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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WON GALLERY. 원문보기 글쓴이: 『김동원』
그림은 이렇게 그리는게 아닌가요?
멋있는 풍경화가 있다. 그것을 감상하는 사람이 작가가 어떤 방식으로 형태를 잡았는지, 물감의 순서는 어떤 순으로 발랐는지 관심을 가지는가? 혹은 누드 모델이 누구 집 자식인지 알 필요가 있겠는가? 관람자가 미술창작에 관한 지식은 고작 작가가 제공한 크기와 제작연도, 재료 따위의 몇 가지 밖에는 모른다. 사실 그 이상은 몰라도 작품감상에 전혀 방해되지 않는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 보자. 그림을 그리는데 일반 감상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면 어떻게 될까? 만약 영화라면 진짜 사람이 날아야 하고, 진짜 정사를 벌여야 할까? 미술 창작에 있어 오해가 생기는 대목이 바로 여기다. 보통 사람들은 화가가 인물이나 사물을 그릴 때 언제나 직접 보고 쓱쓱 그린다고 생각한다. 풍경화를 그릴 때는 직접 그곳에서 그리는 줄 알고, 수채화를 할 때는 붓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한다. 그림을 배우면 대학로 초상화 그리는 사람처럼 빠른 시간 내에 사람을 그릴 수 있다고 여기고, 뭐든지 보기만 하면 그려내는 마술사 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생각은 미술가를 어떤 분야의 전문가로 보는 게 아니라 특별한 재능을 가진 존재로 보는 근거가 된다. 사실 미술을 신비화시켜야만 돈벌어 먹고사는 사람들이 조장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 미술창작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그림을 배우는 방법은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또한 어떤 방법이 특별히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어렵다. 그러나 잘못 알고 있는 몇 가지만 바로 잡자.
1. 형태를 잡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잣대나 비례법을 이용하여 형태를 만들기도 하고, 그냥 바로 보고 그리기도 한다. 또한 확대, 축소 복사하여 베끼기도 하고, 사진을 보고 그리기도 한다. 심지어는 슬라이드로 비춰서 나타나는 형상을 보고 그리기도 하고, 아예 사진을 확대하여 프린트하는 경우도 있다. 어떤 방법이든 형태만 정확히 나온다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그리면 나도 하겠네, 씨~' 정말? 사진으로 형태를 프린트한다고 표현한 미술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게 아니다. 정말 그렇다면 배우들이 직접 싸우고 얻어 터져야 격투신이 감동적이다? 미술작품을 창조하는 사람은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쓰고, 그것을 자신의 개성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작가는 방법에 대해 열려있는 자세를 가지는데, 감상자가 미술은 반드시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우기면 예술이 발전하겠는가? 좁은 생각으로 넓은 생각을 규정할 수 없다는 말이다.
2. 화가는 단번에 그리지 않다.
물론 단번에 그려버리는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크로키나 습작 정도에 머문다. 대부분은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 여러 장의 초벌그림(에스키스)을 그리고, 몇 번씩 연습을 한 다음 최종적으로 캔버스에 옮긴다. 그래도 마음에 안들 때는 몇 번씩 이 과정을 반복한다. 보통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작품은 그 과정의 최종 결과물이다. 그림을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가장 이해시키기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전문가는 여러 번 그리는데 초보자가 한 번에 그린다? 초보자의 재능이 아무려면 전문작가만 할까? 사실이 그렇지 않는가. 이건 일단 넘어가자.
3.그림을 배우면 보지 않고도 잘 그릴 수 있다?
가끔 대상을 보지 않고 그리면 사람들은 놀라워한다. '어떻게 보지 않고도 그렇게 잘 그릴 수 있습니까?' 하지만 솔직히 고백컨대, 나도 보지 않고는 잘 그리지 못한다. 그럼 어떻게 안보고 그린단 말인가? 이 질문의 대답은 바로 '습작'에 있다. 이 방법은 이 글을 보고 있는 당신도 충분히 가능하다. 당신도 사람을 수천 번 그려봐라. 그게 대충 안 외워지겠나? 만화가가 사람 그리는데 매번 보고 그리나? 수천, 수만 번 그려보면 안다. 상상만 해도 그 모습이 줄줄 나오는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사람, 가전 제품, 나무, 풀, 산, 돌, 건물, 집, 꽃 따위를 작게는 수백 번에서 수천 번까지 반복해서 그렸다. 이렇게 했는데도 그려지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정말 지진아이다. 물론 이 과정에는 사물의 구성원리나 기본을 이해하는 내용이 들어있어서 비슷한 사물은 응용을 하게 된다. 좀 끔찍하지? 하지만 하나의 사물을 그리고 이해할 때마다 생기는 희열은 말로 설명 못한다. 그럼 한 발짝 나아가서 대학로 초상화 그리는 사람도 대충 이해가 되는가? 사람의 얼굴을 정면으로 한정하고, 간단한 명암과 색채로 그야말로 죽어라고 반복하여 연습하면 되는 것이다. 나도 가끔 이런 허세를 부린다. 하루 8시간 이상, 3개월만 배우면 초상화로 밥 먹고살게 해 주겠다고.
4.수채화를 그리고 싶은데, 기본과정을 빼고 수채화부터 배우면 안되나요?
어떤 대답을 듣고 싶은가? 두 가지가 있다. 3개월 정도만 배우다가 그만 둘 요량이고, 수강료를 아주 많이 낸다면 '된다'이고, 꾸준히 배우고 싶고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안 된다'이다. 백화점 문화센터 같은 곳에서 바로 수채화부터 가르치는 곳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미술교육이 목적이라기 보단 선생이 인맥을 만들어 장사를 할 의사가 있든지, 아니면 백화점 매상 올리는데 관심이 있는 경우일 뿐이다. 너무 심했나? 그럼 수채화라도 먼저 배워 미술에 관심을 가지게 하거나, 이미 기본기를 땐 사람들이(디자인과, 공예과 , 미술교육과 출신) 수채화를 배우고 싶은 경우도 있겠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수채화에서 스케치는 약 70% 이상을 차지한다.(사실적인 그림에 한해)연필과 붓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정교한가? 연필로 안 되는 것이 붓으로 될 것 같은가? 또한 형태와 명도, 구도와 같은 화면 구성에 핵심 요소는 스케치라는 과정 속에서 풀어야 한다. 그림을 즉흥적으로 그리는 방법은 수많은 방법 중에 하나일 뿐이다. 그런 그림을 그리고 싶다면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술작품의 나름대로의 계획과 공정 속에서 진행된다. 어떤 사물을 얼마만큼 정확히 그릴 것인지, 어떤 분위기를 낼 것인지, 구도는 어떠해야 하는지, 기법은 어떠해야 하고, 완성은 어느 정도인지 미리 가늠하지 않으면 실패하기 쉽다. 몇 시간씩 노력해서 실패한다면 얼마나 허무하겠는가? 어떤 화가는 '기본기가 전부다'라고 말한다. 농구나 축구에서도 마찬가지다. 결국 '기본기'가 아니겠는가.그림 그리기에서 잘못된 지식을 가지는 경우, 미술과 멀어지는 결과를 낳는다. 그림 그리기는 사람을 구속하는 방법이 아니라 다양하게 열린 방법이다. 글을 읽다보면 '역시 미술은 어렵구나'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앞의 글에서 언급했다시피 그림은 중학교 이상이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물론 기술을 익혔다고 모두 훌륭한 창조자가 되긴 어렵다. 하지만 우리가 그림을 배우는 것이 그야말로 전문가를 꿈꾸지 않고,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창조적으로 바꾸는데 있다면 미술은 여러분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
자료사진에 대한 오해
그림을 지도하다보면 가끔 이런 질문을 받는다.
"선생님, 인물이나 풍경, 정물은 직접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닌가요? 사진자료를 보고 그리면, 실제 보고 그리는 것과 아무래도 차이가 나지 않나요?"
대답은 간단하다.
"아무래도...그렇죠. 그런데 그건 왜 묻습니까?"
"여기서는 사진자료를 이용하는데, 좀 이상해서요."
"그럼 제가 질문 하나 해도 될까요? 전시장에 걸려있는 작품 중에서 사진보고 그린 것과 직접 보고 그린 것을 구분할 수 있습니까?"
"글쎄요."
"아마 그림에 문외한이라도 50%는 구분 할 것입니다."
"그래요?"
"둘 중 하나 아닙니까?"
내가 이런 질문에 약간 비아냥거리듯이 반응하고 대답하는 이유가 있다. 대개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은 미술을 어디서 배웠던 분들이다. 주로 백화점 문화센터나 개인 화실에서 작가에게 들은 얘기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보다는 이런 것을 가르쳐 준 화가에게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오버하지 마세요."
왜 '오버'했는지, 이제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1.자료는 작품의 '소스'이다.
어떤 의미에서 하늘 아래 '창조'란 없다. 예술작품도 '모방', '차용', '응용', '조합', '변형' 따위의 행위를 거쳐 탄생한다. 완전히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렇다고 예술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어떤 작가가 머릿속에 창조적인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고 하더라도, 그 '창조적인 영감(靈感)' 또한 작가가 지금까지 배우고 경험한 것에서 출발한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괴물을 표현해도 결국 사람과 동물의 이러저러한 조합이나 변형에 불과하다. 그것은 외계인을 표현해도 마찬가지다. 이렇듯 예술가는 현실에서 보고 배우고 경험한 '소스'를 가지고 요리하는 전문 요리사일 수도 있다. 몇 년 전 김치를 담갔다가 실패한 적이 있는데, 재료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경험했다. 양념을 버무리고 손맛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일차적으로 재료가 나쁘면 김치 맛이 떨어진다는 것이 동네 아줌마들의 충고였다. 실제 맛으로 유명한 음식점 주방장은 자신이 만드는 음식의 재료만큼은 최상의 것으로 쓴다고 했다. 물론 최상의 재료를 골라내는 안목도 필요하다고 했다. 예술에서 작품의 '소스'는 '인간의 삶과 그 주변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신춘문예의 소설부문에 올라오는 글의 대부분은 소설가 자신의 경험을 쓴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만약 자신의 경험(간접 경험도 포함)이 아니고, 전혀 알지 못하는 내용으로 소설은 쓴다는 것이 가능할까? 가능하다 하더라도 그 소설의 수준은 떨어질 것이다. 탄광촌에서 일하는 광부의 삶을 소설로 쓴다면 당연히 소설가는 광부의 구체적인 삶을 알아야 하고, 모른다면 취재나 경험을 통해 구체성을 확보해야 한다. 광부의 삶뿐만 아니라 광부들이 쓰는 장비나 옷가지, 갱도의 내부, 사는 집, 잘 가는 술집 따위에 대해서도 잘 알아야 할 것이다. 70년대 이야기지만, 매춘 여성의 삶을 소설로 쓰기 위해 매춘굴에서 살다시피 한 소설가도 있다. 이렇게 소설가가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 취재를 하고 경험을 하는 것은 예술가의 훌륭한 미덕이 될 수 있다. 다시 미술로 돌아오자. 조선시대에 왕의 초상을 그릴 때 도화서 화가들은 어떻게 했을까? 왕을 모델로 직접 그릴 수는 없었기 때문에 왕의 주변을 어슬렁거리면서 슬쩍 슬쩍 관찰을 하고 난 후 왕과 비슷하게 생긴 노비나 사람을 구해 보고 데생을 했다고 한다. 서양에서 예수의 모습을 표현할 때도 비슷했다. 골격이나 인체의 모습은 모델을 사서 데생을 하고 여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보태 그림을 완성했다. 결국 상상으로만 그림을 그리지 않고 그림에 필요한 요소의 자료를 구해 그렸다는 것이다. 카메라가 발명되면서 화가들은 보다 손쉽게 자료를 만들 수 있었다. 비싼 모델을 몇 시간씩 쓰지 않아도 되고, 비가 오거나 바람이 부는데 야외에서 풍경을 그리지 않아도 되었다. 사진을 이용해 안정되고 편리한 자료를 얻을 수 있기에 보다 작품 자체에 충실할 수 있게 된 것이다.
2. 자료사진은 사진작품이 아니다.
미술에 필요한 자료는 시각적인 것인데 아무래도 사진을 많이 활용한다. 카메라는 인간의 눈과 닮게 고안되어 사물의 형태와 명암, 색상 같은 정보를 담을 수 있다. 또한 보존성이 뛰어나고 여러 장을 현상해서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래서 화가에게 있어 카메라는 필수품이다. 처음 사진기가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화가의 손으로 그리는 미술은 곧 쇠퇴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미술은 오히려 발전했다. 왜냐하면 사진과 미술은 다른 영역이기 때문이다. 화가는 사진작품을 베끼는 것이 아니라 사진자료를 참조하여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낸다. 화가가 사물이나 인물, 풍경을 사진으로 찍는 것은 미술작품을 위한 자료로 쓰기 위함이지 사진작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종종 이런 간단한 문제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오해해서 생기는 문제도 있다. 얼마 전 얘기인데, 어떤 미술 공모전에 입상을 한 작품이 사진작품을 베꼈다고 문제가 된 적이 있다. 실제 입상한 미술작가는 사진 작품과 거의 흡사하게 화면구성을 했고, 문제가 불거지자 문제의 사진 작품을 참조했지만 그대로 베낀 것은 아니라고 변명했다. 하지만 사진을 미술의 자료로 쓰기 위해서는 약간의 조건이 있다.
첫째, 사진작품을 단지 물감으로 재현하는 수준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명암, 구도, 색채, 형태 따위의 요소는 미술과 사진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또한 소재나 주제가 겹치는 점도 있다. 이것 때문에 가끔 사진작품을 그대로 화면에 옮겨 그리는 촌스러운 행동이 일어난다. 무와 배추, 고춧가루 따위를 가지고 김치를 만들지만, 배추만 가지고 '김치'라고 부르는 바보가 있겠는가? 자료는 그냥 자료일 뿐이다. 자료를 가지고 자료의 성질을 넘어서는 그 무엇을 만들 때 비로소 작품이 되는 것이다. 화가가 사진 작품이 가지고 있는 요소를 그대로 차용하는 것은 '지적 게으름'의 소산이다.
둘째, 자료사진은 가급적 작가 자신이 만들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소재와 주재, 구도, 형태에 맞게 다리품을 팔아서 만든 자료야말로 높은 가치를 가진다. 한번도 보지 않은 풍경이나 사람을 사진에만 의존하여 그린다면 형태나 색채만 따라가고 가슴은 멀어지는 어정쩡한 작품이 만들어질 수 있다.
셋째, 사진작품의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 이 말은 사진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요소가 미술작품에 반영되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다이아몬드 햇살이 내리쬐는 풍경, 안개 낀 공원 풍경, 물안개가 흐르는 호수, 순간 포착된 인물, 시점이 너무 높거나 낮은 풍경이나 인물, 플래시를 터트려 찍은 인물 따위는 사진 냄새가 많이 나기 때문에 피하는 것이 좋다.
3.창작과정의 비밀
작가가 무엇을 표현하는데 방법의 제약은 없다. 사람을 다치게 하거나 사기를 치지 않는 범위라면 어떤 방법이든 표현의 자유는 있다. 심지어는 헌법에도 명시되어 있는 사실이다. 이런 표현의 자유를 인정할 때 사회는 다양해지고 풍부해진다. 미술작품은 미술작품 그 자체로서 평가를 받는다. 과정이나 방법이 어떠하든 간에 결과를 중시한다는 말이다. 경제나 정치, 종교 따위는 수단과 목적이 일치하여야 한다. 하지만 예술은 그럴 필요가 없다. 형태를 잡기 위해 직접 보고 그리든, 사진 자료를 참조하든 그 자체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건 단지 그리는 작가의 창작태도일 뿐이다. 문제는 결과이다. 아무리 사진 자료를 참조했다고 해도 질 높고 감동적인 작품이면 그야말로 좋은 것이요, 인물이나 풍경을 직접 모델링 하거나 사생을 했다고 해도 못 그린 것이면 못 그린 것이다. 직접 모델링을 했다고 못 그린 작품에 후한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모델링을 하거나 풍경을 사생하는 일이 사진을 참조하는 것보다 못하다는 말은 아니다. 작품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미술대학을 갓 나온 사람이나 미술판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림만 잘 그리면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창작활동을 하려면 '조건'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경제적인 문제부터 좀더 나은 작품을 창작할 수 있는 조건은 다른 사람이 만들어 주지 않는다. 스스로 만들어 가야 한다. 좀더 좋은 재료, 좀더 좋은 주제나 소재, 좀더 나은 사회성과 예술성과 대중성, 좀더 좋은 작업 환경 따위를 만드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은 일들이다. 이런 말을 현실과 비겁하게 타협하라는 좁은 의미로 듣지 마라. 현실과 비겁하게 타협하면 사회생활은 성공할지 몰라도 창작활동은 실패한다는 것이 오랜 교훈이다.미술과 미술가는 사회와 동떨어진 분야나 사람들이 아니다. 컴퓨터 전문가가 아프리카 오지에서 원시생활을 하면 뭐하겠나. 컴퓨터만 잘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주변 환경과 어울리면서 불리한 조건을 창작에 필요한 유리한 조건으로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민감한 감수성이 필요하다. 일상적인 것에서 느끼고 생각한 소재나 주제를 함부로 스쳐 버리지 말아야 한다. 필요하다면 작은 스케치북에 그리기도 하고, 사진기가 있다면 찍어서 '창작의 소스'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이 일반인들이 모르는 창작의 비밀 한가지이다.
4.눈높이 교육이 필요하다.
자, 대충 하고 싶은 얘기는 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오자. 글의 처음에 순진하게 질문하는 사람에게 '사진보고 그린 작품과 직접 사생한 작품을 구분할 수 있나?' 라고 대꾸를 한 것은 약간의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리고 이런 말을 가르쳐준 화가나 강사에게 '오버'하지 말라고 한 것은 한마디로 그림을 처음 배우는 사람에게 '겁주지 말고', '잘난 척 하지 마라' 것이다. 사진자료를 참조하여 그린 작품을 정확히 구분해 내는 일은 무의미할뿐더러 그런 이야기는 전문가 사이에서 오고 가는 말이다. 윈도98에서 버그가 몇 만개 발생했다고 언론에서 떠들었지만, 일반 사용자와는 아무 관련이 없다. 해결할 수도 없거니와 오락이나 몇 가지 소프트웨어를 작동시키는데는 별 불편을 느끼지 못한다. 이것은 그야말로 전문가가 논의할 문제이다. 오랜 습작과 연륜이 있어야만 가능한 전문적인 이야기를 초보자에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겁주기'에 불과하다. 또한 성인 남자가 초등학생에게 '나 힘세다'라고 잘난 척 하는 것은 촌스러운 짓이듯, 초보자에게 작가의 능력을 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처음 대하는 초보자들의 눈높이에서 가르쳐주고 평가해 주는 것은 보다 많은 일반인들이 미술과 친해지는 첫걸음이다.
천재의식
그림 그리기에 있어 '천재의식'이란 자신이 마치 대단한 미술적 재능을 타고났고, 또 언제든지 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나는 그림을 처음 그리는 사람들에게 '천재의식'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의 말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은 의아해 한다. 초급과정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천재의식'이라니...하지만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사람들이 자신을 '천재'라고 생각하는 것이 못마땅하다. 그림을 2~3개월 정도 배우고 자신의 얼굴을 완벽하게 그리지 못한다면서 실망하고 그림을 포기하는 사람은 천재의식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한 두 작품 실패했다고 해서 자신의 재능을 탓하는 사람도 천재의식에 빠져있는 사람이다. 사진자료를 보고 그리는 것을 아주 우습게 생각하는 사람도 천재의식에 빠진 사람이다. 연필화, 수채화, 유화, 파스텔, 판화 따위를 다 배우고, 인물, 풍경, 정물을 다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사람도 천재의식에 빠진 사람이다. 내가 천재의식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서 가장 힘든 것은 나에 대한 낭패감이다. 보통사람이 천재를 가르치는 일은 너무 버겁기도 하거니와 자신이 한없이 초라해 짐을 느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들은 미술에 대해 좋지 못한 경험을 가지게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 이렇게 천재의식을 가진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은 천재가 아닌 내가 배가 아프기 때문은 아니다. 사실 나는 아직 미술에 있어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 오히려 그런 천재와 한 시대를 같이 숨쉬고 살아간다면 무한한 영광이라고 생각한다. 한때 나 자신을 '미술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은 있다. 이성적으로는 아니라고 부인했지만 속으로는 '혹시 내가 천재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얼마 못 가서 여지없이 깨졌다. 내가 스스로를 천재라고 생각하듯, 나와 비슷한 재능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수없이 만났기 때문이다. 천재가 흔해서야 되겠는가. 소수여야 하는데 너무 흔해서 도무지 인정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어찌 생각하면 미술을 하면서 생기는 자의식이나 자존심 같은 마음과 천재의식을 혼돈하지 않았나 여겨진다. 하지만 어떠한 종류의 '천재의식'이든 그것이 창작을 하거나 미술활동을 하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고백컨대, 내가 작업을 하고있지 않을 때나 심각한 슬럼프에 빠져있을 때 여지없이 '천재의식'이 발동했다. 나는 이것이 나의 개인적인 고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창작활동을 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미술대학을 다닐 때도 엄청난 재주와 열정을 가진 친구들이 쉽게 그림을 포기하고, 앞서 나가던 사람들이 더 빨리 붓을 꺾어버리는 현상을 이해하지 못했다. 단지 사회구조에 문제가 있다고만 여겼다. 처음 그림을 배우는 사람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발생했다. 빠르게 기초를 배우고 그림을 제법 잘 그리는 사람들 중에 대다수는 6개월을 넘기지 못했다. 오히려 자신은 재능이 없고 그저 차분차분 배워갈 뿐이라는 사람들은 지금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가지고 활동하고 있다. 이는 단지 시간이 없거나 너무 어려워서 포기하는 경우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 잘 그리는 사람이 빨리 그림을 포기하는 것, 이는 깊게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하면 그림을 배우는 목적 중 하나는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함인데, 그림을 잘 그리면 곧 포기한다? 이런 등식은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나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이 천재의식에 빠지는 몇 가지 원인을 나름대로 분석해 보면 이렇다.
첫째는, 미술이 시각예술이기 때문이다. 천재의식과 시각예술과 무슨 관계가 있냐고 서둘러 묻지 말라. 분명 관계가 있다. 사람들은 예술을 어렵고 힘든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눈으로 보는 것은 아주 쉽게 생각한다. '보면 다 안다'라는 의식이 바닥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사실 보는 행위는 중요하다. 서양 철학의 역사가 '주관과 객관' 즉, 어떤 현상이나 사물을 보는 방법론에 치중했듯이 보는 행위는 인간의 가치관을 결정지을 만큼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이왕이면 다홍치마', '보기 좋은 떡이 먹기도 좋다' 라는 속담을 보듯 보는 행위를 너무 쉽게만 생각하는 경향도 엄연히 존재한다. 흔히 전시장에서 듣는 말이지만 '나는 그림을 그리지는 못하지만 볼 줄은 안다' 식의 얘기를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다음 '이 그림은 어떻고, 저 그림은 어떻다' 라는 평가를 늘어놓는다. 나름의 느낌이나 감상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를 하는 것이다. 물론 그림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작품을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평가는 거의 사실적인 그림에만 국한되어 있다. 추상이나 설치, 비디오 예술이나 퍼포먼스 정도로 넘어가면 주눅이 들거나 입을 다물어 버린다. 심지어는 '이게 무슨 미술이냐?' 하고 짜증을 내는 경우도 많다. 자신의 관념 속에 있는 구체적인 사물과 닮았다, 혹은 그렇지 않다라고 평가하는 것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생 정도에서 나타나는 모습이다. 고등학생을 포함한 성인이 이런 식의 관점으로 미술을 본다는 것은 보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한 나머지 '보는 훈련과 연습'을 등한시 한 결과이다. 미술작품은 일반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진이 아니다. 색채와 구도, 분위기, 내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다. 어떤 철학자가 말했다. '머릿속에 생각은 있는데 말로 표현을 못하겠다'는 것은 거짓이란다. 생각과 말이 따로 노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말로 표현을 못한다는 것은 생각을 표현할 만큼 정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 그 철학자의 주장이었다. 나는 이 말에 동의한다. 보면 아는 사람이 어떻게 작품을 감상할 수 없겠는가? 미술작품에서 지식만 있고 감상이나 느낌이 없는 것을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결국 보는 것을 너무 과신한 나머지 작품 속에 숨어있는 또 다른 것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둘째는, 본디 우리 민족은 감성두뇌가 발달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우리나라 사람 거의가 천부적으로 미술적인 재능을 타고난지도 모른다. 이는 구체적인 예를 들지 않더라도 쉽게 드러난다. 전국에 부는 막을 수 없는 춤바람, DDR과 노래방, 관광버스 춤, 어딜 가나 놀고, 먹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패션과 화장술은 본디 광대뼈가 나오고, 작고 찢어진 눈, 길쭉한 허리, 큰 턱뼈를 감쪽같이 커버해 한국은 모델만 사는 나라라고 생각하는 외국인도 많다. 손재주는 또 얼마나 좋은가. 기능 올림픽에서 일등을 놓치지 않고, 베끼거나 복제하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섬세한 감성이 요구되는 스포츠 -작은 공이나 작은 지점을 맞추는-는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골프, 야구, 탁구, 당구, 배드민턴, 사격, 양궁 따위는 올림픽 금메달 효자종목이고, 감성이 지나쳐 다혈질인 성격 때문에 태권도, 유도, 레슬링, 권투 같은 투기종목에도 강한 면모를 보여준다. 이렇듯 타고난 감성두뇌가 있기에 만만치 않은 미술의 기술적인 측면을 어렵지 않게 소화해 내는 재주를 가졌다. 혹 본능적으로 이런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천재의식'에 빠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지만 미술을 비롯한 여러 예술은 감성만 가지고는 접근하기가 어렵다. 감성 못지 않게 이성 요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세 번째, 미술을 대하는 사회분위기이다. 우리는 지난 반세기를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을 치며 보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먹는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정신가치의 황폐화라는 괴물을 키운 것도 사실이다. 돈과 결부되지 않는 것들은 가치가 없다는 철저한 물질만능주의에 빠져버린 것이다. 산업 근대화 과정에서 상업 동양화의 범람과 이발소 그림의 유통은 '싸구려 그림'과 '고급 그림'이라는 이분법적 생각을 사람들에게 심어 놓았다. 그것은 마치 귀족과 천민이라는 계급처럼 사람들의 의식 속에 숨어있다. 일반 사람들은 '고급 미술'에 접근하는 것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생각 속에는 여전히 '돈'이라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다. 그러나 정신가치인 미술을 배우기 위해서도 많은 노력과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지 실제로는 잘 알지 못한다. 어쩌면 돈을 벌기 위한 어려움보다 훨씬 쉬운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시간 있으면 부업이나 하지 무슨 그림이냐' 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생각보다 많고, 가전제품보다 미술작품을 못하게 여기는 생각도 널리 퍼져있다. 물질가치보다 정신가치를 우습게 여기는 사회분위기가 존재하는 한 이상한 천재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천재의식'은 사회가 만들어 놓은 산물이다. 우리는 학교교육을 통해 화가하면 으레 '고흐'나 '피카소' 같은 천재를 떠올리게끔 배워왔다. 평범한 재능을 가진 화가의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다. 운명적이고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가는 비범한 화가의 모습은 그 자체가 자극적이다. 일반인들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영역이다. 이런 교육을 통해 사람들은 미술을 하려면 특별한 재주를 가져야 한다고 믿게된다. 다시 말해 특별한 재주를 가져야 접근할 수 있는 그림을 일반 사람들이 한다는 것도 그만한 재주를 가졌기 때문이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상한 '천재의식'에 빠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평범한 화가가 훨씬 많고, 이들에 의해 대부분의 미술문화가 만들어진다. 평범한 화가들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무슨 대단한 명작을 창조할 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있지 않다. 미술에서 감성 못지 않게 미학이나 논리, 과학 같은 이성의 면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미술은 학문이다. 나름의 논리체계 위에 서있다. 이는 가르침과 배움을 통해 미술에 필요한 감성과 기술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치고, 미술대학이나 미술학원이 존재하는 근거이기도 하다. 재능이 많아서 미술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미술을 배우면 재능이 생긴다는 뜻이다. 나는 사람들이 '재능'이나 '천재' 따위를 들먹이면서 미술과 애써 거리를 두려하는 것은 '자기 보호본능' 내지는 '자기 합리화'의 한 방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밥만 먹기 위해 살진 않는다. 예술 같은 정신가치와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본능인지 교육 탓인지를 명확히 알지 못하지만 아무튼 그렇다고 믿는다. 자신에게 부족한 미술을 비롯한 예술제반에 대해 '천재'나 '재능'을 빌미로 합리화를 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말이다. 물론 우리는 이런 생각을 조장하는 사회에 버젓이 살고 있고, 또한 조장하는 당사자이기도 하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형태가 비교적 살아있고 색이 화려한 서양의 인상주의 화풍을 선호하는데 이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감각적인 것을 좋아하는 민족성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지만 미술작품에는 반드시 감각적인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무겁고, 뭔가 내용을 생각하게 하는 미술작품이 더 많다. 감각은 그냥 받아드리면 되지만 내용 있는 작품은 생각을 해야 수용이 가능하다. 이성을 마비시키고 감각을 자극하는 일은 군국주의나 독재자가 선호하는 방법이다. 미술에서 이상한 '천재의식'을 벗어버리는 것은 미술문화를 인정하고 받아드리는데 중요한 출발이 된다. 부족하면 채우고, 미숙하면 연습하면 된다. 미술은 저 멀리 높은 곳에 있는 특별난 것은 아니다. 미술은 사람살이 필요하기 때문에 만들어지고 발전해 왔다. 그 사람 또한 귀족이나 돈 많은 사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대다수의 일반인이다. 미술을 만만하게 여길 줄 알면서도 소중한 가치로 보는 것은 아름다운 자신과 세상을 만드는 작은 거름이다.
그림그리기는 취미가 아니다.
으레 사람들은 미술을 전문적인 화가의 작업과 일반인들의 취미생활로 나눈다. 전문적인 화가란 전시활동을 하거나 작품을 팔아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 일반 사람들이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저 소일거리로, 교양을 높이는 수단으로, 혹은 폼을 잡기 위한 취미생활로 보고 있다. 나도 과거에는 이런 분류에 대해 딴지를 걸 생각이 없었다. 이런 구분 자체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화가의 활동은 그렇다 치고, 일반 사람들의 취미미술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취미’라는 인문학적인 개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많이 다르다. 취미[趣味, taste]는 미적 대상(美的對象)을 감상하고 평가·비판하는 능력.’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하지만 이 정의는 너무 어렵다. 좀 더 풀어서 생각해 보자.
흔히 인간의 존재의 특성을 말할 때, 도구의 인간, 언어의 인간, 유희의 인간 따위로 다른 동물과 구분한다. 도구의 인간이란 인간이 도구를 사용함으로 해서 다른 동물보다 월등한 문명세계를 창조한다는 것이다. 또한 언어의 인간이란 사회구조를 만들어 내고 상호간의 커뮤니케이션과 역사를 기록하는 특성을 말한다. 언어를 통해 문화가 만들어지고 정보의 공유나 역사를 만든다. 유희의 인간이란 놀이를 하는 인간의 특성을 말한다. 원숭이나 강아지도 장난을 치거나 놀지만 잠깐이다.하지만 인간은 유희의 평생을 간다. 유희를 통해 학습을 하고, 새로운 생각을 만들어 낸다. 유희는 크게는 생존에 필요한 행동을 제외한 모든 활동을 뜻하고, 좁은 의미로는 노래나 몸짓, 그리기, 만들기, 놀이, 장난 따위를 말한다. 취미란 말은 바로 ‘유희의 인간’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집단적인 유희는 사회, 민족, 지역적 특성을 드러낸다. 이것은 취미도 마찬가지이다. 하지만 개별적인 유희나 취미는 상당히 감성적이고 주관적이다. 쉽게 말하면 노는 방식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말이다. 인간사회에서 유희나 취미는 곧 창조성의 기본이 된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바로 ‘유희나 취미가 창조성의 기초’라는데 있다. 또한 유희나 취미는 인류의 문화와 정신적 가치를 만들어왔다. 따라서 미술은 취미이고 유희이다. 미술뿐 아니라 모든 예술이 유희이고 취미이다. 그런데 그림그리기가 취미가 아니라니???
문제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취미’에 대한 오해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취미를 통속적으로는 ‘한가한 시간에 소일하는 어떤 기술이나 재미있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는데 문제가 있다. 그게 뭐가 문제냐고?
취미의 문제는 상당히 경제적이고 정치적이다. 예전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사람만이 취미생활을 즐겼다. 취미가 인간 고유의 특성이라고 해도 생계문제를 극복하지 않고는 발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취미는 지배자가 피지배자를 정신적으로 통제하고 우월하다는 의식을 만드는 역할을 하기에 정치적이다. 생존을 위해 난을 키우는 사람과 고상한 정신세계를 드러내거나 표현하기 위해 난을 키우는 사람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이 놓여있다. 취미생활은 수준은 곧 그 사람의 정치적, 경제적 능력을 그대로 드러낸다. 먹고사는 문제는 해결한 우리나라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취미생활의 수준은 곧 정신, 문화, 경제, 정치적 수준과 곧바로 연결되어 있다. 일반사람들은 취미하면 으레, 등산, 낚시, 독서, 영화보기, 우표수집, 동전수집, 인라인스케이트, 혹은 엑스게임, 만화, 꽃꽂이, 오락, 기타, 노래 부르기, 바둑, 고스톱, 컴퓨터게임 따위를 떠올린다. 요즘 인터넷 카페의 동호회 모임 중에는 바비 인형 모으기, 애견이나 이상한 동물 키우기 따위도 있고, 최근에는 주부들을 중심으로, 퀼트, 십자수, 구슬공예 따위의 인기 있는 취미생활도 있다. 하지만 이 속에는 취미가 아닌 것도 많다. 이를테면, 건강이나 몸매관리에 관련된 것은 취미라고 부를 수 없다. 마라톤을 하다보니 건강해 진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위해 마라톤을 하는 것은 다르다. 마라톤 자체는 취미가 될 수 있으나, 건강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은 취미가 아니라 당연한 일이다. 유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또한 독서는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공부다. 여기에 청소년들의 건전한 놀이문화를 빼면 대부분의 취미활동은 단순공예나 소비적인 것들이다. 단순 취미를 넘어서서 제법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을 쌓은 사람을 마니아(mania)라고 부른다. 이들은 취미활동을 하는 일반사람들을 리더하거나, 아예 전문가로 자처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숫자는 극히 미미하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인 취미는 즐겁고 재미있어야 한다. 고통스러워하며 취미생활을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취미활동은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쉬우면서도 아기자기한 재미가 있는 것들이다. 물론 가격도 저렴해야 하고, 눈앞에 보이는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 만약 여기에 철학적이고, 어렵고, 복잡하면 사람들은 당장 때려치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림그리기와 일반 취미활동을 비교해보자. 그림그리기는 어렵고, 난해하며 복잡하고, 미학적이며 시간이 많이 걸린다. 기본기(형태와 명암)를 익히는데도 족히 3년 이상(입시를 중심으로 본다면)걸린다. 설사 3년을 투자한다고 해도 모두 실력을 가진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 미대입시생의 경우 대학에 합격하는 비율을 30~40%에 불과하다. 실기력과 아울러 철학이나 미학, 문화 전반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쌓아야 한다. 머리 나쁜 화가를 상상해 봐라. 얼마나 꼴불견인가. 그림그리기의 본질은 ‘창조성’인데, 누가 취미로 ‘창조’를 한단 말인가.
그렇다면 지금까지 강남의 유한부인들이나 돈 많은 사람들의 그림그리기는 취미활동이었을까, 창조활동이었을까? 백화점 문화센터나 일반 취미학원에서 그림을 배우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일부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술이라는 고급가치에 적당히 기대어 이용하여 폼을 잡거나, 근처를 얼쩡거리고 있을 뿐이다. 또한 취미학원이나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배우는 사람도 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창조성과도 관련이 없고, 재미와 즐거움과도 관련이 없는 어정쩡한 미술을 비싼 돈을 들여 배우고 있는 꼴이다. 몇 가지 기법을 익히고 화려한 색을 쓴다고 모두 그림을 그리는 것은 아니다. 가끔 인사동에서 돈 많은 아줌마들의 전시회를 보면 구역질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그림그리기를 통해 당연히 얻었을 겸손과 진지함, 진정성을 어디가고 버터냄새와 속물근성만 덕지덕지 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직업과 돈과 권력과 관계없이 모든 사람들이 예술을 했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식의 그림그리기는 오히려 미술을 폄하시키고, 사람들이 미술에 접근하는 것을 차단하는 결과만 가져올 뿐이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취미나 미술은 인간의 창조성에 기반을 두고 있다. 창조성이 빠진 취미나 미술은 껍데기일 뿐이다. 우리가 그림그리기를 통해 얻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현실성이 있어야 하고 미래지향적인 가치이어야 한다.
먼저는 창조성이다. 요즘 ‘창의력’을 높인다는 여러 학습지나 교육이 유행을 하고 있다. 우리나라처럼 땅덩이는 좁고, 자원이 없으며, 기초과학이 없는 나라에서 경제와 사회를 발전시키는 원동력은 누가 뭐래도 사람의 수준이다. 마침 우리의 경우 높은 교육열 때문에 고학력을 가진 사람은 많다. 하지만 입시교육과 암기식교육의 한계로 말미암아 머리통만 크고 가방끈만 길었지 실제 경쟁력은 뒤떨어진다. 창의력이 부족하다는 말이다. 창의력이나 창조성은 역시 예술교육에서 나온다. 우리가 실생활에 별 필요도 없는 영어를 배우기 위해 아침부터 밤까지 난리를 치는 것은 회사나 정부에서 그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먹고 살고, 출세에 필요하기에 배우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창조성, 창의력이 회사나 정부에서 절실히 필요하게 되면 모든 사람은 원하지 않아도 예술 한가지쯤은 배워야 한다. 창의력을 가진 사람은 죽어있는 사물과 현실과 관계에 생명력을 불어넣을 수 있다. 쓰레기도 창조작업을 거치면 놀라운 것으로 바뀐다. 우리에게 하드웨어는 이미 충분하다. IT산업은 세계 최고이며, 영상이나 자동차, 선박, 반도체 따위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다. 최고급 컴퓨터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초고속의 인터넷 환경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최신 휴대폰으로, 고화질 디지털 카메라로, 자동차로, 최고급 아파트에서, 고급 음식을 먹으면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하드웨어 그 자체는 아무것도 만들어 내지 못한다. 그것을 굴릴 수 있는 소프트웨어와 그 소프트웨어를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컨텐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창의적인 컨텐츠가 결합되면 놀랄만한 일어 벌어질 수 있다. 이런 작업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취미생활로 가능한가? 그렇지 않다. 창조적인 컨텐츠를 만드는 것은 생활이 되어야 하고 삶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문화가 되어야한다. 생활이 되고 문화가 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이것은 머리로 되지 않는다. 미술은 암기과목이 아니다. 머리와 아울러 몸을 설득시켜야 한다. 권투선수가 그로기 상태에서도 주먹을 내듯이, 타자가 감각적으로 배트를 휘두르듯이, 배우가 바뀐 상황을 즉흥적으로 표현하듯이 해야 한다. 이것은 엄청난 훈련과 반복을 통해서 몸에 숙달시켰을 때만 가능하다. 시간이 나면, 가끔 생각나면 그림을 그리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못한다. 내가 빡빡하게 그림을 가르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널널하게 그림을 배우는 것은 배우지 않는 것과 별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개성과 다양성이다. 그림그리기의 특성은 창조성과 아울러 개성과 다양성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기초과정을 힘들게 혹은 단순 반복적으로 배우는 것은 개성이나 다양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그것은 개성과 다양성을 만들기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이다. 다시 말해 모든 운동선수에게 공통적으로 필요한 기초 체력 같은 것이다. 미술이라는 고단위 창조 작업을 수행하려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고가 필요하다. 또한 감성을 다듬어 표현할 수 있는 손재주와 기술력이 필요하다. 그림그리기에서 개성은 기본적으로 나타난다. 수많은 연필질과 붓질, 혹은 혼색, 채색 따위는 정형화시킬 수 없다. 그것은 사람마다, 소재나 주제마다 매번 달라진다. 똑같은 선생 밑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소재를 가지고 표현해도 사람마다 제각각이다. 과거에는 이런 차이점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미술은 원래 그리는 사람 숫자만큼이나 다르게 표현된다. 개성은 그 자체를 인정할 때 의미를 가진다. 원래 사람은 다른 얼굴만큼, 지문만큼이나 차이가 있고 다르다. 물론 그 차이는 미세하기도 하고 비슷하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보기에 인사동 거리에서 파는 도자기나 국보급 도자기는 별 차이가 없다. 비싼 도자기를 선물 받은 외국인이 인사동에서 비슷한 싸구려 도자기를 보고 속았다며 비싼 도자기를 깨어버린 사건이 있었다. 마치 우리가 쌍둥이 형제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전문가나 쌍둥이 부모는 정확히 구분한다. 개성의 차이란 이런 것이다. 같은 문화권에서 확연히 차이가 나는 것은 별로 없다. 된장국이나 김치를 생각하면 쉽다. 개성과 다양성은 그림그리기를 통해 미세한 차이를 구분하고, 변화를 인식하는 훈련을 통해 얻을 수 있다. 서로의 개성을 인정하면 다양성은 곧바로 생긴다. 개성과 다양성의 문제는 사회 민주화와 문화의 발전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우리 사회는 지금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역동적인 몸부림을 하고 있는 중이다. 실패한다면 중남미의 사례처럼 절벽으로 떨어져 후진국가가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우리 민족의 미래와 국민의 저력을 믿는다. 미국에 초코렛과 밀가루를 구걸하던 나라가 최단시간에 2만 불을 넘보는 경제대국이 되었다. 독재자의 횡포와 남북분단의 고통, 미국과 일본에 착취당하면서도 이만큼 발전시킨 것은 기적에 가깝다. 무지렁이 같은 우리 아버지, 어머니, 누이, 형제가 몸으로 떠받쳤기 때문이다. 7백만의 역동적인 붉은 악마가 있다. 청소년과 청년이 팔팔하게 살아있다. 똘망똘망한 눈빛의 젊은 아줌마가 있다. 이들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가사와 집안일에 시달리면서도 아이를 등에 업고 뭔가를 갈망하는 젊은 아줌마의 힘을 믿는다. 또한 촛불시위와 탄핵정국, 총선에서 보여준 국민들의 합리적인 판단과 결정 또한 믿는다. 개성과 다양성이 있는 사회는 민주적이고 합리적이며 역동적인 사회이다. 모두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똑같은 옷을 입으며, 똑같은 것을 지향하면 그 사회는 망한다. 마치 인류가 수많은 종족의 차이 때문에 발전할 수 있었던 유전자의 원리와 마찬가지이다. 그림그리기를 통해 개성과 다양성을 배우는 것은 이런 사회적 흐름과 일치한다. 사회를 능동적으로 바꿔나가는 일이다. 이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시대는 낡았고 이미 지났다. 개성과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도태하고 소외당한다. 구닥다리라고 박대당한다. 우리 아이들을 보면 너무나 쉽게 알 수 있다. 문제는 또 있다. 개성과 다양성은 그냥 생기지 않는다. 원칙적으로 모든 인간은 개성적이다. 하지만 사회와 현실에서는 조금 다르다. 일단 개성은 합리적이어야 한다. 무조건 튀는 것이 개성은 아니라는 말이다. 개성이 있으려면 자기 합리성이 있어야 하며 타인을 설득할 논리가 있어야 한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거나 역겨운 행동이나 모습은 올바른 개성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따라서 개성은 저마다의 특성과 능력을 제대로 계발하고 발전시킬 때 가능하다. 이것은 학교에서 할 일이고, 사회생활에서 배워야 할 일이다. 학교에서 배울 수없다면 사회생활에서 배워야 하고, 직장이나 가정에서 배울 수 없다면 특별히 시간을 만들어 배워야 한다. 개성을 만들고 발현시키는 역할을 예술이 한다. 그림그리기가 하는 것이다. 또한 개성은 서로 관계망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역동적이며 능동적인 사람관계, 사회관계를 형성해야 올바로 구현된다. 혼자 잘난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나의 개성은 남의 개성과 만나 새로운 가치와 문화를 만들어 낸다. 나의 개성이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얻을 때 사회적 가치가 생긴다. 골방에 처박혀 그림을 그리는 시대는 지났다. 그림그리기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화단은 고립되어 있고, 대중성을 포기했다. 무인도의 개성을 꿈꾸며, 네트워크를 거부한다. 이런 화단은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 역할은 끝났다. 관계망을 만들지 못하는 미술, 네트워크를 만들지 못하는 개성은 알래스카에서 미니스커트를 입고 다니는 꼴이다. 나의 개성을 타인에게 설득시키고 타인의 개성을 받아드릴 수 있을 때, 사회는 다양성의 꽃을 피운다. 그래서 대중성이 필요하다. 상업적 대중성이 아니라 사회적 가치의 합의를 말하는 것이다.
세 번째는 삶의 정체성과 자신감 그리고 자기치유이다. 그림그리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가치와 삶의 목적, 혹은 자신과 세계, 자신과 자연의 관계를 규명할 수 있다. 결국 모든 학문이나 예술은 ‘진리’를 추구한다. 그 진리는 삶에 대한 문제이다. 그림그리기는 여러 기법과 방법을 통해 자연과 사람과 사회를 바라보게 하고 관계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꽃을 그리면 꽃에 대해 잘 알게 됨과 동시에 나와 꽃의 관계를 다시 만드는 일이다. 사람을 그린다면 그 사람에 대한 총체적인 정보를 받아들임과 아울러 그 사람과 나의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자연과 사회에 대한 문제도 마찬가지이다. 그림그리기는 내 주변의 모든 대상과 교류하고 관계를 만드는 일이다. 이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자기 스스로를 안다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내가 무엇을 바라는지, 내가 무엇을 위해 노력하는지, 혹은 내가 왜 사는지에 대한 대답을 얻어가는 과정이 예술을 하는 과정이다. 또한 세상을 인식하고 나름의 질서로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사회적 자신감’을 가진다. 자신감이 없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 무기력하다고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나 능력이 사회에 필요 없다고 생각하면 사람은 남의 눈치를 보는 종이나 노예 같은 생활을 하게 된다. 하지만 색이나 형태, 명암 따위로 자신의 세계를 만들 수 있는 사람, 창조하는 사람은 곧 그 세계의 주인이 된다. 비록 그림이지만 자신의 질서로 세상을 바라보고 받아들여 새로운 세계를 화면에 창조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다. 흔히 예술가들을 고집이 세고 자존심이 아주 강하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세상을 창조해 본 사람만이 가지는 독특한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자신감을 가지면 모든 일에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세를 보인다. 어렵고 힘든 일도 척척 해낸다. 두려움이 없어지면서 미래를 설계하고 만들어나갈 의지가 생긴다.‘미술치료’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미술을 통한 정신병치료를 말하는 것이다. 현대 정신병은 점점 환자를 진단하기 어려워진다고 한다. 정확한 진단을 해야 처방을 내릴 수 있는데, 사회가 복잡해지고 환자 스스로 의사를 속이는 기술이 정교해지기 때문이다. 대화나 행동만으로는 마음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정신상태를 알 수 없다. 이런 문제를 보완하고 보다 적극적인 심리치료를 위해 미술치료가 나왔다. 프로이트의 이상한 제자 자크 라캉의 연구가 미술치료의 주요한 바탕이 되었다. 아무튼 그림그리기는 그리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낸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혹은 어떤 상태인지를 그림 속에 표현하는 것이다. 그림을 보면 그 사람의 정서나 감정상태 심지어는 게으른지, 이성적인지, 혹은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도 알 수 있다. 물론 이것은 그림을 보면서 사람의 마음상태를 읽어내는 오랜 훈련과정이 있어야 한다. 미술치료를 언급하는 것은 그림그리기가 치유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현대 사회에서 아주 중요하다. 현대 사회는 너무 복잡하고, 빠르며, 가치의 혼돈이 일어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사람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다. 육체적 병을 치료하는 병원이 성황을 이루지만 그에 못지않게 정신이나 마음을 치유하는 활동이 폭발적으로 늘고 있다. 요가, 명상, 아로마, 허브, 단전호흡, 불교, 운동 따위의 다양한 활동은 모두 정신건강과 관련이 있다. 심리학적으로 정신병자와 일반사람들과의 차이는 그야말로 종이 한 장 만큼이다. 하지만 인간으로서 몸과 마음이 균형을 가지지 못했기에 심각한 증상이다. 정신병자는 자신을 파괴하고 사람을 해치며 나아가 사회를 파괴한다. 겉으로는 청렴을 말하고 속으로는 뇌물을 받는 사람, 미성년자를 돈으로 사는 사람, 사람보다 돈이 중요하다고 믿는 사람, 자신의 욕심을 위해 사람을 죽이거나 사기 치는 사람, 전쟁을 일으키는 사람, 자기만 옳다고 우기는 사람, 남과 나누지 못하는 사람 따위는 모든 정신병자이다.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정신병자가 판을 치고 떵떵거리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부정부패를 만들고, 약육강식의 살벌한 세상을 만들며, 사람을 착취하며, 더러운 세상을 만들고 있다. 이런 사람들이 큰소리를 치며 활보하면 일반사람들도 함께 정신병자가 된다. 잘못된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사회적 의식이 만들어지면 그 사회는 썩는다.
사회가 좋아지려면 정상적인 사람이 대접받고 상식적인 사람이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림그리기 속에는 기본적으로 마음을 치료하는 기능이 있다. 지속적인 그림그리기는 마음이나 심리의 상태를 안정시키고 몸과 마음을 일치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림은 속일 수가 없다. 내가 추상이나 다른 애매한 그림그리기를 지양하는 이유는 그림 속에 자신을 숨길 수 있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그림 속으로 도피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림 속으로 도피하면 자기치유는 불가능하다. 그림은 정직하다. 누가 봐도 잘 그렸는지, 못 그렸는지 알 수 있다. 여기서 객관성이 생긴다. 자신의 병을 안다면, 그리고 객관적으로 드러난다면 치유하고자하는 의지가 생긴다. 무엇보다 정신병이 자기와 세계에 대한 관계, 즉 질서가 틀어진 것이라면, 미술은 그야말로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기에 흐름이 잘 맞는다. 질서가 곧 진리이다. 자연의 질서, 삶의 질서, 인간의 질서를 찾아가는 과정이 학문이고, 종교이며 과학이다. 그래서 질서가 없는 그림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 그림그리기의 질서는 사물과 사물을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색상과 명암이 조화되어야하며, 경직되어도, 단순해도, 너무 장황해도 안 된다. 균형이 있어야 하고 변화가 있어야 하며, 이 두 가지는 역동적으로 통일되어야 한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그야말로 질서를 배우고 질서를 맞추고 질서를 창조하는 과정이다. 그림그리기는 대상을 자신에 맞게 다시 재창조하는 과정이다. 이 창조의 과정을 통해 부단하게 흐트러지는 심리나 정신상태를 다시 점검하고 질서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림그리기는 이런 역할을 한다. 이속에 소비와 겉멋과 허영과 자만이 끼어들 여지가 있는가. 이게 재미삼아 하는 일인가. 시간이 나면, 심심하면 하는 일인가. 설사 한다고 해도 가능할까? 그림그리기는 통속적인 의미인 ‘취미생활’이 아니다. 반대로 위의 내용을 담아내지 못하는 그림그리기나 그림을 가르치는 것도 미술을 폄하시키거나 올바른 그림그리기를 방해하는 역할을 할 뿐이다. 나는 누구나 그림을 그리기를 원한다. 그래서 좀더 쉽게 그림에 접근하고, 좀더 편하게 그림을 만나도록 하고 싶다. 돈 때문에 혹은 재능이 없어, 시간이 없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사람도 원한다면 그림을 그리게 하고 싶다. 그래서 세상이 좀더 아름다워진다면, 예술과 삶이 어우러지는 멋있는 세상이 온다면...꿈을 꾸어본다.
(대중미술동아리'미술시간'홈페이지의 미술에 대한 오해 中에서 발췌/글: 화가 심규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