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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서기'는 우리의 '이두'로 해석하면 쉽게 해석이 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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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를 중심으로
[2008년 7월 3일]
http://blog.daum.net/hihfly/12364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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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닮은 일본 벽화
일본 천무천황이 곧 연개소문?
고구려 수산리 고분 벽화와 닮은 일본 벽화
다카마쓰즈카 고분의 수수께끼
너희들 형제는 물고기와 물처럼 서로 화목하라. 결코 감투를 두고 다투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같은 일을 벌이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지니….
일본 중부지방 나라(奈良)현(縣) 아스카(明日香)촌. 마을 사람들이 생강을 저장하기 위해 산비탈을 파고 있었다. 굴 창고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한참 파들어가다 보니 반듯한 돌 더미가 나타났다. 자연석이 아니라 인공의 돌무더기였다. 그곳이 옛 궁전터가 아니면 무덤이라는 얘기다. 놀란 마을 사람들은 당국에 신고하여 지역 고고학연구소로 하여금 그 일대를 발굴케 했다. 마을 사람들이 초기 발굴 비용을 스스로 감당했던 것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서 상상을 넘어서는 눈부신 고분벽화가 모습을 드러냈다. 1972년의 일이다. 고분의 이름은 다카마쓰즈카(高松塚·고송총). 7세기 말 ~ 8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었다. 학계는 발칵 뒤집혔다.
그간 일본 학자들은 7세기에 일본에서는 고분벽화가 축조되지 않았다고 단정해 왔는데, 다홍과 초록빛의 화려한 옷차림의 궁중 시녀들과 시종 등 열여섯명의 총천연색 남녀상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고구려 양식 닮아
특히 여인들의 옷 입음새는 고구려 고분벽화와 매우 흡사하여 보는 이들을 더욱 놀라게 했다. 반코트형의 긴 상의를 허리띠로 묶고, 색동 주름치마는 길게 발을 덮고 있었다. 5세기의 수산리(修山里) 고분과 쌍영총(雙楹塚) 고분 등의 벽화 속 여인상과 영락없이 닮았다.
고구려 고분 속 인물상과 흡사한 차림의 여인 그림에 휩싸여 묻힌 인물. 고송총의 주인공은 누구일까.
무덤 속 돌 관에는 백골이 안치되어 있었지만 두개골은 없었다. 척추의 맨 위 뼈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칼로 목이 잘린 것은 아니고, 해골이 된 상태에서 누군가가 머리 부분을 빼 달아난 것으로 추측되었다. 한편 부장품으로 대도(大刀)라 불리는 긴 칼의 칼집만 있을 뿐 칼은 없었다.
시신에서 머리 부분을 떼어낸다는 것은, 죽은 이가 다시 부활하지 않도록 하는 방비책으로 삼아져 왔다. 칼집에 칼이 없는 것도 망자의 항거를 사전에 차단하려 함이었다.
없어진 머리 부분까지 보태어 계산하면, 고송총 무덤의 주인공 키는 163㎝가량. 근육과 골격이 발달된 남성으로, 죽었을 때의 나이는 40~50세 정도. 노인일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 인골 감정 결과였다. 50세 이상의 근골이 튼실한 사나이. 대도를 부릴 줄 아는 칼잡이.
생전에 시종과 시녀들에 에워싸여 수발을 받던 고위층. 무덤의 임자는 왕족 이상의 높은 신분이었음을 능히 짐작케 했다.
고송총 천장에는 28자리나 되는 별자리가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어 성좌에 관한 지식을 지닌 사람들을 감탄케 했다. 천장벽 중앙에 온지름 1㎝가량으로 도려낸 금박 동그라미가 무수히 발라져 있다. 이들을 붉은 선으로 이어 여러 개의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한가운데는 자미궁(紫微宮)이 표시되어 있다. 천제(天帝) 즉, 하늘 임금의 거처가 바로 자미궁이다. 천장 벽 한가운데 자미궁의 천극성(天極星), 즉 북극성이 그려져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무덤에 묻힌 이가 매우 고귀한 인물이었다고 보는 이들이 적지 않다.
천문 사정에 밝은 일본 사학자 아리사카 다카미치(有坂隆道)씨는 이 무덤의 피장자(被葬者)로 가장 합당한 인물을 꼽으라면 덴무(天武·천무)천황이라고 서슴없이 말한다.
그럼 덴무, 즉 천무란 누구인가.
7세기 후반의 일본 천황. 젊었을 때 이름은 오아마(大海人·대해인). 672년 임신(壬申)의 난()에 승리하여 673년 아스카에서 즉위, 686년까지 재위. 관직을 개정하고 법률을 제정. <일본사> 편수에 처음으로 착수하기도 했다.
일본 서기에 연개소문 유언이 왜?
일본 사전 <고지엔(·광사원)>의 천무천황 대목을 요약한 것이다. 요컨대 임신의 난이라는 일본 역사상 최대의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쥔 인물이 천무라는 천황이다. 쿠데타로 쓰러뜨린 상대는 백제계 일본 정권.
당시의 일본 천황, 즉 왜왕은 백제 무왕(武王)의 아들 교키(翹岐·교기)였다. 무왕에게는 이 교키 외에 의자(義慈)란 아들이 있었는데, 무왕이 죽은 다음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싸움이 벌어졌다. 의자가 이 싸움에 이기자, 무왕의 비(妃)였던 어머니와 함께 일본으로 망명했던 것이다.
당시 일본 땅에서 백제 세력은 막강했다. 생전의 무왕은 일본 천황을 겸직하고 있었다. 무왕이 죽은 뒤 아들 교키와 함께 일본에 망명한 무왕의 비는 일본에 가자마자 여왕으로 등극했다. 일본은 백제 분국(分國),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이 같은 백제계 일본 정권을 쿠데타로 쓰러뜨린 천무, 즉 대해인이란 어떤 인물인가. 일본 고대사를 연구해 온 여류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씨에 의하면, 천무는 바로 고구려 말기의 대재상(大宰相) 연개소문(淵蓋蘇文)이라 한다.
고바야시씨는 <천무는 고구려에서 왔다>(별책 문예춘추·1990년 여름호)에서 <일본서기>에 연개소문의 유언장이 세세하게 기술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고구려의 역사책에도 없는 고구려 대신의 유언 내용까지 <일본서기>가 밝히고 있는 것은 연개소문이 곧 천무요, <일본서기>를 편찬케 한 이 또한 천무천황이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다.
연개소문의 유언은 남생(男生)·남건(男建)·남산(男産) 등 아들 삼형제에게 남긴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이다.
‘너희들 형제는 물고기와 물처럼 서로 화목하라. 결코 감투를 두고 다투는 일이 있어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 같은 일을 벌이면 반드시 이웃 나라의 웃음거리가 될지니….’
고바야시씨 또한 고송총의 피장자는 천무라 보고 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666년에 죽었다고 기술되어 있는 연개소문, 바로 그 사람이다. 그가 어째서 괴기 추리소설의 등장인물처럼 두개골이 없는 형상으로 일본 땅에 묻혀 있었다는 것인지 궁금하다. 더군다나 일본 천황까지 되었다는 연개소문이다. 고바야시씨의 주장을 좀 더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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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2) 천무(청룡)는 시해됐다?
청룡 목에 그려진 ×는 암살 뜻해
2008년 07월 10일
몸은 거대한 뱀과 비슷하고 비늘로 덮여 있다. 얼굴은 길고 입가에 수염이 나 있으며, 평상시에는 바다·강·호수·늪 등의 물 속에 사는데, 때로는 하늘로 올라가 바람과 구름을 일으킨다. 중국에서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기며 천자(天子)에 견주어진다
제철을 상징하는 청룡
일본의 고구려식 벽화고분 다카마쓰즈카(高松塚·고송총) 동쪽 벽에는 우람한 청룡(靑龍)이 그려져 있다. 길고 붉은 혀 같기도 하고, 불길 같기도 한 것이 입에서 길게 내뿜어져 있는 데다, 목덜미에는 붉고 오글오글한 털이 나부껴 있다.
해괴한 것은, 이 목덜미에 붉고 큰 X자 표시가 보이는 점이다. 나라(奈良)시 약사사(藥師寺)는 천무천황을 추도하는 오래된 절이다. 청룡 벽화는 이 절에도 있는데, 이 용의 목덜미에도 역시 X자 표시가 선명하다.
약사사도 고송총처럼 7세기 말에 지어진 건조물이다. 동일한 시기에 지어진 건조물 안 청룡 벽화의 같은 X자 표시.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일본 사학자 고바야시 야스코(小林惠子)씨에 의하면, 청룡 목덜미의 X자는 천무가 암살된 인물임을 나타내는 표시라 한다.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은 강줄기 형상
생전의 천무는 푸른 물에서 태어난 용임을 자처했다. 용은 상상의 동물이다. 몸은 거대한 뱀과 비슷하고 비늘로 덮여 있다. 얼굴은 길고 입가에 수염이 나 있으며, 평상시에는 바다·강·호수·늪 등 물 속에 사는데, 때로는 하늘로 올라가 바람과 구름을 일으킨다. 중국에서는 상서로운 동물로 여기며 천자(天子)에 견주어진다…. (금성출판사, <국어대사전>)
용은 턱 아래 여의주를 지녔다고도 한다. 온갖 조화를 부릴 수 있는 보배가 여의주다. 인간은 왜 이 같은 희한한 동물을 상상해 냈을까.
헬리콥터나 소형 비행기를 타고 낙동강이나 한강 등 큰 강 위를 비행하면, 그 해답을 얻을 수 있다.
강은 영락없는 한 마리의 거대한 용이다. 꼬리는 상류요, 몇 개의 발은 강 지류(支流), 반짝이는 비늘은 푸른 강 물결이다.‘얼굴은 길고 입가에 수염이 나 있다’는 것은 기다란 강변 모래밭에 까만 사철(砂鐵)이 쌓인 형상을 나타낸다. 이 강변의 사철을 거둬 고대 제철(製鐵)이 이루어졌다.
용의 입에서 뿜어 나오는 불길은 무쇠를 불려 선철(銑鐵) 만드는 작업을 표현하고 있는 셈이다.
농기구·무기 등 무쇠로 만든 도구는 일찍이 만능의 이기(利器)였다. 여의주란 이 같은 만능의 이기를 만드는 제철 기술을 가리킨 것은 아닐까.
‘십이지(十二支)’는 열두 가지 동물로 시간을 구별한 것으로, 중국 은(殷)나라 때 생겼다 하나 확실치는 않다. 십이지는 쥐에서 시작돼 맨 마지막은 돼지다. 이 순서를 한어(漢語)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자(子·쥐) 축(丑·소) 인(寅·호랑이) 묘(卯·토끼) 진(辰·용) 사(巳·뱀) 오(午·말) 미(未·양) 신(申·원숭이) 유(酉·닭) 술(戌·개) 해(亥·돼지).
이 중 자시(子時)는 오후 11시~오전 1시, 축시(丑時)는 오전 1~3시 등으로 차례를 따라 두 시간씩 할당된다. 또한 이 간지(干支)는 해마다 바뀌는데, 올해는 쥐의 해다.
열두 가지 동물 중 유일한 상상의 존재가 용이다. 인간은 어째서 용이라는 상상의 동물을 십이지에 포함시켰을까. 거북·학·사슴 등 상서로운 숱한 동물들을 제쳐 두고 굳이 상상의 동물 용을 선택한 까닭이 궁금하다.
역시 용은 제철의 상징이자 바람과 구름을 일으켜 농사에 이로운 비를 몰고 오는 고마운 존재로, 인간이 창조해 낸 지체 높은 동물인지 모르겠다.
고송총 안의 북쪽 벽에는 거북과 뱀이 얽혀 있는 ‘현무(玄武)’라는 짐승 그림도 그려져 있다.
얼굴 부분이 칼자국으로 뭉개져 있어 보는 이를 놀라게 한다. 이는 곰팡이 등으로 자연부식된 것이 아니라, 건조 당시 의도적으로 무참히 깎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현무는 북방을 상징하는 신이다. 당시 일본에서 ‘북방’이라면 고구려를 가리켰다.
천무천황과 고구려의 연개소문이 동일인이라는 고바야시설(說)이 맞는다면, 천무 암살은 곧 ‘고구려 세력의 붕괴’와 이어진다.
고송총(高松塚)의 ‘고송’이란 낱말부터가 고구려 세력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고 보면, 무덤에 담긴 철저한 저주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고’는 고구려를 가리키며, ‘고(高)’씨는 고구려 왕가의 성씨다.
소나무의 고구려 말은 ‘부사’다. 따라서 개성의 송악(松岳)은 일찍이 ‘부사악’이라 불렸다. 한 뭉치의 소나무 잎새가 물에 씻어 말린 붓과 같다 하여 소나무는 붓의 옛말 그대로 ‘부사’라 불렸던 것이다.
그런데 이 ‘부사’라는 고구려 말엔 ‘부순다’는 뜻도 포함돼 있다.‘고(高) 부사(松)’라고 하면 ‘고구려 부수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고송총 = 고구려 세력의 붕괴?
천무천황으로 추측되는 인물이 묻힌 이 무덤의 이름을 ‘고송총’이라 지은 이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무덤의 사연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천무의 무덤은 이 고송총 말고 또 있다. 히노쿠마노오우치노미사사기()라는 큰 무덤으로, 황후와의 합장릉이다.
고송총 근처에 있는 이 무덤은 1235년 철저히 도굴당했다. 부장품인 금은보화가 대량 도굴됐고, 은(銀)함에 보관돼 있던 황후의 뼛가루는 길바닥에 무참히 뿌려졌다. 그러나 천무천황의 유골은 발견되지 않았다. 천무는 그곳에 매장되지 않았다는 얘기다.
고송총을 따로 만들어 천무를 머리가 없는 상태로 강제 매장한 것이다. 그럼 천무천황을 이 무덤에 묻은 자는 누구인가.
이야기는 672년 일본 최대의 쿠데타 임신(壬申)의 난(亂)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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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3) 연개소문은 두 개의 ‘아이언로드’ 열었다
고구려의 철기와 제철기술자들을 일본으로, 일본으로
쿠데타의 암호는 ‘금’
한 장의 옛 지도가 있다.
일본의 도쿠가와(德川·덕천) 정권이 1810년에 만든 ‘신정만국전도(新訂萬國全圖)’의 동북아시아 부분이다.
당시 일본은 조선국 외의 나라와는 국교를 맺지 않는 쇄국(鎖國)정책을 펴고 있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정부 기관이 처음으로 만든 세계지도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자신의 나라인 일본 지리 상황을 되도록 소상히 그려 내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현재 이 지도는 일본 정부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소장된 희귀 문헌 중 하나다.
일본,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
지도를 살펴보면 특히 우리나라 부분이 흥미롭다. 우선 동해(東海)가 ‘조선해(朝鮮海)’로 적혀 있는 점이 눈길을 끈다. 근대 이후에 만들어진 일본 지도에는 ‘일본해(日本海)’라 기록돼 있다.
또 한 가지 주목을 끄는 것은 독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울릉도는 ‘우산(于山)’이란 고대의 이름으로 표시돼 있으나, 현재 일본인들이 자신들의 ‘고유 영토’라 주장하는 독도, 즉 ‘다케시마(竹島·죽도)’는 보이지 않는다.
일본 주위의 아주 작은 섬들까지 낱낱이 기록돼 있는 이 지도에서 유독 ‘다케시마’는 없다. 19세기 초인 그 무렵까지만 해도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욕심내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옛 지도의 그 정직이 새삼 아쉽다.
이 지도의 한반도 북쪽 끝에 ‘토문강(土門江)’이 표시돼 있는데, 지금의 ‘두만강(豆滿江)’이다. 그 하구 토문리에서 동해로 빠져나와 남동 방향으로 항해하면 일본 서북쪽의 큰 항만 쓰르가(敦賀·돈하)에 닿는다. 이 바닷길이 바로 고구려 아이언로드(Iron road)였다.
토문강변에 무더기로 쌓이는 양질의 사철로 만든 고구려 철기(鐵器)들이, 이 바닷길을 통해 일본으로 계속 실려 갔다. 가느치(鍛冶匠·단야장)라 불린 철기 제조기술자들도 잇따라 갔고, 큰 배에 말까지 태워 보내기도 했다.
고구려 아이언로드는 육지에도 있었다. 소수의 패로 나뉘어 한반도를 종단, 부산의 김해항에서 배를 타고 일본 규슈(九州)의 북단(北端) 항구로 들어서는 또 하나의 무쇠길이 있었는가 하면,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대동강을 타고 서해로 나와 남하해 일본에 입국하기도 했다. 연개소문은 이 여러 갈래 길을 통해 고구려의 첨단 무기와 인재를 10년 계획으로 부지런히 일본에 실어 날랐다.
<일본서기>는 660년 정월 대목에 고구려 사신(使臣)이라는 이의 낯선 이름을 소개하고 있다. 오쓰소(乙相·을상) 가수몬(賀取文·하취문)이 그 사람이다. 이것은 연개소문의 가명이다.‘을상’이란 관직은 고구려에는 없다. ‘얼’은 고구려 말로 연못·샘 등을 뜻한다. 이것을 한자로 ‘을(乙)’이라 표기했다.
따라서 을상(乙相)이란 ‘연(淵)’이라는 성을 가진 재상(宰相)을 의미한다. 연(淵)씨 성의 재상이라면 당시 고구려에는 연개소문 한 명뿐이다.
고구려 사람 을상 가수몬은 규슈 북부의 쓰쿠시(筑紫)에서 100여명의 일행과 함께 있다가, 5개월 뒤 나니와(難波)로 이동해 2개월 뒤인 7월 ‘돌아갔다’고 기술돼 있다.
나니와는 지금의 오사카(大阪)다. 이곳에서 무엇을 했는지, 어디로 돌아갔는가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다. 도대체 연개소문은 규슈에서 5개월 동안 100여명이나 되는 일행과 함께 무엇을 하고 지냈단 말인가.
660년 7월은 바로 백제가 멸망한 시기다. 연개소문은 백제의 멸망을 확인하고 고구려로 돌아간 것인가.
일본열도의 무쇠터 장악
백제의 멸망은 일본에서 백제 세력의 급격한 쇠퇴를 의미한다. 연개소문은 본격적으로 일본을 차지하기 위해 마무리 일을 하러 고구려로 돌아갔는가.
어떻든 그로부터 꼭 10년 뒤인 670년 일본은 나라 이름을 ‘왜(倭)’에서 ‘일본(日本)’이라 고치고, 국가의 새 출발을 대내외에 알린다. 그리고 연개소문은 일본 땅의 무쇠터를 두루 손에 넣기 시작한다.
규슈의 무쇠터, 시코쿠(四國)의 무쇠터, 당시의 수도 아스카(明日香)와 나라(奈良)를 중심으로 한 무쇠터, 그리고 지금의 도쿄(東京) 북방 간토(關東) 평야의 넓디 넓은 무쇠터…. 그 중에서도 간토 평야의 바닷가 무쇠터 가시마(鹿島)는 병사를 전쟁터로 보내는 데 이용하던 배를 만든 조선소요, 단단하고 잘 베어지는 명품 칼을 지어낸, 소문난 무쇠터였다.
이 무쇠 고장 가시마에는 가시마진구우(鹿島神宮)라는 큰 서낭당이 있어 임신(壬申)의 난(亂) 때 출병한 고사(故事)를 지금껏 재현하고 있는데, 출선제(出船祭)가 바로 그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축제가 12년 만에 한 번씩 말의 해에만 재현된다는 사실이다.
천무천황이 말띠였기 때문이라 한다. 연개소문 역시 말띠였다.
백제판 왕자의 난 발생
백제계의 천황 천지(天智)에게는 어미가 다른 두 아들이 있었다. 오토모(大友·대우)·다케치(高市·고시) 왕자가 그들이다. 이들 중 천지는 대우 왕자를 총애해 왕세자로 삼는다.
이에 반발한 고시 왕자는 아버지의 라이벌인 천무를 가까이 하게 된다. 천무도 고시를 흔쾌히 받아들여 두 사람은 부자관계로까지 발전한다.
천지천황이 죽고 대우 왕자가 즉위하자 두 형제 사이는 더욱 악화돼 임신의 난이 벌어진다. 이때 고시 왕자는 천무 편에서 대우 왕자와 맞서 격렬히 싸운다. 백제판 왕자의 난이었다.
천무는 이들의 갈등을 십분 활용했다. 난리가 일어나자 후하(不破)라는 후방 진지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막강한 후원군만 계속 일선에 들여 보냈다.
누가 봐도 이 전쟁은 백제 왕자끼리의 싸움으로 비쳤고, 고시 왕자는 우세한 군세의 장비로 대우 왕자의 군사들을 단칼에 물리쳤다.
고시 군세의 암호는 ‘금(金)’이었다. ‘금’이라고 대답한 자만이 살아남았고, 대답하지 못한 자는 무참히 베어졌다. ‘금’은 연개소문이 쓴 전략 책자 <김해병서(金海兵書)>의 첫 글자를 딴 암호였다고 전해진다.
쿠데타는 한 달여 만에 일찌감치 끝났다. 천무·고시 팀의 대승리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고시는 하대받기 시작했고, 천무는 화려한 천황 즉위식을 갖는다. 천무 63세 때의 일이다.
이 쿠데타에 대해 언급한 당나라 소설이 있다.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규염객전>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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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4) 일본서 개국 성공한 연개소문
당나라 소설 ‘규염객전’은 그를 모델로 ‘큰 인물’ 묘사
10년 뒤 동남쪽 수천리 밖에서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이오. 그때가 곧 내 일이 성공하는 날이오. 그 소식을 들으시거든 이랑(李郞)과 내 누이동생은 동남쪽을 향해 술을 뿌리고 축하해 주기 바라오.
붉은 수염의 사나이
<규염객전()>은 당(唐)나라의 작가요 사학자인 두광정(杜光庭)이 쓴 소설이다.
고구려 말의 대재상(大宰相) 연개소문(淵蓋蘇文)을 모델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여기서‘규()’는 ‘뿔 없는 용 규’, ‘염(髥)’은 ‘구레나룻 염’이다. 따라서 규염이란 ‘용의 구레나룻(귀밑에서 턱까지 잇따라 난 수염)’을 가리킨다.
용의 구레나룻은 지난 2호 연재 글(7월 10일자 포스코신문) ‘제철을 상징하는 청룡’에 실린 용그림처럼 붉고 오글오글 구불어져 있다고 한다.
연개소문은 이런 형태의 턱수염을 지녔던 모양이다.
규염객·이정의 운명적 만남
당나라 2대 황제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이 나라를 통일하기 전- 훗날 이세민의 오른팔로 크게 활약하는 병법의 명수 이정(李靖) 위국공(衛國公)이 처사(處士·벼슬을 하지 않고 초야에 묻혀 사는 선비)였을 때의 이야기다.
매우 총명하고 아름다운 기녀를 알게 된 이정은 그 여인과 함께 멀리 달아날 생각으로 집을 나와 마을의 한 여관에 묵게 된다.
화로에 올려놓은 양고기가 익어 갈 무렵 한 나그네가 당나귀를 타고 여관에 도착한다. 보통 키에 수염은 용의 수염처럼 붉고 꾸불꾸불했다.
나그네는 배낭을 화롯가에 내던지며 마루에 기대어 이정의 애인이 머리 빗는 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다.
화가 난 이정은 한 마디 하려다가 여인이 제지하자 참고 있었다.
머리를 다 빗은 여인은 그 나그네에게 공손히 인사하며 성씨를 물었다.
“장(張)가요!”
그가 대답하자 여인은 자신도 같은 장씨라면서 “오늘은 오라버니를 만난 기쁜 날”이라며 이정을 오라고 해 오라버니에게 인사드리라고 재촉한다.
이래서 셋은 친해지고, 양고기에 호떡과 술을 곁들여 식사를 했다.
나그네는 안줏거리가 조금 남아 있다며 자신의 배낭에서 사람 머리 하나와 염통과 간을 꺼냈다.
그러더니 머리는 배낭에 도로 집어넣고, 비수를 꺼내 염통과 간을 써는데 그 칼솜씨가 대단히 날렵했다.
나그네가 배낭 속의 머리통을 가리키며 “이놈은 천하의 배신자로, 내가 10년 동안 원한을 품어 오다가 비로소 잡았으니 가슴에 맺힌 한이 이제야 풀렸지”하며 “혹시 이 수(隋)나라 땅에 아주 빼어난 인물이 있다는 말을 못 들었소?”라고 물었다.
이정이 한 사람 알고 있다고 하자, 나그네는 그 사람을 꼭 만나게 해 달라고 말했다.
붉은 수염의 사나이는 이정의 소개로 당시 스무 살밖에 안 된 이세민과 만난다.
이세민은 당시 한낱 장수의 아들로, 규염객과 만날 때 예복도 입지 않은 평복 차림이었으나 의기는 충만했다.
붉은 수염의 사나이는 묵묵히 술을 마시며 이세민을 보고 있다가 말했다.
“진정한 천자(天子)의 상(相)이로군!”
그러고 나서 그는 이정에게 말했다. “내 누이와 함께 낙양(洛陽)에서 만납시다.”
10년 후 실현된 예언
이정과 그의 애인은 규염객이 정한 날, 정한 장소에 찾아가 보니 여러 겹의 울타리로 에워싸인 대궐이 보였다.
대궐 안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가죽옷을 입은 규염객이 그의 아내와 함께 나타나더니 요리상을 들여오게 하고 악사들로 하여금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식사 후에 하인들이 20개의 상을 맞들고 나왔는데, 상 위에는 문서와 열쇠로 가득 했다. 규염객이 말했다.
“이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보물과 돈을 전부 기록한 문서요. 그리고 이것은 그 보물과 돈상자의 열쇠요. 이제 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드리겠소. 부디 이것들을 유용하게 써서 이세민 공이 나라를 창업할 수 있게 해 주시오.”
이어 그는 “10년 뒤 동남쪽 수천리 밖에서 큰 사건이 일어날 것이오. 그때가 곧 내 일이 성공하는 날이오. 그 소식을 들으시거든 이랑(李郞)과 내 누이동생은 동남쪽을 향해 술을 뿌리고 축하해 주기 바라오.”
이 말을 끝으로 붉은 수염의 사나이는 아내와 하인 한 사람만 데리고 말을 타고 홀연히 사라졌다.
그 후 꼭 10년이 지났다. 재상 직에 있던 이정 위국공은 어느날 남쪽 나라에서 왔다는 사람의 보고를 들었다.
“어떤 사람이 1000척의 배와 갑옷으로 무장한 10만 군대를 거느리고 부여국(夫餘國)으로 들어가 그 나라 군주를 죽이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 질서는 이미 안정됐습니다.”
이정은 붉은 수염의 사나이가 성공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아내와 함께 예복으로 갈아입고 멀리 동남쪽을 향해 술을 뿌리고 축하의 예를 올렸다….
<규염객전>은 다음과 같은 구절로 끝을 맺고 있다.
“이위공의 병법 중에서 그 절반은 곧 규염객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이위공, 즉 이정은 당대 으뜸가는 병법가였다. 그 이정이 규염객에게 ‘절반’을 배웠다 한다.
당나라 때 소설은 소설 형식을 빌린 실록의 성격을 띤 작품이 많다고 한다. <규염객전>도 그 중 한 가지로, 이 책에서 한때 중국 대륙을 석권하며 기회를 노리던 연개소문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이 작품은 당대 소설선집인 <앵앵전(鶯鶯傳)>에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번역하고 해설을 쓴 정범진(丁範鎭·전 성균관대학교 총장) 교수는 ‘규염객’이 고구려의 명장인 연개소문의 화신(化身)이라는 점에서 특히 흥미를 끈다고 한다.
연개소문이 일본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같이 당나라 소설에서도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그가 병법에 통달했다는 사실까지, 실재했던 인물 이정의 병법서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흥미로운 사실은 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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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5) 제철왕국 일본’ 건국한 연개소문
몬순 영향으로 강변마다 사철 넘쳐 철기 발달
▶ 풀어진 금실이 스프링 형태로 남아 있는 금제환두태도(金製頭太刀). 5~6세기 신라 작품. 길이 13.8㎝. 호암미술관 소장.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는 일본에선, 벼농사가 잘되고 나무도 잘 자란다. 전국 곳곳의 강변에는 질 좋은 사철(砂鐵)이 무더기로 쌓인다. 사철과, 땔감인 나무가 많으면 덩달아 제철(製鐵)이 왕성히 이룩된다.
다섯 개의 칼
당나라 작가 두광정(杜光庭)의 <규염객전()>에는 ‘부여국(夫餘國)’이야기가 나온다.
연개소문으로 추정되는 규염객, 즉 붉은 수염의 사나이가 이 부여국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성공했다는 것이다.
붉은 수염의 사나이에 따르면 부여국은 당나라 동남쪽 수천리에 있는 나라다. 바로 일본이다.
‘일본 부여국’은 백제 식민지
당시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였다. 백제 왕의 성씨(姓氏)는 부여(扶餘)씨. ‘부여씨의 나라’라 해서 일본은 ‘부여국(扶餘國)’이라 불리기도 했던 것이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義慈王)이 일본에 파견했던 왕자의 이름도 부여풍(扶餘豊)이었다. 그는 일본을 개화시키기 위해 여러 모로 힘썼던 것 같다. <일본서기>에는 부여풍이 백제에서 가져온 꿀벌들을 길렀으나 성공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작자는 이 ‘부여(扶餘)’를 일부러 ‘부여(夫餘)’라 표기해 나라의 존재를 모호하게 만들어 소설적인 효과를 거두려 했던 모양이다.
672년 연개소문은 그 부여씨의 나라를 무너뜨리고 ‘일본국’을 새로 세운 것이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왜(倭)가 나라 이름을 ‘일본’이라 고친 것은 670년(문무왕 10년)이다.
따라서 연개소문은 쿠데타 2년 전에 이미 새 나라의 이름까지 정해 놓은 셈이다. 보통 자신감이 아니다.
<규염객전>에는 또 한 가지 흥미로운 묘사가 있다.
붉은 수염의 사나이가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보통 키였다’는 대목이다. 여기서 일본 나라(奈良) 다카마츠즈카(高松塚·고송총)에 묻혀 있던 인물이 키 163㎝에 근육과 골격이 매우 발달된 남자로 추정된다는 사실(7월 3일자 포스코신문)에 주목하기 바란다.
163㎝라면 당시 한국 남자의 보통 키에 속한다. 고송총에 묻혔던 사나이가 연개소문, 즉 덴무천황(天武天皇)일 가능성이 한층 높아지는 셈이다.
또한 <규염객전>에는 붉은 수염의 사나이가‘허리에 차고 있던 칼을 꺼내 들더니 먹다 남은 양고기를 매우 날렵하게 잘 썰어서 당나귀에게 먹였다’고 기록돼 있다. 연개소문은 항상 다섯 개의 칼을 몸에 차고 다녔다. 칼부림의 명수였던 것이다.
<삼국사기> ‘열전(列傳)’에 있는 기록이다. 연개소문의 ‘칼 다섯’은 훗날 청(淸)나라의 뮤지컬 경극(京劇)의 인기 레퍼토리였다. 경극에 연개소문이 등장해 칼 다섯 개를 능란하게 휘두르며 인기를 차지했던 모양이다. 연개소문의 명성은 경극과 더불어 지금껏 중국에 전해지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당(唐)나라 제2대 황제 이세민(李世民·626~649 재위) 집권 시, 연개소문의 존재가 어떠했는지를 알려 준다.
대왕국 건설의 야망 실현
연개소문이 <삼국사기>의 기록처럼 666년 고구려에서 죽은 것이 아니라 672년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을 장악, 최초의 천황(天皇)으로 등극한 인물이라고 말하면, “그럴리가…”하며 고개를 갸웃하는 이가 적지 않다.
그가 막강한 고구려를 버리고 ‘보잘것없는 섬나라’ 일본을 취하려 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후기백제(後期百濟)의 번성은 일찌감치 왜를 장악한 덕에 얻은 푸짐한 선물이 아니었을까.
따뜻하고 비가 많이 오는 일본에선 벼농사가 잘되고 나무도 잘 자란다. 전국의 강변에는 질 좋은 사철(砂鐵)이 넘쳐난다. 사철과 땔감인 나무가 많으면 덩달아 제철(製鐵)이 활발히 이뤄진다.
한 번 나무를 베면 30년이 지나도 원상복구가 어려운 우리나라와는 달리, 몬순지대인 일본은 나무를 가꾸는 것보다 민둥산 만들기가 더 어렵다.
제철기술은 일찍이 우리나라에서 일본에 전해졌으나 이 같은 사정으로 고대 이후 우리나라의 제철은 눈에 띄게 기울기 시작한다. 농기구와 공구, 무기 부족현상이 빚어지면서 국력도 약화되기에 이른다.
반면 일본은 풍족한 철기를 바탕으로 국력이 강해진다. 이 같은 철기 소유의 격차 현상은 중세에 이르러 일본으로 하여금 임진왜란을 일으키게 했다. 땔감 부족으로 제철을 하지 못한 비극이 침략을 불러들인 측면이 없지 않다.
연개소문은 일찌감치 이 같은 원리를 깨닫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고구려는 세 아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일본으로 건너가 백제를 몰아내고 제철 천국을 장악한 것이다. 그리고 신라와 제휴하여 한반도와 일본에 걸친 대왕국을 건설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그때까지는 당나라가 고구려를 건드리는 일이 없도록 당 태종 이세민과 그의 수하 이정(李靖)에게 은혜를 베풀어 둔다….
그러나 이 원대한 계획은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영웅 연개소문의 아킬레스건은 바로 세 아들이었다.
어쨌든 고구려는 아들 셋의 불화로 인해 멸망했고, 일본 땅에 바야흐로 연개소문의 신천지가 전개된다.
▶ 경주군 안강(安康)에서 출토된 것으로 전해지는 금제쌍봉문환두상감대도(金製鳳文環頭象嵌大刀). 머리 부분이 둥근 환두대도는 ‘고려검(高麗劍·고구려 칼의 뜻)’이라고도 불린다. 일본에도 고려검의 존재가 <동대사헌물장(東大寺物帳)>에 적혀 있다. 5~6세기 신라 작품. 복원 길이 85㎝. 호암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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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6)‘천무 연개소문’ 발자취를 여러 천황 이야기
사실과 허구 결합된 ‘일본서기’
‘천무 연개소문’ 발자취를 여러 천황 이야기로 토막내 기술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했다. 여러 사람의 ‘천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천무에 관한 얘기를 여러 명의 천황 얘기로 토막내 기술하는 분할표현법이 그것이다.
미스터리 대하드라마 ‘일본서기’
일본 고대사 책 <일본서기(日本書紀)>는 마치 추리 대하드라마 같다.
720년 일본 조정이 펴낸 정부 간행물이지만, 그 구성이 기기묘묘해 추리소설 뺨치게 재미있다.
<일본서기>는 이른바 신들의 시대인 ‘신대(神代)’에 이어, 초대왕 진무(神武·신무)에서 덴무(天武·천무), 지토(持統·지통)에 이르기까지 41명의 덴노(天皇·천황)들의 이야기를 엮어 놓은 정사서(正史書)다.
‘팩트(fact) + 픽션(fiction) = 팩션(faction)’
초대왕 진무, 즉 신무의 즉위를 기원전 660년으로 잡는 등 황당무계한 구성으로 일관돼 있지만, 그 중에는 놀랄 만큼 정확하게 역사적 사실을 묘사해 놓은 대목도 적지 않다.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뒤섞어 만든‘팩션(faction)’이 요즘 유행한다는데 <일본서기>야말로 대형 팩션에 속한다.
이 역사책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덴무천황(天武天皇)을 미화하기 위해 편찬됐다. 쿠데타의 당위성, 덴무라는 인물의 탁월성, 그 집안의 정통성 등등이 자세히 기술돼 있다.
그러나 쿠데타는 어쩔 수 없이 쿠데타일 수밖에 없어 암살과 부정한 모의가 동원되게 마련이다. 게다가 고구려에서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을 공략한 사실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이 같은 문제를 모두 외면할 수도 없다.
그래서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했다. 여러 사람의 ‘덴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덴무에 관한 얘기를 여러 명의 천황 얘기로 토막내 기술하는 분할표현법이 그것이다.
초대천황 진무 대목에서는 연개소문이 일본에 와서 각 지방 토후들을 공략하는 과정을 묘사한다.
그리고 제2대 천황 대목에서는 덴무가 덴지(天智·천지) 천황을 암살함으로써 쿠데타의 첫 단추가 끼워지는 장면을 묘사한다. 이때 전혀 다른 이름으로 사건을 전개하는 것이다. 이어 제14대 천황 대목에 가서는 덴무가 죽을 때 이야기가 펼쳐지도록 해 놓았다.
덴무는 정상적으로 죽은 것이 아니라 암살된다. 임신(壬申)의 난(亂)이란 쿠데타를 함께 일으킨 양자 다케치(高市·고시)에게 죽음을 당한 것이다.
다케치 왕자는 연개소문, 즉 덴무가 죽인 덴지천황의 친아들이다. 덴무와 다케치는 뜻이 통해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성공 후에 자신을 하대하는 덴무에게 원한을 품은 다케치는 덴무를 제거할 기회를 항상 노려왔던 것이다.
이 같은 죽음을 차마 본명으로 기술할 수 없어 덴무도 다케치도 모두 가명으로 등장시키고 있다.
덴무는 여기선 ‘14대 천황 주아이(仲哀·중애)’로 둔갑돼 있다. 그리고 실제 ‘다케치’라 불린 고시는 여기선 ‘다케우치(武內·무내)’로 이름이 약간 달라져 있다.
실존인물과 가공인물 뒤섞어
덴무는 40대 천황이다.
14대와 40대. 다케우치와 다케치. 묘한 대비다.‘주아이(仲哀)’라는 이름도 다분히 상징적이다.
‘인생의 중도에서 타의에 의해 슬픔을 당했다’는 뜻을 지닌 이름이 아닌가.
<일본서기>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보면, 진실 파악이 가능하도록 구성해 놓은 교묘한 역사서다. 묘하게 진상을 밝히고 있는 위서(僞書)가 바로 <일본서기>라 할 수 있다. 요컨대 한 사람의 천황 이야기를 토막내 여러 천황의 이야기로 엮어 놓았다.
덴무천황의 역사만 토막낸 것이 아니다. 덴무가 암살한 선대 덴지천황도 게이코(景行·경행)라는 이름의 12대 천황으로 분산 서술돼 있다.
게이코천황에게는 쌍둥이 아들이 있었다. 그 중 동생은 야마토다케르(日本武·일본무)라 불렸는데, 힘이 장사인 데다 얼굴도 잘생겼다 한다. 그러나 게이코천황은‘성미가 사납다’하여 야마토다케르를 멀리 싸움터로 내보내기 일쑤였다. 다케르가 반발한 것은 물론이다.
이 대목의 서술을 통해 덴지천황에게도 쌍둥이 아들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고, 그 중 동생이 다케치라 불린 고시 왕자였음을 추측하게 된다.
<일본서기> 집필자는 다케르와 다케치, 흡사한 두 이름으로 이 같은 사실을 은연중에 일러주고 있는 셈이다. 교묘한 필법이다.
<일본서기>는 41대 지토(持統)여왕 기술로 끝나고 있다. 지토는 덴무천황의 황후였다.
687~696년에 천황 자리에 있었던 여성으로 돼 있으나, 실제로 그녀는 천황에 오른 적이 없다. 다만 ‘황후’라는 직분으로 막강한 실권을 행사했을 뿐이다. <일본서기>의 주아이천황의 황후 진구(神功·신공) 대목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천황급의 황후로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진구의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가 많다. 그녀는 어디까지나 가공의 인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사실 ‘진구’라는 여인은 없다. 그러나 지토황후라는 여인은 7세기 중반~8세기 초에 실존했던 인물로, 진구는 그녀의 그림자인 셈이다.
진구황후는 지토의 더블 이미지다.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천황들은 대부분 이와 같이 더블 이미지 내지 트리플 이미지로, 아니 그 이상 분화된 모습으로 묘사돼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고대사 책이 매우 복잡다단하고 어렵기는 하지만, 이 분리기법만 터득하면 이처럼 재미있는 미스터리물도 없다.
<일본서기>는 기원전 660년부터 서기 696년까지 약 1000년에 걸친 천황 이야기를 담은 책으로 여겨져 있으나, 실은 7세기의 일본사를 서술한 책이다. 한문으로 서술돼 있지만, 인명과 지명, 노래, 회화() 등의 경우 우리 옛말로 해독되는 부분이 적지 않다. 일본 고대어와 백제 고대어가 흡사했기 때문이다.
<일본서기>를 읽다 보면 우리 주변에서 이미 사라진 옛말과 만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이 또한 우리를 즐겁게 해 준다.
연개소문의 일본식 이름도 그 중의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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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교수의 고대철강사]
(7) 연개소문 이름에 제철왕국 비밀 있다
연개소문 이름에 제철왕국 비밀 있다
일본식 훈독 표기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는 ‘연못가의 무쇠’ 뜻 해
<일본서기>에 실려 있는 이름 ‘이리가수미’는 다분히 일본어화된 훈독(訓讀) 부름새라 할 수 있다. 이 훈독 부름새를 통해 우리는 연개소문 이름의 참뜻을 추적할 수 있다.
‘연개소문’의 이름 풀이
<일본서기>에 실린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일본식 이름은 ‘이리가수미(伊梨柯須彌·いりかすみ)’다. ‘이리’는 성(姓), ‘가수미’는 이름이다.
우리가 부르는 ‘연개소문’은 한자의 음독(音讀) 부름새이고,‘이리가수미’는 일본어화된 훈독(訓讀) 부름새라 할 수 있다. 비록 일본어화되어 있기는 하나 이를 통해 우리는 연개소문 이름의 참뜻을 추적할 수 있다.
성은 ‘연’ 이름은 ‘무쇠 갈기’
‘이리’란 연(淵), 즉 ‘연못’ ‘샘’의 고구려말 ‘얼(한자로 於乙이라 표기)’이 일본어화된 것이다. ‘가’는 개(蓋)에 해당되는 낱말로 ‘가장자리’ 또는 ‘(무쇠)갈기’의 ‘가’를 가리킨다.
한편 ‘수미’는 소문(蘇文)과 같은 낱말로 ‘숨’ ‘솜’(또는 수·소)이라고도 했다. ‘무쇠’ ‘금’ 등을 뜻하는 고구려말이다. 따라서 ‘이리가수미’란 ‘연못가의 무쇠’ ‘연못가의 금’ 또는 ‘연못·무쇠 갈기’ ‘연못·금 갈기’라는 뜻임을 알 수 있다. ‘연못’이 성이요, ‘무쇠(금) 갈기’가 이름이다.
연개소문에 대해서는 <신당서(新唐書·당나라 역사책으로, 구당서를 다시 엮은 것)> 고려전(高麗傳·고구려에 관한 대목)에 ‘개소문은 그 호를 개금(蓋金)이라고도 했다’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연못가의 무쇠(또는 금)’라는 뜻보다는 성은 ‘연’씨, 이름은 ‘무쇠(금) 갈기’로 보는 편이 타당하다. 무쇠(금) 갈기란 무쇠나 금을 두드려 단야(鍛冶)하는 일을 말한다.
제철, 즉 ‘무쇠 불리기’나 단야, 즉 ‘무쇠 갈기’를 하는 데 있어 반드시 필요한 것이‘대량의 물’이다. 따라서 수도시설이 없던 옛날엔 제철소나 단야공장은 항상 물이 가득한 큰 못가나 샘가에 지어졌다. 땅 속에서 물이 항상 치솟아 오르기 때문에 연못이나 샘은 늘 어른거린다. 그래서 ‘얼’이라 불렸던 것이다.
고구려말도 기술과 함께 전해져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고구려말을 꼽아 보자.
고구려에서는 납을 ‘나믈’이라 불렀다. 한자로는‘나물(那勿)’인데 ‘남은 것’이라는 뜻으로 이같이 불렸다고 한다. 납은 은(銀)과 붙은 상태로 캐지는데 은을 도려낸 나머지 광석이라 해서 ‘나믈’이라 불린 것이다. 나믈이 현대어 납으로 바뀐 것이다. 나믈은 일본에 건너가 납을 가리키는‘나마리(なまり)’로 바뀌었다.
납은 산화(酸化)시키는 방법에 따라 다양한 빛깔의 그림물감이 된다. 납을 빨갛게 달궈 녹인 뒤 공기와 접촉해 산화시키면 아름다운 안료를 만들 수 있다. 갑자기 식힌 것은 연노랑, 즉 은빛깔로, 천천히 식힌 것은 빨간 빛이 도는 노랑, 즉 황금빛깔로 변한다.
들기름에 이 안료를 섞어서 끓여 만든 물감으로 그리는 유화의 기법은 7세기 고구려에서 일본에 전해졌다. 기술과 함께 언어도 이동한다.
천무는 일본 최초 점성대 세워
<일본서기>의 덴무(天武·천무)천황 대목의 첫장에는 ‘천문(天文)과 둔갑(遁甲)에 능했다’는 구절이 나온다. 덴지(天智·천지) 등 다른 천황들 대목에는 보이지 않는 서술이다.
덴무가 점성술이나 오행술(五行術)에 조예가 깊고 기문(奇門) 둔갑술에도 뛰어난 인물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즉위한 지 4년(675년) 된 해에 일본 최초의 점성대(占星臺)를 지었다는 기록도 눈에 띈다.
이에 앞선 신라 선덕여왕(632~647 재위) 때 지었다는 첨성대(瞻星臺·국보 제31호)가 덴무천황이 지었다는 점성대와 흡사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추측을 낳게 한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첨성대는 ‘점성대’라고도 불렸다 하니, 두 점성대 간의 일치성을 더욱 짐작하게 한다. 첨성대의 높이는 19척 5촌, 위의 원(圓) 둘레가 21척 6촌, 아래의 원 둘레는 35척 7촌이며 중간 이상이 위로 뚫려 있어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 별을 관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현존하는 실물과 일치되는 기록이다.
고구려에도 첨성대는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에 ‘평양성 안에 9묘(廟)와 9지(池)가 있는데… 그 못가에 첨성대가 있다’는 기록이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에도 ‘평양의 첨성대 옛터가 평양부 남쪽 3리(里)에 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신라 첨성대가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가히 ‘천문학적인’ 기적인가.
별을 보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국가의 길흉과 한 해 농사를 점치기 위해 별이 나타내는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역법을 만들거나 그 오차를 바로잡기 위해 일월(日月)·오성(五星) 등의 운행을 관측하는 것이다.
덴무천황이 축조한 점성대에서는 이 두 가지 목적 외에 천제(天祭)까지 지냈을 것으로 여겨진다. 덴무는 쿠데타 길목에서도 길흉을 점쳤고, 천신(天神)을 향해 제를 올린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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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8) 연개소문의 분신 ‘아베노히라부’
아베노히라부는 일본 속 북방 이민족인 에미시(蝦夷) 토벌에 자주 출정했는데, 에미시는 그를 먼 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벌벌 떨며 곧장 항복하곤 했다. 아베노히라부는 영락없이 연개소문 같았다.
연개소문의 분신 ‘아베노히라부’ <阿倍比羅夫>
일본에서 얻은 아들로 무쇠터 돌며 역할 대행
‘아비 빌린 사나이’
서기 660년(제명여왕 6년) 정월 대목의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사신 ‘을상(乙相) 가수몬(賀取文)’ 일행 100여명이 일본 규슈 쓰쿠시(九州 筑紫)에 와 있다고 전한다.
▶ 사람은 물론 말까지 철갑으로 무장하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기마인물형토기. 높이 23.2㎝·폭 14.7㎝로 5세기 무렵에 제작된 가야 시대의 토기. 가야의 철갑 제조기술은 주로 고구려에서 전해졌다. 국보 제275호로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쓰쿠시는 한반도를 향한 북단 항구였다. ‘을상 가수몬’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을 가리키는 일본식 표기 중 하나다. ‘을’ ‘어울(於乙)’은 연못, 즉 연(淵)을 가리키는 고구려 말이요, ‘가수몬’은 ‘개소문’을 가리키는 일본식 발음이다.
660년 7월은 백제가 멸망한 달이다. 그해 정월에 연개소문은 왜 일본에 가 있었던 것일까.
쓰쿠시는 당시 일본의 전진기지였다. 백제를 돕기 위해 제명여왕(齊明女王) 이하 조정대신과 장군·병사들이 두루 포진해 있던 곳이다.
연개소문이 그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그해 5월 개소문 일행이 나니와(難波·현재 오사카)에 도착해 2개월 뒤 귀국했다는 사실이 <일본서기>에 기술되어 있다.
연개소문은 백제의 멸망을 확인하고 일본이 장차 어떻게 될 것인지 정세를 파악한 후 고구려로 돌아갔는가.
제명여왕은 그해 7월 쓰쿠시에서 숨을 거둔다.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얘기도 있으나, 암살당했다는 설도 있다.
멸망한 백제를 되살리기 위해 백제에 병력을 보내 나당연합군과 싸우고자 했던 아들 교기(翹岐·훗날의 덴지천황)와 달리 제명여왕은 전쟁반대론자였다. 그녀는 백제부흥운동이 일본까지 망하게 할 것이라고 만류했다. 따라서 백제부흥론자들에 의해 암살되었으리라는 것이다.
어떻든 제명여왕이 죽은 후, 아들 교기는 백제 왕자 여풍장(餘豊璋)을 총사령관으로 삼은 구원군을 백제로 보내 항전했으나 끝내 패하고 만다. 663년 9월 7일의 일이다.
혈연관계로 지방 토후들 장악
연개소문은 이처럼 <일본서기>에 적잖이 등장한다. 특히 660~662년에 당나라와 고구려의 치열한 전투 상황으로 볼 때 연개소문의 일본 나들이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잦고 체류기간도 길다.
평양에서 대동강을 타고 서해로 나와, 일본에 도착하기까지의 항로도 그리 수월하지 않다. 더군다나 일본에 자주 왕래하자면, 일본 지방 곳곳에 상당한 규모의 숙소도 확보해 놓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이 문제를 거뜬히 해결했다. 각 지방 토후의 딸들과 인연을 맺어 아들·딸을 낳게 함으로써 가족관계를 넓혀 나간 것이다.
훗날 고려 태조 왕건의 ‘사돈 늘리기’ 묘법이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찌감치 일본에서 얻은 아들 중에 ‘아베노히라부(阿倍比羅夫·あべのひらぶ)’가 있었다.
‘아베’란 아비, 즉 아버지를 뜻하는 우리 옛말이다. ‘히라’는 ‘비라’ 즉 ‘빌린’이란 뜻의 일본어화된 우리말. 부(夫)는 ‘사나이’를 가리키는 한어(漢語)다.
즉 ‘아베노히라부’란 ‘아베 빌린 사나이’를 뜻하는 묘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연개소문과 모습이 흡사했던 그 아들이 연개소문처럼 변장하여 그의 역할을 대행했던 것은 아닌지. 연개소문처럼 변장하기는 쉬웠다. 오글오글한 용의 수염처럼 붉은 구레나룻을 턱에 달고,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다섯 개의 칼을 허리에 차고, 말을 탈 땐 엎드린 신하를 밟고 방자하게 올라서면 되는 것이다.
아스카~관동지방 손에 넣어
아베노히라부는 일본 속의 북방 이민족인 에미시(蝦夷·えみし) 토벌에 자주 출정했는데, 에미시는 아베를 먼 발치에서 보기만 해도 벌벌 떨며 곧장 항복하곤 했다. 아베노히라부는 영락없이 연개소문 같았고, 에미시 사이에 연개소문은 공포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은 672년 임신(壬申)의 난(亂)을 일으키기 전에 일본 전국의 무쇠터를 장악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당시의 수도인 중부지방 아스카(明日香)에서 멀리 떨어진 동국(東國·현재 관동지방)까지 두루 손에 넣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동원된 것이 아베노히라부였다. 히라부는 연개소문처럼 변장하여 동국의 무쇠터를 돌며 쿠데타 동참을 강권하고 다녔다.
그때 권유의 결과를 아비 덴무에게 전달한 메모가 노래 형식으로 지금껏 남아 있는‘동국가(東國歌)’다. 4516수나 전해져 온 일본 고대 가요 <만엽집(萬葉集)> 중의 일부분이다.
‘아즈마우타(東歌·あづまうた)’라 일컬어지는 이 노래는 대부분이 연가(戀歌)요, 그 중에는 아주 진한 성애가도 적지 않다. 극비의 보고 문건이었기 때문에 발각될 경우를 염려해 야한 노래처럼 꾸며 이중 보고문을 작성한 것이다.
덴무천황의 아들로 기록
아베노히라부는 덴무천황(天武天皇)의 아들 명단에 시기노미코(しきのみこ)로 등재되어 있다. ‘시기’란 ‘무쇠 성’의 뜻이다. ‘시’는 ‘무쇠’, ‘기’는 ‘성’이라는 뜻의 고대 한국어다.
그가 일찍이 무쇠 고장을 두루 돌아다니며 쿠데타에 동참하기를 권유한 공로로 그 같은 이름을 얻게 된 것일까.
그러나 어떻게 된 것인지 그는 중용된 흔적이 없고, 말년을 어떻게 마감했는지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꼭두각시는 끝내 꼭두각시일 수밖에 없었는가.
아베노히라부, 즉 시기노미코는 북방민족 에미시뿐 아니라 요즘의 중국 북동부에 살고 있던 부족 숙신(肅愼)과도 여러 차례 싸워 이겼다.
‘아베 빌린 사나이’는 아베만큼 강한 명장이었던 것이다. 그의 훗날 삶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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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9) ‘곰’신앙 맥족<貊族>, 일본 무쇠터 장
요충지 선점한 ‘호랑이’ 숭상 예부족<濊部族> 제압
‘고마(こま)’라는 일본어가 있다. ‘고구려’나 ‘고구려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고마’는 ‘곰’을 가리키는 우리 옛말이다. 고구려인의 조상인 맥족이 곰을 숭상해 이같이 불렸던 것이다.
일본 속의 ‘곰’과 ‘호랑이’
곰과 호랑이는 우리나라 개국사에 등장하는 동물이다. 우리나라 역사 첫머리에 왜 하필이면 곰과 호랑이가 등장하는지, 그들이 상징하는 것은 무엇인지, <삼국유사>의 고조선 대목을 살펴보자.
같은 혈통에서 갈라진 맥족과 예족
옛날 환인(桓因·하느님)의 아들 환웅(桓雄)은 3000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 꼭대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왔다. 그 무렵 곰 한 마리와 호랑이 한 마리가 같은 굴 속에 살고 있었는데, 환웅에게 사람 되기를 소원했다. 환웅이 쑥 한 다발과 마늘 20개를 주면서 “이것을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고 지내면 사람이 될 수 있다”라고 했다.
곰과 호랑이는 이것을 먹으며 삼칠일(三七日·스무하루 날) 동안 지냈는데, 환웅이 시킨 대로 한 곰은 여자의 몸이 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호랑이는 사람이 되지 못했다. 여자의 몸이 된 웅녀(熊女)는 결혼할 상대가 없어 신단수 아래서 아이 갖기를 소원했다. 이에 환웅은 잠시 사람으로 변해 웅녀와 결혼해 아들을 낳았다. 그가 단군왕검(檀君王儉)이다. (<삼국유사> 제1권)
여기서 말하는 곰과 호랑이는 그 무렵 요하 일대, 또는 압록강과 혼강 유역에 살고 있던 맥(貊)부족과 예(濊)부족을 상징한다. 맥부족은 곰을, 예부족은 호랑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에 맥은 ‘곰’으로, 예는 ‘호랑이’로 각기 상징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원래 한 굴에서 살았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처음에는 한 부족이었다가 훗날 분파된 것인지도 모른다. 역사책에는 맥족과 예족을 합쳐 예맥족이라 부른다.
‘고마(こま)’라는 일본말이 있다. ‘고구려’나 ‘고구려 사람’을 가리키는 낱말이다. 한자로는 ‘맥(貊)’ 또는 ‘고려(高麗)’라 쓴다(왕건이 창건한 고려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고마’는 ‘곰’을 가리키는 우리 옛말로 ‘고모’라고도 했다. 고구려인의 조상인 맥족이 곰을 숭상해 이같이 불렸던 것이다.
한편 ‘에미시(えみし)’라는 일본말은 ‘예국(濊國) 사람’을 뜻한다. 호랑이를 숭상한 상고시대 우리나라의 한 부족이었다.
예(濊)라는 한자에는 ‘굽이쳐 흐르는 탁한 강물’의 뜻이 있는데 이 부족은 흑룡강·모란강·두만강 등 중국과 한반도 북동부에 걸쳐 살았다. ‘에미시’의 ‘에’는 ‘예’를, ‘미’는 ‘물’을 가리킨 고구려말인 동시에 일본말이다.
‘시’는 ‘사람’ 특히 ‘남자’를 뜻한 우리 옛말 ‘지’가 일본화된 것이다. 따라서 ‘에미시’는 ‘예수(濊水) 사람’을 의미했다.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이미 두만강 기슭의 무산 호곡리에 철기문화를 연 부족으로 알려져 있다. 이 예 사람들이 훗날 강원도 강릉 일대에 ‘예국’ 또는 ‘철국(鐵國)’이라는 이름의 강성한 제철국가를 세웠으나 1~2세기에 갑자기 멸망한다. 멸망의 원인은 알려져 있지 않다.
신라의 공격을 받아 병합됐다는 설도 있고, 가야 건국에 인력이 쏠린 탓이라고도 한다. 어떻든 예 사람들은 신라와 가야, 백제로 뿔뿔이 흩어졌고 많은 백성들은 배를 타고 일본으로 이주했다. 예족들은 조선·항해술에도 뛰어났다.
예 사람들(에미시)은 고구려계인 고마, 즉 맥 사람들에 앞서 일본을 선점한 한국인이었다.
이와 관련해 <일본서기>에는 여러 편의 노래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로 수록된 노래가 ‘예와 맥이 다투어 맥이 이겼다’는 맥 우두머리의 승전가다. 왜땅의 무쇠터 등 요충지를 먼저 차지하고 있던 예부족을, 나중에 온 맥부족이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왜땅을 두고 한국계 사람들 간의 싸움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첫 기록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 옛말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일본 학자들은 이를 ‘남편이 아내에게 바치는 사랑의 노래’로 오역해 버렸다. 당연히 노래 내용이 뒤죽박죽이 될 수밖에 없다.
어떻든 고마는 강했다. 에미시는 점차 변방으로 밀려 가는 형국이 되고 만다. 그러나 바다와 강을 무대로 날렵하게 활약하는 에미시의 세력은 끈질겨서 연개소문은 아들 아베노히라부(阿倍比羅夫)를 시켜 자주 토벌을 하게 했다. 아베는 내친 김에 숙신(肅愼)까지 쳐서 2m나 되는 큰 붉은 곰 가죽 70장을 전리품으로 가져와 조정에 바치기도 했다.
‘곰의 피’로 정치세력·제철권력 확장
이 무렵 연개소문이 덴지(天智)천황의 비(妃)를 임신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덴지천황은 그 비를 제철 재벌이요 대신(大臣)인 후지하라노가마타리(藤原鎌足)에게 하가(下嫁)시킨다. ‘하가’란 왕족이 신하에게 시집가는 것을 말한다.
만약 아들을 낳거든 가마타리 아이로 입적시키고, 딸을 낳거든 덴지에게 돌려보내 달라는 당부까지 곁들인 이례적인 하가였다. 가마타리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덴지는 가마타리에게 선심을 베풀 겸, 연개소문의 아이를 가진 비를 단칼에 처리해 버린 셈이다.
비의 이름은 경왕녀(鏡王女). 백제 무왕과 신라 선화공주 사이에 태어난 딸로 여겨지고 있다. 무왕이 죽은 후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백제에 정변이 일어나자, 이복오빠인 교기(翹岐·훗날의 덴지천황)를 따라 일본에 망명했던 여인이다.
어떻든 이 하가 사건은 당시의 일본을 떠들썩하게 했고, 연개소문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심지어 고구려 사람들까지 호된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일본에 있던 저명한 고구려인 화가 고마로(子麻呂)는 연개소문을 자기 집에 일부러 초대해 면박을 주었다. 아베노히라부가 조정에 바친 큰 붉은 곰 가죽 70장을 빌려와 그날 잔치 자리의 방석으로 깔아 수모를 준 것이다.
‘70’은 당시의 고구려말과 일본말로 ‘나나소(ななそ)’라 했는데, 이 말은 ‘성기를 나누어 가지소’라는 뜻도 된다. 고구려말과 고대의 일본말은 놀랄 만큼 닮았다.
붉은 곰은 붉은 수염의 연개소문을 비유한 동시에, 곰의 가죽, 즉 ‘곰의 피(皮)’로 고구려인의 피를 표현해 권력층의 여성 사냥으로 정치세력을 확장해 나간 연개소문을 신랄하게 비판했던 것이다.
<일본서기>의 659년 대목에 보이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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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0) ‘요시노강의 은어’로 연개소문 빗대
일본 지명 ‘시마’는 일관제철터
동요 ‘요시노강의 은어’로 바다 건너온 연개소문 빗대
바다에서 살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은어의 특성 때문에, 고구려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와 쿠데타까지 일으킨 연개소문을, 은어에 빗대 야유한 노래가 ‘요시노강의 은어’다.
쿠데타 중에 유행한 노래
672년, 연개소문이 일본서 일으킨 쿠데타 ‘임신(壬申)의 난(亂)’ 중에 유행한 노래가 있다. ‘요시노(吉野·よしの)강의 은어(銀魚)’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는 노래다.
요시노강이란, 나라(奈良·なら)현(縣) 남부의 넓은 산지(山地)와 요시노초(吉野町)에 걸쳐 흐르는 굴곡이 많은 강이다.
은어는 우리나라와 일본 등 동아시아의 강에 주로 사는 20~30㎝ 길이의 민물고기로, 새끼일 때는 바다에서 지내다 자라면 강물을 타고 올라가 맑은 여울에서 살며, 모래나 자갈 밑에 알을 낳는다.
한강과 두만강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모든 강에 사는 맛과 향이 좋은 물고기다.
은어의 일본말 ‘아유(あゆ)’의 숨은 뜻
은어의 일본말은 ‘아유(あゆ)’다.
쿠데타 때, 왜 요시노강의 은어 노래가 유행한 것일까.
당시 연개소문은 요시노강변에 살고 있었다. 또한 은어는 바다에서 살다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는 특성이 있다. 이 두 사실로 볼 때 고구려에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와 임금자리에 오르려고 쿠데타까지 일으킨 연개소문을, 은어에 빗대 야유한 노래가 ‘요시노강의 은어’다.
은어의 일본말 ‘아유’는, ‘가장 높은 곳으로 간다’는 뜻의 우리 옛말 ‘아예’가 바뀐 낱말이다. ‘아’는 ‘가장 높은 곳’ 또는 ‘최고의 것’을 가리키는 우리 고대어요, ‘예’는‘간다’를 뜻하는 옛말이다.
‘최고로 높은 곳’이란 바로 임금자리를 의미했다. 바다에서 하류를 지나 상류까지 헤엄쳐 오르는 물고기 은어의 노래는, 요시노강변에 살면서 임금자리를 노린 연개소문을 비난한 노래였던 것이다. 물론 연개소문, 즉 훗날의 덴무천황(天武天皇) 반대파들이 지어 퍼뜨린 노래다.
정치적인 목적으로 가사를 지어 아이들로 하여금 부르게 하는 노래를, 고대의 일본인들은 ‘동요(童謠)’라 불렀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유행한 ‘서동요(薯童謠)’와 흡사한 노래들이다.
‘서동요’는 훗날의 백제 무왕(武王)이 ‘서동’이라는 이름의 청년이었을 때,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 딸 선화(善花)공주가 밤마다 서동을 찾아온다며, 아이들을 시켜 서라벌 장안에 유행시킨 노래다. 이 노래 때문에 선화공주는 왕궁에서 쫓겨나 서동, 즉 훗날의 백제 무왕과 결혼하게 된 것이다. 노래의 힘은 대단하다.
‘요시노강의 은어’는 일본 조정이 편찬한 역사책 <일본서기>의 덴지천황(天智天皇) 대목 맨 뒤에 실려 있다. 덴지는 연개소문에 의해 암살된 천황이다. 덴지천황 암살과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호에서 밝히겠다.
연개소문은 덴지천황이 죽은 다음 그 아들 오오토모(大友·おおとも) 황태자가 즉위하는 것을 기다렸다가 쿠데타를 일으킨 것이다. 그럼 그 동요라는 것을 현대의 우리 말로 옮겨 보자.
물의 요시노(吉野), 요시노의 은어여
은어 꽂이 하고파
시마 패 모았으니
아! 그르지요(그릇된 일이지요)
해내지는 못해
재지도(뽑내지도) 못해
알리고파라 아! 그르지요
‘요시노강에 사는 은어 아유(あゆ), 위로 올라가 임금이 되려고 하는 은어여, 칼로 꽂아 없애고 싶네. 뜻대로는 안 될 것이네. 시마 패 모았으니 그건 아주 나쁜 짓이네’라는 내용의 노래다.
‘시마 패 모았으니 나쁜 짓이다’는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시마(島·しま)’란 ‘섬’을 뜻하는 일본말이다. 그런데 일본 지명 중에는 섬이 아닌데도 ‘시마’자(字)가 붙은 지역이 시마네(島根)·히로시마(島)·가시마(鹿島)·시마반도(志摩半島) 등 수두룩하다. 이와 같이 섬 아닌데도 ‘시마’자가 붙은 지역은, 영낙없이 고대의 제철터였던 곳이다.
전국에 산재한 제철집단 끌어 모아
‘사·시·수·세·소·수에’ 등의 낱말은 모두 ‘무쇠’를 가리키는 우리 옛말이었다. ‘마’는 ‘공간’ ‘터’를 뜻하는 역시 우리 옛말. 이 말이 일본으로 건너가 그대로 ‘공간’을 뜻하는 일본말 ‘마(間·ま)’가 되었다.
‘시마’란 ‘무쇠 터’를 가리키는 우리 말이요, 동시에 일본말인 것이다. 따라서 ‘시마 패’란 ‘제철집단’을 뜻하는 말로, 제철집단의 세력 규합을 비난하는 노래 마디임을 알 수 있다.
일본에는 엄청나게 많은 고대 제철터가 있었다. 규슈(九州) 일대와 시코쿠()·히로시마(島)·오카야마(岡山)·시마네(島根)·돗토리(鳥取)·후쿠이(福井)·아이치(愛知)·기후(岐阜)·시가(滋賀)·이시카와(石川)·미에(三重)·효고(兵庫)·시즈오카()현 등을 비롯해 이와테(岩手)·미야기(宮城)·후쿠시마(福島)현 등 동북지방과, 이바라기(茨城)·군마(群馬)·토치기()·치바(千葉)현 등의 관동(關東)지방은 물론, 지금의 수도인 도쿄(東京)와 대도시인 오사카(大阪), 옛 도읍지 교토(京都)·나라(奈良)에 이르기까지, 일찍이 제철터 아닌 고장이 드물다.
이들 지방에는 수많은 강이 흐르고 있고, 그 강변에는 제철의 원자재인 질(質) 좋은 사철(砂鐵)이 풍부히 쌓여 있었으며, 주변 산에는 땔감인 나무들이 풍성히 자라고 있었다.
원자재인 사철의 질적·양적 차이는 있었을 망정 일본 전체가 거의 제철터였던 셈이다. 고대의 일본은 보기 드문 제철왕국 중의 하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연개소문이 일찌감치 일본 땅에 집착, 자주 들락거리다가 7세기 중반부터는 이들 제철터를 상당부분 장악했음을 그의 행적으로 짐작케 된다.
특히 그가 노린 곳은 요즘의 오카야마(岡山)현으로, 당시에는 키비시마(吉備島)라 불린 무쇠칼의 명품 고장이었다.
‘키비(吉備·きび)’란 ‘기비’, 즉 ‘긴 칼’을 뜻한 우리 고대어다. 그리고 ‘시마(島·しま)’란 앞에서 설명한 대로 ‘제철터’의 뜻. 이 제철터의 개념엔 칼 등의 철기를 만드는 단야장(鍛冶場)까지 포함된다. 무쇠를 불리고 그 불린 선철이나 강철로 철기를 두드려 만드는 대장 터 역할까지 맡아 했던 것이다.
그야말로 일관제철터였던 셈이다. 기비, 즉 오카야마의 수령(首領)은 원래 덴지천황 휘하였는데, 쿠데타에 앞서 연개소문 휘하로 들어갔다. 배신을 한 것이다. 죽은 덴지의 아들 오오토모 황태자는 크게 노하고, 즉각 자객(刺客)을 보내 그를 살해했다. 큰 사건이 빚어진 것이다.
‘요시노강의 은어’에 보이는 ‘시마 패 모았으니, 아! 그르지요(나쁘지요)’란 기비 고장을 비롯해 수많은 무쇠터를 끌어 모은 연개소문에 대한 비난의 소리였던 셈이다. 임신의 난은 치열한 ‘무쇠터 찾기’ 싸움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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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1)궁지에 몰린 연개소문의 야망
사냥은 연개소문이 주관해서 야마시나(山科)라는 교토(京都) 교외의 산야에서 베풀어졌다. 미리 이 고장 지리 등 사정을 소상히 파악한 연개소문은, 험지(險地)로 덴지천황을 몰아 사살(射殺)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쿠데타는 두번 있었다
백제계의 천황(天皇) 덴지(天智·천지) 8년(669년) 음력 5월 5일, 대대적인 ‘약사냥’이 베풀어졌다.
약사냥이란 산과 들판에 뛰노는 사슴을 잡아 그 녹용(鹿茸)을 채취하고 약으로 삼는 사냥으로, 해마다 사슴뿔에 피가 잔뜩 고이는 초여름에 베풀어졌다. 천황이 직접 참가하는 대규모 사냥으로 당시 고위층 남성들의 녹용에 대한 높은 관심을 읽을 수 있다.
사슴 사냥서 덴지천황 시해 수포로
이날의 사냥은 연개소문이 주관해서 야마시나(山科)라는 교토(京都) 교외의 산야에서 베풀어졌다. 이 고장에 특별히 좋은 사슴이 많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미리 이 고장 지리(地理) 등 사정을 소상히 파악한 연개소문은, 험지(險地)로 덴지천황을 몰아 사살(射殺)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사냥을 핑계로 쿠데타를 감행할 작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화살은 빗나가, 신발 한짝만을 떨어뜨린 채 덴지는 급히 달아난다.
이 바람에 근처에 있던 내대신(內大臣) 후지하라 가마타리(藤原鎌足)의 말이 소스라치게 놀라 뛰어오르며, 가마타리를 말에서 떨어뜨리는 사고가 발생했다.
크게 다친 가마타리는 곧장 집으로 실려가 응급처치를 받았으나 5개월 후 56세로 세상을 떠났다. 척추와 흉추(胸椎) 및 왼팔 관절 골절, 하반신 마비로 인한 합병증이 사망 원인이었다.
연개소문은 가마타리와 친했다. 일본 중부지방과 동부지방의 무쇠터를 장악하고 있던 ‘제철 재벌’ 가마타리는 이용 가치가 높은 인물이기도 했지만, 손꼽히는 병술가(兵術家)이기도 했다. 때문에 뛰어난 병술가였던 연개소문과 상통하는 바가 많았다.
가마타리는 백제 무왕(武王) 정권의 재상인 대좌평(大佐平)을 지냈다. 무왕이 죽자 곧장 일본에 망명, 역시 일본에 피신한 무왕비(武王妃)와 그 아들 교기(翹岐), 즉 훗날의 덴지천황을 받들어 일본 내의 백제 정권 지키기에 힘쓴 인물이다.
백제 재상 때 이름은 사택지적(砂宅智積). 우리나라에 오직 하나뿐인 백제 석비(石碑) ‘사택지적비’는 그의 글을 화강암에 아로새겨 놓은 것이다. 높이 3.36척·폭 1.25척·두께 0.96척·56자의 단정한 해서체(楷書體) 글씨와 품격 높은 한문 문장이 예사 작품이 아님을 일깨워 준다.
아쉽게도 이 석비는 반토막으로 동강이 나 있다. 1948년 부여시 냇가에서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빨랫돌로 쓰기 위해 두 동강 낸 것으로 추측된다.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사택(砂宅)’이란 백제식 성씨다. ‘사’는 ‘무쇠’의 우리 옛말. ‘택’은 일찍이 ‘탁’ ‘타구’라 읽힌 ‘달군다’는 뜻의 백제식 우리말이었다. ‘사탁’ ‘사타구’란 ‘무쇠를 불린다’ 는 뜻의 백제식 옛말이다.
사택지적의 조상이 일찍부터 제철(製鐵) 집안의 인물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조상이 가야계 신직자(神職者)였다는 말도 있는 것으로 미루어, 가야시대 때 일본으로 건너간 집안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후원자 ‘제철 재벌’ 가마타리 잃어
애초에 덴지천황 계열이었던 사택지적, 즉 후지하라 가마타리가 덴지의 라이벌인 연개소문 쪽으로 기운 데는 몇 가지 원인이 있었다.
첫째, 인물의 됨됨이가 연개소문 쪽이 뛰어났고
둘째, 덴지, 즉 교기는 어머니가 같은 여동생 ‘동모매(同母妹)’와 육체적인 관계를 맺어 세간(世間)에 비난의 말들이 많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어머니가 다른 남매끼리의 혼인은 인정되었으나, 한 어머니의 남매끼리 혼인하는 일은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다.
셋째, 가마타리와 결혼한 정실(正室)부인 경(鏡)왕녀는 덴지천황의 비(妃)였다. 덴지천황은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경왕녀를 가마타리에게 시집 보낸다.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을 신하에게 시집 보내는 일은 그 신하에 대한 최고의 대우였다.
그러나 실은 그 아이는 덴지의 아이가 아니라 연개소문의 아이였다. 연개소문이 경왕녀를 범했던 것이다. 가마타리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따라서 경왕녀가 낳는 아이가 곧 가마타리의 장자(長子)가 되는 셈이다. 자기 아들의 아버지가 되는 연개소문에게, 가마타리는 당연히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사정으로 친해진 후원자 가마타리를, 연개소문은 졸지에 잃은 것이다. 물론 쿠데타도 실패로 그쳤다. 그럼 덴지천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일본 고대사를 엮은 정사서(正史書) <일본서기>의 두 번째 천황 수정(綏靖) 대목에는, 산 속 굴창고에 숨어 있는 덴지를 추적해 화살로 사살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수정천황’이란 곧 연개소문을 가리킨 가명(假名)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론 모두 가명으로 표기되어 있다.
산 중에 있는 이 굴은 술이나 얼음을 저장하는 창고였다. 이 굴 안에 덴지는 혼자 누워 있었다. 발을 다쳐 움직이지 못하는 상태였다. 사슴 사냥 때 연개소문이 쏜 화살을 맞은 것이다.
“쏘아 죽이시죠!”
연개소문이, 옆에 있던 형 오오노오미(多臣) 홈치(品治)에게 말했으나, 형 홈치는 벌벌 떨기만 할 뿐, 감히 쏘지를 못했다. 그러자 연개소문은 형이 들고 있던 화살을 낚아채어 덴지를 쏘았다. 가슴에 한 번 쏘더니 등에다 대고 또 쏘아 확인 사살했다.
덴지천황은 이렇게 죽었다.
요시노산 들어가 ‘임신의 난’ 준비
그러나 덴지의 신하들은 그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아들 오오토모(大友·おおとも), 즉 대우 황태자를 서둘러 즉위시켰으나, 그 사실 또한 공표하지 않은 채 연개소문을 불러 물었다. 덴지천황의 병환이 몹시 심하니 대신 국정(國政)을 맡아 달라는 것이었다. 국정을 맡겠다면 그 자리에서 연개소문을 죽일 작정이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사냥을 잘못 펼친 자신의 잘못이 크다며, 사죄하는 뜻으로 당장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요시노(吉野)산에 들어가 수도(修道)하겠다고 눈물을 흘렸다.
덴지천황의 왕비와 새로 즉위한 아들 오오토모는 그의 말을 곧이 받아들여, 연개소문이 머리를 깎고 요시노산에 들어가 중이 되는 것을 허락했다. 이 말을 들은 백성들은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서 내보냈다”고 한숨 지었다.
요시노산을 근거지 삼아 일으킨 제2의 쿠데타 ‘임신의 난’은 이렇게 해서 준비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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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2)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해 돋는 데와 가장 가까운 나라’의 뜻으로,
서기 670년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이라 새로 정한 왜(倭)는,
‘부상(扶桑)’ ‘부상국(扶桑國)’을 일본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삼아 왔다.
덴무천황 시대의 동전 ‘부본전’<富本錢>
우리나라와 일본의 셈씨 ①
우리나라의 셈씨(수사·數詞)는 하나·둘·셋·넷… 으로 시작하고, 일본의 경우는 히·후·미·요…(ひ·ふ·み·よ…)로 시작한다. 겉보기는 전혀 다르다.
그런데 두 나라의 셈씨가 옛날에는 우리나라의 일부 낱말과 비슷했다고 하면, 억지주장이라고 핀잔받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찬찬히 들어주기 바란다.
일본 수사는 고구려 언어 영향
고대 우리나라에는 신라·고구려·백제 세 나라가 서로 세력을 겨루고 있었다. 생활풍습은 물론 말도 달랐다.
가령 ‘물’만 해도 신라에서는 ‘몰’이라 했는가 하면, 고구려에서는 ‘밀’ 또는 ‘미’라 불렀고, 백제에서는 ‘미’, ‘매’라 했다.
고구려말과 백제말은 흡사했다. 백제는 고구려에서 갈라져 나온 나라였기 때문이다.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셈씨는 신라 계통의 말에서 유래된 것이고, 일본이 쓰고 있는 셈씨는 고구려 계통 낱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은 일찍이 우리 삼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동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탓으로 일본은 신라의 영향을 가장 먼저, 가장 일찍부터 받았지만, 4~5세기 이후의 일본은 백제와 고구려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특히 백제를 통해 불교를 받아들여, 종교·예술·식생활문화의 경우 백제말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본이 고구려 언어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은 7세기 이후의 일로 보여진다.
벼농사가 잘되고, 사철(砂鐵)과 땔감 나무가 풍부한 ‘제철천국(製鐵天國)’ 일본을 탐낸 고구려 권력층의 잇따른 진출이 계기가 됐다.
연개소문이 일본에 눈독 들이기 전, 그의 외가 집안인 ‘대(大)씨’ 사람들은 일찌감치 일본 공략에 힘을 기울였다. 이들은 일본에서는 ‘다(多)씨’로 통했다.
다씨 세력은 막강했다. 연개소문이 일본에 가자마자 쿠데타를 일으킬 근거를 마련한 것도, 이 외가의 엄청난 세력과 재력 덕이었다.
연개소문은 다씨 문중의 으뜸가는 제철 재벌 오노오미 홈치(多臣品治)의 여동생이요, 자신의 외가 숙모 되는 여인과 일본에서 결혼, 훗날 황후로 삼는다.
막강한 재력과 뛰어난 지략을 갖춘 여인이었다. 일본에서 연개소문의 ‘힘’은 이 여인에게서 빚어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치권력은 경제를 장악하고, 경제력은 언어를 사로잡는다. 언어 중에서도 가장 먼저 권력층이 장악하는 것은 바로 셈씨, 즉 수사(數詞)다.
경제는 어쩌면 ‘수’의 변통이라고도 할 수 있다. 수 놀림 속에 경제는, 아니 정치는 굴러가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셈씨는 이렇게 해서 7세기 일본 땅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게 된다.
당시 도읍지 아스카에서 출토
1999년 1월, 일본 각 신문은 일본서 가장 오래된 동전 ‘부본전(富本錢)’이 나라(奈良)현 아스카(明日香)촌 연못에서 발굴됐다고 대서특필했다.
‘부본(富本)’이라고 새겨진 7세기의 동전 33개를 출토했다는 것이다. 아스카촌은 연개소문, 즉 덴무천황(天武天皇)이 도읍으로 삼은 고을이다.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의 덴무천황(天武天皇) 12년(683년) 4월 15일 조에는 “지금으로부터 반드시 동전을 쓰도록 하라. 은전(銀錢) 쓰는 일은 없어야 한다”라는 대목이 보이는데, 그 기록과 합치되는 동전임이 밝혀진 것이다.
동전의 크기는 지름 2.5㎝, 무게 4.25~4.59g으로 한가운데 네모 구멍이 뚫려 있고, 구멍 아래 위에 ‘富本(부본)’이라는 한자와, 좌우에는 7개의 둥근 혹이 도드라져 있다. 이것은 일곱 개의 별, 즉 북두칠성을 나타낸 문양이다. 고대의 천문학에서는 북두칠성을 매우 중시했다.
그럼 이 ‘부본’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낱말일까.
중국 후한(後漢) 때 임금 광무제(光武帝·서기 25~57년)에게 마원(馬援)이라는 신하가 “국민을 부유하게 만드는 근본은 화폐”라고 주장, ‘오주전’ 제조를 건의했다는데, ‘부본’이란 낱말은 이 옛일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냐는 설이 일본 학자들 간에 나돌았다.
그러나 이 두 글자에는 보다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2세기에서부터 4세기에 걸쳐 엮어졌다고 보여지는 중국의 고전 <산해경(山海經)>에는 동해의 해돋는 데에 있다는 신령스런 나무를 ‘부상목(扶桑木)’이라 부르고, 그 고장을 ‘부상국(扶桑國)’이라 했다고 적혀 있다. 또한 태양을 ‘부상(扶桑)’이라고도 했다. 부상은 ‘해’ ‘해 돋는 곳’ 등의 뜻으로 쓰여 온 것이다.
‘해 돋는 데와 가장 가까운 나라’의 뜻으로, 서기 670년 나라 이름을 ‘일본(日本)’이라 새로 정한 왜(倭)는, ‘부상(扶桑)’ ‘부상국(扶桑國)’을 일본의 또 하나의 이름으로 삼아 왔다.
부상(扶桑)=부본(富本)=일본(日本)
이 한어(漢語)를 우리 이두(吏讀)식으로 읽어 보자.
‘이두’란 한글이 없던 시절, 우리 고유의 말을 한자의 음독(音讀)과 훈독(訓讀)에서 빚어지는 소리를 이용해 나타낸 표기법이다. 글자라고는 한자밖에 없었던 시절, 한자를 한글처럼 썼던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읽으면, ‘부상(扶桑)’은 ‘부뽕’이라 읽힌다. ‘扶’는 음독으로 ‘부’, ‘桑’은 훈독으로 ‘뽕’이라 읽힌다. 그러나 ‘뽕나무의 뽕’은 고대에는 ‘봉’이라 발음했기 때문에, 한자 ‘扶桑’을 우리말 식으로 읽으면 ‘부봉’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스카 연못에서 발굴된 동전에 쓰여 있던 ‘부본(富本)’은 바로 ‘일본’을 가리키는 낱말이었음을 이로써 추정할 수 있다. 덴무천황 정권 사람들은 이 동전이 곧 ‘일본’ 고유의 화폐임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이다.
나라에 고유의 화폐가 유통되고 있다는 사실은, 그 나라 경제가 규모 있게 돌아감을 나타낸다. 고구려말 셈씨도 활발히 쓰였음은 물론이다. 경제의 주체가 고구려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고구려 셈씨는 일본땅에 뿌리 깊이 내리게 된 것이다.
그럼 다음 호에서는 고구려말 셈씨가 일본말 셈씨로 어떻게 바뀌었는지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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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3)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포항 옛 지명 ‘근오기<斤烏支>’는 큰 항구 뜻해
우리나라와 일본의 셈씨 ②
우리나라 고대국가인 고구려와 일본의 수사(數詞·셈씨)가 일부 대응한다(맞아떨어진다)는 사실은, 한·일 두 나라의 학자들에 의해 간간이 지적돼 왔다.
이를테면 3을 가리키는 고구려 셈씨 ‘미’와 일본 셈씨 ‘미(み)’, 5를 가리키는 고구려 셈씨 ‘우차’와 일본 셈씨 ‘이츠(いつ)’, 7을 뜻하는 고구려 셈씨 ‘나는’과 일본 셈씨 ‘나나(なな)’, 그리고 10을 뜻하는 고구려 셈씨 ‘더(‘다’소리 가까웠다)’와 일본 셈씨 ‘도오(とお)’의 네 마디가 빼닮았다는 것이다.
3·5·7·10의 발음은 닮은꼴
근거는 우리의 고대사 책 <삼국사기(三國史記)> 안의 ‘잡지(雜志) 지리편(地理篇)’. 우리나라 각지의 시대별 지명을 나란히 적어 놓은 아주 귀중한 문헌이다.
이 지리편에는 삼국시대(신라·고구려·백제)의 세나라가 세력을 겨루고 있던 시절, 즉 서기 4세기부터 7세기 후반까지와 그 후의 고려(高麗·10~14세기) 때 지명이 두루 비교 기술돼 있어서, 이 기록을 통해 우리의 옛말을 생생히 파악할 수 있다.
이 중 고려 때 지명은 모두 한어(漢語)풍이다. 이를테면 ‘서울’을 ‘한성(漢城)’이라 표기하는 방식이다. 그리고 신라 경덕왕(737~742 재임) 때 고쳐 지은 지명도 한어식이다.
그러나 그 이전의 신라·고구려·백제의 지명들은 한자로 표기는 돼 있으나, 모두 이두(吏讀)식 표기로 쓰여있다. 당시의 순수 우리말 지명을, 한자에서 빚어지는 소리를 빌려 표기해 놓은 것이다.
이를테면 포스코 본사가 있는 포항의 신라 초기 때 이름은 ‘큰오기’였다. 큰 항구를 뜻한 이름이었다. 이것을 비슷한 소리인 ‘근오기’라 읽히는 한자 ‘斤烏支’로 표기해 놓은 것이다. ‘支’자의 옛소리는 ‘기’였다.
이 ‘근오기(斤烏支)’라는 옛 지명은 신라 경덕왕 때 이후는 ‘영일현(迎日縣·해맞이골)’이라는 한자식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나 근오기라는 옛 지명은 동해안 최대의 항구 도시 포항의 끝자락 마을 ‘대보(大甫)’라는 이름에 지금껏 남아 있다.
영일만의 맨 끝자리를 ‘크고 넓은 항구의 시발점’이란 뜻으로 ‘대보’라 부른 것은 그럴싸한 지음새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충청북도 진천군(鎭川郡)의 고려시대 이름은 진주(鎭州), 통일신라시대 이름은 흑양군(黑壤郡), 고구려시대 지명은 금물노군(今勿奴郡).
여기서 ‘흑양(黑壤) = 금물노(今勿奴)’라는 등식(等式)이 형성된다.
‘흑양’이란 ‘검은 평야’를 말한다. ‘금물’이란 ‘검을(검은)’의 옛말이다.
한편 ‘노’란 ‘들판’을 가리키는 고구려말이다. 따라서 ‘흑양 = 검은 들판’이라는 등식이 입증되는 동시에, ‘들판’이란 뜻의 고구려말 ‘노(野)’와, ‘들판’이란 뜻의 일본말 ‘노(野·の)’가, 어김없는 동음동의어(同音同義語)임도 여기서 밝혀진다.
고구려의 수사(셈씨)와 일본의 수사가 일부 대응하는 사실도, 이 같은 시대별 지명의 비교 기술을 통해 발견되었다.
1에서 10까지의 셈씨 중 3·5·7·10의 네 가지가 같다(대응한다)는 사실은 나머지 여섯 가지 셈씨도 합치될 가능성을 지닌다.
나머지 셈씨도 어원 찾아
그러나 <삼국사기>의 지리 고구려편에는 이들 나머지 숫자를 포함한 지명이 보이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나머지 여섯 개 수사를 찾아낼 수 있을까.
이 문제는 내가 스스로에게 맡겨 온 오랜 과제였다. 그러나 방법론이 영 떠오르지 않았다. 셈씨를 생각할 때마다 답답한 중압감에 짓눌렸다. 그러던 중 깜깜한 길에 한 가닥 빛줄기가 들었다.
이를테면 3은 왜 ‘미’라고 불리게 되었는가, 7은 왜 ‘나는’이라 불리게 됐는가 하는 등의 셈씨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의문을 품게 된 순간이었다.
요컨대 셈씨의 어원(語源)에 대한 새삼스러운 의문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이 의문에 스스로 답했다.
“그렇지! 수사의 어원을 찾아야 한다!”
수사라는 명사는 단순히 숫자를 나타내는 품사(品詞)일 뿐만 아니라 원래 낱말 뜻, 즉 어원이 있는 낱말이 아닌가. 이를테면 3은 왜 ‘미’라 불렸는가, ‘미’는 무엇을 뜻한 낱말인가를 밝히면, 3이 왜 ‘미’라 불리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이 같은 방법으로 수사의 어원을 밝혀 간다면 나머지 여섯 가지 고구려 수사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미 대응이 인정돼 있는 3·5·7·10 네 낱말의 어원을 먼저 찾아내고, 그 존재 방식에 따라 나머지 수사의 어원을 풀어 나가면 되는 것이다. 그 받침대가 되는 것은 바로 일본 수사다.
이 같은 방법론에 의해 나머지 여섯 가지 고구려 셈씨는 재구성될 수 있었다. 또한 그 부산물로서 고구려와 일본 셈씨의 어원을 통째로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음 호에서는 고구려와 일본 셈씨의 어원과, 새로 찾은 나머지 1·2·4·6·8·9의 고구려 셈씨에 대해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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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4)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고구려 셈씨엔 ‘야망’이 담겨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셈씨 ③
일본 셈씨와 우리 셈씨를 비교해 소개하기 전에, 한 가지 일러둘 말이 있다.
고대의 일본어는 일찍이 우리 옛말이 일본에 건너가서 생성된 언어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고구려·백제 각 나라마다 방언(方言)이 있어 조금씩 달랐듯이 우리말이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일본에 건너가 둔갑, 일본어가 된 것이다. 따라서 일본어는 한국어의 또 하나의 사투리라 할 수 있다.
고대 일본어 어원은 한국어
한자 ‘一’의 한국식 음독(音讀)은 ‘일’이지만, 일본식 음독(音讀)은 ‘이치(いち)’, 훈독(訓讀)은 ‘히(ひ)’, ‘히토(ひと)’라 한다.
한자사전에 의하면 한자 ‘一’은 한 개의 가로 줄로 ‘하나’를 가리키는 글자다. 옛사람들은 빛을 ‘한가닥의 줄’로 인식했다. 광선을 ‘빛살’이라 부른 것도 이 때문이다.
‘빛’의 옛소리는 ‘’이었다. 우리말 b음은 일본에 가면 h음이나 f음이 된다.
한편 ㅌ과 같은 우리말 받침은, 일본말이 되는 과정에 ①없어지거나 ②또 하나의 소리로 독립해 ‘토’가 되기도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우리말 ‘’(빛)은 일본에 건너가 ‘히(ひ)’ 또는 ‘히토(ひと)’라 불리게 된 것이다. 이 ‘히토’에 낱개를 뜻하는 ‘츠(つ)’를 붙여 ‘히도츠(ひとつ)’라 하면 ‘한 개’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둘’을 가리키는 한자 ‘二’는 ‘一’ 두 개가 포개진 상태를 가리키는 글자다. 두 개의 ‘一’이 붙은 모양새라 할 수 있다. 따라서 ‘붙’이라는 말로 ‘二’를 표시했다.
이 말이 일본에 가서 ‘후(ふ)’ 또는 ‘후타(ふた)’가 되었다. 여기에 낱개를 표시하는 ‘츠(つ)’를 붙여 ‘후다츠(ふたつ)’라 하면 ‘두 개’를 가리키는 일본말이 된다.
‘삼(三)’은 고구려말로 ‘밀’이라 불렸다. ‘밀’은 ‘물’을 가리키는 고구려말이다. ‘밀’의 리을(ㄹ) 받침을 빼고 단순히 ‘미’라고 해도, ‘삼(三)’ 또는 ‘물’을 가리켰다.
이 ‘미’에 낱개를 표시하는 낱말 ‘츠(つ)’를 붙여 ‘미츠(みっつ)’라 하면 ‘세 개’를 가리키는 일본말이 된다.
요즘의 일본말로도 ‘미(み)’는 삼(三)과 물을 동시에 가리킨다. 고구려말과 똑같은 것이다.
‘넷’을 가리키는 한자 ‘사(四)’는, 일찍이 네 개의 줄로 표시했으나, 훗날 요즘과 같은 글자로 바뀌었다 한다. ‘四’라는 한자는 ‘구(口)’와 ‘팔(八)’을 합쳐 만들었는데, ‘입에서 나온 입김이 사방으로 갈라지는 형태’를 나타낸 것이라 한다.
따라서 고구려 사람들은 이 ‘사(四)’를 샘의 뜻으로 ‘얼’이라 불렀다. 이 ‘사(四)’를 가리키는 ‘얼’이란 고구려말이 일본에 건너가 ‘요(よ)’ 또는 ‘요츠(よっつ)’가 되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오(五)’는 우차(于次)’라 불렸다.
‘우차’란 ‘우(위)가 차는(가득한)’ 상태를 나타내는 고구려말로 ‘충만’을 가리킨다. ‘우차’란 말이 일본에 가서 ‘이츠(いつ)’로 바뀌었다. 一에서 五까지 헤아리면 한 손이 가득 찬다. 이 가득 찬 상태를 가리킨 숫자가 바로 五인 것이다.
북쪽 대륙까지 영토확장 꿈꿔
한자 ‘육(六)’은 ‘덮개를 씌운 구멍’을 나타내는 글자다.
‘六’은, 한쪽 손의 다섯 손가락 전부와 또 한쪽의 손가락 한 개로 표현되는 숫자다.
하나의 손가락을 다섯 개의 손가락으로 ‘묻는’ ‘덮씌우는’ 형상을 나타낸 것이 六이란 숫자이므로, ‘묻다’ ‘덮다’의 뜻으로 ‘묻’이라 부른 듯하다. ‘묻’이란 우리말이 일본에 건너가 ‘六’을 나타내는 ‘무(む)’가 되었다. 여기에 낱개를 뜻하는 ‘츠(つ)’를 붙이면 ‘무츠(むっつ)’가 되고, ‘여섯 개’라는 뜻의 셈씨가 된다.
‘칠(七)’은 고구려말로 ‘난은(難隱)’이라 불렸다. 요즘 말로는 ‘나눈’이라는 뜻이다.
이 낱말 또한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이 말이 일본에 건너가 ‘나나(なな)’ 또는 ‘나누(なぬ)’가 됐다. ‘칠(七)’이라는 물량(物量)을 둘로 나눌 때 삼(三)과 사(四)로 가르게 되기 때문에 공평하게 나눌 수 없고, 일(一)이라는 자투리를 버리게 된다는 어려움에서 ‘七’은 ‘나눈’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팔(八)’이라는 한자는 좌우로 갈라지는 형상을 나타낸 글자다.
‘가다’는 뜻의 우리 옛말은 ‘예’. “기러기 울어 예는 하늘 구만 리…”라는 유명한 노래도 있다. 그래서 八은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는 ‘예’라 불렸고, 일본에서는 ‘야(や)’라 했다.
일본 신화 속에는 ‘八(や)’이 무척 많이 등장한다. 일본인에게 있어서 팔(八), 즉 야(や)는 ‘성수(聖數)’이기도 했다. 거기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맨 먼저 일본에 간 부족이 예족(濊族)이었고, 그들은 흔히 ‘八(예)’이라는 숫자로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예족은 우리나라 백성이었으나, 일찌감치 일본에 집단 이주했다. ‘좌우로 갈라져 감’을 나타내는 한자 팔(八)로 예족을 나타내는 데는 까닭이 있는 셈이다.
‘구(九)’는 일본말로 ‘고고노(ここの)’라 불린다. 불가사의한 이름의 수사(數詞)다. 이 일본말은 ‘그것 넣어’라는 우리말을 나타내고 있다.
‘십(十)’은 <삼국사기>에 ‘덕(德)’이라 표현되고 있으나, 이는 ‘전부’를 가리키는 ‘다’의 고구려말 ‘더’를 나타낸 것이다. 이 말이 일본에 가 ‘도오(とお)’라는 ‘十’을 가리키는 일본 수사가 되었다.
여기서 ‘비·부·밀·얼·우차·뭍·나눈·예·그것 넣어·다(ひ·ふ·み·よ·いつ·む·なな·や·ここの·とお)’란 수사를 통틀어 읊어 보자. 희한한 뜻의 글귀가 떠오르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빛·불·물·샘·위쪽의 찬 대륙·나뉜 예·그것 넣어·다….’
‘빛·불·물·샘 등의 자연만이 아니라 위쪽(북쪽)의 대륙, 즉 부여(夫餘) 땅과 갈라선 예(濊)까지 다 넣어 몽땅 갖겠다’는 고구려의 야망을 나타낸 글이 드러나는 것이다.
고구려 수사는 단순한 셈씨가 아니라, 고구려인의 야망을 담은 숫자 노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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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5)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가야 건국왕 칼이 왜 일본에…
참 해괴한 일이다.
서기 668년 대목의 <일본서기>에는, 일본 최고의 보물 도난 사건에 관한 기술이 있다.
도행(道行)이라는 스님이, 신검(神劍)으로 알려진 ‘쿠사나기(·くさなぎ)’라는 무쇠 칼을 훔쳐 신라로 달아났는데, 폭풍우를 만나 헤매다 되돌아왔다는 기록이다. 스님이 왜 일본 칼을 훔쳐, 하필이면 신라로 달아나려 했는가.
일본 왕실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이른바 3종의 ‘신기(神器)’가 있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쿠사나기’란 이름의 큰 무쇠 칼이요, 둘째는 동경(銅鏡), 셋째는 곡옥(曲玉)이다. 이 세 가지 보물은 왜왕의 왕위를 상징해 온 신기였다.
금관가야 세력의 일본 진출 입증
<일본서기>를 비롯한 일본 고대 문헌에 등장하는 신(神)이나 사람·고장·보물의 이름 등은 모두 한자(漢字)로 표기돼 있지만 한어(漢語)는 아니다.
한자의 훈독(訓讀)과 음독(音讀)에서 빚어지는 소리로 우리 고대어를 나타낸 일본식 이두체(吏讀體)다.
따라서 칼 이름이 ‘초치()’라는 한자로 표기된다고 해서 한자의 뜻 그대로 ‘풀베기’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초치()’를 일본식 훈독으로 ‘쿠사나기’로 읽고, 이 ‘쿠사나기’란 소리를 우리 고대어에 대입해서 그 뜻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흡사 요술처럼 뜻이 떠오른다. 시험해 보자.
초(草)는 일본 훈독으로 ‘쿠사(くさ)’. 치()도 역시 일본 훈독으로 ‘나기(なぎ)’라 읽힌다.
중국의 옛 역사책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을 보면 금관가야는 ‘구사한(狗邪韓)’으로 적혀 있다. ‘狗邪’는 중국의 중고음으로 가야 음 비슷하게 발음되었기 때문에, 당시 중국인들은 금관가야, 즉 가락국을 이 같은 글자로 표기했던 것이다.
이 ‘狗邪’를 우리식 한자의 음독으로 읽으면 ‘구사’가 된다. 풀을 가리키는 일본말 ‘쿠사’와 흡사한 소리다. 따라서 <일본서기>의 저술자는 일본식으로 ‘쿠사’라 읽히는 한자 ‘草’자로 금관가야국을 표현코자 한 것이다. ‘나기’는 우리 고대어로 ‘건국왕’ ‘시조’를 의미했다.
‘쿠사나기’라는 이름의 신검은 이래서 금관가야 건국왕의 칼임이 드러난다.
김수로왕이 왜왕에게 하사한 칼이었을까. 아니면 김수로왕의 자손이 일본에 진출하면서 왕으로부터 받아 간 칼이었을까. 또는 대대로 전해 내려온 가야 왕가의 보검(寶劍)이, 금관가야가 신라와 합병되면서 일본으로 흘러간 것일까.
어쨌든 금관가야 시조의 칼이 고대의 일본에 있었다는 것은 그들 세력이 일찌감치 일본에 진출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칼이 역대 왜왕의 왕위를 상징해 왔다는 것은 금관가야 세력이 개척기의 일본에서 실로 막강했음을 뜻한다.
쿠사나기 칼은 일본 중부지방인 아이치(愛知)현 나고야(名古屋)시의 아츠타(熱田) 신궁에 보관돼 있었다. 도행 스님은 이 신궁에서 칼을 훔쳐 달아난 것이다. 그는 이 신궁 근처에 법해사(法海寺)라는 유명한 절을 지은 고승(高僧)으로 알려져 있다.
대사찰을 건립한 고승이 칼도둑이라니… 정녕 해괴한 일이 아닌가.
7세기 말 도행이 세운 법해사 창건 문서를 보면, “도행은 신라 명신왕(明信王)의 태자로, 아버지 명신왕의 명을 따라 일본에 건너와 신검을 훔쳐 달아나다 잡혀 옥에 갇혔는데, 고승임을 인정받아 석방됐다…”라는 내용이 있다.
도행이 칼을 훔친 당시의 신라왕은 문무왕(文武王)이다. 그 전 왕은 무열왕(武烈王)이요, 문무의 뒤를 이은 왕은 신문왕(神文王)으로, 이 무렵 신라 명신왕이란 임금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이 창건 내력을 적은 문서의 기술은 터무니 없는 허위 날조로 치부되어 왔다. 그러나 면밀히 검토해 보면 놀라운 사실이 드러난다.
‘도행’스님은 김유신의 장남 추정
결론부터 먼저 말하자.
‘명신왕’이란 신라 김유신 장군을 가리킨 것으로 추정된다. 김유신은 김수로왕의 12대 종손이요, 금관가야 마지막 임금인 제10대 구해왕(仇亥王)의 증손자다. 금관가야가 신라에 병합되지 않았다면 그도 어엿한 ‘왕’일 수 있었다.
유신은 그의 아버지 서현(舒玄)이 경진일(庚辰日) 밤, 하늘에서 해와 달이 나란히 내려오는 태몽을 꾸고 낳은 아들이라 전해진다.
그래서 서현은 아이 이름을 ‘경진(庚辰)’이라 지으려 했으나, 해나 달을 가리키는 글자로는 이름을 짓지 않는 법이라 하여, 경(庚)자를 닮은 유(庾)자와, 진(辰)자 닮은 소리인 신(信)자를 택해 ‘유신(庾信)’이라 지었다 한다.
천문의 이치에 따르면, 일월(日月)이 합치는 것을 진(辰)이라 일컫는다. 일(日)자와 월(月)자가 합하면 무슨 자가 되는가. 바로 ‘명(明)’자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등식이 이루어진다.
경진(庚辰) = 유신(庾信) = 명신(明信). 김유신이 명신왕과 동일 인물임을 일러주는 등식이다.
도행은 명신왕의 태자였다 한다. 태자는 임금을 이을 왕자인 동시에 큰아들을 가리킨다.
유신의 큰 아들은 삼광(三光)이다. 훗날 이관등(二官等)의 고위직에 오른 대신이었으나, 그가 스님이었다는 기록은 없다.
삼광은 수수께끼의 인물이다. 666년 당나라에 파견되었다가 668년 6월 귀국, 당항진(지금의 경기도 화성)에 도착한 후 한동안 종적을 감춘다. 668년은 일본에서 신검 도난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해다.
삼광이 역사의 기록 속에 다시 나타난 것은 683년 문무왕의 큰아들 신문왕이 두 번째 왕비를 간택하는 혼사 때다. 무려 15년 만의 출현이다.
그간 삼광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혹시 ‘도행’이란 이름으로 스님 행세를 하며 일본에 잠행, 금관가야 시조의 칼을 탈환하려다 잡혀 옥살이했던 것은 아닐까.
김유신은 문무왕의 외삼촌, 문무왕과 삼광은 외사촌 간이다. 668년 9월 21일 고구려 평정을 끝낸 문무왕은 11월 5일 경주로 개선, 조상의 사당에 들러 삼국통일의 대업 완수 사실을 보고한다.
금관가야의 핏줄을 이은 문무왕이 통일신라의 대권을 장악한 것이다. 그것은 금관가야의 부활을 의미하기도 했다. 김유신은 금관가야 왕권의 상징인 신검을 일본에서 도로 찾아와, 문무왕에게 바치고차 했던 것은 아닐까.
역사의 뒤안길엔 많은 수수께끼가 쌓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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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6)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일본 망명 신라 문무왕, 천황이 되다
문무대왕의 뼛가루를 동해(東海) 어귀의 큰 돌 위에 뿌려 장사를 치렀다 한다. 경주 동쪽 50㎞ 지점에 있는 감포(甘浦) 앞바다 대왕암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문무대왕은 죽지 않았다.
신라 문무대왕과 일본 몬무천황
신라 제30대 문무(文武)대왕(661~681 재위)과, 일본 제42대 몬무(文武·문무)천황(697~707 재위)이 동일 인물이라고 말하면,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웃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찬찬히 들어주기 바란다.
친당 쿠데타 물리치려 ‘죽음’위장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 문무대왕은 681년 음력 7월 1일 죽은 것으로 되어 있다. 51세 때였다. 즉각 그의 큰아들 신문(神文)왕이 왕위를 계승한다.
문무대왕은 죽기 전 신문왕에게 긴 유서를 남겼다.
“내가 임종하거든 태자는 내 관 앞에서 곧바로 왕위를 계승하라. 무덤을 짓지 말고 죽은 지 열흘 후에 내 시신은 바깥 뜰에서 화장(火葬)토록 하라….”
이 유언에 따라 문무대왕의 뼛가루를 동해(東海) 어귀의 큰 돌 위에 뿌려 장사를 치렀다 한다. 경주 동쪽 50㎞ 지점에 있는 감포(甘浦) 앞바다 대왕암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나 문무대왕은 죽지 않았다.
그는 대왕암을 바라보는 바닷가 이견대(利見台)에서 배를 타고, 일본으로 출항한다. 신라에서 죽은 것으로 하고 일본 망명길에 오른 것이다.
당시의 왜왕은 덴무(天武)천황. 672년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쥔 고구려 재상 연개소문, 바로 그 사람이다.
연개소문은 문무대왕의 외삼촌인 김유신 장군과 어렸을 때 함께 자란 친구 사이다. 김유신의 큰누이동생 보희와 연개소문은 연인(戀人) 사이였다고도 하고, 심지어 문무대왕, 즉 법민(法敏)은 연개소문과 보희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사실 여부는 나중에 밝히기로 하자.
어떻든 문무대왕과 덴무천황은 철저한 반당파(反唐派)였다. 당나라는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에도 여러 차례 대군(大軍)을 보내 신라를 무찌르려 애썼다.
전쟁으로 신라를 치려다 못하자, 문무대왕의 장인 김흠돌(金欽突) 일당을 매수해 친당(親唐) 쿠데타를 일으켜 문무를 암살하려고도 했다. 황당하고 끈질긴 이 음모를, 문무대왕은 음모로 대응한다. 자신을 죽은 것으로 꾸며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아들을 왕위에 앉혀 놓고 일본 망명을 꾀한 것이다.
당나라는 문무대왕의 동생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앉히려 하고 있었다. 친당파인 김인문 또한 형 법민을 제치고 자신이 신라왕이 되길 바라고 있었고, 일찍이 당나라로 피신해 있던 처지였다.
문무대왕의 전략은 맞아떨어졌다. 아들 신문왕을 무사히 왕위에 앉힐 수 있었고, 친당 쿠데타도 물리칠 수 있었다.
신라계 제철 마을 ‘대왕도’에 상륙
그러나 문무대왕의 망명길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감포 대왕암에서 떠난 대왕 일행을 태운 배는, 부산 김해 앞을 지나 대마도(對馬島)를 거쳐 일본 본섬과 규슈(九州) 사이의 세토(瀨戶) 내해(內海)로 접어든다. 이 긴 내해의 끝이 당시 나니하(難波)라 불린 요즘의 오사카(大阪) 항이다. 여기서 상륙해 육로로 말을 달리면 당시의 수도 아스카(明日香)까지는 한달음이다.
그러나 여기에도 장애가 도사리고 있었다. 덴무천황의 아들들이 이 항구 근처에 진을 쳐 문무대왕이 오면 무찌르려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규슈의 북쪽 항구 츠크시(筑紫)까지 문무대왕을 마중 나간 덴무천황비(妃) 지토(持統·지통)여왕은, 내해를 가다가 다시 남하, 키이(紀伊)반도를 길게 돌아 미에(三重)현 시마(志摩)군 남단을 향하는 코스를 택한다.
그러나 때마침 음력 8월의 태풍 시즌. 문무가 탄 배는 시마(志摩)반도 남단에서 난파(難破)하고 만다.
시마반도 남단 해안의 이름은 다이오자키(大王崎). 이 해안에서 50m 바다 쪽에 자그마한 섬이 있다. 이름은 다이오시마(大王島). 섬이라기보다는 ‘바위’라 불러야 옳다.
문무대왕 일행은 이 바위에 올라, 바닷가 마을에 구조원을 보낸다. 이 바닷가 마을이 다이오자키, 즉 대왕기(大王崎)요, 대왕 일행이 의지한 바위의 이름이 대왕도(大王島)인 것이다.
문무대왕의 배가 출항한 곳이 신라의 ‘대왕암’이요, 대왕 일행이 난파하여 몸을 의지한 곳이 일본의 ‘대왕도’라면, 우연의 일치치고는 희한한 합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신라 문무대왕이 대왕암에서 떠나 일본에 당도한 곳이라 하여, 후세 사람들이 ‘대왕’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됐기 때문이다.
이곳 마을 사람들은 신라계 제철(製鐵) 집단의 기술자들이었다. 신라에서 임금님이 납시었다는 소식에 그들은 밤을 지새워 구조에 나선다.
이 구조작업은 지금껏 해마다 음력 8월, 즉 양력 9월의 신(申)일에 재현되고 있다. 7세기 말의 신라 문무대왕 구출 작전이, 21세기 요즘까지 ‘무형문화재(無形文化財)’로 계속 받들어져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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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7)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아고’는 문무왕이 덴무천황 아들인 증거
‘아고’란 이름이 뜻하는 것
‘문무대왕이 탄 배 난파(難破)!’라는 급보를 접한 일본 다이오자키(大王崎·대왕기)의 신라계 제철 기술 집단 사람들과 어부들은, 부랴부랴 커다란 짚신 한짝을 짠다. 길이가 3m나 되는 대형 짚신이었다.
한편 아낙네들은 고대미(古代米)인 빨간 쌀 서 말(3斗·한 말은 18ℓ) 석 되(3升)를 씻어 밥을 짓는다. 엄청난 양의 밥이다.
여기에다 말린 생선 게르치 여러 마리를 구워 반찬으로 곁들인다. 몸길이 50㎝가량의 게르치는 기름지고 맛있는 생선이다.
문무왕 구조 재현 행사 ‘짚신 끌기’
대량의 밥과 구운 생선을 커다란 짚신에 실어, 마을 장정 넷은 문무대왕이 피신해 있는 다이오시마(大王島·대왕섬)로 헤엄쳐 간다.
짚으로 짠 배는 험한 물살에도 가라앉지 않고, 암초에 부딪혀도 깨지거나 부서질 염려조차 없다. 더군다나 짚은 어느 정도 수분을 흡수하면 그 이상 물을 머금지 않아 침몰할 염려도 전혀 없다.
이 짚신배에 실은 밥과 찬으로 문무대왕 일행의 허기를 채우게 한 후, 대왕을 짚신배에 태워 마을로 모실 작정이다. 참으로 절묘한 구조 계획이 아닐 수 없다.
문무대왕은 지혜롭고 손 빠른 마을 사람들의 이 같은 구조 작전으로 무사히 육지에 오를 수 있었고, 나머지 일행도 모두 목숨을 건졌다.
이 문무대왕 구조 작업을 재현하는 행사는 요즘도 해마다 9월(음력 8월) 신(申)일에 행해지고 있다.
이로써 문무대왕은 681년 음력 8월 신(申)일에 구조되었음을 알 수 있다. 신라의 감포 대왕암에서 떠난지 한 달 뒤의 일이다.
행사의 이름은 ‘짚신 끌기(와라지비키·わらじびき)’. 일본 중부지방 미에(三重)현(縣)의 무형문화재로 지정, 매년 성대히 재현되고 있다.
이 행사는 17세기부터 지금껏 계속 이어지고 있다 하나, 마을 사람들은 행사의 연유를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답답한 일이다.
마을의 현재 이름은 다이오초(大王町·대왕정). 이 행사의 세습 신주(神主)를 계속 지켜 왔다는 다이오초의 마쓰이(松井) 댁에, 잔치에 관한 옛 문서가 보관되어 있다.
짚신 끌기 행사 방법과 행사가 끝난 뒤 제사를 드리는 방법 등이 이 문서에 적혀 있는데, 제문(祭文)은 ‘제여신재(祭如神在) 여신재(如神在)’라는 한문 구절로 시작 된다. ‘제사 모시기를 조상이 계시는 것처럼 하다. 신 모시기를 신이 계시는 것처럼 하다’는 뜻이다.
이 제문의 첫 구절은 공자(孔子)의 <논어(論語)> ‘팔일(八佾)의 춤’에 등장하는 글귀다.
팔일의 춤이란 고대 중국 아악(雅樂) 중 군무(群舞)의 하나로 천자(天子), 즉 국왕에게만 허용된 춤이다. 64명이 8열(列)·8행(行)으로 서서 아악에 맞춰 추는 게 특징이다.
국왕에게만 허용된 팔일의 춤 첫 구절이 제문 첫 구절에 적혔다는 것은 이 행사의 주인공이 국왕이었음을 가리킨 것은 아닐까.
즉위 후 일본 최초로 공자 제례
신라왕이었던 문무대왕이 대왕섬에서 구출된 다음, 대왕마을에서 올린 첫 제사는 팔일의 춤으로 시작된 듯하다.
대왕섬에서 구출되자마자 팔일의 춤 첫 구절을 외우며 제사 지냈다는 것은, 그 구출된 주인공이 천자(天子), 즉 군주(君主)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신라 문무대왕이 일본 몬무천황이었다는 증거이기도 할 것이다.
문무대왕은 이로부터 15년 뒤 일본국왕 몬무천황(文武天皇)으로 등극한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공자를 제사 지내는 제례를 일본 최초로 시작한 임금이다.
문무대왕이 피신한 섬이 대왕섬이었고, 그 섬이 바라다보이는 바닷가를 대왕기라 부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 바닷가 마을인 다이오초에서 북쪽으로 10여㎞ 간 곳에 아고초(阿兒町)라는 마을이 있다.
‘아고’란 우리 옛말로 ‘아이’ ‘아가’를 가리킨다.
문무대왕은 대왕섬에서 구출된 뒤, 얼마 동안을 이 마을에서 지냈다.
이곳에 저택을 지어서 휴양했는데, 이때 전복·생선 등을 잡아 문무대왕에게 진상한 마을 어부에게 훗날 후한 상을 내려 주목을 끈다. 단순한 진상(進上)에 대한 상이 아니라, 구출 작전에 보답하는 고마움의 표시였을 것이다.
‘아고’는 우리 옛말로 ‘아이’ 뜻해
그런데 문무대왕이 한동안 지낸 휴양지의 지명이 하필이면 ‘아고’였을까.
‘아이’라는 뜻의 이 지명은, 문무대왕이 당시의 일본 천황 덴무(天武)의 아들이었음을 가리키는 강력한 증거다.
이 동네 사람들만이 아니라 그 무렵의 사람들은 두루 문무대왕을 ‘아고님’이라 불렀다. 덴무천황의 아들, 덴무의 아이라는 뜻으로 이같이 부른 것이다.
문무천황, 즉 몬무천황(文武天皇)은 707년 일본에서 서거한다. 그의 시신은 일찍이 그가 아들 신문왕에게 유언한 것처럼 화장했고, 그 뼛가루의 일부는 신라 감포의 대왕암 위에 뿌려 제사 지냈으며, 일부는 일본 중부지방 아스카(明日香)의 한 산기슭에 매장했다.
능의 이름은 ‘히노쿠마아고산릉(檜安古山陵)’. ‘히노쿠마’란 ‘빛 곰’이란 뜻의 덴무천황을 가리킨 일본 이름이요, ‘아고’는 ‘아이’ ‘아들’을 가리키므로 이를 종합해 보면 ‘빛곰의 아들 산무덤’을 뜻한다.
덴무천황의 아들 문무의 무덤임을 가리킨 이 산릉 이름은, 문무가 덴무의 아들임을 뜻하는 강력한 증거로 지금껏 일본 아스카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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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8)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문무대왕의 죽음 위장한 ‘수중릉’
‘츠키 나뭇가지가 스스로 부러져 떨어졌다’는 것은, 신라왕이었던 문무대왕이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고 죽은 것처럼 가장했음을 가리키는 대목이다. 날짜도 정확하게 문무대왕이 죽었다는 680년 7월 1일자로 되어 있다.
대왕암은 정말 무덤인가
경주 감포에 있는 대왕암에 올라가 봤다.
바닷가에서 동쪽으로 200m 앞을 바라다보면 하나의 섬처럼 보이지만, 직접 올라가 보니 네 갈레로 갈라진 큰 바윗덩이다. 동서남북으로 물길이 트여 있어 바닷물이 수시로 넘나든다. 한가운데는 평평한 연못처럼 물이 고여 있고, 남북으로 놓인 기다란 네모바위가 잠겨 있다. 흡사 인공의 조형물 같다.
사학자와 고고학자들은 이 바윗덩이를 ‘문무대왕 수중릉(文武大王 水中陵)’이라 명명했다. 1960년대의 일이다. 현재 사적 제158호로 지정돼 있다.
학자들은 이 네모나고 널따란 돌 아래 어떤 장치를 해서 문무대왕의 유골을 보관했으리라 추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많은 다이버나 해녀들이 여러 차례 탐색한 바에 의하면 판석(板石) 모양의 돌 아래에는 어떤 장치도 없었고, 유골을 담았음직한 발(鉢)이나 궤 또는 석곽(石槨) 등이 전혀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바위 위에서 이 돌을 향해 문무대왕의 유골을 뿌려 제사 지냈을 것으로 짐작된다.
어떻든 제사 지낸 자리임에는 틀림없다. 제사는 조선 시대 때까지 해마다 기일(忌日)에 지냈다고 한다.
그럼 당시 일본 조정이 편찬한 역사책 <일본서기>에, 문무대왕의 ‘가짜 죽음’이 어떻게 서술되어 있는지 살펴보자.
‘일본서기’도 위장술 뒷받침
‘덴무천황(天武天皇) 9년(680년) 7월 1일, 아스카사(飛鳥寺)의 서쪽에 있는 츠키(つき·둥근 느티나무) 나뭇가지가 스스로 부러져 떨어졌다…’라는 괴이한 대목이 보인다. 한낱 나뭇가지 부러진 것이 왜 정사서(正史書)에 어엿이 실려 있는가.
아스카사는 당시의 일본 수도 아스카(‘明日香’이라 한자 표기하기도 하고 ‘飛鳥’라 쓰기도 한다)에 있던 고구려 양식으로 지어진 조정 관할의 절이다.
이 절 서쪽에 있는 츠키 나뭇가지가 스스로 부러져 떨어졌다 한다. 짤막하지만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매우 상징적인 글귀다.
우선 ‘서쪽’이란 당시의 일본에 있어 신라, 나아가 한반도를 뜻했다. 신라나 한반도는 일본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츠키’나뭇가지라는 글마디에도 중요한 뜻이 담겨 있다. 츠키(つき)라는 일본말은 ‘둥근 느티나무’를 가리키지만 ‘달’도 의미한다.
‘츠키’라 하면 당시의 일본인들은 곧 신라의 왕궁 월성(月城)을 떠올렸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을 두고, 일본인들은 흔히 ‘츠키노 미야코(月の都·달의 도성)’라 부르기도 했다.
‘츠키 나뭇가지가 스스로 부러져 떨어졌다’는 것은 신라왕이었던 문무대왕이 스스로 왕위를 포기하고 죽은 것처럼 가장했음을 가리키는 대목이다. 날짜도 정확하게 문무대왕이 죽었다는 680년 7월 1일자로 되어 있다.
절간의 둥근 느티나무 가지가 부러진 것을 묘사한 하찮은 대목 같지만, 이같이 중대한 역사 기록을 넌지시 써서 남긴 <일본서기>의 글씀새에 새삼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엄청난 왜곡 기술 가운데, 정확한 기술을 진주알처럼 숨기고 있는 이 고대의 역사서에 새삼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일본서기> 속에 파묻혀 있는 우리 역사의 진실을 파내야 한다. 덴무천황 9년(680년) 7월 초하루의 이 ‘츠키’ 기록만 해도 신라 문무대왕의 죽음이 스스로 꾸민 계획적인 사건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대사 책 <삼국사기> <삼국유사>와,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日本書紀)> <고사기(古事記)> <속일본기(續日本紀)> 등을 아울러, 그 진실과 허위를 낱낱이 밝혀야 하는 것이다.
일본 도착 15년 만에 천황 등극
문무대왕이 일본 미에(三重)현 시마(志摩)반도 대왕섬에서 구사일생(九死一生)으로 구조받은 사실을 증명하는 물증이 또 있다. 경주 석굴암 본존불(本尊佛)의 지음새다.
서쪽에서 동쪽을 향해 멀리 동해로 그 시선(視線)을 돌리고 있는 본존불의 두 눈썹 사이에는 백호(白毫)가 박혀 있다. 이 주옥(珠玉)은 동지(冬至)날 새벽, 떠오르는 햇빛을 받으면 눈부시게 빛난다.
동지는 죽음에서 재생(再生)하는 날로 꼽히고 있다.
본존불의 시선과 동지날 일출(日出)하는 동해 꼭지점을 묶어 그 시각(視角)을 연장하면, 멀리 일본 미에(三重)현 시마반도 끝의 다이오시마(大王島·대왕섬)에 다다르게 된다.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景德王) 15년인 751년에 창건됐다. 경덕왕은 문무대왕의 증손이다.
삼국을 통일하고 신라를 지키기 위해 일본에 망명한 증조부 문무의 구사일생(九死一生)을 감축하는 뜻으로 석굴함 본존불상은 지어진 것인가. 본존불은 종교성과 예술성에 있어 우리 조상이 남긴 가장 탁월한 불상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생전의 문무대왕은 “죽은 다음 동해의 용으로 환생하여 왜구(倭寇)의 침략을 막겠다”고 다짐했다 한다.
왜의 침략을 막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 그것은 자신이 ‘왜왕이 되는 일’이 아니겠는가. 문무대왕은 자신의 다짐을 철저히 지켜낸 셈이다.
사실 문무대왕이 일본 천황으로 등극한 11년(697~707) 동안은, 우리나라와 일본이 가장 사이 좋고, 내치(內治)·외교에 있어 일본이 가장 눈부신 발전을 이룩한 시대로 손꼽히고 있다.
그러나 문무대왕이 일본 몬무천황이 되기까지는 15년이라는 긴 신고(辛苦)의 세월을 거쳐야 했다. 그 아픈 세월을 낱낱이 훑은 소설 책이 지금 일본에서 베스트셀러로 인기를 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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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19)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소설 속 겐지<源氏>는 문무대왕이 모델
천년 전 소설 ‘겐지 이야기’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에 쓰여진 소설이 일본에 있다. 무라사키 시키부(紫式部)라는 여류작가가 쓴 작품으로, 제목은 <겐지(源氏·げんじ) 모노가타리(物語·ものがたり)>.
‘겐지’라는 남자 주인공의 화려하고 파란 많은 일대기(一代記)를 엮은 장편으로, 우리말 번역본의 제목은 <겐지 이야기>.
영문판도 나와 있다. 영국인 왜일리 역 <The Tale of Genji>와 미국인 사이덴스티커 역본도 있다. 이 밖에 불어판·이태리어판·스웨덴어판·네덜란드어판·핀란드어판까지 나와 있다.
일본 본국에서는 올해 ‘겐지 이야기 천년’을 맞아 요란한 리라이트와 CD 출시로 다시 붐이 일면서 베스트셀러에 등극했다. 각종 공연 등 다양한 행사도 잇따르고 있다. 천년 전 한 여류작가에 의해 쓰여진 소설에 대한 긍지가, 일본인의 문화의식을 한층 드높여 주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모델 소설’이라면 일본인들은 단정적으로, 또한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젓는다. 엄청난 규모의 픽션, 순수 창작이라는 것이다.
<겐지 이야기>가 ‘모델 소설’이라 하더라도 그 문학적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진정 ‘모델 소설’이라면 우리는 8세기 말의 큰 역사 창고 하나를 송두리째 차지하게 되는 셈이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인공 겐지는 바로 신라에서 일본으로 망명한 문무대왕을 모델로 삼은 것이기 때문이다. 겐지의 행적을 살피면 망명한 문무대왕이 일본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히카루는 우리말로 ‘칼을 갈아 만듦’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는 등장 인물의 이름부터 묘하게 지어 붙였다. 그 이름 지음새를 자세히 뜯어보면 주인공의 성격이며, 주인공이 처한 상황 등을 알 수 있어 여간 흥미로운 것이 아니다.
문무대왕에 비겨지는 주인공의 이름은 ‘히카루 겐지(光源氏)’. 히카루는 이름, 겐지는 성(姓)이다. ‘히카루(光る)’는 ‘빛나다’는 뜻의 일본말이다.
주인공 히카루는 용모가 눈부시도록 아름다웠고, 학문과 무예(武藝)도 뛰어나 어디에 내놓아도 단연 으뜸으로 빛났다.
더욱이 일본말 ‘히카루’의 어원(語源)은 우리말 빛깔. 색채·광채를 뜻하지만, 옛말로는 ‘비(칼) 갈(연마)’ 즉 ‘칼을 갈아 만듦’을 뜻하기도 했다.
문무대왕의 외조부 김서현(김유신의 아버지)은 제철터 관리자요, 칼 만드는 전문가이기도 했다.
더군다나 ‘겐지(源氏)’는 신라 사람들에게만 붙인 성씨다. 이 겐지라는 성으로, 문무대왕이 신라 사람임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는 셈이다.
히카루 겐지의 아내 온나산 미야(女三宮)는 당대의 시인 가시와기(柏木)와 불륜관계를 맺어 사내 아이를 낳는다.
가시와기의 실명(實名)은 가키노모토 히토마로(). 8세기 일본에서 첫손 꼽힌 유명 시인이다. 겐지는 이 아이가 자신의 핏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세자(世子)로 삼지 않을 수 없는 고초를 겪는다. 대신 자신의 친딸을 세자비로 맞게 함으로써 친권을 행사한다.
결국 겐지의 시대가 온다. 겐지는 도읍 안에 사계절을 본뜬 아름다운 궁전을 지어 영화를 누린다.
‘일본서기’에 감춰진 역사적 진실
문무대왕의 ‘몬무천황 등극’이 실현되는 것이다. 일본에 망명한 지 15년 만의 일이다. <일본서기>와 <속일본기>는 이 15년 만의 등극을 교묘하게 표현하고 있다.
몬무천황이 15세에 임금자리에 올랐으며, 그 후 10년간 천황 위(位)를 누리다가 25세에 죽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일본으로 망명한 지 15년째 되던 해에 등극하였으니, 열다섯 살에 천황이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일본 역사서는, 이같이 교묘하게 사실을 감추듯 밝히고 있는 것이다.
<겐지 이야기>의 작가 무라사키 시키부는 이 같은 일본 사서(史書)의 허구를 샅샅이 알고 있었다.
고구려 장군 연개소문이 일본 덴무천황으로 등극했고, 신라 문무대왕이 일본 몬무천황으로 등극했으며, 신라 장군 김유신의 장남 삼광(三光)이 일본에 있던 금관가야왕의 칼을 훔쳐 신라로 가져가려 했다.
또한, 일본 지타(知多)라는 고장에 법해사(法海寺)라는 유명한 절을 지어 도행(道行)이라는 이름의 고승(高僧) 대우를 받았으며, 일본 미에(三重)현 시마(志摩)반도의 제철 터에 ‘도행가마’라는 제철 가마터를 세운 것까지 두루 알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수마(須摩) 아카시(明石) 등 제철터 일대를 누비며 문무대왕의 무기 뒷바라지를 한 것까지 알고 있었다. <겐지 이야기> 속에 ‘아카시(明石)의 뉴도(入道)’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는 스님은 다름 아닌 삼광, 즉 도행 바로 그 사람이다.
<겐지 이야기>는 지금부터 천년 전, 무라사키 시키부가 글쓰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세간의 큰 인기를 독차지했다. 당시 독자들은 등장 인물이 각각 실인물의 누구에 해당하는지 잘 알고 있어 흥미진진했기 때문이다.
<겐지 이야기>는 쓰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이미 베스트셀러였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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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20)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주인공 ‘가구야’ 신라 왕비가 되다
일본 고대소설 ‘가구야 아가씨’
지금으로부터 천년 전에 쓰여졌다는 <겐지(源氏) 이야기>보다 약 100여 년이나 먼저 엮어진 소설도 일본에 남아 있다.
<다케토리(竹取り) 모노가타리(物語り)>라는 소설이다. 우리말로 옮기면 <대나무 얻기 이야기>라 해야 할까.
서기 900년대에 지어진 작품으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창작이다. 작자는 누구인지 알려져 있지 않다.
현재 <가구야 히메(かぐやひめ·가구야 아가씨)>라는 제목의 동화책으로 번안되어 나와 어린이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모으고 있다. 이야기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실화 바탕 픽션 … 현재 동화로 번안
외딴 마을에서 대나무를 팔아 생활하는 할아버지 내외가 있었다. 어느날 할아버지가 대나무 숲 속으로 들어서자 굵다란 한 대나무의 밑동이 환히 빛나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할아버지가 조심스레 그 대나무를 잘라 보니, 나무 안에 아주아주 작은 여자 아이가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놀란 할아버지는 여자 아이를 조심스레 집으로 데려와, 할머니와 상의해 키우기로 했다. 이름은 ‘가구야’라 붙였다.
가구야는 놀랄 만큼 아름다운 아가씨로 자랐다. 할아버지는 그때부터 큰 부자가 되었다. 대나무를 자를 때마다 황금으로 가득 찬 마디가 날마다 한 마디씩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할아버지는 대궐 같은 집을 짓고, 가구야를 대궐 맨 안쪽의 큰 방에 살게 했다.
대나무숲 부자 영감의 딸이 천하일색이라는 소문이 장안에 퍼지자 청년들이 앞다투어 청혼을 해 왔다.
그 중에서도 높은 벼슬아치 청년 다섯 명이 가장 열성이었다. 벼슬아치들에게 시달린 할아버지가 가구야에게 말했다. “모두들 괜찮은 신랑감 같으니 그 중 한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 어떠냐?”
키워 준 할아버지의 은공을 외면할 수 없어 가구야는 대답했다. “그럼 제가 원하는 보물을 갖다 주시는 분과 혼인하기로 하지요.”
그런데 가구야가 ‘원하는 보물’이란 쉽게 구할 수 있는 물건들이 아니었다.
이를테면 석가모니가 들고 다녔다는 빛나는 돌 사발, 봉래산 황금나무에 열리는 하얀 옥 열매, 불 속에 넣어도 타지 않는 가죽, 용의 목에 둘러져 있는 오색 구슬, 아기를 안산(安産)할 수 있다는 보배 조개 등 너무나도 희귀한 것들이었다.
벼슬아치들은 저마다 가짜를 만들어 가구야에게 가져갔다가 들통나서 창피만 당하고 쫓겨났다.
이 같은 소문을 들은 그 나라 임금은 가구야를 왕비로 맞고 싶다고 할아버지에게 청한다.
임금의 뜻을 전하는 할아버지에게 가구야는 한숨을 쉬며 말한다.
“사실을 말씀드리자면, 저는 달나라 성에서 온 사람입니다. 다음 대보름 달밤이면 달나라 성 사람들이 저를 데리러 올 것입니다. 저는 그들과 함께 달나라로 돌아가야 한답니다.”
그리고 그날이 왔다. 가구야를 달나라 성으로 보내지 않으려고 수많은 군사들이 무장하여 지켰지만 소용이 없었다. 눈부신 달빛 속, 가구야는 마차를 타고 달의 성으로 가 버리고 만 것이다….
일본국 사신 일행으로 서라벌 방문
판타지 동화 같은 이야기지만, 이것은 8세기 초 한국과 일본에 있었던 실화(實話)를 픽션화한 것이다.
신라 성덕왕(聖德王) 2년인 703년 <삼국사기>에는 ‘일본국 사신이 서라벌에 왔는데 모두 204명이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느 사절단보다 한결 많은 인원수에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이듬해 5월 ‘승부(乘府·차나 말을 관장하는 관청)의 승부령(승부의 우두머리) 김원태(金元泰)의 딸을 맞아들여 왕비를 삼았다’는 기록이 보인다. 성덕왕이 승부령 김원태의 딸과 혼인을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승부령의 딸’이라는 대목이 마음에 걸린다. 이 시기 우리나라와 일본의 경우 아비 없는 딸을 귀인에게 시집보낼 때, 승부령을 양아버지로 삼아 혼인시켰던 관례가 흔히 있었다.
따라서 아비 없이 일본에서 자란 가구야를 신라 성덕왕의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우선 승부령 김원태의 딸로 입양시킨 후 혼사를 치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가구야는 자기를 키워 준 대나무꾼 할아버지에게, 자신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고 실토하고 있다. 일본인이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달의 성’에서 자기를 마중하러 올 것이라고도 말하고 있다. ‘달의 성’은 ‘월성(月城)’, 즉 신라 서라벌에 있는 신라 임금의 왕궁을 가리킨다.
월성에서 자신을 마중 온다는 것은, 곧 신라 왕과 혼인함을 암시하는 말이다. 가구야는 신라 왕과 결혼한 것이다. 성덕왕 2년인 703년 일본에 있던 가구야는 신라 서라벌의 월성으로 와 그 이듬해 5월 왕비가 된 것이다.
그럼 일본 몬무천황(文武天皇) 재임 중인 703년, 일본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정사서(正史書) <속일본기(續日本紀)>를 살펴보자.
일본 몬무천황은 신라 문무대왕과 동일인으로 여겨지고 있는 인물이다. 동화 같은 픽션으로 여겨지고 있는 옛 작품을 통해 역사의 진실에 접근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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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21)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일본의 무쇠 사나이 ‘엔노교자’<役行者>
신기한 힘 지닌 단철 기술자
7~8세기 일본에는 신기한 힘을 지닌 이상한 사내가 있었다.
땅 위를 가듯 바다를 걸어다녔고 천 길 산벼랑을 새처럼 날아다녔다. 등나무 껍질로 만든 옷을 입었고 솔잎을 양식 삼아 마흔 살이 넘도록 산중 굴에서 지냈다.
등나무와 소나무는 고대 제철의 상징이었다. 등나무 껍질로 만든 바구니는 강변의 사철(砂鐵)을 걸러내는 도구였고 소나무는 숯으로 만들어 무쇠 불리기(만들기)를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등나무의 보라색 꽃빛은 무쇠 불릴 때 피어오르는 불빛을 방불케 했다. 옛 제철로 이름 있는 일본 몇몇 지방에서는 현재까지 제철제(祭)가 해마다 치러지고 있는데, 이때 어김없이 등꽃이 등장한다. 등꽃을 손에 들고 춤추는 것이다.
한편 그는 도깨비를 자유자재로 부려 갖은 신통력(神通力)을 발휘하기도 했다.
▶ 엔노교자(役行者)의 동상은 일본 산악지 일대에 세워져 있다. 그는 지금껏 일본인들로부터 숭상받는 인물이다.
이름 ‘엔’은 우리 고대국가 예(濊) 의미
그의 이름은 엔노교자(役行者·えんのぎょうじゃ). 우리말로 읽으면 ‘역행자’다. 에노우바소크(役優婆塞·えのうばそく)라고도 불렸다.
‘에’ 또는 ‘엔’은 한자 ‘역(役)’자로 표기되고 있으나, 이것은 우리 고대국가의 하나였던 예(濊)를 가리킨 말이다. ‘교자(行者)’란 도교(道敎)나 불교의 수도자(修道者)를 뜻한다. 그는 큰 절 여러 개를 세운 독실한 불교 신자였다. ‘우바소크’도 ‘우파사카’라는 범어(梵語)가 일본어화된 낱말로 불교 신자를 뜻한다.
그런데 이 ‘우바소크’란 말엔 또 하나의 뜻이 감춰져 있다.
‘우바’ 또는 ‘우파’는 ‘엎어’의 우리 옛말. ‘소’는 ‘무쇠’의 옛말. ‘크’는 ‘굽다’의 어간 ‘굽’의 줄임말. 무쇠를 불에 달궈 여러 번 뒤엎어서 두드리는 일. 즉 단철(鍛鐵)의 제조과정을 나타낸 말이다. 에노우바소크는 단철 기술자였거나 제철왕이었음을 이름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왜왕 자리를 노리고 있다는 모함을 받는다. 즉각 체포령이 내려지고 관군(官軍)이 들이닥쳤으나, 신통술에 능한 그는 번번이 감쪽같이 빠져나간다. 도저히 체포할 수 없다고 포기한 관군들은 그의 어머니를 잡아간다.
자기 대신 어머니가 체포됐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즉각 자수해 섬에 유배된다. 그러다 모반 계획은 모함이며 사실이 아님이 증명돼 3년 후 석방된다. 서기 701년 그의 나이 42세 때의 일이다.
그는 그 후 왜왕 가까이에 있더니, 드디어 신선(神仙)이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고도 하고 신라로 갔다고도 전해진다. ‘토라메(虎女·호녀)’라는 이름의 그의 어머니는 그가 옥에 갇혀 있을 때 세상을 뜬다. 그는 어머니의 유골을 무쇠발(鉢)에 담아 신라로 떠난다. 토라메는 원래 예 출신의 신라인이었다.
신라 효소왕이 죽고 성덕왕(聖德王)이 즉위한 것은 702년의 일이다. 효소왕에게는 아들이 없어 그의 동생 성덕왕이 뒤를 이은 것이다.
가구야 아가씨의 아버지로 신라에
성덕왕 2년인 703년 <삼국사기>에는 일본국 사신 204명이 신라에 왔다고 밝히고 있는데(13일자 포스코신문 참조), 엔노교자도 이때 사절단과 함께 온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가구야 아가씨’의 아버지다. 당대의 미인이었던 가구야를 성덕왕의 왕비로 삼도록 왜왕이 명령했기 때문이다. 당시 왜왕은 몬무천황(文武天皇). 신라 문무대왕(文武大王)의 후신이다. 성덕왕은 문무대왕의 손자가 된다. 손자의 며느리를 할아버지가 손수 골라, 일본에서 신라까지 보낸 셈이다.
가구야 아가씨가 어려서 대나무 숲에 남몰래 버려져 있었던 사연을 여기서 알 수 있다.
산중에서 무쇠 만들기에 바빴던 아버지, 역모(逆謀)의 모함을 받고 도망 생활을 하던 끝에 옥살이까지 한 아버지는, 어린 딸을 대나무꾼 할아버지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구야는 그래서 남의 손에 자랐다. 그러나 엔노교자는 딸의 양육비로 꼬박꼬박 금(金)을 보냈다.
엔노교자는 산을 타는 데 명수였다. 산에서 철광석·금·은 등을 찾아 캐내는 기술자이기도 했다. 그의 제자들이 캐낸 금이 대나무꾼 할아버지네 대밭에 어김없이 전달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대나무꾼 할아버지는 갑부가 될 수 있었고, 가구야 아가씨도 호화롭게 살 수 있었던 셈이다.
환상동화 같은 이야기도 알고 보면 한 토막의 처절한 역사임을 알 수 있다.
엔노교자는 이런 사연으로 신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에게는 할 일이 많았다. 원래 예 사람이었던 엔노교자는 예 사람을 돌봐야 했기 때문이다.
서기 1~2세기 지금의 강릉 일대의 땅에는 동예(東濊) 또는 철국(鐵國)이라 불렸던 나라가 번성했다. 그 후 신라의 힘에 밀려 서남방으로 흩어진 예 사람들은 일본으로 망명하기도 했고, 나라는 쇄잔을 거듭한 끝에 신라로 병합되고 만다.
그러나 예 사람은 강릉·삼척·태백·양양 일대의 철 생산지에 터를 잡고 그 후 오래도록 살았다. 엔노교자는 그들을 돌보기 위해 신라로 돌아온 것이다.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불가사의한 노인. 신라 최고의 미인 수로부인(水路夫人)에게 산꼭대기의 꽃을 꺾어 바친 노인이 바로 이 엔노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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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희 교수의 고대철강사]
(22)한·일 고대왕조의 진상 - 철강 기술 교류
납치에 시달린 미모의 ‘수로부인’
삼국유사 ‘수로부인 이야기’
우리나라 고대사에 관한 책 <삼국유사>는 신라 으뜸의 미인과 얽힌 유괴사건 이야기를 소상하게 소개하고 있다.
미인의 이름은 수로부인(水路夫人). 신라 제33대 성덕왕(聖德王·702~737 재위) 때 강릉 태수(太守)를 지낸 순정공(純貞公)이 수로의 남편이다.
강릉은 당시 신라의 북녘 변방이었다. 그곳 장정 2000명을 동원, 국경에 긴 성을 쌓았다는 기록(721년)으로 봐서 순정공은 산성 축조공사의 총지휘관을 겸하고 있었을것이다.
무쇠 산지였던 강릉 태수의 아내
조선시대의 인문지리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이 지역은 원래 예국(濊國) 땅이었으며 철국(鐵國)이라고도 불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 고장에서 무쇠와 강철이 생산되었던 것이다. 강릉 태수 순정공은 이 무쇠터에서 제철을 감독·독려하는 책임자이기도 했을 것이다.
당시 무쇠란 나라 최고의 생산품이었다. 그러나 순정공은 이같이 막강한 권한을 지닌 지방장관이었지만 아내에겐 약했다. 남편과 함께 임지로 가는 길에 미모의 아내는 외간 남자에게 여러 차례 납치되었다 되돌아오곤 했다. 그러나 순정공은 당당한 아내에게 아무 불만도 표현하지 못했다.
하루는 바닷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있는데, 용이 들이닥쳐 아내를 납치해 갔다. 순정공이 너무 놀라 땅에 넘어져 허둥대고 있을 때 한 노인이 나타나 말했다.
“옛말에 여러 입은 무쇠도 녹인다 했습니다. 그러니 백성들을 모아 물가 언덕을 치며 노래 부르게 하십시오. 용도 부인을 내놓지 않고는 못 배길 것입니다.”
순정공은 노인이 시킨 대로 했다. 그랬더니 용이 정말 바닷속에서 부인을 받들고 나왔다.
이때 마을 백성들이 부른 노래를 ‘해가(海歌)’라 한다.
“부인을 내놓아라. 남의 부인 앗아간 죄 얼마나 크리. 만약 내놓지 않으면 그물로 잡아 구워 먹으리.”
그런데 이때 언덕을 지팡이로 치게 한 까닭은 무엇일까. 언덕 ‘둑’의 신라말은 ‘도게’ 또는 ‘도가’였다. 이 말은 ‘다오’라는 뜻의 신라말 ‘도게’ ‘도가’와 소리가 같다. 요즘의 경상도 사투리도 마찬가지다. 경상도 사람들은 ‘밥 다오’라는 말을 ‘밥 도가’라 한다.
마을 사람들은 언덕, 즉 ‘도가’ 또는 ‘도게’를 지팡이로 치면서, “수로부인을 도가(다오)”라고 강조했던 것이다.
수로부인의 남편 순정공의 임지 강릉은 원래 예국의 영토였다. 당시 예국은 신라에 평정되어 나라를 잃은 지 오래된 상태였으나 예 사람들은 높은 제철기술을 지닌 철국의 백성이었다는 긍지를 잃지 않고 생활했다. 따라서 그들은 순정공의 부임에 저항해 동해 앞바다에 배를 띄워 두고 용처럼 꾸며 부인 납치극을 벌였던 것이다.
예국 출신 무쇠꾼들의 강력한 저항
용에게 유괴됐다 돌아왔을 때 그곳이 어떠했느냐는 남편 물음에 수로부인은 선선하게 대답했다고 <삼국유사>는 밝히고 있다.
“눈부신 칠보 궁전에 음식은 맛있고 향기롭고 깨끗하여 도무지 인간 세상 같지 않았습니다.”
납치됐다고는 하나 수로는 극진한 대접을 받은 것이다. 용에게 잡혀 바다로 간 것을 비롯해 깊은 산중이나 큰 연못가 등지에서 수로부인은 여러 차례 신물(神物·신령스런 괴물)에게 잡혀갔고, 그때마다 며칠 후 무사히 되돌아왔다.
이 같은 납치행위는 일본에서 신라로 왔던 엔노교자(役行者)가 꾸민 사건으로 보여진다. 강릉 태수로 부임한 순정공에게 보낸 강력한 경고였을 것이다. 엔노교자는 바로 일본에서 성덕왕에게 시집온 ‘가구야 아가씨’의 아버지다.
“예는 살아 있다! 예의 무쇠꾼과 예의 무쇠터를 함부로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 라는 경고 속에는 나라 잃은 무쇠꾼들의 분통함도 잘 드러나 있다.
사건은 그뿐이 아니었다. 바닷가 길을 계속 가다가 점심 때가 되어 식사를 하는데, 수로부인이 느닷없이 말했다.
“저 꽃을 꺾어다 내게 줄 사람은 없는가.”
그가 가리키는 높다란 바위 봉우리에는 철쭉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낭떠러지 산꼭대기였다.
“거기는 사람이 갈 수 없는 곳입니다.”
한 신하가 고개를 저었고, 꽃을 꺾으러 가려고 나서는 사람도 없었다.
때마침 ‘어미소(母牛)’를 끌며 지나가던 한 노인이 이 말을 들었다. 그는 대뜸 산벼랑에 올라 꽃을 꺾어 와 스스로 지은 노래까지 곁들여 수로부인에게 바쳤다.
이 노래가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신라 향가(鄕歌) 중의 하나인 그 유명한 ‘노인헌화가(老人獻花歌)’다.
<삼국유사>에 신라 향가는 14수 실려 있다. 34자의 한자로 된 이 노래를 요즘 말로 고치면 대충 다음과 같다.
“자줏빛 바윗가에 잡은 손 어미소 놓게 하시고,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거든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어미소를 끌고 온 손을 잠시 놓고, 산에 올라 꽃을 꺾어 왔으니, 내가 부끄럽지 않으시거든 이 꽃을 받아 주십시오”라는 뜻의 노래인데, ‘꽃’이라는 낱말에는 두 가지 뜻이 담겨 있다.
한 가지는 ‘꽃’ 그 자체를 뜻하고, 또 한 가지는 ‘꽃’ 아닌 야한 낱말뜻이 담겨 있다. 노인은 ‘꽃’에다 빗대어 좀 야한 뜻의 노래를 읊은 것이다. 다음 호에는 ‘노인헌화가’의 노래말을 풀어서 자세히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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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고대 한국어 ‘백제어’를 찾아서
계백 장군충청도 사투리 썼다
都 守 熙
● 1934년 충남 논산 출생
●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 충남대 국어학 박사
●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 현재 충남대 명예교수
● 저서 : ‘백제어연구’ ‘한국어음운사연구
코미디 영화 ‘황산벌’에서 극중인물 계백 장군(박중훈 분)이 전라도 사투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계백 장군이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것은 역사적 사실에 부합할까. ‘황산벌’은 실제 백제어로는 어떻게 발음됐을까. 필자는 잃어버린 고대 한국어인 ‘백제어’를 찾아나섰다. 충청도 부여에서 일본에 이르기까지, 기원전 18년에서 서기 2000년대 오늘에 이르기까지, 백제어는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고 있었다.
드라마나 영화는 역사적 사실을 충실하게 전달해야 한다. 필자는 몇년전 방영되었던 KBS의 ‘태조 왕건’을 시청하면서 후삼국 통일의 기초를 닦은 황산곡(黃山谷)의 격전 장면이 틀림없이 나오려니 하고 은근히 기다렸다. 태조 왕건 하면 우선 이곳 전투부터 떠오를 정도로 역사적 대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투가 벌어졌던 곳은 유서 깊은 개태사(開泰寺)가 자리잡고 있는 황산곡(黃山谷, 현 충남 논산시 연산면) 천호리(天護里)이다. 이곳에서 왕건이 견훤의 아들 신검과 격전 끝에 승리하여 신검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고 후백제를 멸망시켰다는 사실이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 적혀 있다.
태조 왕건은 승전 기념으로 격전지인 황산곡에 ‘나라를 크게 열다’라는 뜻을 담은 개태사를 창건하였다. 한편 “하늘이 자신을 도왔다”고 여겨 황산(黃山)이라 부르던 승전지의 배산(黃嶺의 북부)을 ‘천호산(天護山)’이라 고쳐 부르게 하였다. 그 후로 오늘날까지 이곳은 ‘천호산’이라 불리며 산 아래 마을은 지금도 ‘천호리’라고 불린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적 사실이 드라마 ‘태조 왕건’에선 언급되지 않았다.
백제 장군 계백은 왕건보다 300여 년 전의 인물이다. 백제가 멸망할 때(660년) 계백이 전라도 사투리를 썼는 지 여부에 대해선 결론을 내릴 수 없다. 구체적인 자료가 전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언어와 관계가 있는 그의 출생지와 생활 근거지(주소지)부터 먼저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백제어에 관한 이모저모도 종합적으로 밝혀야 그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상상하기조차 막연한 아득한 옛날 한반도의 언어, 그 중에서도 특히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은 백제어를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아닐 수 없다.
백제어와 마한어의 차이
백제(BC 18~AD660년)의 북으로는 고구려·예맥이 있었고, 서남으로는 마한이, 동남으로는 신라가 있었다. 정남으로는 가라가 있었고 현해탄 건너엔 일본이 있었다.
그동안 백제는 마한의 터전에 건국한 나라로 인식되어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엄격히 말해 백제는 고대 한반도 중부 지역에 위치한 ‘위례홀(慰禮忽)’에서 건국하였다. 그래서 ‘위례홀국’이라 부르기도 한다. 백제는 건국 이후 350여 년간 마한과는 별도의 국가로 존재해오다가 백제 중기에 이르러서야 마한을 통합하기 시작하였다. 사학자에 따라서는 마한이 완전 통합된 시기를 문주왕이 웅진(공주)으로 천도한 때(475년) 이후인 5세기 말엽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이 엄연한 사실(史實)을 외면한 것이 백제어가 마한어를 계승한 것으로 착각하게 만들었다. 착각을 증명할 정답은 백제의 첫 번째 수도인 ‘위례홀’이라는 이름에 들어 있다. 지명 어미 ‘홀’이 바로 그것이다. 이 ‘홀’은 백제의 태조 온조의 형인 비류가 나라를 세운 곳인 ‘미추홀(彌鄒忽)’에서도 발견된다. 이밖에도 부근 지역의 지명에서 ‘홀’이 많이 발견된다.
이 ‘홀’에 대응하는 지명 어미로 마한 지역에서는 ‘비리(卑離)’가 쓰였다. 이것이 후기 백제어에선 ‘부리(夫里)’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고량부리(古良夫里), 소부리(所夫里) 등이다. 이 ‘부리’는 마한어 ‘비리(卑離)’의 변화형이다. 이 어휘는 신라어와 가라어 지역의 ‘벌(伐)’과 대응된다. 예를 들면 신라어엔 사벌(沙伐), 서라벌(徐羅伐), 비자벌(比自伐) 등이 있었다. 지명 어미 ‘홀’과 ‘비리(또는 부리)’ ‘벌’의 대응 현상은 초기 백제어가 마한어, 신라어, 가야어와는 확연히 달랐다는 것을 증명한다.
백제가 마한을 적극적으로 통합한 시기는 근초고왕(346~375) 때의 일이라고 사학자들은 주장한다. 이 학설에 따른다면 백제와 마한은 적어도 4세기 동안 별도의 국가로 공존해온 셈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백제어는 마한어에서 기원하였다”는 생각은 지워져야 한다. 설령 백제가 건국한 곳이 마한 지역이었다 할지라도 그 북부에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짙은 부여계어(語)에서 출발했다고 추정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고대 경기·충청과 호남의 언어 달라
마한어는 현재의 충남·전라도 지역에만 분포해 있었다. 충북을 비롯한 기타 지역에서는 마한어가 사용되지 않았다. 온조 비류 형제가 각각 나라를 세운 곳의 지명에서 마한어의 특징인 ‘비리>부리’는 나타나지 않고 오히려 ‘홀’(위례홀, 미추홀)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들 지명에 붙은 ‘홀’이 고구려 장수왕이 중부지역(황해·경기·충북)을 점령한 서기 475년 이후의 어느 시기에 고구려 식으로 새로 붙인 어미가 아니라면 이것은 분명 백제어의 기원을 증언하는 횃불의 존재이다. 이를 근거로 백제어는 부여계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는 많다. 앞에서 제시한 ‘위례홀’과 쌍벽을 이루는 ‘미추홀’의 별명이 ‘매소홀’(買召忽)인바, 이 별칭의 첫글자 ‘매(買)’가 ‘매홀(買忽=水城, 요즘의 수원)’ 등과 같이 ‘수(水)’의 뜻임을 알 수 있다. 더구나 중부 지역의 남단인 청주의 옛 이름은 ‘살매(薩買)’인데, ‘매(買)’가 어미일 경우에는 강을 뜻하는 ‘천(川)’으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예로 경기도 이천(利川)시의 옛이름은 남천(南川)인데 백제시대엔 남매(南買)라고 했다.
이와 같은 특징은 조수 간만(干滿)의 이름에도 화석처럼 박혀 있다. 예를 들면 한반도 중부지역의 남단인 어청도에선 음력 초하루를 ‘일굽매’라고 부르는데, 남부지역의 북단인 흑산도에선 ‘일곱물’이라고 한다. 열이틀은 어청도에선 ‘세매’, 흑산도에선 ‘서물’이다.
이처럼 ‘매’가 한반도 중부지역에만 분포되었고 마한 지역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로 미루어볼 때 백제어는 부여계어를 쓰던 ‘위례홀어’에서 기원한 것으로 추정된다.
지금도 백제 역사는 공주·부여 시대에 고정되어 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제 이런 착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백제사에 대한 이해와 관심은 이른바 경기도 ‘한홀’(漢城) 시대까지 확대되어야 한다. ‘한홀’(현재의 경기도 광주)은 백제 시대 전기·중기(BC 18~AB475년)의 중심이었다.
‘백제 역사=공주·부여시대’라는 착각에 빠지도록 만든 사람은 고려의 김부식이었다.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 지리 1-3 지명에 의거하여 그려진 삼국 판도는 고구려가 남침하여 백제의 북부(황해·경기·강원 영서·충북) 지역을 장악한 장수왕 63년(475년) 이후 시기를 기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 백제의 역사가 상당 부분 묵살되었다.
여기서 필자는 ‘삼국사기’가 애써 감춘 사실들을 들추어내고자 한다. 다행스럽게도 ‘삼국사기’의 본기와 열전에 그 단초가 있다. ‘삼국사기’의 기사를 면밀히 검토하면 백제의 전기·중기 시대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의 영토가 아니었던 사실(史實)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의 중심부는 졸본과 국내성이었으며 남쪽 경계는 살수(청천강)였다. 따라서 백제의 중기 말(475년) 이전까지 고구려는 한반도 중부지역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의 내용을 중심으로 백제의 전·중기 판도를 그린 결과 중부지역이 오히려 백제의 소유였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따라서 한반도 중부지역인 황해도, 평안남도 일부,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영서지방 언어는 백제어였음에 틀림없다. 강원도 영동지역은 처음부터 백제와 무관했다.
한반도 중부지역은 고구려가 약 77년간 점령한 이후에 신라의 북진으로 경기 이남과 이북으로 분리된다. 따라서 경기도, 충청도 지역은 겨우 77년간만 고구려의 소유였다. 그렇기 때문에 백제 문주왕이 공주로 천도하기 전인 서기 475년까지 중부지역의 토착어는 고구려어가 아닌 백제의 전기·중기어로 봄이 타당하다.
지명은 가장 보수성이 강한 언어다. 경기·충청지방의 지명들이 고구려어도, 마한어도 아닌 백제어(위례홀어)와 뿌리가 닿아 있는 것은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하게 해준다.
잠시 지명의 보수성을 살펴보자. ‘구약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고장이었던 ‘바빌론’을 비롯하여 아브라함의 고향인 ‘우르’와 ‘우르크’, 아수르왕국의 수도 ‘아수르’ 등의 옛 지명이 50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이라크 전역에서 지명으로 쓰이고 있어 얼마 전 이라크전쟁 보도 때 자주 접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도 백인들이 점령하기 이전 인디언 지명과 하와이 원주민의 지명이 그대로 쓰인다.
백제어와 일본어 매우 유사
백제어 중 수를 세는 어휘인 밀(3), 옻(5), 나는(7), 덕(10)은 현재의 일본어에서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대응되는 일본어 어휘인 밋(3), 잇즈(5), 나나(7), 도우(10)와 거의 일치하는 것이다. 전·중기 시대 백제의 선진문화가 일본에 수출된 사실은 자타가 공인한다. 언어는 문화를 담아 나르는 그릇이다. 따라서 자동적으로 백제어도 일본에 동반 수출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수를 세는 단어가 주변 국가로 수출되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우리와 일본이 일(1), 이(2), 삼(3) 등 중국의 수사체계를 빌려 쓰고 있음이 좋은 본보기이다. 다만 우리는 고유의 수사체계를 아울러 쓰고 있지만 일본은 둘 다 차용하고 있음이 다르다. 이처럼 고대 일본이 백제어의 수사체계를 차용할 정도였으니 다른 어휘의 차용이 어떠했을까는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이는 백제어가 현대 일본어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음을 실증한다.
신라의 수도는 천년간 현재의 경북 경주 일대 서라벌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천도(遷都)로 인한 언어변화를 경험하지 못했다. 고구려는 여러 번 천도를 하였지만 동일한 부여계 언어권 안에서 이동하였기 때문에 언어는 변하지 않았다.
그러나 백제의 경우는 전혀 다르다. 백제는 ‘위례홀⇒한홀⇒고마(웅진, 현재의 충남 공주)⇒소부리(현재의 충남 부여)’와 같이 언어권이 다른 곳으로 세 번이나 천도하였다. 백제는 서기 660년에 멸망하였다. 나라가 망해도 언어는 상당기간 존속하는데, 백제어는 망국 후 적어도 1세기 남짓은 존속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백제어의 실질적인 존속기간을 약 800년 정도로 추산하여도 무방할 것이다.
신라어가 중앙어를 서라벌에 고정시켜 천년 장수를 누린 것과는 대조적으로 세 차례 천도한 백제는 언어변화의 소용돌이를 겪어야 했다. 편의상 800년 백제어사를 전·중·후기로 구분해 각 시기별로 특징을 요약해본다.
전기 백제어인 ‘위례홀어’는 부여계의 단일 언어였다. 전기 백제사회도 단일 부족국가에 의한 단일 언어사회였다. 이 시기에 쓰인 백제어 지명 어미 ‘홀(忽)’은 성(城)과 같은 의미다. ‘달(達)’은 산(山), ‘단(旦)’은 계곡(谷), ‘매(買)’는 물(水), ‘파혜(波兮)’는 고개(嶺)를 뜻한다. 그런데 한반도 중부 이남에서는 ‘홀’이 ‘비리>부리’로, ‘달’이 ‘뫼’로, ‘단’이 ‘실(實)’로, ‘매’가 ‘믈(勿)’로, ‘파혜’가 ‘고개(古介)’로 달리 쓰였다. 고대 호남지방 언어인 ‘바달(波旦-현대의 바다)’에 해당하는 전기 백제어는 ‘나미’로 서로 달랐다. 바다를 뜻하는 현대 일본어는 ‘우미’다.
전기 백제어의 수사 체계는 독특했다. 백제 지명에서 ‘밀’(密=3), ‘옻’(于次=5), ‘나는’(難隱=7), ‘덕’(德=10)과 같이 기본수 네 개가 발견된다. 이 수사들은 ‘셋, 다섯, 일곱, 열’이라는 현대 한국어 단어와는 전혀 뿌리가 다르다. 앞서 언급했듯 오히려 일본어와 연결된다. 백제가 한반도 내의 전기 영토를 상실한 것처럼 전기 백제어의 상당부분이 한반도에선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구려어·신라어에 비해 백제어는 중기에 이르러 상당히 다르게 형성됐다. 일반적으로 정치단위가 하나라고 해서 언어적인 면에서도 단일한 것은 아니다. 한 국가 안에 여러 언어가 사용되는 일은 흔하다.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모두 국어로 쓰는 스위스가 대표적인 예다. 비슷한 사례를 중기 백제어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백제는 중기에 남북으로 영토를 확장함으로써 언어사회의 구조까지 바꾸었다. 이 시기에 백제는 남부와 북부가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형성했다. 말하자면 전기 시대 부여계 단일 언어사회에서 마한어를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로 바뀐 것이다.
백제 사람들은 왕을 ‘어라하’ 또는 ‘건길지’라 일컫고 왕비를 ‘어륙’이라 불렀다. 그런데 ‘어라하’와 ‘어륙’은 지배층인 귀족들이 사용한 언어였다. 반면 ‘건길지’는 평민들이 사용한 호칭이었다. 여기서 지배층의 언어가 부여계어이고 피지배층의 언어가 마한어임을 알 수 있다.
마한어의 특징은 지명 어미 ‘비리’에서 나타난다. 마한 54개국의 이름 중 ‘점비리’ ‘내비리’ 등 비리로 끝나는 이름이 여덟 번이나 나온다. 그런데 이 ‘비리’는 후기 백제어에 ‘부리’(夫里)로 계승된다. ‘고량부리’는 오늘날의 청양이고, ‘소부리’는 부여다. ‘모량부리’는 전남 고창이고, ‘인부리’는 능성이다. 부리가 사용된 지명은 무려 열 번이나 나타난다.
후기 백제어는 두 번째 옮긴 도읍지 공주 시대로부터 막이 오른다. 이 시기 백제는 영토의 상반신을 상실했다. 그러나 왕족 및 귀족은 여전히 부여계어를 사용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제어는 이 후기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다. 비록 백제사 668년 중 185년에 불과하지만 이 시기의 문화는 백제 문화를 대표할 만큼 찬란하다. 언어는 곧 문화발전의 매개체이기 때문에 발달한 문화는 언어의 발달을 수반한다.
특히 성왕 때 ‘소부리’로 천도한 이후 122년간 눈부시게 발전하는데 이는 곧 언어의 발달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처럼 찬란한 문화를 기록한 문헌이 전해졌더라면 백제 말기 언어의 참모습을 알 수 있으련만 안타깝게도 그런 자료는 전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문장 수준의 자료는 아니지만 지명·인명·관직명 등의 단어들이 전·중기의 것들만큼이나 이 시기에도 남겨졌다.
백제어 억압한 통일신라
나라가 멸망한 후 백제어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수도가 함락된 뒤 백제 유민들은 부흥 운동을 벌였다. 거의 100여 년이나 끈질기게 지속하였으니 그 저항정신은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들의 저항정신 속에 언어도 함께 살아 숨쉬고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일제 36년간의 식민지 시대에 소중한 우리말을 빼앗긴 적이 있다. 이후에 한국어는 되살아났지만, 백제어는 백제 멸망 100여 년 뒤 소멸되고 만다. 통일신라의 경덕왕은 언어 통일을 위하여 전국의 고을 이름을 한자(漢字) 지명으로 개정했다. 신라 정부에 의한 지속적인 ‘백제어 억압 정책’은 백제어의 소멸을 앞당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반해 외세에 의해 언어탄압을 받지 않은 일본의 언어에 고대 백제어의 잔재가 매우 많이 남아 있어 주목을 끈다. 일본의 역사서인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도 백제어가 많이 남아 있다. 일본 역사 자료를 토대로 후기 백제어 단어들을 정밀 분석해보자.
● 고마 : 공주의 옛 이름을 한자로 웅진(熊津)이라 적고 ‘고마’라 불렀다. 이 이름이 ‘용비어천가’(1445)에 나오고 ‘일본서기’(720)에는 ‘구마나리(久麻那利)’로 나온다. ‘고마’는 ‘북쪽’이란 뜻이고 ‘나리’는 현대 한국어 ‘나루’로 변하였다.
● 소부리 : 소부리(所夫里)는 백제의 마지막 수도 이름이다. 백제가 망한 뒤에도 ‘소부리주>소부리군’으로 쓰이다가 신라 경덕왕이 서기 757년 지금의 부여로 고쳤다. 백제 성왕은 천도하면서 백제의 뿌리가 북부여(北扶餘)임을 강조하는 뜻에서 ‘남에 있는 부여’란 의미로 국명을 ‘남부여(南扶餘)’라 고쳤다. 경덕왕은 남부여에서 ‘부여’만 따다가 소부리를 부여로 바꾼 것이다. 현재도 부소산 기슭 마을은 ‘소부리’라고 불린다. ‘소’는 ‘동쪽’이란 뜻(샛바람의 새)이고, ‘부리’는 ‘벌판’이란 뜻이다. 그러니까 ‘소부리’는 ‘동쪽 벌판’이란 뜻이 된다.
이 말은 경북 상주(尙州)의 옛 이름인 ‘사벌국(沙伐國)’의 ‘사벌’과 같은 말이고, 신라의 서울 ‘셔벌(徐伐)’과 같은 말이다. 이 말이 변해서 오늘의 ‘서울’이 되었다. 그런데 어형 변화 과정으로 따져볼 때 ‘고마’가 줄어 ‘곰’이 되었듯이 ‘부리’가 줄어 ‘벌’이 된 것이니 ‘소부리’가 ‘사벌’ 또는 ‘셔벌’보다 이른 시기에 발생했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따라서 현대 한국어 ‘서울’의 본 뿌리는 ‘소부리’이다.
‘님’의 기원은 백제어 ‘니리므’
● 구드래나루: 고지도에 한자로 ‘龜巖津’(구돌나루)이라 적혀 있다. 소부리에서 은산 및 정산(定山) 방향으로 건너가는 나루를 ‘구드래나루’라 부른다. 백제 시대에는 이곳이 나루라기보다 항구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본 사신의 배들이 군산포(白江口)를 거쳐 강을 따라 올라와 입항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국빈을 맞는 항구였다면 ‘구드래나루’는 그에 알맞은 뜻이 담겨 있어야 한다. 일본인들은 예로부터 백제를 ‘구다라’로 불렀다. ‘구드래’와 ‘구다라’는 비슷하다. 따라서 동일어로 믿을 수 있다. ‘구드래’는 ‘굳+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백제어는 유기음이 없기 때문에 ‘大’를 ‘근’(>큰)이라 하였다. 따라서 ‘굳+으래’는 다시 ‘그우+ㄷ+으래’로 분석할 수 있다. 결국 ‘그우>구’(大)로 변한 것이고 ‘ㄷ’은 사잇소리이다. ‘으래’는 전기 백제어로 왕을 일컫던 ‘어라+하’의 ‘어라’에 해당한다.
‘어라’는 지금까지도 즐겨 불리는 민요의 마지막 대목인 ‘어라 만수’(왕이시여 만수 무강하소서)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컨대 ‘구드래’의 본말은 ‘근어라’이며 ‘대왕(大王)’이란 뜻이다. 따라서 ‘굳어라’가 일본어로는 ‘구더라’ ‘구다라’로 변하였고, 우리말로는 ‘구드래’로 변한 것이다. 이 말은 ‘근어라(大王津)’란 뜻이다. 백제의 선진 문화가 후진 일본 문화의 밑거름이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일본인들이 백제국을 ‘구다라나라(대왕국)’로 높여 불러온 겸손을 이해할 수 있다.
● 부소산 : 부소산(扶蘇山)은 백제어로 ‘부소모이’였다. ‘부소’는 ‘솔’(松)의 뜻이다. 부여계어로 ‘부소’ ‘부·’는 ‘솔’을 뜻하는데, ‘솔’은 마한어였다. 전기 백제어 지역에서 이 ‘부소’가 많이 발견된다. 한 예로 ‘부소압(扶蘇押=松嶽=松都)’을 들 수 있다. 백제 시조 온조가 위례홀에 도착하여 먼저 오른 산이 ‘부아악’(負兒岳=三角山)이었다. 그런데 兒의 고음이 ‘·’이었으니 부아(負兒)는 당시의 백제어 ‘부·’를 적은 것이다. 이 ‘부·’도 솔을 뜻한다. 마한어 ‘솔’ 지역에 부여계어 ‘부사’가 침투한 것이다.
● 니리므 : 전기 백제어로 왕을 부를 때 지배층은 ‘어라하’라 하고, 백성은 ‘건길지’라 불렀다. 그러나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다. ‘일본서기’는 백제 근초고왕에 대하여 “백제 사람들은 왕을 ‘니리므’라 부른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 후기 백제어로는 왕을 ‘니리므’라 불렀음이 분명하다. 백제어 ‘니리므’가 말모음 ‘ㅡ’와 자음 ‘ㄹ’을 잃고 ‘니임’으로 변한 뒤에 다시 줄어들어 현대 한국어의 ‘님’이 됐다. 이처럼 현대어 ‘님’은 후기 백제어에서 온 것이다.
백제표준어, 충남방언으로 계승된 듯
계백 장군의 영정. 충남 부여군 부여읍 삼충사 소장.
나라 잃은 언어는 결국 쇠퇴하여 한 지역의 방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백제어도 마찬가지 전철을 밟았다. 그렇다면 백제어를 계승한 방언은 지금 어느 지방의 방언일까. ‘표준 백제어’를 계승한 현대어는 바로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쓰이는 방언으로 추정된다(충남 공주 부여 논산 서천 보령과 전북 익산 방언).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백제어는 부여계어의 단일 언어로 출발했다. 그러다 중기에 이르러 호남지역으로까지 영토가 넓어지자 호남지방에서 주로 쓰이던 마한어까지 공용하는 복수 언어사회를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선 부여계어와 마한어가 혼용되어 단일 언어사회에 가깝게 됐다.
그러나 백제 후기에도 왕족과 귀족은 국호를 백제에서 남부여로 개명할 정도로 부여계 혈통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들 상류층은 여전히 부여어계 백제어를 구사했다. 마한어를 토대로 부여계어가 혼합된 형태의 백제어는 주로 피지배층이 사용했다.
즉 상류층은 백제 멸망 때까지도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형성된 부여어계 언어를 계승, 사용한 것이다. 이들 상류층의 언어는 후기 백제의 수도, 즉 공주-부여를 중심으로 ‘수도권 백제 표준어’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오늘날의 호남 방언은 마한어에서 주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충남 공주-부여 방언은 호남 방언과 언어학적 특징에서 뚜렷이 구분된다. 따라서 충남 공주-부여 방언이 후기 백제의 수도권 표준어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여지는 것이다.
계백 장군은 제2품(달솔)의 고관, 즉 상류층 귀족계급으로 백제의 수도인 부여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계백장군은 수도에 거주하는 백제 상류층이 사용한 언어, 즉 백제 표준어를 구사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영화에서 계백 장군이 굳이 현대 한국어 방언을 사용하는 것으로 설정한다면, 호남 사투리가 아닌 충청도 사투리를 쓰는 것이 더 역사적 사실에 가깝다.
다만 부여어계와 마한어가 백제의 영토 내에서 혼합되었으며 이로 인해 현재의 호남 방언도 수도권 백제 표준어의 특징들을 상당부분 이어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산벌 전투를 백제 표준어로 표현하면 ‘누르리모이부리(黃等也山夫里)’ 전투다. 누르리모이부리에서 산화한 패장 계백은 어떤 인물일까. 이 물음에 자세히 대답하기는 어렵다. 그나마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는 문헌은 ‘삼국사기’열전의 기록뿐이다.
이 전투에서 맞서 싸운 신라 장군 김유신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 열전 10권 중 3권에 나누어 자세히 기술하였으나 계백은 열전 제7의 13인 중 맨 끝에 소개하였는데 그나마 짤막하기 그지없다. 오히려 계백이 생포했다가 돌려보낸 화랑 관창에 관한 내용이 배나 길다. 승자에 비해 패자의 모습은 이렇듯 초라하다.
‘삼국사기’는 김유신의 생지(生地)와 가계를 확실히 밝히며 서울(서라벌) 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그러나 계백은 어디에서 태어나 어디에서 살았는지 밝히지 않았다. 다만 그가 백제 사람이라는 것과 벼슬길에 나아가 달솔이 되었다고 적었을 뿐이다.
그의 이름은 階伯, 텏伯으로 표기되어 있다. ‘계’를 동음이자로 표기한 것을 보면 한자의 뜻과는 관계없이 이름을 적은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성씨는 기록하지 않았다. 같은 시기의 백제 인물들이 ‘장군 允充(윤충) 殷相(은상), 좌평 成忠(성충) 義直(의직) 興首(흥수) 忠常(충상) 常永(상영), 달솔 自簡(자간) 助服(조복)’ 등과 같이 성씨 없이 이름만 나타난 것과 비슷하다. ‘삼국사기’엔 신라왕은 박·석·김(朴·昔·金) 3성으로 불렀지만 백제왕은 성씨 없이 온조, 다루, 기루, 개루 등과 같이 이름만 적혀 있다. 백제에서는 왕처럼 백성들도 이름만 불렀을 것이다.
백제인은 두 자 성씨, 두 자 이름
계백의 의미는 무엇인가. 위에 열거한 다른 이름들에 대한 의미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계백의 의미도 알 수 없다. 신라 왕명 중에서 시조 혁거세(赫居世)는 ‘밝아누리’, 유리(儒理)는 ‘누리’, 소지(昭知)는 ‘비지(毗處)’라는 신라말로 풀이할 수 있다. 백성 이름도 황종(荒宗)을 ‘거칠부(居漆夫)’, 태종(苔宗)을 ‘이사부(異斯夫)’, 염독(厭獨)을 ‘이차돈(異次頓)’이라 불렀기에 그 의미를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인의 이름은 신라처럼 한자어로 표기한 별명이 없기 때문에 지금에 와서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 백제 왕명 중에 의미를 확실히 알 수 있는 경우는 무령왕뿐이다. 무령왕은 부모(왕과 비)가 국빈으로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가는 중에 왕비가 일본 규슈(九州)의 북쪽 한 섬에서 해산하였다. 무령왕은 섬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을 ‘세마(斯麻=嶼)’라 불렀다고 ‘일본서기’에는 비교적 자세히 적혀 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사마(斯摩)로 적혀 있고, 무령왕릉에서 발굴된 지석(誌石)에도 사마(斯麻)로 적혀 있어 믿을 수 있다.
또 다른 근거는 백제어 ‘세마’ 또는 ‘사마’에서 기원하여 ‘섬(島)’이라는 현대 한국어가 나왔다는 사실이다.
‘고마(熊)’가 변하여 ‘곰’이 된 것처럼 끝 모음을 잃고 단음절로 줄었다. 백제는 왕성이 ‘부여(扶餘)’씨이고 백제 멸망 후 백제 부흥운동을 이끌었던 장수 은솔(西部恩率) 귀실복신(鬼室福信), 별부장(別部將) 사탁상여(沙度相如),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경우 귀실, 사탁, 흑치는 성씨이며 복신, 상여, 상지는 이름이다. 역사서에 이들의 성명이 ‘복신, 상여, 상지’로만 빈번히 기록된 것을 보면 생략된 앞부분은 성씨였음이 분명하다. 이들의 성씨가 두 자인 점도 특기할 만하다.
이로 미루어 생각할 때 계백은 성명이 아니라 오로지 이름일 뿐이며 그도 두 자로 된 별도의 성씨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현대 한국인은 한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 반면 현대 일본인은 계백 등 고대 백제인과 마찬가지로 두 자로 된 성씨와 두 자로 된 이름을 쓰고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계백 장군의 고향은 어디일까. 그가 거주하였던 곳은 어디였을까. 앞에서 언급하였지만 계백의 출생지와 거주지가 어느 문헌에도 적혀 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여러 모로 탐색하여 짐작할 뿐이다. 역사서는 귀실복신을 서부 달솔이라 지칭하였으니 그가 서부 사람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백제의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았다.
계백도 예외가 아니다. 계백의 벼슬이 달솔이었으니 품계로 따지면 제1품인 좌평(佐平) 다음가는 높은 자리이다. 이러한 그의 벼슬로 미뤄보아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 사람임에 틀림없을 듯하다. 더구나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러 왕이 그를 구국의 선봉장으로 삼았다면 그가 도성에서 멀리 떨어져 살지 않았을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
‘누르리모이부리 전투’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지칭하는 황산벌(黃山之野)은 어디였을까. 황산(黃山)은 고려 태조 때 연산(連山)으로 개명되었다(940년). 백제 시대에는 황등야산(黃等也山)으로 불렸는데 신라 경덕왕이 황산으로 개명한 것이다(757). 따라서 서기 757년까지는 ‘황등야산’으로 불렸다. 앞서 언급했듯 백제인들은 ‘黃等也山’을 ‘누르리모이’라 불렀다. 따라서 황산벌전투가 끝난 후 한동안은 ‘누르 리모이부리 싸움’이라 불렸을 것이다. 거의 100년 뒤인 서기 757년에 중국식 두 글자 지명인 ‘黃山’으로 개정된 뒤부터 백제식 이름은 점점 약해져 결국 사라지게 되었다.
이곳의 지형은 치소(治所)를 중심으로 동부에 올망졸망한 산봉우리가 북으로부터 남으로 36개나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백제인들은 이렇게 ‘산이 늘어섰다’는 의미로 ‘누르리모이’라 명명한 것이다.
한자 黃, 等은 음을 따온 것이다. 그런데 신라 경덕왕이 ‘黃等也山’에서 ‘等也’ 두 자를 줄여 ‘누르모이(黃山)’가 됐다. ‘누르’는 곧 ‘느르(連)’와 동음이어다. 그리하여 고려 초기에 ‘느르모이(黃山)’는 ‘連山’으로 다시 한역되어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황산벌 싸움터’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 ‘누르기재’(黃嶺), 누르기(마을), 누락골(於谷里 또는 於羅洞), 누르미(마을), 황산리(新良里 동쪽) 등의 지명이 파생되었다.
계백 장군은 백제 수도인 현재의 충남 부여지역에 거주하면서 수도권 표준어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에 있는 백제 별궁의 연못 궁남지.
이들 여러 지명 중에 어느 곳이 당시의 결전장이었을까. 본래 싸움터란 일정한 곳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싸우다가 다른 장소로 밀려가기도 하기 때문에 어느 한 곳만을 고집할 수는 없다. 그래도 굳이 지정한다면 ‘누르미, 누르기, 황산리’ 일원이 아닐까. 전해 내려오는 ‘황산벌 싸움’의 지명 ‘黃山, 누르모이’와 같기 때문이다. 상당히 넓은 이 벌판은 계백 장군의 지휘사령부에서 약 10여 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계백 장군이 5000명의 결사대를 지휘하던 사령부는 황산성(黃山城)에 위치해 있었다. 누르모이 싸움의 요새였던 이 성의 둘레는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493보(步)이고 성 안에 샘이 하나 있었는데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다고 하였다. 필자는 소년 시절 황산성에 있었다는 이 샘에 자주 놀러 갔었는데 수량이 많고 깨끗해서 물맛이 아주 좋았던 것으로 기억된다.
이 황산벌 성터는 남저북고(南低北高)의 지형을 갖추고 있어 북쪽은 성을 쌓을 필요가 없을 정도로 높았다. 아래로 내려다보면 멀리서 움직이는 적군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위치로 서쪽으로는 백제의 서울 소부리(사비성)가 아련히 보인다. 이 성터 지휘대에 올라서서 구름처럼 몰려든 신라군과 맞서 싸우며 계백장군은 한두 번쯤 서울 소부리를 바라보지 않았을까. 한반도 서부와 일본을 호령하던 ‘700년 제국’ 백제의 멸망을 예감하며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논산시 관동은 화랑 관창에서 유래
현재 논산시 연산면 북쪽 3리 황산성(일명 城隍山石城)의 동쪽 산자락에는 관동(官洞)이라는 산골이 있다. 이 산골의 이름은 신라 화랑 관창에서 유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삼국사기’ 열전 제7에 화랑 관창(官昌 또는 官狀) 이야기가 나온다. 관창은 신라 장군 품일(品日)의 아들이다. 백제를 침공할 당시 관창은 부장(副將)이었다. 신라 군사가 느르뫼벌에 이르러 백제군을 네 차례 공격하였으나 번번이 실패하였다.
그러자 품일 장군이 아들 관창에게 홀로 백제군에 진격하여 용맹을 떨치라고 명하였다. 명을 받은 관창은 말에 올라 창을 비껴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백제군을 여러 명 죽였다. 그러다 사로잡혀 백제 원수 계백 앞에 끌려갔다. 계백 장군이 관창의 갑옷을 벗기게 하였다. 아직 나이 어린 소년이었다. 계백은 어린 소년의 용감함을 어여삐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 탄식하기를 “신라에는 기특한 선비가 많다. 소년도 오히려 이러하거늘 하물며 장사는 어떠하랴” 하며 살려보냈다.
그러나 관창은 “내가 아까 적진에 돌격하여 장수의 목을 베고 영기(營旗)를 꺾지 못하였으니 한스럽기 그지없구나. 다시 쳐들어가서 반드시 성공하리라”고 외친 후 손으로 우물물을 움켜 마신 뒤 재차 적진으로 돌진하여 용맹스럽게 싸웠다. 계백이 그를 사로잡아 이번에는 머리를 베어 말 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말이 관창의 머리를 안장에 매달고 돌아오자 품일은 아들의 머리를 쳐들고 소매로 피를 닦으며 “내 아들의 얼굴이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나라를 위하여 전사하였으니 참으로 장하도다”라고 외쳤다. 이를 본 모든 군사가 분개하여 목숨 받쳐 굳게 싸우기로 결의한 다음 북을 치며 진격해 백제군은 크게 패하고 말았다.
화랑 관창이 죽은 곳이 이후 ‘관창골(官昌洞)’로 불렸으며 후대에 ‘창’이 생략되어 ‘관골(官洞)’이 되었다가 현재엔 관동이 됐다는 것이다.
충남 논산시 부적면 충곡리(忠谷里) 마을 북쪽 산기슭에 1340여 년 전에 사망한 계백 장군의 묘가 있다. 최후의 결전장에서 직선으로 거의 6km나 떨어져 있는 곳이다. 계백은 비록 패했지만 5000의 군사로 5만 군사와 싸워 네 번을 격퇴시킨 충장(忠將)이었다. 그가 전사한 후 어떻게 여기에 묻히게 되었는지를 전하는 기록은 없다. 아마도 전사한 장군을 누군가 남몰래 이곳으로 옮겨 비밀리에 묻었던 것으로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그렇지 않으면 누르리모이부리 싸움에서 이곳 부근에까지 밀려와 끝까지 저항하다가 결국 이곳 충곡리에서 전사한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곳은 백제 서울 소부리 쪽으로 후퇴하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백제 충신 계백의 무덤이라는 전설로 인하여 이곳은 지금도 충곡(忠谷)이라고 불린다. 지명이 지닌 역사적인 증거력이 얼마나 강한가를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묘가 가짜일 수도 있다 하여 의심해왔다. 의심을 풀기 위하여 1966년 여름 실제로 묘를 파 보았는데 증거물은 찾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 묘는 계백 장군의 묘일 가능성이 상당히 크다. 우선 묘 속의 길이가 12척이요, 넓이가 6척이나 되며 석회로 천장을 다섯 층이나다진 것 등은 상고(上古)시대의 무덤 규모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충곡이라는 지명이 가장 확실한 물증이다. 조선 영조 18년(1692년)엔 충곡서원이 창건되어 계백 장군을 배향(配享)하였다.
최근 논산시가 계백 장군 묘의 봉분을 장군 묘답게 키우고 묘역도 넓혔다. 묘소에 충혼비도 세웠다. 아울러 부근에 계백 장군의 영정을 모시는 사당을 짓고 앞의 넓은 광장에 기념관을 건립하는 등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5000 결사대 최후의 순간
앞에서 소개한 바와 같이 계백의 벼슬은 달솔이었다. ‘달’은 백제어로 ‘높다(高)’는 뜻이다. 또한 ‘달’은 ‘아사달(阿斯達=九月山)’, ‘부사달(夫斯達=松山)’, ‘소물달(所勿達=僧山)’ 등과 같이 산(山)의 뜻으로도 쓰였다. 달솔(達率)은 대솔(大率)로 다르게 적기도 하였다.
고유어 ‘한’을 한역하면 ‘大’이다. 대전(大田)을 ‘한밭’, 대천(大川)을 ‘한내’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솔’은 고구려의 벼슬이름 중에서 ‘욕살(褥薩)’의 ‘살’에 해당한다. 이 ‘살’, ‘솔’이 변하여 후대의 ‘슬’이 되었다. ‘벼살’이 ‘벼슬’로 바뀐 것이다.
계백 장군은 장졸 5000 결사대를 이끌고 서울 소부리를 출발하여 ‘두락모이(石城)’를 지나 ‘가디나이(恩津)’를 거쳐 ‘누르리모이(黃等也山)’에 당도했을 것이다. 도착하자 세 진영(三營)을 설치하고 신라군과 맞섰다. 아마도 당시의 세 진영 중 제1영은 현 관동리의 서쪽산 위에 축성한 석성 ‘누르모이잣(黃山城)’이고, 제2영은 이 제1영에서 정남을 향해 왼쪽(남동쪽)에 있는 흙성 ‘누르재잣(黃嶺城)’이며, 제3영은 오른쪽(서남쪽)에 있는 흙성 ‘오이잣(外城)’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령탑인 제1영을 중심으로 양팔을 벌린 듯이 두 진영이 펼쳐 있어 적을 품안에 끌어들여 섬멸할 수 있도록 설치됐다.
계백은 5000 결사대를 작전에 알맞게 3개 진영에 분산 배치하고 주성인 제1진영에 올라 총지휘하여 10배가 넘는 5만여 신라군을 네 차례 격퇴했다. 그러나 싸움이 계속되면서 기진맥진한 백제군은 신라군의 다섯 번째 진격을 맞아 ‘누르리모이부리’ 마지막 싸움에서 마침내 전멸한 것이다.
앞의 이야기로 돌아가 계백은 후기 백제의 표준어에 해당하는 ‘고마·소부리’ 말을 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영화 속 계백 장군은 공주·부여 지방 방언을 쓰는 편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