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봉재(飛鳳齋)연혁(沿革)
이곳 비봉재(飛鳳齋)는 성주 이씨 8세조(八世祖) 도정공(都正公) 휘(諱) 전(詮) 선조님으로부터 12세조이신 참판공(參判公) 휘 성(珹) 선조님까지, 5위(五位)의 제향(祭享)을 올리고 유덕(遺德)을 기리는 성주 이씨의 성지(聖地)이다. 성주 이씨 도정공 후예가 곡성 ․ 보성에 세거(世居)하게 된 것은 광해조의 정치적 혼란 때문이었다. 12세조 참판공 휘 성(珹)께서는 당시 페모(廢母) 사건이 일어나자, 1618년 벼슬을 버리고 보성으로 남하(南下)하여 은거(隱居)하신 것이다. 우계(牛溪) 성혼(成渾) 선생 문하(門下)에서 교분이 두터웠던 보성 출신 우산(牛山) 안방준(安邦俊) 선생과 함께였다. 공(公)은 덕(德)을 숨기고, 절개를 지키며 오직 학문과 후진 교육에 전념하셨다. 휘 성(珹)은 고려 정당문학 문열공(文烈公) 휘 조년(兆年)의 10대손으로 성주 이씨 곡성 ․ 보성 입향조(入鄕祖)가 되신다. 공의 손자 공조판서 정헌공(靖憲公) 휘 광적(光迪)이 공의 묘소를 보성에서 곡성군 석곡면 연반리 통명산 자락으로 이장(移葬)하여, 제실을 짓고 비봉재(飛鳳齋)라 하였다. 그런데, 오랜 세월이 흘러오면서 제실이 퇴락하여, 1995년 도정공 종원(宗員)의 합의(合意)로 비봉재는 현재의 모습으로 중창되었다. 도정공파(都正公派)의 파조(派祖)이신 공의 고조(高祖) 도정공 휘 전(詮), 증조(曾祖) 참의공 휘 운기(云芑), 조부(祖父) 도총관 휘 흔(掀), 부(父) 대사헌공 휘 언충(彦忠), 4위(四位)의 묘소는 당초 서울 노원구 중계동에 모셔져 있었는데, 주변 도시화로 인하여 1986년, 1997년 두 번에 걸쳐 이곳으로 이장하여 모셨다. 우리 선조님의 유택은 통명산 정기(精氣)가 모여 비봉혈(飛鳳穴)을 이루니, 멀리 중천(中天)에 아미산(峨媚山)이 높이 솟아오르고 주변의 산봉우리는 마치 많은 자손이 늘어서 있는 듯하며, 마을 앞 기름진 들판에는 연반천 맑은 물이 은빛으로 흐른다. 이는 마치 봉황(鳳凰)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의 명당(明堂)이다. 아름다운 비봉재에서 후손들이 향례(享禮)를 정성스럽게 모실 수 있으니, 어찌 훌륭한 선조님의 음덕(蔭德)이라 아니 할 수 있겠는가. 세월이 흘러도 비봉재가 불후(不朽)의 명당(名堂)으로 길이 보존되기를 바라며, 병신년(丙申年) 초춘(初春)에 뜻을 모아 연혁비를 세운다. 西紀 2016 年 3月 25 日
星州李氏都正公派宗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