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0년 전 세조 지나간 길 지금도 법주사 소나무가 지키네
월간산 2022.04.05
[숲과 사찰] <10> 법주사
국보 제55호 법주사 팔상전. 현존하는 국내 유일의 5층 목탑.
1464년 2월 28일, 조선의 7번째 임금 세조는 수행원 500여 명을 이끌고 궁을 나섰다. 속리산 법주사 복천암에 있는 신미대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 단종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그는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조카를 죽여야 했던 삼촌의 마음도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청주를 출발한 세조 일행은 말티재 아래 대궐 터에서 하루를 묵었다고 <조선왕조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다음날, 고갯길을 넘어 평지로 내려섰을 때 잘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세조의 눈에 들어왔다. 전설은 소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들어 올려 세조 일행이 편안하게 지나가도록 했다고 하는데, 세조가 소나무의 덕을 기려 정이품 벼슬을 내렸다고 한다(<조선왕조실록>에 이에 관한 기록은 없다).
신미대사는 한글 창제와 보급에 세종을 도와 큰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으며, 세종 이후 세조 이전의 선왕들에게도 존경 받은 인물이다. 세조는 복천암에 머물려 신미대사와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피부병을 고쳤다고 한다. 법주사 옆을 흐르는 계곡에는 세조가 목욕을 하면서 피부병을 고쳤다는 목욕소가 있다.
600년 전 세조가 걸어간 길을 따라 걸었다. 세조를 위해 길을 열어 주었다는 정이품송이 600년 전처럼 법주사를 목전에 둔 자리에 서있다. 이 나무는 원래 삿갓 또는 우산을 활짝 편 모양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는데 1993년 강풍으로 서쪽 큰 가지가 부러졌고, 또 이후 폭설 피해로 서쪽의 남은 가지들조차 적지 않게 상하고 말았다. 수백 년간 같은 자리에서 비바람을 견뎌온 노구는 지치고 힘들어 보였다. 좌우로 완벽한 대칭을 이루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고 한쪽마저 축 쳐진 가지를 받침대가 부축하듯 받치고 있다.
법주사 계곡을 끼고 만들어진 세조길. 나무데크 길이 평탄해서 가족들과 걷기에 좋다.
가족과 함께 걷기 편한 길
세조가 복천암의 신미대사를 찾아가는 여정은 오늘날 ‘세조길’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법주사 계곡과 어깨동무하듯 걷는 이 길은 나무데크로 조성돼 있는데 오르내림이 심하지 않고 평탄해 가족끼리 걷기에 정말 좋은 길이다. 특히 출발지점 근처에 있는 법주사 수정교 앞 속리산사실기비俗離山事實記碑(현종 때 세운 비, 속리사의 내력이 기술돼 있다) 주변 솔숲엔 옛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무성하다.
세조길 곳곳에서 쭉쭉 뻗은 잘생긴 소나무들을 찾아볼 수 있다. 법주사에서 비로봉으로 오르는 숲길, 탑골암 삼거리, 복천암에서도 기세 좋은 소나무들이 아름답게 자라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세조길 숲속에 있는 호수. 솔숲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낸다.
사찰의 노력으로 지켜온 숲
예부터 법주사 솔숲은 유명했다. 그러나 이제는 생태학적 천이에 따라 활엽수가 차지하는 면적이 갈수록 커지는 등 소나무 숲의 면적이 줄어들고 있는 추세다. 소나무 보존과 숲의 자연적 천이라는 두 갈래 관점에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법주사 일주문에서 세심정까지 편도 2.7km, 복천암까지 3km 약간 넘는 세조길로 천천히 걸으면 왕복하는 데 2시간 남짓 걸린다. 군데군데 휴게소도 잘 갖춰져 편리하다.
우리는 조선 후기와 근대의 국내 산들이 전란과 남벌로 인해 민둥산이 많았기에 사찰 주변의 숲도 예외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1920년 출판된<조선고적도보>와 <조선사찰 31본산>에 수록된 사진을 보면 그렇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진집들을 보면 몇몇 사찰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찰은 주변에 울창한 솔숲을 거느리고 있었다. 단기간에 생성되거나 소멸할 수 없는 숲의 생태적 특성을 고려할 때, 그리고 조선시대 사찰 소나무 숲에 대한 기록을 볼 때 사찰의 소나무 숲은 장구한 세월에 걸쳐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며 사찰의 적극적인 개입과 노력으로 전란과 민간인들의 마구잡이 남벌로부터 숲을 지켜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
1 경내를 지나가는 스님. 2 보물 제915호 법주사 대웅보전. 신라 때 것을 벽암스님이 1624년 중창했다. 3 전성기 때 스님 3000명에 달했다는 법주사 사세에 맞게 무쇠 그릇이 어마어마하다. 무게 20톤,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 4 국보 제 64호 법주사 석련지. 통일신라시대 8세기경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5 국보 제5호 법주사 쌍사자석등.
법주사, 우리 문화의 寶庫
법주사를 품고 있는 속리산은 속세를 떠난다는 의미를 지닌 산이다. 신라 선덕여왕 때 진표 율사가 수행할 만한 곳을 찾아 전국을 유랑하던 중 속리산 근처에 이르렀을 때 밭을 갈던 소들이 스님의 법력 앞에 모두 무릎을 꿇는 것을 본 사람들이 모두 진표 율사를 따라 속세를 버리고 입산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14년인 553년 신라의 의신義信이 창건했다. 인도에서 공부를 마친 후 신라로 돌아오는 귀국 길에 의신은 흰 노새에 불경을 싣고 왔다. 절을 지을 만한 터를 찾아 이리저리 다니던 중 노새가 지금의 법주사 터에 이르러 발걸음을 멈추고 우는 것을 보고 문득 깨달은 바 있어 이곳에 절을 지었다고 한다. 절 이름은 인도에서 가져온 경전, 즉 부처님의 가르침法이 이곳에 머물렀다住는 뜻에서 법주사라 지었다. 그후 여러 차례 전란을 거치며 소실과 중창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법주사는 고려시대에는 왕건과 공민왕, 조선시대에는 세조 등 여러 임금이 찾았던 사찰로서 가장 번성했을 때는 절에 머무르는 스님만 3,000명이 넘었다고 전해진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경내에 높이 120cm, 지름 270cm, 두께 10cm, 무게 20톤에 달하는 철솥이 놓여 있다. ‘철확’이라고 하는 이 무쇠 솥은 쌀 40가마를 담을 수 있는 규모로 수천 명이 먹을 국을 끓일 수 있는 크기다.
법주사는 많은 국보와 보물을 간직한 사찰로 유명하다. 국내에서 유일한 목조 5층탑인 팔상전(국보 제55호), 신라시대 대표적 석등인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 신라시대인 8세기에 조성된 석련지(국보 제64호), 높이 5m에 이르는 마애여래의상(보물 제216호) 등이 역사 깊은 법주사에 품격을 더해 주고 있다.
본 기사는 월간산 2022년 4월호에 수록된 기사입니다.
“속리산 거북바위를 알아야 법주사가 제대로 보입니다”
법주사의 내력에 대해서 말하는 각운스님.
법주사 금동미륵대불 뒤에는 수정봉이라는 나지막한 산이 있다. 높이 565m밖에 안 되지만 속리산 8봉 가운데 하나다. 정상 부위에 거북을 빼닮은 큰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에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중국 당나라 태종이 세수를 하는데 대야에 큰 거북 그림자가 비쳐서 도사를 불러 물으니 “동국 명산에 큰 거북이 머리가 당나라를 향하고 있어 재물과 인재가 동국으로 들어가게 됐다. 당장 사람을 보내 거북이 머리를 없애라”고 했다. 동국 땅을 샅샅이 뒤진 당태종은 속리산 수정봉에서 돌거북을 발견해 목을 자르고, 그 위에 10층 석탑을 쌓아 거북의 정기를 눌렀다고 한다.
당태종이 우리 땅의 정기를 끊기 위해 거북목을 쳤다는 전설이 서린 거북바위. 목부분에 이어 붙인 흔적이 보인다.
효종의 북벌 의지 담긴 전설
1653년 효종 때 이 사실을 알게 된 목천군수 이두양이 거북 머리를 찾아 붙이도록 했으나 목을 이은 흔적은 지울 수 없어 그대로 남게 됐다고 한다. 또한 1655년 병마절도사 민진익은 거북 등에 놓여 있던 석탑마저 허물어 버렸다고 한다. 지금도 수정봉 거북바위 아래에는 당시 허물어 버린 석탑 부재가 남아 있다. 우암 송시열은 이 이야기를 ‘속리산사실기비’에 상세히 적었다. 조선 제17대 임금으로서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있던 효종의 절치부심과 북벌 의지가 전설의 행간에서 엿보인다.
“속리산 천왕봉은 세 군데의 물줄기가 시작되는 경계입니다. 천왕봉에 내린 빗줄기는 동으로 낙동강, 남으로 금강, 서쪽으로 한강을 이루지요. 풍수지리적으로 법주사의 위치는 인체에 비유하면 온 몸의 기가 모이는 단전 자리에 해당해요.”
필자에게 속리산과 법주사에 얽힌 사연을 이야기 해준 부주지 각운 스님은 대표적 미륵신앙 도량인 법주사의 거북바위 전설은 ‘민족의 정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조상들의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좌도 우도 후손을 위해 내려놓아야
“당나라 때까지 올라갈 필요도 없어요. 지금 이 땅에서 좌와 우가 얼마나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까. 양쪽 모두 이 땅에서 살아갈 후손들의 미래를 위해서 이념과 기득권을 내려놓고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각운 스님의 말은 시대적 웅변처럼 들렸다.
“6·25 때 빨치산들이 사찰을 은신처로 이용한 경우가 많았어요. 그래서 전국 도처의 절이 미군의 폭격 대상이 됩니다. 법주사도 예외가 아니어서 스님들하고 마을 주민들이 빨치산들이 절에 얼씬하지 못하게 힘을 모아 막았어요. 그래서 법주사와 주변의 소나무숲이 폭격을 면하게 된 겁니다.”
스님은 전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풍전등화 같았던 법주사가 살아남게 된 사연을 전해 주면서 “법주사 숲의 소나무 한 그루, 계곡의 돌 한 조각마다 절집과 숲을 지키기 위해 애쓴 선조들의 노고가 배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