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답사기
2010년 7월 22일부터 23일까지 남원지방을 답사했다. 답사라고는 하지만 답사겸 피서 여행이라고 해야 옳은 것이다. 답사목적은 내가 금년에 써야 하는 논문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 쓸 논문은 趙(조)慶(경)男(남)(1670-1641) 장군이 쓴 {亂中雜錄(난중잡록)}에 대한 것이다. 조장군은 임진왜란의 기록으로 위의 책을 썼다. 1주일 전에 그 후손인 趙(조)庸(용)奭(석)옹과 연락을 하였다. 이에는 순천대의 조원래교수님과 전북대학교의 하태규교수의 도움을 받았다. 조교수님은 전날 서울에서 만났기 때문에 남원 답사에 함께 하기로 했다가 오시지 않기로 했다.
답사는 집식구와 올사모 회원인 박노욱 박사 내외와 함께 떠나기로 했고, 숙박은 회원인 김봉곤 박사가 근무하고 있는 지리산권문화연구원 숙소를 예약했다. 22일 아침 9시 20분에 내 승차로 출발하여 1시 경에 남원에 도착하여 우리는 남원향토박물관을 먼저 들렀다. 이곳에 들른 목적은 {난중잡록}의 원본이 이곳에 보관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박물관은 네비게이션의 도움으로 잘 찾아갔으나 그 안에서 헤맸다. 왜냐하면 입구 쪽에 박물관 표시가 되어 있지 않아서 불쑥 차를 몰고 갔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서 물어보아도 관광객이라 잘 몰랐다. 몇 차례의 수소문을 한 후에야 정문 밖에서 들어감을 알았다.
안내판이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래 안내판은 처음 찾는 우리 같은 사람이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지 그 곳을 잘 아는 사람을 위해서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입구 쪽에 만들어져야함을 다시 느꼈다. 30분여를 찾아 가보니 진열장에 {난중잡록}이 전시돼 있는데 마침 학예사가 휴가 중이어서 글씨 사진을 찍지 못했다. 이 박물관에는 내가 35년 전에 발굴를 했던 만복사지 출토 기와 세점이 전북대로부터 대여되어 전시되고 있었다.
우리는 조용석 영감과 만나기로 한 지점인 조장군의 묘소와 사당이 있는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에 갔다. 이곳은 조장군이 말년에 살았던 산서 지방으로 산서라는 호를 칭하는 이유가 이에 있다. 이미 그곳에 나와 계셨다. 조영감은 74세인데 정정하셨고, 차를 직접 운전을 하셨다. 그 곳 향토를 지키는 어른 중 가장 연노하신 분이었다. 우리는 인사를 나누고 사당을 참배하고 족보자료와 기타 문건 5가지를 빌리고 묘소를 참배했다. 묘소는 사당 뒤에 있는데 1984년경에는 원래 세 묘소로 되어 있던 것을 합장하여 하나의 묘소로 만들고 원래의 신도비와 새 신도비가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난중잡록} 서문에 나오는 유명한 전적지의 위치를 영감님에게 여쭈어 보았다. 대단히 소중한 정보를 얻은 것이다. 우리는 다음으로 조장군의 출생지였던 주천면 은송리 423-4 내승부락으로 갔다. 가는 도중에 佛(불)隅(우)전적지를 답사했다. 이 곳은 현지에서 부처모퉁이라고 칭하는 곳이고 이 곳은 주천면 호기리 도로 가에 있었고, 이곳에서 마애불과 표지 그리고 기념물 설명서가 잘 되어 있었다. 이 호기리에는 1608년 경에 조장군이 이곳에 살았다고 하는데 그 위치를 아는 사람은 없는듯 하다. 그리고 그곳에 있다고 하는 ‘天使(천사)臺(대)’는 잘 모르셨다.
우리는 차로 10분을 더 가서 주천면 은송리 내송부락의 조경남 장군의 생가터를 갔다. 이곳에 조용석 옹이 살고 있었다. 은송리 423-4번지이다. 이곳은 조장군이 태어나 13세까지 살았던 외갓집 남원양씨 댁이었던 것 같다. 마을은 꽤나 넓은 들이 퍼져 있었다. 조장군은 13세 때에 어머니를 여위고, 외할머니 허씨를 의지하며 정유재란 때까지 살았다. 외할머댁은 어디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이전의 임진왜란 시에는 홀로 계신 외할머니의 봉양문제로 의병에 참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우리는 3시 경에 남원 조사를 우선 마치고 다음에 한번 쯤 더 와야 생생한 유적지를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다음 행선지는 하동 쌍계사로 향했다. 가다보니 구례군 토지면 오미동 구례유씨고문서 소장가의 집앞을 지났다. 이곳은 내가 20여년 전에 와서 고문서를 조사 수집한 지역이다. 우리는 아침 간식으로 탄천 휴게소에서 했지만 점심을 먹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면 면사무소가 있는 농협 주차장에 차를 멈추고 네 사람이 칼 국수 두 그릇을 시켰다. 고동칼국수를 나누어 맛있게 먹었다. 섬진강에서 잡은 고동이 씹을 것은 없지만 옛 시골의 정취를 한껏 돋아주었다. 우리는 더 가다가 섬진강 전망대에 잠간 차를 세워 강의 전경을 한 번 둘러 보았다. 물도 풍부하고 아름다운 山河(산하)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는 경남 하동시 화개장터에서 좌회전하여 10여분을 달려 4시 30분에 쌍계사에 도착했다. 사찰 경내의 유적을 둘러보았다. 물론 나에게는 이곳이 첫 번은 아니었으나 진감선사비의 비문을 보니 항상 새로운 감을 주었다. 우리 일행 여자분 두 분에게는 이곳이 처음이었다. 쌍계사를 나오다가 20여분 간 계곡에 발을 담그는 것도 했다. 이는 피서 겸 간다고 한 약속의 일부분이었다. 찬 시냇물이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시원했다. 나는 발만이 아니라 양손을 담그니 가슴에 전달되는 냉기가 훨씬 배가되는 듯했다. 마치 네 발로 걷는 짐승생각을 했다. 그리고 뒷편에 박경리의 소설에 나오는 청학동도 있음이 머리에 회상되었다.
우리는 6시에 쌍계사를 출발하여 구례쪽으로 되돌아오다가 순천대학교 지리산권문화연구원의 건물에 도착했다. 이는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에 있다. 저녁식사는 토종닭을 큰 것으로 한 마리 시켜놓았고, 7시에 먹기로 예약을 오전 중에 했다. 6시 40분에 도착하여 전화를 하니 김봉곤 박사가 나와서 안내했다. 우선 우리는 할머니가 정성껏 해주시는 토종닭을 맛있게 먹었다. 옆에서는 김봉곤 박사팀의 연구원들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사연인즉 김 박사가 우수연구원으로 지정되어 상금을 받아 한턱을 낸다고 했다. 여기서 연구원 박용국박사와 김아네스 박사와 인사를 나눴다. 김박사는 이 지역 민간신앙을 연구한다고 했다.
나는 식사 도중 잠간 나와서 지리산 일몰사진을 찍으려다가 놓쳤다. 노고단으로 지는 석양이 그름을 붉게 물들이고 뭉게 구름이 연출하는 장면은 지리산 천왕봉의 지모왕산신의 마지막 퇴장하는 연극 실연의 마지막 장면이었다. 나는 카메라 건전지를 바꿔 끼고 촬영장소를 찾다가 그만 퇴장 장면을 놓치고 말았다.
식사 후 우리는 숙소인 3층으로 옮기고 박노욱박사와 나는 바둑 앞에 대좌했다. 그래서 박용국박사와 김아네스 박사와 환담을 나누지 못한 것이 못내 미안스럽다. 그러나 인연은 앞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식구가 제자들에게 그렇게 신세를 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걱정을 하길래 글쎄 이세상의 일은 선배가 후배에게 신세를 지고 우리가 그대로 되돌려주지 못하면 그는 다음 후배에게 받는 법이 아니겠냐고 했다. 그러나 김박사에게 참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 싶다. 김박사는 2007년도에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역사학을 전공하여 "노사 기정진의 사상"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현재 순천대학교 연구교수, 전남대학교 사학과 강사로 근무 중이며 자녀 두명을 두었고 현재는 부인은 인천에 자기와 이들은 구례에 떨어져 살고 있는 중이다. 성실한 학자의 태도와 연구원에서 배운 고문서 실력이 돋보이고 이 곳에서 열심히 연구에 몰두하고 있음이 자랑스럽다.
23일 우리는 아침 7시에 화엄사를 가기로 약속을 했는데 한 시간을 늦게 출발했다. 김봉곤 교수가 나와서 배웅을 했다. 아마 한 시간 이상 기다렸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리는 10분 후 화엄사에 도착했다. 나는 입구에서 초 두 자루를 샀다. 주상길 교수의 명복을 빌어주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막상 화엄사에서는 초를 대웅전에 놓아두면 켜준다도 하기에 그대로 하기로 했다. 대웅전에 참배를 하는데 100일간 영가기도를 해준다고 해서 제자 주상길 교수의 천도를 예약했다. 그리고 나와서 국보인 각황전과 그 앞의 석등, 그리고 사사자 석탑을 둘러보았다. 사사자석탑은 이 화엄사의 창건법사인 緣起(연기)대사가 돌아가신 자기 부모님을 추도하기 위해서 앞에서 공양을 하고 3층석탑을 머리로 이고 있으며 탑의 기간부에는 금강역사들이 호위하고 있다. 화엄사 입구에는 대역사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화엄사의 물을 마시면서 내려와 다음 행선지는 남원 광한루였다. 원래는 노고단을 가려다가 박박사 내외분이 가본 곳이고 나의 집식구가 등산을 할 수 없는 처지여서 이를 포기했다.
11시에 광한루에 도착하여 나는 450년 된 팽나무와 400여년 된 버드나무를 촬영했다. 팽나무의 뿌리로 뻗은 줄기가 마치 발가락모습 같았다. 버드나무는 송강 정철이 부사로 왔을 때에 심은 나무라고 설명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광한루에서 나와서 추어탕집을 찾다가 '가마솥추어탕집'에 들려 11에 아침 겸 점심식사를 했다. 그리고 다음 행선지는 청주시 문의면의 청남대였다. 그런데 88고속도로를 타고 오다가 좌회전해서 국도 빠치는 곳을 실수로 놓지고 말았다. 그래서 함양에 와서 진주대전간 고속도로를 바꿔탔다. 이 고속도로 길은 두 달전에 박노욱박사와 함께 실상사에 왔다가 간 길이었다. 오는데 소나기가 엄청나게 쏟아졌다. 그래서 금산휴게소를 들려 잠간 쉬었더니 소나기가 멈췄다. 오후 4시 경에 청남대에 들렸으니 비가 다시 내려 갈 수가 없었다, 청남대 가는 데 버스를 타고 가야하는데 아무도 타지를 않았다. 天時(천시)가 도와주지 않으니 할 수 없다고 포기했다. 이 경우 "人道不如地理 地理不如天時"라고나 할까!
그래서 우리는 이곳 탐방을 포기하고 차를 집으로 돌려 5시30분에 오리역에 도착하여 저녁식사를 하고 헤어졌다. 이틀간 답사 겸 관광을 무사히 마쳤다. 즐거운 여행이었다. 피곤해서 잠을 푹잘것만 같다.
##사진 설명 위로부터
1번 남원시 주천면 호기리 조경남장군 임진왜란 궁장현 싸움 삽화도
2 궁장현 불위치 복원 설명서
3. 경남 하동 산신산쌍계사 경내 국보 최치원글, 글씨의 진감선사비명-1200년전의 글씨가 뚜렸하다.
4. 전남구례군 화엄사 4사자3층석탑(국보 135호 전경)
5. 광한루 내의 450년된 팽나무- 우리올사모도 이정도만 유지되었으면!
6. 땅에 굳게 내리고 있는 팽마무의 줄기모습 마치 엄청남 힘을 쓰고 있는 팽나무발가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