, 주먹막한 염주를 자기키만 한 것을 걸고는...
사람 죽이기를 그냥 파리 목숨 죽이듯이 그렇게 하던 사람인데...
견성할 때는 척~~ 강물소리. 강물의 조수, 들어왔다ㆍ나갔다하는 소리 척 듣고는 한 생각 탁 돌이켜서 깨닫는 겁니다. 그래 또 그런 근기가 깨닫기로 하면 그렇게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활이 밑으로 굽었지만, 그것을 반대로 돌리면 위로 올라가듯이 사람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근기가 시시하게...
첫댓글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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本과 末을 바르게 알라.. _()()()_
감사합니다.()
나무 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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