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의 신학
사이에서 경계를 넘어
이한오 신부 (프란시스, 춘천성공회)
‘사이의 신학’이란 이름으로 새 지면을 꾸미게 되었습니다.
‘사이의 신학’, 이렇게 이름을 붙인 것은 하느님과 예수님 그리고 우리 인간들에게서 비롯하는 여러 가지 주제들 사이의 관계에 대하여 풀어나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형식적으로는 일종의 칼럼이나 단상이 될 것이고, 내용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실 것입니다.
예수를 어떻게 이해하느냐?
신학교에서는 이른바 ‘그리스도론’이라는 과목에서 배우는 주제인데, 이 물음이 어디 신학생들에게만 해당하는 주제이겠습니까?
오늘날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신자들, 성도들, 교우들 그 이름이 어떻게 불리더라도 모든 신앙인들은 예수가 누구인지 다시 질문해야 하는 시대에 산다고 생각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는 없다>는 책까지 등장했겠습니까?
특별히 오늘의 한국에서 예수는 누구이며 어떻게 ‘선포’되고 있으며, 어떻게 ‘이해’되고 있는지 관심을 두겠습니다.
세계 교회가 놀랄 정도의 인구 대비 신자수를 자랑하는 한국 교회에서 예수는 어떤 모습으로 이해되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 저는 해석학적 원근법이라는 매우 오래된 방법론을 사용하려고 합니다.
해석학적 원근법이란 어떤 상황에 대하여 멀리서도 보고, 가까이서도 바라보아 관찰된 대상을 종합적이고 융합적인 방식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예컨대 구원과 은총이란 주제를 다룬다고 할 때, 이 주제의 원론적인 개념을 전제로 하면서 실제로 신앙인들이 받아들이는 육감적 시각을 놓치지 않고 접근해 보는 겁니다.
‘사이의 신학’은 연재소설처럼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해 놓았다거나, 조직과 체계를 갖추어 모든 순서를 미리 정해 놓은 것도 아닙니다.
그저 제 자신이 성직자이기 이전에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서 고민해 오던 주제들, 혹은 우리 교회가 미래에도 존재할 수 있으려면 갖추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주제들, 참으로 이상하게도 극단적이고 배타적인 주제들을 다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학은 현실이라는 구체적 배경 위에서, 초월적 대상의 메시지를 적용하는 일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현실과 초월 사이에서, 빛과 어둠 사이에서, 하늘과 땅 사이에서, 복음과 상황 사이에서, 전통과 문화 사이에서, 좌익과 우익 사이에서 하느님의 뜻을 묻고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이와 경계는 우리 현실에서 양비론의 쌍날칼로 오해되기 일쑤입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태도로 이해되어, 입장이 없는 ‘두리뭉실과’로 치부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이와 경계’에 서는 진정한 이유는 사이와 경계에 맞닿아 있는 여러 입장, 주장, 신학, 믿음의 내용, 당파적 조직들 그 외 수많은 사람들의 섬세한 기호와 생각의 차이까지 가급적 모두 아울러 보려는 시도이지, 모든 사람들과 그저 ‘좋은 게 좋은 것이다’는 국경 없이 ‘사람 좋은 신학’을 하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사이에 서게 되면 모든 극단주의와 배타주의와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포스트 모던적 해체론도 아니고, 반대로 다시 ‘거대담론’으로 빠지고 싶은 유혹과도 거리를 취해야 합니다.
사이에 서게 되면 여러 가지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유기적 전체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야 화해와 소통이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위와 아래를 잇고, 좌와 우를 잇느라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요사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영성’에 대해서도 결국 어떤 예수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영성의 성격이 정해집니다.
어떤 이들은 예수의 수난에 초점을 맞추고, 어떤 이들은 영광의 부활에 시선을 맞춥니다.
‘사이의 신학’은 그분의 탄생, 곧 성육신하신 말씀에 포커스를 두려고 합니다.
성육신하신 하느님은 하늘에서 땅의 세계에 오셔서, 무한하신 존재가 유한한 존재가 됨으로써, 유한한 존재들의 삶을 무한한 존재와 연결시켜 벽을 허물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평생 길을 걸으셨습니다.
길 위에서 하늘과 땅 사이를 연결해주시려 하셨고, 이 땅의 세상이 모든 것으로 알고 있는 이기적인 사람들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다른 세상을 깨닫도록 해 주셨습니다.
저는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예수께서 하느님과 우리 사이에 오셔서 경계를 초월하도록 자극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쓰다 보니 조금은 거창한 프롤로그가 된 것 같습니다.
다음 주부터는 물음은 크더라도 이야기는 작게 풀어갈 것입니다.
그 첫 번째는 동정녀가 아기를 낳는 아름다운 잉태 이야기부터 풀어 볼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