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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고픈 나대신 다른 사람이 밥을 먹어줄 수 없습니다. 제 아무리 부처님 아들이라도 부처님의 지혜를 상속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 수행하는 것을 미루지 마세요. 스스로 선을 닦아 깨쳐야 합니다. 수시로 부처님을 부르고 기도하면 업도 소멸되고 해탈하는 날이 반드시 찾아옵니다.”
대중을 만나는 자리에서는 어김없이 수행을 강조했던 백성욱(白性郁)박사. 일제강점기와 광복을 거치며 독립운동가.정치가로 활동했던 그의 삶을 관통하는 것은 다름 아닌 불교였다. 수행에서 전법으로 이어지는 80여년의 삶 속에서 백 박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나 함께 불법(佛法)을 공부했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가르침을 등대 삼아 고해의 바다를 건너고 있다.
서울에서 태어난 성욱은 일찍 부모를 여의고 고모 밑에 자랐다. 14세인 1910년 봉국사 최하응(崔荷應)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출가 후 경성 중앙학림에 입학한 그는 출가수행자로서 배움에 매진했다.
1910년대는 일본이 무단통치를 자행하던 시기. 중생을 품어야할 수행자가 일본의 통치아래 신음하고 있던 대중의 고통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었다. 성욱은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다. 당시 중앙학림 강사로 재직하고 있던 만해스님의 영향도 컸다.
만해스님과 함께 불교계 만세운동을 주도한 그는 3.1운동 이후 김대용.김법린 등과 함께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갔다. 이곳에서 그는 훗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될 이승만 박사를 만났다.
이승만과 성욱의 인연은 각별하다. 상해에서 독립을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니던 성욱을 눈여겨보던 이승만은 “독립을 하려면 인재가 많아야 한다”며 유학을 권유했다. 누구보다도 독립에 대한 의지가 강했던 그는 이승만의 충고를 듣고 고민한다. 마침내 “선진문물을 익히고 대중을 교화하는 것만이 조선이 살 길”이라고 결론을 내린 성욱은 “장차 20만명의 조선청년을 깨우치는데 평생을 바치겠다”는 결심을 안고 유럽으로 떠났다.
1920년 성욱은 24세의 나이에 프랑스 파리 보베고등학교에 입학했다. 독일어.라틴어 등을 익힌 그는 다시 남독일의 벌쓰불룩 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학문연구에 몰두한다. 고대 희랍어, 독일 신화사(神話史), 천주교 의식 등을 공부하며 ‘불교순전철학(佛敎純全哲學)’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1925년 귀국한 그는 이듬해부터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교수를 맡아 학인들을 지도했다. 후학양성에 힘을 쏟던 백 박사는 1928년 돌연 학교를 떠나 금강산에 들어갔다. 자신의 부족함을 느꼈던 것일까. 금강산에서 그는 무섭게 수행했다. 안양암에서 홀로 지내던 백 박사는 〈대방광불화엄경〉 정근을 했다.
이곳에서 그는 하루 한 끼만 먹으며 1000일 기도를 하는 등 깨달음을 향해 나아갔다. 그가 홀로 수행한다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자 동참을 원하는 대중들이 안양암으로 왔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하나 둘 늘어 결국 지장암으로 거처를 옮겨 대중을 지도하고 수행했다. 그렇게 10여 년 동안 백 박사는 금강산에 머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 시절이 하수상하다보니 수행도 뜻대로 하기 어려웠다. 금강산에서 수도하던 그는 일본경찰의 압력으로 서울로 돌아와야만 했다.
그러다 광복이 되고 백 박사는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적극 동참한다. 임시정부에서 활동할 때 맺은 이승만과의 인연이 계기였다. 그는 한국인에게 정권을 이양할 것을 촉구하는 5만 여명의 서명이 담긴 연판장을 주한미군사령관에 전달, 단독정부를 수립하는 단초를 마련했다. 1946년 이승만이 중심이 된 건국운동에 참여했고, 1950년 2월 내무부장관에 임명됐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책임지고 5개월 만에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1952년과 1956년에는 부통령 후보로 입후보하기도 하는 등 꾸준히 정치활동을 벌였다.
이 시기 그는 동국대학교 총장을 역임하며 동국대의 틀을 마련했다. 1953년 8월 총장에 취임한 그는 8년 동안 본관, 과학관, 도서관 및 기타 부속건물 등 9000여 평의 건물을 신축했다. ‘고려대장경 보존동지회’를 맡아 고려대장경 영인사업에 착수했고, 동국대 장학회를 설립해 학생들을 후원했다. 강단에 서는 것도 멈추지 않았다. 학생들에게 〈금강경〉을 가르치고 대학원에서 〈금강삼매경론〉 〈보장경〉 〈화엄경〉 등을 강의했다.
이승만과 인연각별…정치활동도
동국大총장 맡아 후진 양성 매진
말년에 ‘백성목장’설립 중생구제
1962년 5.16이 일어난 이후 총장직을 사임한 백 박사는 부천 소사동으로 내려간다. 그곳에 ‘백성목장’이란 간판을 걸고 농사를 지으며 중생구제에 나섰다. 법당도 한 채 마련했는데, 이곳에는 부처님을 봉안하지 않았다. “불법이 있는 곳에는 부처님이 계시기 때문”이라는 생각에서였다. 목장생활은 단조로웠다.
1967년부터 3년간 이곳에서 수행한 홍익대 김원수 교수는 “아침저녁으로 정좌하고 앉아 〈금강경〉을 읽고 ‘미륵존여래불’을 정근하는 것을 공부의 기본으로 삼았다”고 회상했다. 목장에서는 누구나 새벽3시 전에 일어나야 했고, 눈뜨자마자 한 시간 가량 〈금강경〉 독송과 ‘미륵존여래불’ 정근을 했다. 4시에는 법회를 했다. 함께 지내는 3~4명의 수행자들이 자신의 의문이나 느낌을 말하면 백 박사가 대답했다. 낮에는 울력을 했다. 당시 젖소목장을 운영했는데, 소젖을 짜거나 축사를 돌보는 것이 주된 일이었다. “정신은 가만히 둬야 건강하고, 몸은 규칙적으로 움직여야 건강하다”는 백 박사는 낮에는 열심히 울력을 하고, 오후6시면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금강경〉을 독송했다.
그는 “바친다”는 표현을 즐겼다. 제자들에게도 마음을 비우고 번뇌를 버리라고 하기보다 늘 “바쳐라”하고 말했다. “탐.진.치를 갖고 있으면 병이 되고 참으면 폭발한다”며 “마음속에서 올라오는 번뇌를 억누르려고 할 것이 아니라 그 마음 그대로를 부처님 전에 바치라”고 가르쳤다. 삼독심이지만 부처님 전에 공양하면 공덕을 쌓은 것이고, 부처님을 공경하게 되는 두 가지 득이 있다는 것. “탐.진.치는 자신의 마음을 밝힐 밑천”이라며 탐심을 닦으면 마음이 넉넉해지고, 진심을 닦으면 자비를 배우고, 치심을 닦으면 지혜로워지기 때문에 결국 삼독심에 의해 마음이 밝아진다고 한결같이 말했다.
수행법으로는 앞서 얘기한 〈금강경〉 독송과 ‘미륵존여래불’ 정근이 주가 됐다. 이 두 수행법에 대해 인천대 정천구 교수는 ‘보살의 현대적 화신 - 백성욱’에서 “백 박사는 미륵존여래불을 마음으로 읽고 귀로 듣다보면 자신의 생각을 부처님께 바치게 된다는 말과 함께 〈금강경〉을 읽을 때도 부처님이 직접 마음닦는 강의를 한다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고 설명했다”고 부연했다. 백 박사는 제자들에게 1일 7독을 목표로 삼으라고 말하며 “〈금강경〉을 3회 이상 읽으면 무언가 뒤에서 밀어주는 힘 같은 것을 느낄 것”이라고 격려했다.
“정신은 대승을 본받고 생활은 소승의 조촐함을 배워야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한 백 박사. 이 말처럼 그는 중생을 품을 줄 알았다. 홍익대 김원수 교수는 “수행하다 드는 생각이나 의문들, 하다못해 스트레스까지 받아주고 해답을 알려주신 자상한 스승”이라고 떠올렸다. 반면 스스로에게는 엄격한 수행자였다. 총장 재직 시 오후3시까지 모든 업무를 마치고, 이후부터는 수행하는 것 이외 일체 활동을 하지 않았다.
20여 년간 소사에서 생활하며 백 박사는 현대인들이 언제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는 가르침을 전했다. 그가 부처님을 마음속에 그리며 ‘미륵존여래불’을 정근하고,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은 특별한 능력이 없어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수행. “시간이 없어, 근기가 낮아”라는 말로 수행을 회피했던 불자들에게 변명의 여지를 주지 않고, 실천가능한 수행법을 일러주었다. 그는 또 “복은 받거나 비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짓는 것”이라며 “복 짓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고 노력하겠다는 마음먹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하고 생활하는 것 역시 수행이라고 알려줌으로써 일을 놓기 어려운 재가자들에게 구도의 길을 제시했다. 이런 그의 가르침은 지금도 수많은 재가자들이 깨달음을 향해 나아가는데 힘이 돼주고 있다. 어현경 기자
-백성욱과 금강경독송회
제자들이 스승 사상 기리려 1977년 발족
‘금강경’ 매일 7독…백장청규 정신 실천
금강경 독송회는 정초마다 미륵세계사에서 법회를 연다.
말년에 백 박사는 경기도 부천 소사로 내려와 ‘백성목장’을 열었다. 그는 입적 전까지 20여 년간 이곳에 머물면서 〈금강경〉독송과 ‘미륵존여래불’ 정근을 요체로 삼아 수행에 전념했다.
당시 그와 함께 목장에서 지내면서 수행을 했던 사람 중에는 홍익대 김원수 교수, 인천대 정천구 교수와 김재웅 씨 등이 있었다. 이들은 새벽3시에 일어나 〈금강경〉을 읽고 ‘미륵존여래불’을 정근한 뒤 백 박사를 찾아가 법문을 듣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했다. 낮에는 목장 일을 하거나 농사를 지었고, 저녁이면 방에 돌아와 〈금강경〉을 펴는 생활을 반복했다. 이 때 소사법당에서 7년6개월간 수행한 김재웅 씨가 스승의 사상을 기리기 위해 1977년 금강경독송회를 발족했다.
금강경독송회는 〈금강경〉을 수지 독송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행단체라고 할 수 있다. 1977년 발족된 이후 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대전 울산 포항 등에서 독송회가 창립했다. 전국에서 현재 1000여명의 회원들이 활동하고 있다. 지난 1991년에는 사단법인 청우불교원(대표 김재웅)을 설립해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법당들을 법인 산하로 옮겨왔다.
“〈금강경〉을 하루에 7독은 해야 한다”는 백 박사의 가르침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는 독송회 회원들은 〈금강경〉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한다. 수시로 ‘미륵존여래불’ 정근을 하는 것 역시 빼놓을 수 없다. 또 김재웅씨는 불자들이 실천해야할 6가지 덕목을 마련, 생활 속에서 불법을 실천하도록 유도한다.
‘마음 살림살이’라 불리는 이 실천덕목에는 다른 사람의 허물을 덮어주고 내 허물이라 생각하는 마음, 다른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 늘 공경하며, 긍정적인 마음을 갖고, 누구를 만나든 베풀겠다는 마음, 자신의 내면에서 올라오는 모든 생각을 부처님께 마친다는 마음을 연습하라 등이 포함돼있다.
회원들은 정초가 되면 월악산 미륵세계사에서 정초기도를 올린다. 현충일에는 전국 50여개 시.도의 현충탑에서 〈금강경〉을 독송한다. 유주무주 고혼을 천도하기 위해 시작한 천도독경은 1974년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또 1985년부터 매년 한차례 씩 전국 통합 철야 용맹정진법회를 실시하고 있다. 통합법회 때에는 전국에서 수행하고 있는 독송회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수행을 점검하는 시간을 갖는다. 각 지역법당에서는 매년 태어난 날과 입적한 날이 같은 백 박사를 추모하기 위해 탄생일 및 열반일 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금강경독송회가 회원들의 회비에 의존하기보다 자급자족으로 운영한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一日不作 一日不食)’는 백장청규가 고스란히 살아있다. ‘생산불교’를 주창하는 회원들은 아침저녁 수행시간을 제외하고는 함께 울력한다. 소사법당에서 백 박사가 제자들과 함께 젖소를 키웠다면, 포항법당에서는 콩으로 메주를 쒀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장류와 참기름을 만드는 것. 이것을 판매한 수익금으로 법당을 운영한다. 경주법당의 경우에는 직접 무, 배추 등 야채농사를 지어 자급자족하고 있다.
김재웅씨는 “만나는 사람을 부처님으로 보고 공경하라는 선생님 말씀을 실천하다보면 부처님을 닮아가는 날이 올 것”이라며 “금강경독송회 회원들은 〈금강경〉 속에 담겨진 깨달음의 길을 찾는 날까지 수행을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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