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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 5. 6 (월) 팜플로나(Pamplona)-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오늘은 푸엔테 라 레이나(Puente la Reina) 까지 23.5km 를 걸을 예정입니다. 생장에서 받은 자료를 보니, 오늘
코스 도중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개하는 자료에 빠지지 않는다는 해발 800m 높이의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을
넘어가게 되네요. 오늘도 무거운 배낭 때문에 고생께나 하겠구나...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도착해서 숙소나 제대로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침에 눈을 뜨니 6시군요. 대충 세수하고 주섬주섬 배낭을 챙긴 후, 어제 펜션 주인 아주머니가 얘기해준 대로
방 열쇠는 방문에 그냥 걸어놓고 나무로 된 복도가 삐걱거리지 않도록 까치발로 문을 나섰습니다. 밖으로 나오니 길거리
에는 약한 안개가 끼어있고 아직 어두컴컴합니다. 사방이 어두우니 산티아고 순례길 방향표시한 화살표가 눈에 띄질 않
아서, 어디로 방향을 잡고 걸어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앞서가는 순례자라도 있으면 따라가기라도 할텐데...
마침 조금 걸으니 근처에 불이 켜져 있는 호텔이 눈에 띕니다. 호텔 안으로 들어가서 프런트 직원에게 산티아고
가는 길을 물어보니 친절하게도 지도를 한 장 가져다가 볼펜으로 자세히 표시를 해줍니다.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오는데,
스탬프 생각이 났습니다. 어제 깜박 잊고 우리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를 찍지를 못했잖아요? 이 새벽에 스탬프를 찍어 줄
성당이나 관광안내소가 있을 리 없으니 이대로 이 도시를 떠나면 우리가 여기서 하루 묵었다는 흔적을 크레덴시알에 남
기지 못하는데, 이 호텔에서 스탬프를 찍으면 되겠네요. 그 호텔직원에게 크레덴시알을 보여주고 스탬프를 찍어달라니까
환하게 웃으며 잘 찍어줍니다.
조금 걸으니 안개가 걷히면서 사방이 점차 환해지는데 아주 좋은 날씨입니다. 새벽공기도 상쾌하기 짝이 없습니다.
얼마 걷지 않으니 중세시대 그대로인 구시가지가 끝나면서 잘 가꾸어진 공원이 나옵니다. 잘 포장된 보도에는 타일 한 장
크기의 철제로 제작된 산티아고 순례길 엠블럼이 순례방향을 따라 띄엄띄엄 박혀 있어서 지도가 없어도 길을 잃을 염려
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 앞뒤로 배낭을 짊어진 순례자들이 가끔씩 눈에 띄네요.
걸으면서 주변을 보니 팜플로나가 꽤나 크고 깨끗한 도시라는 걸 알겠더군요. 우리나라 도시들처럼 건물들이 다닥
다닥 붙어 있는 것이 아니고 공원 속에 도시를 앉혀놓은 것 같습니다. 가로수도 잘 가꾸어져있고, 공원들을 자주 지나가게
됩니다. 시가지를 거의 벗어날 무렵에 나바라 대학교(Universidad de Navarra) 를 만나게 되는데, 캠퍼스를 관통하는 길을
걸으면서 보니 이 대학교 캠퍼스가 엄청 넓기도 하려니와 학교인지 공원인지 구별이 잘 안될 정도였습니다. 사진을 찍어
놓지 못한 것이 아쉽네요. 이 길을 걷는데, 한국인 청년 순례자를 만났습니다. 이 청년도 우리처럼 팜플로나에서 숙소를 구
하지 못해 고생했는데, 이 대학교 기숙사에서도 순례자를 재워준다는 얘기를 듣고 와서 정말로 기숙사에서 잤다는군요.
어디인지는 확실하게 기억이 나질 않지만, 팜플로나 구시가지가 끝나고 신시가지를 지나가는 곳 근처인 것 같군요.
사진 왼쪽은 공원입니다. 우리가 잤던 펜션에서부터 팜플로나 시가지를 빠져 나오는데 거의 한시간은 걸리는 것 같습니다.
각 나라말로 Buen Camino 를 적어 놓은 이정표. 나바라 대학교 캠퍼스를 지나서 만나는 교차로 근처에서 발견.
나바라 대학교를 지나고 나니 자동차 길을 따라 걷게 되는데, 길 좌우로는 유채밭과 밀밭입니다. 월요일 아침 출
근길이라 그런지 자동차들이 꽤 많이 다닙니다. 얼마나 걸었나... 시주르 메노르(Cizur Menor) 라는 마을에 들어서게 되
네요. 시간을 기록해 놓지 않아서 몇시쯤인지는 생각이 나질 않는데, 아마도 아침 8시쯤일 겁니다. 어제 팜플로나에서 숙소
를 얻지 못했을 때 누가 시주르 메노르에 가면 숙소를 구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던 말이 생각납니다.
수퍼를 만나서 사과와 바나나, 빵과 물을 샀습니다. 그리고 공원 벤치에 앉아서 아침식사 대신으로 먹었습니다.
지나가던 순례자들이 손을 흔들어 아침인사를 하며 지나갑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작은 마을의 아침풍경이지요.
시주르 메노르를 벗어나니, 포장도로를 벗어나 페르돈 언덕을 향하여 밀밭과 유채밭으로 뒤덮인 본격적인 들판
길을 걷게 됩니다. 작년에 프랑스의 시골동네를 돌아다녔을 때 유채꽃으로 노랗게 뒤덮힌 들판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었
는데, 이곳 유채밭도 아주 넓고 아주 예쁩니다. 위 사진엔 나타나지 않았지만 한쪽편으로는 밀밭이 펼쳐져 있어서 멋있는
스페인의 시골 풍경을 볼 수 있습니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해발 800m 가까운 높이라는 페르돈 언덕을 향해서 걷는 길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닙니다.
자갈로 덮힌 지루한 오르막길을 걷다가 쉬다가를 반복합니다. 더운 날은 아니지만 햇볕을 피할 그늘도 없고, 엉덩이 깔고
앉을 만한 쉴 곳도 마땅치 않습니다. 배낭은 어깨를 계속 짓누릅니다. 순례자 노릇 제대로 하는 셈입니다. 그 와중에도 승
현이 엄마는 인도 아가씨와 얘기를 나누고, 프랑스 아줌마들과도 수다를 떱니다.
저 멀리 산 위에 풍력발전을 위한 풍차들이 보입니다. 앞으로 순례길 걷는 동안 실컷 만나게 될 풍차들... 나중엔
걷다가 멀리 풍차만 보여도 또 언덕을 넘는가보다 하고 긴장하게 되었었죠.
마침내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도 피레네를 넘는 것 다음으로 어렵다는 용서의 언덕(Alto del Perdon) 에 올라왔
습니다. 산티아고 순례에 대한 소개를 할 때 사진과 함께 으례 등장하는 곳입니다. 바람이 엄청 강하게 부는 곳이어서 풍
력발전용 풍차도 많이 설치되어 있고 그 풍차 돌아가는 소리도 요란하다는데, 우리가 올라왔을 땐 바람이 그다지 강하게
불지 않았습니다.
이곳엔 철판을 오려 만든 순례자들의 다양한 모습이 세워져 있습니다. 순례자들의 옷과 머리가 바람에 날리는 형
상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사진 찍기 바쁩니다. 나한테도 사진 찍어 달라는 부탁이 많아
서 여러사람들 사진을 찍어줬습니다. 철판을 오려 만든 순례자상 주변은 사진 찍는 사람들로 붐벼서 우리 차례가 올 때
까지 꽤 기다렸습니다.
사실 나는 용서의 언덕에 대해서 잘 몰랐거니와, 사진으로 보았던 유명한 곳을 순례 시작한지 며칠 되지도 않아서
지나게 될 줄도 생각 못했습니다. 용서의 언덕에서는 가슴 속에 품고 있던 모든 미운 이들을 용서하고 훌훌 털고 내려가라
는데... 미리 알았더라면 용서할 사람들의 명단을 준비해 와서 한꺼번에 용서했을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나 저러나, 용서한
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나한테 누군가를 용서할 권한이 있기나 한걸까? 오히려 제발 나를 용서해달라고 빌어
야 할 처지가 아닌가?
생장의 알베르게에서 같은 방을 썼던 한국인 간호사 아가씨와, 수비리 알베르게에서 우리를 반겨 주고 걱정해
주었던 젊은이들을 이곳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이틀만에 다시 보는 얼굴들이 무척이나 반갑네요. 앞으로도 만났다가 헤어
지기를 반복할 사람들입니다.
사진도 찍었으니 슬슬 길을 떠나야겠습니다. 이곳에 도착한 시간이 12시가 조금 안되었을 때였는데, 8시쯤에 길가
벤치에 앉아서 빵과 과일 몇조각을 먹었으니 점심을 먹을 때가 되어가는군요. 이제 내려가다가 카페를 만나면 제대로 된
점심을 먹어야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생장을 떠나 순례를 시작한 이래 제대로 된 점심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용서의 언덕에서 부터는 계속 내리막 길입니다. 생장에서 받은 자료를 보니 푸엔테 라 레이나는 해발 300m 를
조금 넘는 곳이니, 해발 800m 의 페르돈 언덕을 기준으로 약 500m 를 수직으로 내려가는 셈입니다. 급경사 내리막 길인데
다가 엄청난 자갈길입니다. 무거운 배낭과 함께 걷기가 상당히 조심스럽네요. 지팡이가 많은 도움이 됩니다.
어느 정도 급경사길을 내려가면 좌우로 밀밭과 유채밭, 올리브 밭이 이어지는 평평한 길로 접어듭니다. 한시간쯤
걸어가다보니 저 앞에 마을이 보이는데, 우테르가(Uterga) 라는 마을입니다. 마을 입구 길옆에 천상모후의 관을 쓰신
성모님께서 우릴 환영해 주십니다. 마을에 들어서서 Calle Mayor 라는 포장된 길을 따라가면 출입구 위에 깃발 몇 개가
꽂혀있는 건물이 보입니다. Ayuntamiento de Uterga 라고 팻말이 있는 걸 보니 아마도 이 동네 동사무소나 읍사무소 쯤
되지 않나 싶습니다. 앞으로도 많이 보게 되지만, 가는 동네마다 보게 되는 Calle Mayor 라는 거리는 아마도 우리 식으로
치자면 중앙로 쯤 되는 모양으로, 이 거리에 면해서 대개 관공서 건물과 교회, 광장등이 있더군요.
쉴만한 곳이 있나 기웃거리며 조금 더 걸어가니 알베르게 문패를 달아놓은 집이 보입니다. Albergue, Camino del
Perdon 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자갈을 깔아놓은 넓은 마당에 파라솔과 함께 테이블과 철제의자들이 놓여져 있고 순례자
들이 맥주를 마시거나 빵을 먹고 있습니다. 마당 안쪽에는 2층건물이 있는데 아랫층은 카페겸 매점이고, 2층이 알베르게
랍니다.
페르돈 고개를 넘어 내려오면 처음 만나는 카페라서 그런지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쨌거나 여기서 점심을 해결하
기로하고 배낭을 벗어서 마당 한귀퉁이에 내려 놓은 뒤 매점 카운터에 음식을 주문하러 들어갔습니다. 음식 주문하는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뤄서 한참만에야 주문할 수가 있더군요. 뭐가 먹을 만한 것인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라 남들 주문하는
걸 곁눈질해가면서 mixed salad 한접시와 계란으로 만든 찜 비슷한 요리 한접시, 콜라 하나 맥주 하나씩을 주문해 받아서
마당으로 들고 나와 파라솔이 있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음식은 먹을만 했습니다. 순례길에 나선 이래 처음으로
먹어보는 점심다운 점심입니다. 맥주와 함께 느긋하게 식사를 했습니다.
식사를 마쳤으면 다시 길을 떠나야죠? 시간을 보니 오후 두시가 넘었네요. 오늘도 침대 구할 걱정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계속 걸을 생각만 한 것이 후회스럽습니다. 어깨를 짓누르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그 어렵다는
용서의 언덕을 넘어왔겠다, 또 지금 시간이 오후 두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고 바로 여기가 알베르게이니 여기서 하루 잘
생각을 했을 법도 하건만, 그 당시에는 왜 그 생각을 못했는지... 오직 계획했던 대로 걸어야 한다는 생각 뿐이었습니다.
화장실에 다녀온 후 배낭을 둘러 맵니다. 길을 떠나기 전 화장실을 미리 다녀오는 일은 생략할 수 없는 중요한
일입니다. 순례길 중간에 간이 화장실이라도 있는 곳은 보질 못했으니까요. 천지사방에 나무 한그루 없이 밀밭이나 유채밭,
올리브밭과 포도밭 밖엔 없으니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우리가 마음 편하게 볼 일을 볼 곳이 없습니다.
우테르가 마을을 뒤로하고 푸엔테 라 레이나를 향해서 다시 길을 떠납니다.
갈길은 바쁘지만 온천지를 노랗게 물들인 유채밭에서 기념사진 한 장 남기는 여유쯤은 가져야겠죠? 우리의 여성
순례자 유제연 여사께서는 당연히 여고생 취향으로 사진 찍히기를 원합니다.
우테르가를 떠난지 한시간쯤 지나 오바노스(Obanos) 라는 마을을 지나갑니다. 사진은 광장앞에 있는 성당.
성당 앞 광장에 세워져 있는 철로 만들어진 십자가.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깡마르게 표현된 예수님과 손발에 박힌
투박한 쇠못이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틀림없이 사진을 찍었는데, 암만해도 찾지 못해서 다른 분의 사진을 옮겼습니다.)
광장으로 통하는 성당 옆 아치가 인상적입니다.
이 순례기를 쓰기 위해서 자료를 뒤지다 알게 되었지만, 오바노스는 비극적이고도 아름다운 전설이 전해져 내려
오는 마을입니다. 프랑스의 아키텐(Aquitaine)지방 영주인 기요르모(Guillormo)공작과 그의 여동생 펠리치아(Felicia)
공주에 대한 전설입니다. 이 전설을 연극으로 만들어서 8월이면 이곳 주민들이 모두 참여하는 공연을 하는데, 이 연극
공연이 오바노스를 유명한 곳으로 만들었다는군요.
착하고 아름다운 공주 펠리치아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나기로 결심했는데,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가문의 가장이
된 오빠 기요르모 공작은 여동생의 위험한 순례계획을 극렬하게 반대했습니다. (그 당시 순례길은 엄청 위험한 길이었기
때문에 대개는 유언장을 써놓고 떠났다는군요.) 하지만 오빠는 동생의 고집을 이기지 못하고 할 수 없이 순례를 허락했지요.
펠리치아 공주는 산티아고까지 순례를 마친 후 깊은 감명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결심합니다. 남은 생을 어렵게 사는 사람
들을 위해 바치겠노라고... 그러나 반대할 것이 뻔한 오빠한테 얘기할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빠한테 알리지
않은 채로 수녀가 되어 오바노스에 정착했습니다. 그리고 병든 사람들과 헐벗고 굶주린 사람들을 보살폈습니다.
이 소문을 듣고 격노한 기요르모 공작은 공주를 데려오려고 직접 오바노스로 갔습니다. 그러나 펠리치아 공주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이에 분개한 공작은 말다툼 끝에 칼로 동생을 찔러 죽입니다. 위 사진의 포스터에 이 장면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위 사진도 제가 찍은 사진을 못찾아서 어디선가 옮겨 온 것입니다.)
정신을 차린 공작은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일을 저질렀음을 깨닫고 절망했습니다. 결국 그 자신도 동생이 걸었던
순례의 길을 떠나게 되며, 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오바노스에서 귀족 신분인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립니다. 그리고
오바노스에 성당을 짓고 동생 펠리치아가 하던 일을 계속하며 평생을 지냈다고 합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전설입니다.
오바노스의 길거리에는 Calle Santa Felicia, Calle San Guillermo, Calle Duques de Aquitania, Calle Peregrinos
de Compostela 처럼 이 전설을 뒷받침하는 이름들이 붙여져 있습니다.
오바노스에서 얼마 가지 않으니 오늘 우리의 목적지인 푸엔테 라 레이나가 나타납니다. 오후 네시가 조금 넘었
습니다. 이번 순례 시작한 뒤로 목적지에 가장 빨리 도착한 날이네요. 침대가 없으면 어쩌나...하는 불안한 마음으로
알베르게를 찾아갑니다.
큰 길 교차로에 바로 면해 있는, 처음 만난 알베르게의 이름이 Albergue de Peregrinos, PP. Reparadores
입니다. 들어가 보니 나이가 좀 들어보이시는 영감님께서 접수를 보고 계시는데, 뭐가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우리보다 앞서 온 사람들 등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분에게 다가가서 크레덴시알을 꺼내 보여주며 침대 두개를 달라고
했는데, 내 말에는 대답이 없이 크레덴시알을 들여다 보며 "꼬레?" 하고 묻습니다. 그렇다고 하니 이 양반 손가락을
꼽으며 우리가 오늘 열 세사람 째 한국인이랍니다. 나도 놀랐습니다. 그러더니 이 양반 다짜고짜 휘파람으로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합니다. 눈을 크게 뜨고 어떻게 우리나라 국가를 아느냐고 하니 "꼬레, 월드컵" 이라고 대답하는데, 아마 2002년
월드컵 때문에 알게 되었다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 우리가 스페인을 승부차기에서 이기고 사상 최초의 월드컵 4강이 되었죠?
다행하게도 침대가 남아 있었습니다. 5유로씩을 내고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를 받았습니다. 이 아저씨가 통하지도
않는 스페인 말로 뭐라고 중얼거리는데,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표정을 짓자 볼펜으로 이층 어디에 있는 침대로 가라고
그려줍니다. 이층에 올라가 보니 길고 큰 방에 가운데를 통로로 하고 양쪽으로 이층침대를 배열해 놓았습니다. 우리에게
배정된 이층 침대는 창쪽으로 면해 있었습니다. 승현이 엄마는 아래 침대, 나는 위 침대를 쓰기로 하고 배낭을 벗었습니다.
순례길 걷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진짜 공립 알베르게의 이층침대를 쓰게 되었네요.
놀랍게도 바로 우리 옆 침대의 주인들이 수비리 식당에서 만났던 프랑스 아줌마들이네요. 우리가 이층으로 올라
가자마자 이 아줌마들이 우리를 알아보고 뭐라고 아는 체를 하지 뭡니까. 우리도 이 아줌마들이 엄청 반가왔습니다. 어설
프게라도 영어로 통하는 아줌마는 세 분 중 한 분 뿐인데, 세 분 모두 알아듣거나 말거나 우리한테 수다를 떨기 시작합니다.
참 좋은 분들입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침대에 쓰러져 낮잠 자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고, 몇몇 사람들은 서로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가
하면, 책을 읽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대부분의 침대는 배낭과 침낭이 올려져 있는 채 비어있습니다. 침대 주인은 아마도
바깥에 나가 있겠죠? 조금 전 우리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많은 순례자들이 알베르게 주변 길거리 여기저기 모여 맥주를
마시거나 얘기를 하고 있었거든요.
여기서, 우리같은 순례자가 알베르게에 도착한 후 하는 일상적인 행동들을 묘사해 볼까요?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우선 등록을 해야 합니다. 등록이라고 해야 접수 보시는 봉사자가 접수노트에 우리 크레덴
시알에 적힌 것을 보고 몇가지 기록한 다음 사용료를 받고 크레덴시알에 스탬프를 찍어주는 것이 전부이지요. 그리고는
침대를 지정해 주거나 아니면 우리더러 아무데나 빈 침대를 찾아 쓰라고 합니다. 알베르게에 벼룩이나 빈대등 소위 bed
bugs 가 있다는 불평들이 있어서인지 침대와 베개에 씌우는 일회용 cover 를 주기도 합니다. 침대를 찾아 방에 들어가기
전에 대개는 신발을 벗고 샌들로 갈아 신을 것을 요구받습니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우리가 걷는 길이 보통 지저분한 길이
아니잖아요? 그러니 순례자들에게 다른 건 몰라도 샌들만은 필수품입니다.
침대에 가서는 배낭을 벗고 침낭을 꺼내 침대에 펴놓습니다. 그리고 나서 갈아입을 옷가지를 꺼내서 침낭 위에
던져놓고는 세면도구를 꺼내 가지고 세면장으로 갑니다. 짐작하시겠지만, 이쯤되면 배낭을 다 뒤집어 놓는 꼴이 됩니다.
그러니 다음날 새벽엔 컴컴한 방에서 소리 내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배낭을 처음부터 다시 꾸려야 하는 겁니다. 내 것만
꾸리겠어요? 마누라 것도 꾸려야지...
세면장에 가서 면도와 샤워를 하고 침대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은 후, 배낭을 정리하거나 책이나 자료를 뒤져 내일
어디까지 걸어야 할 지 생각해 둡니다. 그 동안에 승현이 엄마도 샤워를 하거나 빨래를 해서 널고, 간편복으로 갈아 입습
니다. 그리고는 점심을 만들어 먹거나, 낮잠을 자거나, 동네를 한바퀴 산책하거나, 바(bar)나 식당을 찾아가서 맥주를 한
잔 하거나 또는 포도주를 곁들인 식사를 합니다.
이것이 알베르게에 도착한 이후의 일상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처음으로 알베르게에 침대를 차지하고 나서 샤워까지 마치고 행복에 겨운 우리는, 저녁을 만들어 먹기로
했습니다. 접수 사무실 옆에 주방이 있으며, 이곳에서 다른 순례자들이 이미 음식을 만들어 먹는걸 확인했거든요. 우선
성당을 찾아가서 저녁 미사시간을 알아놓고, 수퍼마켓을 찾아가서 음식재료를 사가지고 오기로 했습니다. 밖으로 나가
려고 아랫층으로 내려가 접수대 앞을 지나서 나서려는데 지훈이가 꾸벅 인사를 합니다. 수비리 가는 길에 만났던, 엄청
큰 배낭을 짊어지고 고생하던 울산 젊은이입니다. 반바지 차림으로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모양입니다. 승현이 엄마가
반갑게 맞으며, '어젠 어디서 잤느냐, 그 무거운 짐을 지고 어떻게 여기까지 벌써 왔느냐'고 물었죠. 이 녀석은 팜플로나
에서 하루 더 묵겠다고 했거든요. 지훈이가 '짐은 택배 편으로 다음 목적지로 보내고 빈 몸으로 걸어왔다' 고 합니다.
승현이 엄마가 '뭐라구? 짐을 택배로 보냈다구?' 하면서 어떻게 택배를 불렀느냐고 눈을 반짝이며 깊은 관심을 표합니다.
결국 '우리도 택배를 이용하자.' 로 결론이 났습니다. 접수대에 가서 택배회사에 연락해달라고 하면 된다니 이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접수 보시는 영감님한테 가서 '배낭을 택배로 보내고 싶다, 택배회사에 연락해달라.' 고 얘길
하는데, 영어를 전혀 못알아 듣는 이 영감님은 우리가 다른 숙소로 옮기겠다는 줄로 잘못 알아 듣고서는 좋을대로 하라면서
우리가 냈던 5유로씩인가를 다시 꺼내주려고 하는 겁니다.
우여곡절 끝에 접수대 옆에 택배회사 봉투가 놓여있는 걸 알아내서 봉투에 적혀있는 전화번호로 전화를 했습니다.
간단하더군요. 이곳에 비치된 자기 회사 봉투에 우리의 목적지와 우리 이름을 적고 7 유로를 봉투 안에 넣어서 그 봉투를
배낭에 걸어 놓으면, 내일 아침에 자기네가 여길 들러서 차에 배낭을 싣고 가서 우리 목적지에 갖다 놓는다는 겁니다. 물론
7유로는 회사에서 가져가는 거죠. 우리 부부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그렇게 하겠다고 합의를 보고 전화 저편의 사나이
에게 내 이름을 말한 뒤, 우리 배낭을 내일 우리가 가고자 하는 에스떼야(Estella) 의 공립알베르게(Albergue Municipal)
로 가져다 달라고 말했습니다. 이로써 내일부터 우리는 배낭과의 전쟁에서 벗어나게 될 것입니다.
알베르게 바로 앞 길 건너에 있는 Iglesia del Crucifijo 성당의 Y 자 모양의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 나는 이 십자
가가 유명한 것인 줄 모르고 이상한 십자가상이 있구나... 하면서 이 사진을 찍었었는데, 이 글을 쓰느라고 뒤져본 여행기
들에서 이 십자가가 유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4세기 독일의 순례자가 가져왔다고 합니다.
옛날 중세풍의 건물들이 늘어선 구시가지를 둘러 보는데, 동네사람은 거의 눈에 띄질 않고 간혹 우리 같은 순례자들만
마주치게 됩니다. 레스토랑겸 카페가 하나 보이는데, 순례자들이 길가 테이블에 둘러 앉아서 음식접시를 놓고 맥주를 마
시고 있더군요. 생장에서 같은 방을 썼던 독일 친구와 이탈리아 친구도 거기에 끼어 있었는데 우릴 보더니 큰 소리로 반
가와 합니다. 우리도 손을 흔들어서 반가운 인사를 해주었습니다.
구시가지를 한바퀴 돌고나서 수퍼마켓을 찾아 들어갔습니다. 안에는 순례자 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우린 가장 한국산 쌀과 비슷하리라고 추측되는 쌀 작은 것 한봉지와, 해물매운탕(?) 처럼 보이는 냉동포장된 즉석식품
하나, 상추 한 묶음, 플라스틱 병에 든 큰 포도주 한 병을 사가지고 알베르게로 돌아왔습니다.
주방은 꽤 붐볐는데, 그래도 밥을 하고 매운탕을 끓였습니다. 알베르게의 주방에는 크기와 색깔과 짝이 맞는 건
거의 없지만 냄비나 프라이 팬, 스푼, 포크, 컵 등이 제법 갖춰져 있습니다. 매운탕에는 서울에서 가져 온 라면스프가 들
어가서 얼큰한 맛을 잘 살려 냈습니다. 앞으로도 배낭여행 할 기회가 있으면 무게도 나가지 않고 부피도 작은 라면스프는
반드시 챙겨야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밥도 그럴싸합니다. 안락미가 아닌 쌀로 잘 고른 모양입니다.
식탁 하나를 잡아 밥과 매운탕과 씻은 상추를 옮기려 하는데, 바이욘에서 생장으로 오는 기차에서 우리와 합석
했던 젊은이들을 만났습니다. 이 친구들도 샐러드 같은 걸 만들어서 먹고 있던 중이더군요. 같이 앉아 먹자고 불러서
우리가 만든 밥과 매운탕, 상추쌈을 포도주도 한잔씩 곁들어서 같이 잘 먹었습니다. 론세스바예스의 라 파사다 호텔
에서 버리지 않고 남겨둔 튜브 고추장이 아주 훌륭한 역할을 했습니다. 플라스틱 병에 든 큰 포도주 한 병도 다 해치우고
보니 오랫만에 먹어보는 한국식 저녁이 정말 좋습니다. 덕분에 저녁미사엔 가질 못했습니다만. 위 사진 저 뒤편에 보이는
백발노인이 접수 보시던 영감님입니다. 플라스틱 포도주 통을 흔들며 같이 한 잔 하자는 표현을 하니 두 손으로 손사레를
치며 안마시겠답니다.
설겆이를 끝내고 세면대에 가서 이를 닦은 후 이층으로 올라가 보니 밖은 아직 훤한데 다들 자고 있군요. 모든
알베르게는 오후 열시면 실내등을 모두 끄게 되어 있습니다. 피곤했던 오늘, 빨리 잠자리에 들어야겠습니다. 내일은 배낭
때문에 고생하지 않아도 될 걸 생각하니 기분좋게 잘 수 있겠군요.
첫댓글 하루가 길고도 꽉~찬 여정이였네요~
체력도 두분 다 대단하십니다~
천사들이 순례자들을 보호하고 있는 느낌이 드네요
이미 표정속에 신의 품 속에 ....... (느낌~아니까‥)
처음으로 공립 알베르게에서 자고 무거운 짐도 택배로 보내는 의미있는 날이었네요.오바노스의 전설도 기억에 남구요. 알베르게에 도착해서 무겁던 신발을 벗고 쪼리로 갈아 신고 동네에 나가 시원한 맥주 한잔 너무 좋읍니다..
뭐가 잘못된건지 사진과 글자 배열이 제멋대로인데, 아무리 용을 써도 바로 잡히지 않아 그냥 올렸습니다. 이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