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국제결혼문화원 원문보기 글쓴이: 해바라기
|
|
베트남의 종교 (Religion)
베트남 종교 비율
불교 9.3%, 카톨릭교 6.7%, 호아하오교 1.5%, 까오다이교 1.1%, 개신교 0.5%, 회교도 0.1%, 기타 / 무신론 80.8%
1999년 CIA 조사 결과
베트남의 종교로는 불교, 카톨릭, 개신교 등이며, 제일 많이 믿는 종교는 불교, 가톨릭(평균 신자 비율 6%)이다. 그외에 신흥종교도 있는데, 양대 신흥종교는 까오다이와 호아하오교이다. 까오다이교는 1926년 베트남 남부의 터이닌에서 응오반쩨우에 의해 창시된 불교, 로마 가톨릭, 개신교와 토속종교가 혼합된 유일신교이고, 호하하오교는 베트남 남부에서 기원한 불교에 바탕을 둔 신흥종교이다. 1939년 후인 푸 소가 창시하였다. 발원지인 메콩 강 삼각주 지역을 중심으로 대략 200만명의 신자가 있다고 추산된다. 베트남은 과거에는 종교으 자유가 없었지만 예로부터 베트남에서 가장 많이 믿는 종교가 중국, 인도의 영향을 받은 불교였기 때문에 불교만은 탄압하지 못했다. 현재는 제한적인 종교활동은 허용되고 있는데 집회는 사전 신고를 하여야 하고 선교는 불법이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의 종교정책이 탄압정책에서 종교를 실용적으로 활용하는 실용정책으로 변경되었기 때문이다.
베트남의 가톨릭교회는 베트남 정부에 의해 종교의 자유를 허용받았으며, 2005년 12월 5일에는 바리아 교구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 장관 크레센지오 세페 추기경에 의해 26번째 교구로 인정받는등 교세가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2년에 한 번만 신학생을 선발할 수 있는 신학생 선발제한으로 가톨릭사제가 부족한 문제등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다. 베트남 개신교는 크게 복음주의 노선과 오순절 교회 노선으로 구분되는데, 이는 한국 개신교 선교사들의 전도활동에 의한 것이다. 하지만 설교내용을 종교문제를 맡는 당국에 알려야 하는 등, 로마 가톨릭과 마찬가지로 종교의 자유가 제한되어 있다. 베트남 성공회는 동남아시아 성공회 관구교회싱가포르 교구에 베트남 부교구로 속해 있다
정부의 종교정책, 무늬만 개방
베트남 사회주의 정부는 종교생활을 기본적으로 억제해 왔으나 지난 2004년 11월 5일에 발표한 헌법개정에서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입장을 밝혔다. 헌법 1조 1항에 의하면 ‘공민(공산당 민족)은 종교를 가질 수 있고, 가지지 않을 수도 있다’고 명시돼 있다. 그러나 이 헌법에는 교회의 모든 것을 사회주의 이념과 활동 속에 종속시키려는 개념이 내재돼 있다고 한다. 이 헌법의 시행령에 따르면 모든 교회활동은 교회 내에서만 가능하고, 교회활동과 사역자 임직 등도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종교를 가지지 않을 자유를 침범한다는 이유로 전도활동도 금지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공포한 새 종교관련 법에 따르면 베트남의 모든 교회가 당국에 등록해야 한다. 이에 베트남 정부는 모든 교회가 등록을 신청해 당국의 승인을 받으면 합법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그러나 관련 규정을 보면 교회가 공산당 종교성에 등록되기 위해서는 준법서약 서류와 기타 서류들을 제출하도록 돼 있다. 그리고 준법서약과는 별도로 각 지역의 지역관리들의 명령도 함께 지킬 것을 서약해야 한다. 따라서 베트남 정부에서 인정한 몇몇 교단을 제외한 나머지 교단은 탄압의 대상이 되고 있는 현실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 지역관리들이 법의 한계를 뛰어넘어 교회에 대한 탄압에 앞장서고 있어서, 당국에 제대로 등록되지 못한 교회들이 많다. 지난 해의 경우 베트남 북부에서만 무려 500교회가 등록 신청을 했으나 거의 대부분은 거부되거나 신청서류를 뜯지도 않은 채 반려됐다. 선교정보단체 푸른섬선교정보에 따르면 “이것은 정부의 말을 잘 듣는 교회만을 양성화시킨다는 의미”라며 “그 외에 순수성을 고집하는 교회는 지하교회와 가정교회가 되고 있는 현실”이라고 한다. 베트남 P 선교사도 “헌법에 신앙의 자유가 보장돼 있으나 통제를 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종교자유가 없다”며 “베트남이 WTO가입을 앞두고 표면적인 개방만 했을 뿐, 많은 기독교인들이 인권탄압과 박해 아래 놓여있다”고 설명했다.
소수종족들에게 기독교 탄압
베트남의 이러한 기독교 탄압은 베트남 인구의 20%에 해당하는 소수종족들에게 주로 행해진다. 기독교인이 거의 없는 베트족(낀족)은 베트남 전 인구의 80%이상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베트남은 60개 정도의 종족들로 형성돼 있다. 특히 소수종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베트남 국경지대에 근접한 중서부 고원지역은 정부의 심한 박해 아래에 놓여있다. 지난 부활절 기간에는 베트남 경찰이 이 지역 기독교인들을 대거 구속했으며 그 가운데 일부는 심한 고문 등으로 인해 사망했다. 푸른섬선교정보에 따르면 최근 2주 동안 이 고원지대의 소수종족 기독교 목회자 14명이 구속됐으며, 이들은 현재 어디에 수용되어 있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현재까지 알려진 구속 목회자 수는 총 26명으로 늘어났으며, 이 가운데 이번에 구속된 14명을 제외한 나머지 12명은 북부 지역의 강제노동교화소에 수용돼 벽돌제작에 투입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베트남 정부가 이 지역의 소수종족들을 문제삼아 탄압하는 까닭은 이 종족들이 베트남 전쟁 때 남부 베트남과 미국의 입장에 동조해 베트남과 대적해 싸웠던 적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는 서양의 종교인 ‘기독교’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베트남 정부가 탄압하는 소수종족의 또 한 예로 종족의 95% 이상이 기독교인인 흐몽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산간지역에 거주하며 다른 종족에 비해 복음전파에 열정적인 종족이다. 정부가 이들을 박해하자 흐몽족 기독교인들은 신앙을 지키기 위해 현재 지하교회 중심으로 신앙을 유지하며 가정교회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다. P 선교사는 “외부적으로는 인권상황을 개선하는 듯 보이나 내부적으로는 신앙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 베트남 선교의 안타까운 현실”이라며 ‘신앙의 자유를 가진 한국교회 성도들이 특별히 박해받는 베트남 성도들을 위해 기도로 도와줄 것’을 호소했다.
베트남의 역사 (History)
반랑국~안남시대
최근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베트남 원주민은 약 30만년전 선사시대부터 거주하고 있었으며, 기원전 4천년부터 청동기문화가, 기원전 2천년 전에는 철기문화가 시작하였다고 보고되기도 한다. 기원전 275년에 반랑국을 멸망시키고 안 즈엉 브엉에 의하여 어우락 왕국이 세워졌고, 어우락 왕국은 진나라의 장수인 찌에우 다에 의해 합병되어 남비엣(남월: 南越, 오늘날 비엣남의 기원임)의 한부분이 된다. 찌에우 다는 중국인 관리에서 시작하였지만 토착문화에 익숙하고 자신을 현지인들과 동일시하면서 중국의 한나라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베트남인들은 중국의 침략에 대항하는 위대한 황제로 본다. 그런데, 이 남비엣은 BC 111년 전한(前漢)의 무제(武帝)에게 정벌됨으로써 베트남은 그 후 약 1000년간 중국의 지배를 받았다. 당대(唐代)에는 이곳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가 설치되어 이후 중국은 베트남을 안남이라고 불렀다.
특히 기원전 2천년전부터 논농사를 경제적 기반으로 하는 국가형태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는데, 고대 베트남의 청동기 기술이 절정에 달한 7세기의 동선문화(Dong Son culture)의 유물 및 유적이 발굴되면서 전설상의 반랑국의 존재가 확인된다. 베트남인들은 기원전 2천년전 반랑국의 흥왕을 건국의 아버지로 여긴다. 한편 베트남인의 선조는 중국의 화남지방에 거주했던 월족(越族)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도 하지만, 중국과의 교류이전에 독자적인 토착문화를 이루어 왔다고 한다.
베트남 최초의 독립왕조
중국대륙의 당송교체기의 혼란기에 남비엣 지역을 장악한 류엔이 국호를 대월이라 하였다가 이후에 남한으로 바꾸었다. 이 세력은 중국대륙과는 별도의 세력을 이루면서 베트남지역을 장악하였지만, 베트남에서의 중국세력을 몰아내려는 응오꾸엔(吳權)과의 일전을 벌인다. 938년 중국의 원정군에게 대승리를 거둔 응오꾸엔이 이듬해인 939년에 스스로 왕위에 올라 처음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난 최초의 왕조인 응오왕조를 세운다. 이후 딩, 레 왕조로 이어졌으며, 레(黎)왕조는 송나라의 침입을 물리치고 베트남의 독립을 지켰다. 이들 왕조에 이어서 1009년에 성립된 리(李)왕조는 리꽁우언에 의해 만들어져 송나라의 재침입을 물리치면서 200년간 왕조를 이어갔다. 그러나 원나라의 침입과 내부혼란으로 리왕조는 무너지고 몽고군의 침입을 물리친 쩐흥다오에 의해 쩐(陳)왕조(1226~1400)가 세워져 동남아시아의 강력한 국가의 하나임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쩐왕조의 멸망 이후 들어선 호왕조는 허약하여 명나라의 침입을 받으면서 1406년에는 다시 중국의 속국이 되어 약 20년간 지배를 받게 된다.
베트남의 레왕조
1428년 레러이가 명나라를 몰아내고 세운 레왕조(허우레(後黎)왕조라고도 함: 1428~1788)는 베트남 봉건왕조 중에 가장 오래 지배한 왕조의 하나이며 봉건왕조가 가장 발전한 시기로 기록되어 있다. 네번째 왕인 타인똥(聖宗)은 베트남 역사상 보기 드문 안정과 번영을 만들었다. 그는 국내에서는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당율을 근간으로 베트남 고유의 관습법과 사회제도 등을 반영한 베트남 최고의 성문법인 <國朝刑律>을 만들어 유교이념을 바탕으로 중앙집권적 군주제를 실현하였고, 대외적으로는 남방정벌에 나서 참파국을 정복하고 서쪽으로는 라오스의 루앙프라방까지 정복하였다.
그러나 타인똥의 사후에 혼란을 겪다가 막당중에 의해 왕조가 멸망하자 레왕조의 중흥노력이 일어난다. 1592년 막씨가 축출되고 레왕조가 부활되었으나 이후에는 왕조의 정통성과 권력을 둘러싸고 북쪽에는 찡 가(家)가, 남쪽에는 응웬 가(家)가 지배하면서 남북으로 갈라져 대립과 분열이 지속되었으며, 양쪽간의 수차례의 전쟁을 치르는 등 이러한 대립구도는 17~18세기까지 지속되었다. 서로 간의 전쟁이 교착상태에 빠지면서 휴전을 하여 1세기 정도를 지냈으나 오랜 전란으로 전국의 농촌이 황폐화되면서 농민들의 봉기가 빈발하게 되었으며, 마침내 1771년 응웬냑, 응웬후에, 응웬르 삼형제가 농민들을 모아 일으킨 떠이썬(西山) 봉기로 남부의 응웬가의 세력이 1774년 무너졌고, 북부의 찡가의 세력까지 무너졌다. 북부 레왕조의 구원요청으로 당도한 청나라의 20만 군대가 수도인 탕롱(오늘날의 하노이)을 잠시 점령하였으나, 1788년 후에(Hue)에서 왕위에 올라 떠이산 왕조를 연 응웬후에에게 패배한다. 레왕조 시대의 남부세력을 재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응웬가의 응웬아잉은 마침내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고 1802년 떠이산 군을 물리치고 후에를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웬왕조를 창건한다.
베트남의 응웬왕조와 식민시대
레왕조 시대의 남부세력을 재건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던 응웬가의 응웬아잉은 마침내 프랑스 세력을 등에 업고 1802년 떠이산 군을 물리치고 후에를 점령함으로써 베트남의 마지막 왕조인 응웬왕조를 창건하게 되며, 이 왕조는 국호를 과거의 중국에서 불렀던 남비에트와 구분하여 비에트남(越南)이라고 하였으며 1945년까지 지속된다.
그런데 응웬왕조의 2대 황제 성조명명제(聖祖明命帝)가 선교사 박해사건을 일으킴에 따라 영국과 경쟁하며 일찍부터 인도차이나로의 진출을 꾀하고 있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이를 구실 삼아 1858년 다낭을 공격하고 이듬해에는 사이공을 점령하였다. 그 후 프랑스는 베트남의 북부 및 중부를 공략하여 1884년에는 베트남의 전국토가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었다.
프랑스 세력에 대항하기 위한 베트남인의 독립운동은 20세기에 들어와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중국·일본 등지에 그들의 독립운동 단체가 만들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7년에는 베트남국민당이, 1930년에는 인도차이나공산당이 조직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일본이 베트남에 침입하자 많은 민족주의 세력 중 가장 조직력이 뛰어났던 공산주의 계열은 베트남 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하였다.
1945년 8월 전쟁이 끝나자 베트민을 중심으로 베트남민주공화국이 성립되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전쟁 전의 지배권을 되찾고자 하였고 이로 인해 1946년 말부터 양국 사이에는 전쟁이 발발하였다.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이라고 부르는 이 전쟁은 8년(남부에서는 9년)이나 지속되었다. 1954년 5월 프랑스군의 거점인 디엔비엔푸가 함락되었고 같은 해 7월 제네바에서 휴전협정이 성립된 결과, 북위 17°선을 경계로 하여 베트남은 남과 북으로 양분되었다. 제네바협정은 체결 2년 후에 전국 총선거를 규정하고 있었으나 이 조항은 이행되지 못하였다.
베트남전쟁
고 딘 디엠의 친미정권(親美政權)이 반공정책을 강화하자 남부 베트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1960년 12월 베트남 민족 해방전선(베트콩)을 결성, 월맹에게 조종되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편 1963년 11월 장군 두옹 반 민의 군부 쿠데타로 고 딘 디엠은 실각하였는데 이때부터 베트남의 정국(政局)은 쿠데타의 악순환에 휩쓸려 무려 10여 차례의 쿠데타를 겪은 후 1965년 6월에는 장군 구엔 반 티우의 정권이 들어섰다. 티우 정권은 1966년 새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1967년에는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통령과 상·하 의원을 선출하였는데, 1969년 2월에 공산군의 전면공격이 개시되었다.
한편, 이보다 앞선 1965년 8월 ‘통킹만(灣)사건’을 치른 미국은 베트콩의 활동은 곧 월맹의 침략행위라는 견해를 표명하고 북폭(北爆)을 개시하였다. 베트콩의 기세가 꺾이지 않자 미군은 소탕전에 직접 뛰어들어 작전을 유리하게 이끌었고 민생안정·농촌건설에 주력하는 ‘평정계획’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특히 이 전쟁에는 동남아시아의 집단방위를 목적으로 하여 한국을 비롯하여 필리핀·타이·오스트레일리아·뉴질랜드도 파병하였다. 1969년 2월 공산군이 베트남에 대하여 전면 공격을 개시하자 미국대통령 닉슨은 ‘베트남전쟁의 베트남화 계획’을 발표하였다.
1972년 1월 미국과 월맹 간의 비밀회담이 계기가 되어 1973년 1월 파리에서 미국·베트남·베트콩(남베트남의 공산당)·월맹 간에 휴전협정이 조인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 4월 공산군은 협정을 위반하고 맹렬한 공격을 재개하여 1975년 1월 푸옥빈 성도(省都)를 함락, 점차 베트남 전역을 휩쓸기 시작하자 4월에 대통령 티우가 사임하고, 트란 반 후옹을 거쳐 장군 두옹 반 민이 난국 수습의 중책을 맡았으나 대통령 민의 평화협상 제의를 베트콩은 거절했다.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이 사이공을 점령하자 30년에 걸쳤던 베트남전쟁은 막을 내렸다.
중국과의 국경전쟁
1976년 6월에 개최된 남·북 베트남 통일국회에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탄생하였으나 30여 년에 걸친 전쟁을 겪은 국토의 황폐(荒廢)는 여러 가지 면에서 신국가 건설의 장애가 되었다. 1978년 남베트남의 개조(改造)사업이 본격적으로 착수되고, 일반 상점의 사회주의화, 통화개혁 등이 단행되었으나 이러한 일련의 조치는 호치민시(市)의 경제적 실권을 잡고 있는 화교(華僑)의 대량 귀국사태를 야기하였다. 그 결과 대중공관계의 악화, 군사·경제 양면에 걸친 중공 원조의 전면 정지라는 사태에까지 발전하였다. 그리하여 베트남은 같은 해 6월 소련·동구권의 COMECON(Council for Mutual Economic Assistance:경제상호원조회의)에 가맹하는 한편, 미국이나 동남아시아 제국 등 서방측 진영에의 접근도 시도하였다.
1977년 가을부터 격화한 캄보디아와의 국경분쟁이 1978년에 들어서서 더욱 악화할 조짐을 보인 끝에 1979년 1월, 베트남군의 지원을 받은 캄보디아 구국 민족통일전선이 캄보디아 전국토를 제압하기에 이르자 캄보디아와 우호관계를 맺은 중공은 무력으로 응징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하여 1979년 2월 17일 중공군은 중·월 국경지대에서 베트남에 대하여 선전포고 없이 대규모적인 군사행동을 개시하였다. 베트남도 철저히 항전, 쌍방간에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1979년 3월 6일 중공이 제안한 외무차관급회의를 베트남이 수락하였으므로 전투는 일단 종식되고, 5월 21일에는 제1차 포로교환이 이루어졌다. 1989년 9월에는 캄보디아 주둔 베트남군의 철수가 완료되었다.
도이머이 개혁정책
장기간의 전쟁 이후인 1975년과 1986년 동안에 베트남은 전후의 황폐함, 사회문제, 대규모 난민의 발생, 캄보디아와의 분쟁 그리고 자연재해 등 수많은 문제들에 봉착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미국과 유럽의 고립정책과 무역금지 정책이 베트남의 전후 발전에 크나큰 걸림돌이 되었다. 더욱이 이러한 어려움들은 발전을 위한 특별한 제반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베트남의 상황을 한층 악화시켜, 1986년에는 774.7%에 달하는 최악의 인플래이션이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국내외의 어려움을 타개하고자 베트남 정부는 1986년에 모든 부문에 걸친 개혁 정책안인 ‘도이 머이(Doi Moi)’ 정책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도이 머이’ 정책의 가장 우선순위는 경제발전으로 정부에 의해 조절되는 다양한 시장 경제 영역을 창조해내는 경제부문에 대한 개혁이었으며, 동시에 합법적 경제환경을 구축하고 정당과 국가의 구조를 개편하는 것이었다. 도이머이 정책을 통해 베트남의 경제는 개방되었으며 중앙계획적인 방식에서 시장 지향적인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모든 재정의 중심이 예산 균형과 수출증대에 맞추어졌다. 1989년 이후에 베트남은 연간 1-1.5톤의 쌀을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인플래이션도 1990년에는 67.4%로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또한 정치와 치안도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으며 외국과의 관계도 개선되어 무역금지와 고립화를 벗어나 무역활동을 재개할 수 있는 나라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91년에서 1998년 사이 연평균 경제성장률은 8%에 달했으며, 1999년에 자연재해로 인해 GDP 4.5%로 주춤한 이후 2000년에는 다시 GDP 6.7%로 급속한 발전을 이어 나가고 있다 베트남의 정치 (Government) 베트남 사회를 지배하는 유일한 세력은 공산당이며, 당원수는 약 248만 명이다. 헌법상 공산당은 국가와 사회를 영도하며 정부, 국회의 활동을 지도하도록 하고 있어서, 베트남의 현 사회주의 체제하에서 정치구조상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 기관은 공산당이다. 베트남 공산당 최고의 기관은 전당대회이며, 여기에서 당의 중요한 정책의 인준, 정책노선의 결정, 새로운 당 규약의 채택이 이루어지게 된다. 베트남 공산당은 집단주의 지도체제의 만장일치에 의한 의사결정과정을 1930년 공산당 창립이래 지켜왔는데, 정책결정과정에서 만장일치와 비밀주의 원칙을 철저하게 적용하였다. 그러나 정책결정과정을 위한 정보와 그 과정이 소수의 최고지도자에 의해 독점됨에 따라 각 파벌간 불신과 권력수단의 독점을 위한 과열된 경쟁을 동반하여 노선을 확정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1980년대에도 극심한 저발전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가장 가까운 우방국이자 경제의존율이 높았던 구소련에서는 1985년 고르바초프가 등장하면서 페레스토로이카라는 개혁 및 개방노선을 채택함으로써 베트남은 1986년 제6차 베트남 공산당대회에서 획기적인 개혁 및 개방정책인 도이머이 노선을 채택하게 된다. 최근 도이머이 정책수행이 본격화됨에 따라 행정부와 의회의 기능 및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지만, 베트남의 정치는 여전히 공산당과 당의 지역조직인 인민의회에 의해 실행되고 있다.
2001년 4월 제9차 전당대회에서 농 득 마인(Nong Duc Manh)이 당서기장으로 선출되었으며 공산당의 주요 의사결정기구로는 정치국 상무위원회, 정치국, 중앙집행위원회가 있다. 국가주석은 임기 5년으로 국회의원중에서 국회에서 선출되고 국가원수로서 대내외적으로 국가를 대표한다. 1997년 9월 쩐 득 르엉이 국가주석으로 선출되었다. 국가의 최고 권력기관이며, 유일한 입법기관인 국회는 의원수 550명(임기 4년)으로 매년 2회의 정기회의를 갖는다. 현재 베트남 권력구조는 베트남 공산당 당서기장, 국가주석, 총리가 권력을 분점하고 있는데, 당서기장이 최고 실권자이며 국가주석은 군사, 외교권을 행사하고 총리는 정치, 경제 전반을 관장하는 방식이다. 최근 2006년 4월 개최된 10차 당대회를 계기로 보수 원로들이 퇴진하고 개혁성향의 인사들이 등장하면서 국가주석과 총리의 권한이 강화되고 있기는 하나, 여전히 권력의 중심은 당서기장에 있다.
베트남은 1986년 제6차 공산당전당대회에서 응우옌 반 린이 서기장에 취임하면서 ‘도이머이(刷新)’정책을 채택하였는데 식량부족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잉여수확물을 분배하는 방식을 허용함으로써 벼농사의 생산성이 높아지면서 1990년대 이후 생산량이 크게 증가하였고 이후 수출을 하게 되었는데 현재는 세계3위의 쌀 수출국이 되었다. 베트남은 이 정책을 실시하면서 경제개혁을 추진하였으나 공직사회의 부정부패가 만연하여 대대적인 부정 추방운동도 함께 펼치고 있으며, 동시에 경제의 공업화, 지식산업,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을 추구하고 있다.
도이머이 정책이후 외교는 러시아와의 동맹관계가 기조를 이뤘으나 경제실리 위주로 전환하였다. 1979년 전쟁까지 치렀던 중국과는 캄보디아문제, 국경분쟁 등으로 한때 멀어졌으나 1991년 관계정상화가 이루어졌으며, 1994년에 미국의 대베트남 경제제재의 해제 등 상당한 성과를 올렸다. 1995년 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동남아시아국가연합)에 가입하였고, 1964년 이래 단절된 미국과의 국교는 1995년 정상화하였으며 EU와의 기본협정체결 등을 보다 많은 진전을 이루었다. 현재까지 베트남은 모든 국가와 우방관계를 수립할 정책을 전개하여 160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UN과 UN산하 기구 중 중요한 국제기구에 거의 대부분 가입하였으며, 1998년에 APEC에 가입하였으며 2007년 1월에는 150번째 WTO 회원국이 되었다.
주요 도시
수도
하노이(Ha Noi)
중앙정부 직할시 (5 시)
하노이 (Ha Noi) ,호치민 (Ho Chi Minh) , 다낭 (Da Nang) , 하이퐁 (Hai Phong) , 칸트- (Can Tho)
주요인물
공산당 서기장
논·두크·마인 (Nong Duc Manh)
국가 주석
장·두크·르온 (Tran Duc Luong)
수상
환·밴·카이 (Phan Van Khai)
제일 부수상
구엔·탄·즌 (Nguyen Tan Dung)
부수상
브?·코안 (Vu Khoan)
부수상
팜·더·키엠 (Pham Gia Khiem)
정치
국회
일원제
의석수
498 의석
국회 의장
구엔·밴·안 (Nguyen Van An)
정당
공산당
정부관료.
-총리: 응웬 떤 융 (58세). 고향: 까마우(*남부). 법대졸업. 중앙경제위원장, 정부 상무 부총리, 정부 총리 역임.
-부총리 1: 응웬 신 훙 (61세). 고향: 응에안(*북부). 경제학 박사. 재무부 차관, 재무부 장관, 정부 상무 부총리 역임.
-부총리 2: 팜 쟈 키엠 (63세). 고향: 하노이(*북부). 금속학 박사. 과학-기술-환경부 장관 역임.
-부총리 3: 쯩 빈 쫑 (65세). 고향: 벤쩨(*남부). 전공: 문학, 경제관리. 중앙감사위원회 주임, 중앙內政위원장 역임.
-부총리 4: 호앙 쭝 하이 (48세). 고향: 타이빈(*북부). 경영학 석사. 베트남전력총공사 사장, 공업부 차관, 공업부 장관 역임.
-부총리 5: 응웬 틴 년 (54세). 고향: 짜빈(*남부). 경제학 교수(박사). 호치민市 인민위원회 상무 부주석, 교육훈련부 장관 역임.
-국방부 장관: 풍 꽝 탄 (58세). 고향: 빈푹(*북부). 大將. 베트남 인민군 참모장, 국방부 장관 역임.
-공안부 장관: 레 홍 안 (58세). 고향: 낀쟝(*남부). 大將. 중앙감사위원회 주임, 공안부 장관 역임.
-내무부 장관: 쩐 반 뚜언 (57세). 고향: 하이증(*북부). 경제학 박사. 하노이市 공산당 부서기장, 남딘성 공산당 서기장, 내무부 상무 차관 역임.
-사법부 장관: 하 훙 끙 (54세). 고향: 빈푹(*북부). 법학박사. 사법부 차관, 꽝빈省 공산당 서기장 역임.
-투자계획부 장관: 보 홍 푹 (62세). 고향: 하띤(*중북부). 대졸. 투자계획부 차관 및 장관 역임.
-재무부 장관: 부 반 닌 (52세). 고향: 남딘(*북부). 경영학 석사. 하노이市 인민위원회 부주석, 재무부 차관 및 장관 역임.
-상공부 장관: 부 후이 호앙 (54세). 고향: 하이퐁(*북부). 경제학 박사. 투자계획부 차관, 하따이성 인민위원장, 랑썬省 공산당 서기장 역임.
-농업-농촌개발부장관: 까오 득 팟 (57세). 고향: 남딘(*북부). 경제학 박사. 농업-농촌개발부 차관, 안쟝省 공산당 부서기장, 농업-농촌개발부 장관 역임.
-운송교통부 장관: 호 응이아 융 (57세). 고향: 다낭(*중부). 헝가리 공업대학졸업, 금속학 전공. 꽝응아이省 공산당 서기장, 운송교통부 장관 역임.
-건설부 장관: 응웬 홍 권 (58세). 고향: 하이증(*북부). 수력발전기술자. 송다 수력발전소건설총공사 사장, 건설부 차관 및 장관 역임.
-환경자원부 장관: 팜 코이 응웬 (57세). 고향: 하따이(*북부). 경제학 박사. 지질학 석사. 과학-기술-환경부 차관, 환경자원부 상무 차관 역임.
-정보-미디어부 장관: 레 도안 헙 (56세). 고향: 응에안(*북부). 경제학 박사. 응에안省 인민위원장, 응에안성 공산당 서기장, 중앙문화사상위원회 부위원장 역임.
-노동보훈사회부 장관: 응웬 티 낌 엉 (53세; 여성). 고향: 벤쩨(*남부). 경제학 석사. 재무부 차관, 하이증省 공산당 서기장, 무역부 차관 역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호앙 뚜언 안 (55세). 고향: 다낭(*중부). 항공측정기술자. 법대졸업. 다낭市 인민위원장, 관광총국 부국장 및 국장 역임.
-과학기술부 장관: 호앙 반 퐁 (59세). 고향: 하노이(*북부). 하노이백과대학총장, 과학기술부 장관 역임.
-보건부 장관: 응웬 꾸옥 찌우 (56세). 고향: 박닌(*북부). 박사, 의사. 하노이市 보건청장, 하노이시 공산당 부서기장, 하노이시 인민위원장 역임.
-민족위원회주임-장관: 쟝 세오 프 (56세). 고향: 라오까이(*북부). 소수민족 몽족 출신. 경제대학졸업. 라오까이성 공산당 서기장 및 인민위원장, 중앙조직위원회 부위원장역임.
-베트남국가은행총독: 응웬 반 쟈우 (50세). 고향: 안쟝(*남부). 경제학 박사. 베트남국가은행 부총독, 닌뚜언省 공산당 서기장, 인민위원장 역임.
-정부 총감사: 쩐 반 쭈인 (57세). 고향: 벤쩨. 법대졸업. 중앙감사위원회 부주임. 정부감사 부원장 및 원장 역임.
-정부사무소주임-장관: 응웬 쑤언 푹 (53세). 고향: 꽝남(*중부). 경제대학졸업. 꽝남省 인민위원장, 정부감사 부원장, 정부사무소 상무 부주임 역임.
1. 정치체제
베트남의 정치체제는 두가지의 중요한 축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외관상으로 드러나는 국회와 정부이고, 다른 또 하나는 내부적으로 실력을 행사하는 공산당이다.
베트남 헌법에 따르면, 국회는 국민 최고의 주권이며 입법권을 지니고 있으며 중앙의 국회와 지역단위의 각급 인민의회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행정조직으로는 중앙 행정기관으로서의 정부와 지방수준의 인민위원회가 있다. 기능면에서는 직접 선거를 통하여 구성된 국회는 행정부는 조각하는 한편 지방에서는 직접 선거에 의해 구성되는 인민의회가 지방의 행정조직인 인민위원회를 선출하고 그 활동사항을 검토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는 이러한 조직 및 기능과는 다소 다르다. 많은 연구가 베트남 정치구조에서 실질적인 세력은 집권당인 공산당에 있으며 당 조직은 사실상 각 지역 단위의 인민의회와 인민위원회의 수직적 위계와 수평적 관계를 유지하고 당정책의 확실한 이행을 보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1)공산당
도이머이 정책수행이 본격화됨에 따라 행정부와 의회의 기능 및 권한이 상대적으로 강화되었다하더라도 현 사회주의체제하에서 베트남 정치구조상의 실질적인 최고 권력 기관은 역시 공산당이다. 이와같은 당의 역할은 프랑스 및 미국등 침략세력과의 민족독립 전쟁을 수행하는 기간뿐아니라 1975년 국가재통일 후에도 그리고 1986년 도이머이 개방 정책을 채택한 이후에도 계속되다가 1991년 제7차 전당대회에서 당과 국가의 기능을 분리한 이후에야 비로서 자신의 세력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베트남 공상당의 성립 및 발전과정을 살펴보자. 프랑스의 식민지배로부터 민족의 독립을 찾으려는 노력가운데 시작된 베트남 공산주의 운동은 1930년 2월 3일 베트남 공산당이 결성되면서 헤게모니를 잡게 되었다. 그럼에도 당의 이념적 노선과 민족독립투쟁전략에서 서로 다른 의견으로 파벌간에 갈등고 겪은 당은 그 명칭을 몇차례에 걸쳐 바꾸는 등 시련도 겪어야만 했다.
당의 조직을 살펴보면, 베트남 공산당 최고의 기관은 전당대회이다. 당의 모든 중요한 정책을 인준하고, 새로운 당 규약을 채택하며, 주요 정책노선이 당대회를 통해 결정된다. 베트남 정치계에서 핵심인물에 해당하는 중앙위원회 정위원과 후보위원을 선출한다. 5년에 한차례씩 소집되는 당대회는 새로운 당 규약의 채택과 중앙위원회 위원을 선출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 당대회가 최고기관인 베트남 공산당은 당대회를 폐회기간 중에는 중앙위원회가, 중앙위원회 전체외의 폐회기간 중에는 정치국이 그 업무를 담당한다. 당대회는 중앙집행위원회를 선출하고 중앙집행위원회는 정치국위원을 선출한다. 각지역의 당원들이 먼저 그 구역의 대표를 선출하고, 이 대표들은 다시 대표를 선출하여 성과 시의 당대표대회에 참가한다. 성과 시의 당대표들은 그들의 대표를 결정하고, 이들이 전국당대회에 참가한다. 그러므로 전국적인 당대표대회는 당의 최고기관이라 할 수 있다.
96년 6월 24일부터 7월 1일까지 개최된 제8차 전당대회는 약 230만명(전체 국민의 3.1%) 당원을 대표하는 약 1,200명의 대표가 참석하였다. 이 대회에서는 당 조직을 개편하여 우선 서기국을 폐지히고, 정치국 상무위원회(5명)을 신설, 정치국원을 17명에서 19명, 중앙위원회위원을 161명에서 170명으로 중원하였다. 제8차 전당대회를 평가해보면, 우선 이 대회를 통해 베트남 공산당은 도이머이 정책의 지속적인 추진을 확인하였다. 국가지도부 3인(도므어이 당서기장, 레측아인 대통령, 보반끼엣 수상)을 유임시킴으로써 정치, 사회적 안정을 유지하는 동시에 당내 서대교체를 통한 당의 활력 및 지도력 강화의 추구, 특히 지속적인 경제발전을 통한 국가 산업화, 현대화 전략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2)국회
베트남 국회는 국민의 최고 대표기관이자 유일한 헌법제정 및 입법기관이다. 구체적으로 국회는 여러 가지 기능 및 권한을 갖고 잇는데, ①헌법과 법률의 제정, 개정 및 입안, 국가기구의 조직 및 활동의 규정,②최고 감찰권 행사, ③국가 주석, 수상, 최고인민법원장, 최고인민감찰원장의 선출, ④국회 상임위원회 위원 선출 등을 들 수 있다.
베트남 국회는 단원제로써 의원수는 인구수에 따라 매 선거시 내각에 의해 결정된다. 이에 따라 87년의 경우 496명이었고 92년의 경우 395명이 그리고 97년에는 450명이 선출되었다. 의원의 임기는 5년으로 정기 회기는 매년 2회로 6월과 12월에 각각 소집된다. 국회의 상임위원회는 국회 휴회기간 중 국정전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위원회의 각종 법령을 법률과 같은 효력을 지닌다. 선거권은 18세이상, 피선거권은 21세이상으로 인구 10만명당 1석을 갖는 대선거구제이다. 국회의원 선거시 각 후보는 민족조국전선에 의해 추천된다. 독자적인 출마가 가능하나, 현실적으로 민족조국전선의 허가를 획등해야 하고 난 뒹 주민 및 직장 동료중 과반수가 허기를 획득해야 하는 조건 등 실현하기 어렵다.
조직을 살펴보면, 베트남 국회는 상임위원회, 분과위원회, 그리고 사무처를 두고 잇다. 상임위원회는 국회의장 농 득 마인을 비롯해 3명의 부의장을 포함한 8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주요 권한으로는 국회를 소집할 권한을 가지며 국회 폐회시 국회 업무를 수행한다. 현재 베트남 국회내에는 법무, 경제 및 예산, 국방 및 치안, 문화, 교육, 청소년, 아동, 사회복지, 대외관계, 헌법개정 등 7개의 분과위원회를 두고 있다.
(3)행정부
베트남 행정부는 국가주석과 내각으로 이루어 진다. 국가 주석을 국가 원수로서 대내외적으로 국가를 댚표하고 내무, 국방 및 안보에 상당한 실권을 행사한다. 국회의원중에서 선출하도록 되어있는 국가 주석직은 국회 상임위원회 참석할 권한을 지닌고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한 명령 및 결정을 행사할 수 있다. 인민군의 통수권자이며 국방 및 안보위원회의 당현직 의장이다. 국회에서 제정한 헙법 및 법률을 공포할 권한을 갖는다. 한편 부주석, 수상, 최고인민재판소 재판장, 최고인민감찰원장의 임명과 해임을 국회에 건의할 수 있고, 국회 또는 국회상임 위원회의 결의에 근거하여 전쟁상태의 선포와 사면령을 공포할 수 있으며 부수상, 장관과 정부 기관의 장을 임명, 해임할 수 있다.
내각(정부)은 수상, 부수상(5명), 장관 및 국가위원회 위원장 등으로 구성되며, 이들 구성원은 국회에서 선출된다. 국가행정의 최고집행기구로서 행정부는 각종 안건을 국회에 보고한다. 임기는 국회임기와 동일하며 5년마다 재구성된다. 내각 가운데 수상식을 과거에는 그리 큰 권한과 기능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베트남 정부가 도이머이 개혁정책을 수행하기 시작한 80년대말 구체적으로는 91년 제7차 전당대회이후 그 세력이 많이 강화되었다.
(4)사법부
최고인민법원, 지방인민법원 및 군사재판소가 설치되어 있으며, 검찰기관으로는 이르 재판소에 대한 최고 인민검찰원 및 군사 검찰원이 설치되어 있다. 특별심리사안이나 특수상황일 경우 국회가 특별법원을 설치할 수 있다.
대법원장은 국회에서 선출하며 대법원은 국회에 대해 보고의무를 진다. 대법원장과 차장 및 각급 인민법원 판사의 임기는 자신을 선출한 기관의 위원임기와 같으며, 대법원의 인민배심원을 2년 6개월, 지방법원의 인민배심원의 임기는 2년이다.
인민검찰원은 공소권을 갖고 지방 인민검찰원은 최고인님감찰원의 지휘를 받는다. 최고인민감찰월장은 국회의원과 임기가 같고, 각급 지방감찰원 원장과 차장 및 검사의 임면권을 가지고 있다.
이상의 주요 구성 요인외에도 베트남 정치구조상에는 다른 정치세력들이 존재한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조국전선이다. 조국전선의 전신을 1940년에 창설된 베트남 독립동맹이며 모든 정당, 사회단체, 종교, 종족, 각계계층 국민의 대표가 망라된 민족대단결의 상징이다.
조국전선은 중앙이나 지방에서 자기의 조직체를 갖고 있으며 모든 정치사회적 문제는 협상하는 포럼으며 국회, 인민의회선거에 입후보를 추천하는 역할도 한다. 조국전선에 망라된 유력한 대중단체로서는 직업총연맹, 농민동맹, 여성동맹, 공산주의 청년동맹, 청년학생협회 등이 있다.
(5)베트남 인민군
베트남 인민군은 육, 해, 공 3군으로 구성되면, 정규군, 지방군, 및 예비군(예비대, 민방위대, 민병대)로 분류된다. 96년 9월 현재, 정규군의 총병력수는 85만명으로 이 가운데 육군이 70만명, 해군이 4만 2천명, 공군이 만 5천명, 방공부대가 약 10만명이다.한편, 기타 비정규군은 약 166만명으로 여기서 민방위대는 공장, 학교, 관공서 등의 중요시설에 대한 자위업무를 담당한다. 한편 '청년 노동지원대'라는 준 군사조직에 있어 경제건설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병역제도는 의무복무제를 해당연령은 18세에서 27세까지이고 복무기간은 2년이다.
1944년 12월 22일 항일, 항불 독립군으로 조직된 비엣 민군이 주축이 되어 베트남 인민군이 창설되었다.
2. 정치형태
1986년 7월, 레 주언 당서기장이 사망하자 후임으로 쯔엉 찐 국가평의회의장이 취임하였으나, 1986년 12월의 제6차 당대회에서는 쯔엉 찐, 팜 반 동, 레 득 도 등 3인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응우옌 반 린 서기장이 등장하였다. 그는 베트남 전쟁중 남부 베트남에서 당남부위원회 서기로 활동하였고, 해방 후 호치민 시 당위원회 서기를 역임하기도 했다.
1987년 2월 각료평의회의 대폭교체와 동념 4월의 총선거에 의한 제8기 국회의 출범 및 이에 따른 인사개편등이 있었다. 1988년 3월 팜흥총리가 급사여 동년 6월 국가평의회의 추천을 받은 도 무어이가 임시로 총리직을 수행하던 보 반 끼엣과 경선한 결과 64%의 지지로 총리에 선출되었다.
1990년 3월의 제8차 중앙위원회를 통해 베트남 공산당의 노선중 경제를 중심으로 한 '도이머이'정책 강화, 당의 규율강화와 부패 배제 등을 결의하였다. 한편 1990년 4월 2일 정부 부처 중 12개 부처를 무역, 교육, 중공업부의 3개 부처로 통폐합하여 행정쇄신을 도모하였다.
1991년 베트남은 대내외적으로 급격한 변화는 없었지만 제7차 당대회를 통해 향후 베트남이 지향할 개혁노선과 방향을 설정하고, 이에 대한 대내외적인 적응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1991년 이수 적대관계를 유지해 오든 중국과의 외교정상화, 캄보디아 문제의 해결,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논의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다.
1991년 6월 24일부터 27일까지 4일간 개최되었던 제7차 당대회는 지난 수년간 시행해 온 도이머리 정책에 대한 정치, 경제적 성과를 평가하고 향후 지향해야 할 사회, 경제발전 전략을 논의하였으며 정치국원을 대대적으로 교체하였다.
한편, 베트남 공산당은 1994년 1월말 전국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다. 678명의 대표자로 구성된 이 회의에서 베트남 공산당은 1996년 제8기 당대회까지의 기본노선을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이 회의에서는 시장경제화와 대회개방을 주축으로 하는 경제개혁의 기본 노선을 확인하면서도, 개혁에 따른 부정부패의 심각성, 계층 및 도농간의 소득격차확대, 교육 및 의료시설의 부족 등 사회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이 중점 논의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전국대표자회의가 개최되기 직전인 1월 18일 제7기 제7차 당중앙위원회에서 응우옌 마인 껌 외무장관을 비롯하여 4명의 정치국원이 임명됨과 동시에 중앙위원도 20명이 추가되어 중아위원 수가 대폭 증원되었다는 점이다.
베트남에 있어서 주요 과제는 앞으로 사회주의의 고수, 사유권을 인정하는 다부문경제의 실행, 대외개방이라는 3가지 원칙이 공존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다.
3. 대외관계
1945년 9월 독립 직후 베트남은 홍수와 일본 군국주의의 통치정책에 의하여 200만명의 생명을 빼앗은 기아와 빈궁, 그리고 외세의 간섭과 침공에 대처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1946년 1월에 실시된 전국 총선거에 의하여 구성된 통일정부는 1946년 3월 6일 베트남 프랑스 기초협정 및 9월 14일 잠정협정의 체결과 호치민 대통령의 국빈자격 프랑스 방문으로 프랑스로부터 공식적인 승인을 받게 되었고 동시에 프랑스의 침략기도에 대처하기 위하여 시간여유를 얻게 되었다.
프랑스의 재침에 의하여 1946년 12월 19일에 반프랑스 항쟁이 시작된 이후 프랑스 세력에 군사 공세를 취하면서 외교활동을 꾸준히 추진한 결과 1950년 소련, 중국 및 동구권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하게 되었다.
1954년 5월 7일 디엔 비엔 푸 전투승이로 반프랑스 항쟁이 종결되고 동년 소집된 제네바회의에서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독립과 통일을 인정한 협정이 체결된 것은 군사적 승리와 결부된 외교적 투쟁의 매우 중요한 성과이며 1946년 프랑스와의 협정체결에 이어 베트남이 통일 국가라는 충분한 법적 근거를 갖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법적 기반과 군사, 정치 투쟁의 성과에 기초하여 베트남은 1986년 파리 회담에 당당하게 참가하여 1973년 1월 27일에 독립과 통일이라는 베트남 국민의 기본권을 정중히 인정한 베트남에 관한 파리 협정을 체결하였으며 1975년 4월 30일 전쟁 종식 후 1976년에 국가 재통일을 이룩했다. 그러나 전쟁 직후 전쟁의 심각한 후유증, 외세의 무역제제봉쇄정책(embargo)을 물리치기 위하여 외교 활동이 꾸준히 전개되어 1986년에 제시된 도이머이 정책과 개방정책의 추진에 따라 외교활동이 더욱 힘차게 전개되어 온 결과 1991년에 중국과의 관계정상화, 1994년에 미국의 엠바고 해제, 1995년에 동남아 연합에 가입, 미국과의 국교 정상화, EU와의 기본협정체결 등을 성취함으로써 베트남 개방에 필요한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조성해 놓았다.
현재까지 베트남은 모든 국가와 우방관계를 수립할 정책을 전개하면서 160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UN과 UN산하 기구 중 중요한 국제기구에 거의 다 가입했으며 APEC과 WTO가입을 위한 준비를 추진하고 있다.
공산당(Dang Cong San)과 선거(Bau Cu)
베트남 공산당은 호치민에 의해 1930년 2월 3일 홍콩에 거주하는 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을 규합하여 처음으로 베트남 공산당(Dang cong san Viet Nam)이 창설되었다. 창립 당시 당원 수는 약 200명에 달하였다. 이 베트남 공산당은 코민테른 지령에 의해 당명을 인도차이나 공산당(Dang cong san Dong duong)으로 개명한다. 그리고 1951년 2월 제 2차 전당대회에서 모든 당의 명칭을 베트남 노동당(Dang Lao dong Viet Nam)으로 바꾼다. 통일 이후 76년 12월 하노이에서 개최된 제 4차 전당대회에서 다시 당명을 베트남 공산당(Dang cong san Viet Nam)으로 개명하여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1. 당의 목표, 성격, 임무
베트남은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거치지 않고 사회주의를, 그리고 궁극적으로 공산주의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혁명과 베트남 사회의 발전을 지배하는 법칙을 발견하기 위해 막스 레닌주의 방법을 이용하고 있다. 베트남 공산당은 베트남 노동자 계급의 정당으로서 노동자, 농민, 혁명적 지식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당의 중심 활동에 있어서 대중 정책을 적용하고 대중이 당 건설에 참가하며 당 활동 및 간부 당원의 활동과 자질을 감독한다. 당의 조직상 기본 원칙은 민주적 중앙집권주의로 그 목적의 하나는 당 내부의 견해와 행동을 통일하고 당의 규율을 유지하는 데 있으며, 당은 최고 지도 원칙으로서 집단 지도 체제를 유지하고 어떠한 파벌주의도 용납하지 않으며 당내의 분열과 파벌을 혁명에 대한 최대의 죄악으로 간주한다.
2. 조직 및 기구
당의 기구는 전국급(중앙급), 지방급, 기초급으로 크게 분류되고, 지도 기관으로서 각급 대표 대회가 있으며 전국 대표 대회가 최고 지휘기관이 된다. 당의 조직으로서 지방급은 지방행정단위와 일치하고 기초급은 생산, 노동 등의 단위에 따라 설치된다. 전국에 약 170만명의 당원과 말단급으로 9만 5촌여개의 당지부와 3만 4천개의 당조직이 있다. 각급 지도기관은 선거로 선출되며 각종 당대회의 결의는 과반수의 다수결로 결정된다. 당의 제결의는 무조건 수행되어야 하며 하급조직은 상급조직의 지도와 감독을 받고, 전국의 당조직은 전국 대표대회와 중앙위원회의 지도, 감독을 받는다.
3. 지도기관
당의 전국급 지도 기관은 전국 대표 대회이고 5년에 한 번씩 전당대회를 개최하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대회 폐회 기간 중에는 동 전국 대표 대회에서 선출된 중앙위원회가 최고 지도를 담당한다. 지방 지도 기관은 행정단위 즉 주(Tinh) 및 중앙직할시에 따라 2년에 한 번 소집되는 각급 대표대회가 지도기관이 되고, 대회 폐회 기간 중에는 각 당위원회가 지도를 담당한다. 기초 지도기관으로서는 기업, 광산, 건설현장, 공장, 국영농장, 촌락, 구, 상업단위, 정부기관, 병원, 학교, 군내 중대급 등의 기초단위 대표대회 또는 당원대회가 있으며 대회 폐회 기간 중에는 기초단위 집행위원회가 지도기관이 된다.
4. 당중앙위원회
중앙위원회는 전국대표 대회에서 선출되며 임기는 4년이며 전국 대표 대회 폐회 기간 중에 모든 당의 활동을 지도하고 당의 강령, 규약 및 전국대표대회의 결의된 사항을 수행한다. 중앙위원회는 통상 6개월에 한 번 회의를 열고 당 활동의 성과 및 일반정세를 하급조직에 시달한다. 중앙위원회 전체회의는 정치국에 의해 소집되고 전체 회의에서 정치국 및 서기국원, 통제위원회 의원, 당서기장 등을 선출한다.
5. 당중앙정치국
최고의 실권 기구로 당내 최고 정책 결정권을 갖고 있으며, 당과 국가의 고위 임원 임명권을 가진다. 정치국은 주요 방향 및 임무에 대한 의견 제시, 국무회의에서 이를 준비하고 국회에 보고, 결정 받은 후 실행한다. 중앙회 전체 회의 폐회기간 중에는 중앙위원회가 직권을 행사한다. 정위원은 17명이며 중앙위원회 전체 회의에서 선출된다.
6. 당중앙서기국
중앙정치국의 지도 아래 중앙위원회의 각 해당부서 업무를 관장하고 당에 일상 업무를 처리하며, 지시의 실행에 대해 당의 각조직 및 당원의 활동을 감시한다. 특히 당서기장은 당과 국가 기구의 전반적인 업무를 관장한다. 서기는 총 9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중앙위원회는 당고문회, 당중앙감찰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산하 당간부회의 등의 기구와 베트남 민족전선등 10개 대중조식을 산하에 두고 있다.
위에서 베트남 공산당의 구조를 대강 알아보았다. 이제 당원이 되는 절차과 선거에 대해서 알아보자. 베트남은 공산당 일당 체제이다. 많은 사람들이 당원이 되기를 원하고 있으며 당원이 되면 사회적인 존경과 인정을 받게 된다. 대학생이 되면 한 반에 약 2명 정도의 학생을 공산 당원으로 뽑는다. 자격 요건은 성적이 우수하며 품행이 단정하고 학교 활동이 건전한 남, 여 청년이다. 이렇게 뽑힌 청년들은 일정한 학습 기간을 거쳐 몇 달 후 최종 심사를 거쳐 당원으로 입적이 된다. 당원이 되었다는 말은 국가가 보장한다는 뜻이므로 졸업 후 취업이 용이하고 사회에서 인정을 받게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기관장이나 당원들로부터 추천을 받아서 심의를 거쳐서 당원이 된다. 베트남 국가기관에 일하는 많은 사람들은 공산당원이며 학교, 공장 등 거의 모든 직장에 공산당원이 있다. 그러나 반정부적인 사람도 많이 있어 당원에 대한 시각이 위에서 말한 것처럼 좋은 것만은 아니다.
베트남에서 투표는 18세 이상이면 가능하다. 또한 녕끄(Ung Cu)라 불리는 후보자 추천은 21세 이상이면 가능하다. 5년마다 치러지는 투표는 주로 자기가 속한 주(Tinh)에 주요 인사과 국회의원(Dai bieu Quoc Hoi)을 뽑는다. 한국의 도지사, 시의원 정도 위치에 있는 사람을 뽑을 수 있는 투표권이 주어진다. 입후보자는 3명을 뽑는다면 약 6-7명 정도 후보자로 나온다. 각 후보자는 A4용지에 명함판 사진과 약력, 공약을 적은 내용을 지정된 벽보에 붙인다. 한 명을 찍을 수 있으며 가장 많이 표를 얻은 사람순으로 직위에 오른다. 베트남 국민은 직접 수상이나 총리를 뽑을 수가 없다. 이들은 국민이 직접 뽑은 국회의원에 의해서 뽑혀진다. 그러나 TBT같은 당서기장은 주로 후계자에게 물려주므로 이전 TBT가 지명한 사람이 대부분 뽑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