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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4입니다. 가을 채집하러 담양을 내려가는데 수하 셈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어요. 1년에 한두 번 있을까 말까 하는 행운입니다. 갑자기 이젤을 사러
가자네요. 헐. 수시 보는 날까지 학원에서 지낼 모양입니다. 입시를 그렇게
오래도록 많이 했어도 제 새끼들 시험이라 긴장되고 두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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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말이 많았는데 멍해지면서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습니다. 평소대로 준비
한 만큼만 과거를 치렀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잘하는 사람은 시험을 즐긴다고
합디다만. 일요일로 약속을 하고 가던 길을 달려 늦은 저녁 목적지에 도착
했습니다. 하도 오랜만의 순방길이라 한 30분은 헤맨 것 같네요. 순창-광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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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으로 와서 더 헤맸을 것입니다. 대한민국에서 숙식, 사우나까지 17,000원에
해결할 수 있는 곳은 찜질방이 유일합니다. 6시 기상. 조기매운탕을 먹고 고고싱!
군청 뒤쪽으로 걸어갔는데 아파트뿐이라서 고증찾기가 어렵습니다. 곤 이네
집도 없어져 버렸나 보네요. “자식, 보상금 좀 받았겠고 만.“ 백 동 뒤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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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리에 진입했을 때 ‘용화사’가 나타났어요.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봐도 한번
도 가보지 않았어요. 소림사처럼 스님들이 무예를 하던 절인가 봐요. 혹시
동창 ‘갑신’ 이를 아느냐고 물어보려다 용기가 안 나서 멋쩍게 합장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용화사에는 보물 제737호 ‘불조역대통재‘ ’월인천강지곡‘ ’연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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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 스님의 사기, 고종의 정 씨 마마 임 상궁의 궁중 유물이 소장되어 있답니다.
돌로된 사기 안에는 만적한 스님의 사리가 들어있을 것입니다. 하여간 인간은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한줌 흙으로 돌아갈
인생이 뭐가 그리 아쉬운 걸까요? 저 관음보살을 만들려면 도대체 얼마나 큰 바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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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 저런 바위가 있긴 하나요? 용암덩어리가 통채로 수 천년은
응고 되었을 것입니다. 느와르에 신부나 목사보다 스님이 단골로 나오는 것은
왜 그럴까요? 어쩌면 의병과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담양의 텃세와 용호사는
한 편일까요? 남산리에서 순창 정읍 넘어가는 쪽으로 새길이 2차선으로 나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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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온 길을 내려다보았더니 저기가 바로 메타세콰이어길이나 봐요. 맞아요.
헛갈릴 때는 멀찍이 떨어져서 전체적으로 보면 감이 잡혀요. 급하게 메모를 하고
공주에게 인 스타를 보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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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워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자“
”말씀하신 그대로 순종하자“
”시각을 바꾸고 도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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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나뭇잎 귀퉁이가 물감을 찍어놓은 것처럼 단풍이 올라오기 시작했네요.
고추 깔 좀 보세요. 새빨갛습니다. 저것은 무화과나무, 석류가 천지에 널려 있어요.
배추 포기 좀 보시라. 장미도 있어요. 장미가 6월에 피는데 아직까지 버티고 있네요.
살아남기 위해 굳굳이 서있는 장미를 보노라니 눈물이 납니다. 예에공! 존재감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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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체발광 하지만, 그냥 오래 살아남으면 그 자체가 위대한 것이란다. 살아남는 놈이
강한 것이란 말도 있잖아. 저 장미처럼 말이야. 비가 후두룩후두룩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상관없습니다. 비 좀 맞으면 어떻습니까?‘보광사‘ 마하 ‘무랑사‘쪽에서 턴을 해야겠네요.
담양에 이렇게나 절이 많은 줄 미처 몰랐네요. 절 많은 것이나 농사, 공무원, 학교, 식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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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것이 안성과 똑같습니다. 사실 성당, 교회, 원불교, 여호와 증인 등등 별별 종교
단체가 다 들어와 있는 것까지 닮았어요. 박태선이 신앙촌도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곳 살 때는 '담양읍교회'와 '중앙교회' 정도 생각이 나는데 40년 동안 늘어난 것은
교회하고 카페촌인 것 같아요. 성당도 새로 건물을 지어서 겉으론 흥왕하고 있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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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입니다. 석류를 보자마자 침샘을 자극하는 조건반사가 일어났습니다.
자전거 펜션이 예뻐서 한 컷 찍고 측백나무 깔이 죽여줘서 담았어요. 메타세콰이어길
낙우송은 우리가 심었어요. 제 기억에 초등학교 2학년 땐가 군청에서 예산 삭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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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해 남은 돈으로 묘목을 사서 무임금 노력동원 묘목이 효자가 된 케이스입니다.
여건이 된다면 펜션에서 에에공이랑 한두 달 살고 싶습니다. 발품을 부지런히 팔면
수발 쪽까지 성지순례를 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비가 더는 내리지 않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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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바퀴 빙 돌아 공용터미널에 도착했습니다.’부부식당‘ 자리가 우리 아지트였다는
걸 이 집 주인이 알까요? 터미널에 차들이 안성터미널보다 훨씬 많습니다. 저도
이 터미널에서 3년을 보냈어요. 후반기 미술학원, 광주항쟁, 정읍 내장산 치열하게
살았네요. 터미널 뒤편 화장실이 지금도 그 자리에 있어서 반갑더라고요. 물론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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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장을 해서 몰라보게 생겼는데 이곳에서 나쁜 짓 많이 했어요. 통학생들에게 삥
뜯고, 여자애들 못 가게하고 광주 통학생들 패고 말이에요. 어렸을 적에는 백동,
남산리가 먼 시골이라 생각했고 만 지금은 월산, 봉산까지 모두 통합되었더라고요.
수북하고 가산리를 통합해 첨단도시를 건설한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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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뭘 느꼈냐면 우리 어머니가 담양의 명동에서 육 남매를 키웠고 일찍 상경해서
서울 물을 먹게 한 것이 가장 잘한 일이라고 봅니다. 말하자면 문명을 빨리 접하게
만든 것이지요. 저는 특별히 어려서부터 서울을 들락거려서 혜택을 가장 많이받은
셈입니다. 어머니 리스펙트! 터미널 앞 바로 정면에 담양 중학교, 고등학교가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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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슬렁어슬렁 팔자걸음으로 걸어 들어갔어요. 우씨. 팔자걸음을 하면 신발이 언발란스로
단다고. 줄줄이 있던 문구점이 있던 곳은 카페가 들어 섰고, 녹십자 자리는 사랑병원으로,
동산병원이 치과도 있었네요. 우리 시절엔 수성병원과 동산병원이 최고였어요. 두 분
모두 장례식을 제가 치렀고요, 동산병원 아들놈 이름이 상0일 것입니다. 그 녀석 일찍
유산을 물려받았는데 철이 없어서 다 까먹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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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는 저에게 있어 생존경쟁의 첫 관문이면서 친정집 같은 곳입니다. 질풍노도의 시기에
소년 가장이 되어 제 밑으로 동생 셋을 거느리고 왕국을 통치하던 춘추전국시대의 애환이
짠한 노스텔지아를 동반하여 감성을 붙잡습니다. 연합고사 점수가 바닥이라 광주유학을
포기하고 터미널 앞 담양 고에 입학을 했습니다. 지금 같으면 무조건 광주권 내 학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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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출할 것인데, 그때는 그래야 할 명분도, 그러고 싶지도 않았던 것 같습니다. 중딩 때까지
있는 듯 없는 듯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던 성격 탓도 있고, 마땅히 누구에게 진학 상담을
받을 사람도 없었습니다. 지침리에 살던 저는 중학교 3년처럼 똑같은 3년을 보내야 했습니다.
친구들도 교사들도 3/1정도는 중학교 때 보았던 군상들과 꼰대들입니다.
몇 번의 예비 모임을 한 후 입학식을 하였습니다. 명목상 특목고인데 정원미달인지라
꼴통들이 다 모여서 학교인지 삼청교육대인지 분간이 잘 가질 않습니다.
동네 2년 선배도 보이고 교사보다 머리가 더 긴 학생들이 욕 지껄이를 해대며 웅성거립니다.
저 형은 우림 파, 저 형은 라일락 파, 저 형은 불사조 파 이거야 원 선생보다 학생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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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무섭습니다. 1982년도 우승컵이 있네요. 제가 뻔질나게 들락거렸던 교무실과 복도는
그대로입니다. 3학년 우리 교실은 카페처럼 생겼어요. 담양고가 여고랑 합친 후로 많이
좋아진 것 같아요. 건물도 몇동이나 더 지었고 대학도 많이 보낸다고 들었어요. 담양고
리스펙트! 제가 고교에 입학하고 첫 시험을 치르던 날 성적표를 받아 보니 전교 8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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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를 포기했는데 뜻밖입니다. 안 되겠습니다. 공부포기 안합니다. 입학을 하고
6개월 동안 나는 빠르게 우리 학교에 적응해갔습니다. 범 생이 대신 가-다로.
우리 시대는 고삐리인 우리가 패션을 선도해갔습니다. 스마트 학생복 CF에 하희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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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을 드밀었을 거에요. 남자 모델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제일 합섬 폴리에스텔
50%, 면 50% 바지 단을 까고, 카라는 블루블랙, 12인치 통바지 뒷주머니에 뚜껑을
달았습니다. 상의는 우라를 모조리 뜯고 몽탁 와이셔츠를 입었지요. 머리는 펑크스타일,
학생 화는 하얀 러닝화나 B.B 운동화를 신으면 간-지가 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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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색 스파이크는 아마도 300원쯤 했고 러닝화는 1800원 정도 한 것 같습니다.
"이 세상 모두 우리 거라면, 이 세상 모두 사랑이라면~"학교는 단순히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닙니다. 이곳에서는 온갖 감정들이 뒤엉켜서 터져 나옵니다. 의리, 질투, 경쟁,
사랑, 학습, 슬픔, 배신 등등 희노애락이 다 있습니다. 저는 매일 짤짤이 판에서 2,000
원씩 삥을 뜯었으니 학교가 직장의 성격도 있습니다. 일부러 짤짤이 하던 교실 뒤쪽을
돌아보았습니다. 아, 그대로입니다. 이곳에서 담배 빵을 지지던 승국이 놈 생각도 납니다.
그 놈은 뭐그리 급하다고 20살에 교통사고로 저 세상 가버렸습니다. 잠깐 엣 친구랑
담배 한개비 피우고 가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찬, 도수, 00, 모두 일찍 세상을 떠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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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쯤 하늘나라에서 자리를 잡았을 것입니다. '금연'은 누구보라고 써놓은 걸가요?
요샌 체벌이 안 되니까 학생과장 해먹기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보호유리창이
예술적으로 깨져서 액자같습니다. 운동장이 작아진 건가? 한 학년에 600명*3=1800명이
사용하던 곳인데 말입니다. 박넝쿨음 요나를 떠올리게 합니다. '생각하는 사람' '비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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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골통품은 족히 50년은 먹었을 것입니다. 저 구령대에서 학교장 훈시를 월요일마다 했어요.
내동생이 가끔 애국가 지휘를 하였는데 얼마나 자랑스럽던지요. 김 진호 그레이. 강남콩,
나팔꽃, 올챙이는 그시절 만만한 관찰용 오브제였습니다. 관찰일기도 썼어요. 우리 학교는
허구한 날 백차가 운동장을 가로질렀습니다. 학생이 선생을 신고한 것이 아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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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때문에 형사가 학생을 잡으러 왔습니다. 그 와중에 어떤 놈이 도덕 선생 스커트에
거울을 들이대는데 선생님이 말을 못 했어요. 저는 국어 선생님이 졸라 좋았어도 유치한
짓은 하지 않았어요. 중학교 2학년 때였습니다. 그때와 지금의 신장차이는 178cm,163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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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은 소심했고, 어깨 골반이 보일 만큼 삐쩍 마른 나는 요새로 치면 꽃미남이었습니다.
신체적 발달은 늦은 편이었어도 내 관심은 늘 여자였습니다. 여자에 대하여 그리고 성에 대하여
호기심이 많아, 나는 플레이 보이 잡지나 청계천 표 야한 만화를 보면서 성적 호기심으로 늘
목말라 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놈이 싸가지까지 없으면 밥맛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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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위는 중2 때 배웠고요. 한 번은 광주 대인동에 나가 어떤 누나에게 동정을 받치기도 했습니다.
중학교 때 우리 학교에서 제일 인기 있었던 선생님은 도덕 선생님이셨습니다. 기럭지가 조금
큰 편이고, 얼굴은 갸름하고 다리는 늘씬하게 쭉 뻗었습니다. 혀가 좀 짧은 도덕 선생님은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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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학생의 선망의 대상이었는데 친구 경태가 특히 선생님을 좋아했습니다. 그 시절, 미니스커트가
유행했었는데 도덕 선생님은 하루도 안 거르고 미니스커트를 입었고 수업을 했는데,
애들의 시선은 늘씬한 종아리에 가 있었습니다. 목소리도 꾀꼬리 같았습니다. 수업 시간에
도덕경을 차근차근 설명하시는 모습을 보면 공연히 가슴이 두근 두근거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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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드름은 덕지덕지하고 까까머리 짓궂은 녀석들이 선생님의
팬티를 훔쳐보는 게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교실을 왔다
갔다 하시며 수업을 하시는데, 애들이 의자에서 몸을 수그려 조그만 화장 거울을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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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스커트 밑에 대고 팬티 감상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애들 사이에는 “오늘은
도덕 선생님이 빨간 팬티를 입고 왔네! 야, 죽여준다. 내일은 무슨 빤스 입고 올라나?”
“야, 나는 노란 빤스가 좋던데.” “야, 도덕 선생님은 빤스가 무지개색으로 있나 봐! 맨
날 색깔이 바뀌는 걸 보니.” 그러면서 선생님의 팬티를 공책에 스케치해서 수업 시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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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려보곤 했습니다. 도덕 선생님이 우리 학교 초임이셨는데 애들이 그런 짓궂은 장난을
한다는 걸 다 눈치채셨을 텐데 여전히 미니스커트를 입고 학교에 오셨습니다.
나중에는 애들이 더 용감해져서 아예 선생님 미니스커트 밑으로 고개를 갖다 대고
직접 선생님 팬티를 감상했습니다. 선생님 팬티 이야기는 중학교 전체에 파다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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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졌고, 사내 녀석들이 모이기만 하면 도덕 선생님 팬티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과제물을 걷는데 애들이 작전을 짜고 선생님 옆에 서너 놈이 서 있게
하고, 다른 애들이 교탁에까지 진출해서 교대로 선생님 팬티를 감상하기로 했습니다.
아이들이 시간을 끌며 숙제를 제출하는 사이, 선생님은 탁자에 양팔을 집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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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실 안은 혼란스러웠습니다. 바로 그 틈을 타고 아이들이 교탁에 올라가 엎드려 선생님
팬티를 감상하기 시작했습니다. 선생님 팬티를 본 녀석들은 재밌다고 입을 막고 키득
키득거렸습니다. 나도 한번 감상해 볼까 하여 교탁에 접근하여 차례를 기다리는 사이,
선생님이 갑자기 고개를 뒤로 휙 돌리셨습니다. 서너 놈이 선생님 미니스커트 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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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릎을 꿇고 있었고, 나는 그 옆에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선생님은
얼굴을 찡그리시더니 그대로 교실을 나가 버렸습니다. 그다음 시간은 점심시간이었습니다.
잠시 후 담임선생님이 나타나셔서 ‘누구누구’ 하고 이름을 부르는데 내 이름도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내가 부르는 놈들은 얼른 교무실로 와. 점심 먹지 말고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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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담임선생님 별명은 ‘멸치’이었습니다. 화가 나면 신고 있던 슬리퍼로 얼굴을
때리는 괴팍하고 무서운 선생님이셨습니다. 다섯 녀석이 교무실에 불려갔습니다.
선생님은 화가 단단히 나셔서 엎드려뻗쳐를 시키더니 걸레 자루로 빳다를 치셨습니다.
교무실은 선생님들이 도시락을 먹으면서도 우리가 맞는 것을 구경 하고 계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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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도덕 선생님은 자리에 계시지 않았습니다. 빳다를 맞고 나서 담임선생님은
“너희 같은 놈들은 퇴 시켜야 정신을 차릴 놈들이야!” 그러면서 한참 동안 훈시를
하더니 다짜고짜 반성문을 써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 있었던 일을 사실대로
쓰라고 하셨습니다. 16절지 갱지를 두 장을 나눠주시면서 두 장 가득하게 쓰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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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누누이 “사실대로”를 강조하셨고, 하나도 빠트리면 안 된다고 못을 박았습니다.
우리는 교무실 복도로 쫓겨나서 무릎을 꿇고 반성문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반성문을 쓰기는 써야겠는데 나는 쓸 말이 없었습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는 억울했습니다. 나는 거기에다 이렇게 썼습니다. “선생님, 나는 정말 억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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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오늘 맹세코 선생님 빤스는 못 봤습니다. 사실 선생님 빤스를 좀 볼까 해서 교탁
옆에서 얼찐거리다 윤리 선생님이 고개를 돌리자 거기 내가 서 있어서 선생님이 저도
선생님 빤스를 보신 줄 오해하셨던 같습니다. 나는 선생님 빤스를 못 보았으니 무죄라고
생각합니다.” 대충 이런 요지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이 내 반성문을 읽다가 갑자기 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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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소를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선생님들까지 달려와 내 반성문을 읽고
웃으시는데, 남자 선생님들은 오늘 벌어진 사태를 은근히 즐기는 것 같았습니다.
허슬 딴스, 순화 교육대, 화장실 청소, 교련, 도시락, 좌충우돌하던 십 대가 그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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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고했어요.
랩-랩소디, 보헤미안 랩소디처럼
미-미친 듯이 솟다 부은 열정을
술-술회해보니 짠하네요
학-학부형도, 학원생도 모두
원-원대로 잘 될 거예요.
2019.9.21.sat.악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