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 영수, 권서, 전도부인의 활동과 충북의 복음화
1) 조사와 영수
1914년 6월에 충청지방에 대한 통계 보고가 노회 통계표에 나타나 있다. 거기에 보면,
한국인 목사 1, 미국목사 3, 장로 1, 조사 6, 남매서인 6, 여전도인 6, 영수 13, 서리집사 19, 다른 임원 27, 주일학교교사 27, 조직교회 1, 미조직교회 50, 예배당 집 30, 주일학교 51, 주일학교학생 1,200, 금년 세례교인 88, 세례인 도합 554, 금년아이세례 15, 아이세례 도합 49, 금년학습인 78, 학습인 도합 344, 원입인 524, 교인도합 1,413
으로 나타나 있다.
이를 보면, 충북에는 조직교회로 청주읍교회 1개 교회, 미조직교회가 50개 교회, 한국인 목사로는 이원민 목사(청주읍교회), 미국 선교사로는 민노아, 계군, 국유치 목사 가 있었고, 장로는 1914년에 장립한 청주읍교회의 최영택 장로 한 사람뿐이었다.
당시 충북 지역에 50개의 미조직 교회가 있었지만 이들 교회는 모두 주일학교를 운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미조직교회라 하더라도 한해 세례교인이 88명이요 학습교인이 78명인 것을 보면 복음의 확산이 빠르고 강열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엿 볼 수 있다.
농촌의 미조직 교회는 조사, 영수 등에 의해서 관리되고 있었다. 조사(助師)는 한국인 목사가 대거 양성되기 전, 선교사들을 도와 교역 일선에서 직분을 맡아 수행하던 목회 조력자(helper)이다. 이들은 정식 신학교육을 마치지는 않았지만 선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전도, 치리, 순회 심방 등의 일체 활동을 보좌하거나 미조직 교회에서의 헌신적으로 전도와 목회 활동을 담당하던 사람들이다.
영수는 조사나 교역자를 도와 교회 제반업무를 수행하고 교회를 대표하며 교역자를 돕는 사람이다.
이들 조사나 영수는 초기 선교사, 목사, 장로 들이 정착되기 전에 충북 지역 교회를 지도하던 사람인데, 이들 조사와 영수들에 관한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안타까운 일이며 여러 자료에 의하여 파악된 조사는 다음과 같다.
김흥경(1893), 김정현(1907년경) 이찬규(1913년경) 최영택(1914년경), 김성구(1916년경) 경 환(1916년경) 이호재(1923년경) 김영주(1923년경) 서상필(1923년경) 김영주(1924년경) 곽경한, 이병식, 정인환 박정훈 등이다.
2) 권서 및 전도부인의 성경보급
한국 기독교 수용 과정에서 특기할 만한 사실은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우리말 성경이 번역, 발행되었고, 그 중 상당수가 국내에 유입되어 읽혀졌으며 그 결과 많은 구도자가 생겨났다.
그런데 한국 교회 초기에 성경과 교리서는 대부분 권서, 전도부인을 통해 배포되었다. 성경을 갖고 다니며 팔면서 전도한 사람들을 권서(勸書) 또는 매서인(賣書人)이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선교사 혹은 성서공회로부터 봉급을 받고, 지방에 다니면서 성경과 전도지를 팔면서 기독교 전도에 힘을 기울였다. 책을 팔았다하여 일명 매서인(賣書人)이라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책장수의 뜻이 아니라 전도인을 의미하는 직책이었다.
이들이 책을 판 이유는 돈을 받지 않고 거저 주면 사람들이 책을 소홀히 여기는 경향이 있음으로 복음의 중요한 가치를 인식하게 하기 위해 일부러 팔았던 것이다..
권서의 직책을 맡은 사람들은 대개 남자였다. 그러나 남녀 간 내외하는 것이 엄격했던 당시의 사회에서, 규방(閨房)에 대한 전도와 성서 보급은 남자들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이라서 여성들이 이 일을 담당했는데, 여성으로서 선교사 혹은 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으며 성서 보급에 종사한 사람들을 권서 또는 전도부인(Bible woman)이라 했다. 이 전도 부인 역시 남자 권서와 같이 책을 팔며 전도를 했다.
성경 보급은 남녀 권서들을 통한 판매, 서고(書庫) 판매, 위탁 판매 등의 판매 형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감옥의 죄수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 배부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성경의 90%는 이들 남녀 권서들에 의해서 보급될 정도로 성경 보급은 대개 권서들에게 크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한국 기독교 초기의 복음 전파가 성경 보급에 의해 널리 추진되었다고 할 때, 그 성경 보급은 자신들의 사명을 다한 권서, 전도부인들의 헌신에 의한 것임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조선)성서공회 소속이 되어 충북에서 활동한 권서를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장로교계통 : 강창규(1917~20), 김성수(1920), 김성호(1908~16), 김원달(1922~33), 김진안(1938), 김창구(1917~18), 김창규(1920~34), 남기호(1935~37), 박노성(1935), 박영재(1937), 박여윤(1913~21), 박정수(1917~21), 서명춘(1938), 서병규(1923~34 괴산지역), 서병호(1909~19), 신상희(1923~38, 연풍교회), 안기수(1913~17, 원평교회), 안두현(1935~36), 안시층(1920~21), 오석근(1924~27), 오을석(1935~38 신대교회), 이상기(1935), 이춘명(1913~16, 사평리교회), 이훈경, 임창규(1932), 전용섭(1938, 청안교회), 정규태(1937 청주제일교회), 조기윤(1938), 조정하(1914~16), 최영택(1912 청주제일교회), 한영문(1921~23)
② 감리교계통 : 박인수(1907~11), 전연극(1924~25), 전연득(1924~38)
③ 교단불분명 : 강춘(1911~12), 김경문(1908~13), 김순천(1912), 김치만(1908), 김화복(1908~09), 서성삼(1909~12), 손상삼(1909), 유문달(1912~13), 류형기(1906~08), 이동신(1912), 이안모(1911), 이원실(1911~12), 이재봉(1919~24), 이태동(1912)
권서들은 성경을 산 사람이 복음에 대하여 흥미를 느끼거나 믿기로 작정하면 곧 근처의 선교사나 교회에 알려서 그를 돌보게 하였다. 하지만 지역이 너무 외지거나 근처에 조직된 교회가 없을 떼에는 모이기 적당한 장소를 마련하고 그 모임을 인도하였는데, 이런 모임들은 대부분 지역의 교회로 발전하는 예도 많았다. 선교사들은 주로 대도시의 선교 거점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문에 선교사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벽지의 많은 교회들은 권서들을 통해 교회가 세워지고 자랐던 것이다.
이런 사례가 충북에서도 나타났는데, 이를 테면 충북최초의 권서 김성호는 일찍이 청원군 오창면에 건지산(乾池山)교회(1906)를 세웠다. 그리고 성경 보따리를 당나귀에 싣고 1915년에 보은 지방에 내려가 보은교회를 세우는데도 기여했다. 그리고 김성호는 조사 최영택(崔榮澤)과 함께 청산에 내려가 전도함으로 여러 청년들을 얻어 청산교회를 세웠다.
권서 안기수 역시 성서공회 소속 권서로서(1913~17) 원평교회를 중심으로 보은 지역, 그리고 옥천 청산교회 등지를 돌아다니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활동하였다.
권서들이 교회 설립의 기초를 닦거나 또는 그들의 전도 행적에 대한 구체적 사례가 밝혀진 경우가 많지 않으나 다음은 충북 권서들의 활동을 엿볼 수 있는 좋은 자료라 생각된다.
[청주] 청주동지방은 소열도 목사의 선교지인데 항상 교회들이 연약하여 다시없는 유감이더니 대영성서공회에서 파송한 양익환(梁翊煥) 목사와 지방전도사 이병식 외 권서 4인, 함께 6인이 각처 교회와 부근 동리에 성서 3,290여부를 전파하며 밤마다 전도 강연회를 개최한 바 양익환 목사의 열렬한 설교는 일대 선풍을 일으키었고 동시에 미원교회에서는 금년 특별 부흥의 해로 정하고 매 교인은 한명씩 인도하여 보겠다고 결심하였으며, 각 교회의 새신자의 총계는 152명인 바 각별한즉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쌍수교회(현 남일교회) 32명, 무성교회 15명, 미원교회 42명, 부흥교회 28명, 청천교회 35명
이를 보면, 권서들이 성경 반포와 아울러 복음 전도의 최 일선에서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는가 하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