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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8장은 빵 일곱 개와 물고기 몇 마리로 사천 명을 먹이셨다는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이 본문도 마태복음 15장에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가 오병이어 이야기와 같은 사건인지 아닌지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논쟁은 극단적으로 보수적인 신학자들 사이에서나 벌어지는 논쟁입니다.
오병이어 이야기나 이 이야기나 설화, 즉 이야기일 뿐이지 사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법칙에 어긋나는 일은 동화와 신화의 세계에서나 나타나는 일이지 현실세계에서 발생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합리적으로 분석하거나 과학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초과학적이고 초합리적인 영역은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는 우주인이 존재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아직은 과학과 이성으로 입증할 수 없는 초과학적인 영역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물 위로 걷는다거나, 빵 몇 개로 수천 명이 먹는다는 것은, 초합리적이거나 초과학적인 것이 아니라, 과학과 이성에 어긋나는 비합리적인 것입니다. 이 둘의 차이를 분명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에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표적을 보여달라고 요청하는데 예수께서 거절하시는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마가복음에는 이런 내용이 밋밋하게 담겨있는데 마태는 이 이야기를 가져가면서 훨씬 더 드라마틱하게 바꾸었습니다. 11~13절을 보겠습니다.
11 바리새파 사람들이 나와서는, 예수에게 시비를 걸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그에게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요구하였다.
12 예수께서는 마음 속으로 깊이 탄식하시고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는가!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세대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13 그리고 예수께서는 그들을 떠나, 다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셨다.
마태복음 16장 1~4절을 보겠습니다.
1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이 다가와서, 예수를 시험하느라고, 하늘로부터 내리는 표적을 자기들에게 보여 달라고 요청하였다.
2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저녁때에는 '하늘이 붉은 것을 보니 내일은 날씨가 맑겠구나' 하고,
3 아침에는 '하늘이 붉고 흐린 것을 보니 오늘은 날씨가 궂겠구나' 한다. 너희는 하늘의 징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징조들은 분별하지 못하느냐?]
4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요구하지만, 이 세대는, 요나의 표적 밖에는, 아무 표적도 받지 못할 것이다." 그런 다음에, 예수께서는 그들을 남겨 두고 떠나가셨다.
일반적으로 기독교 신자들은 마가복음보다 마태복음에 익숙합니다. 마태복음이 신약성서의 첫 번째 책으로 마가복음보다 앞에 편성되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용상으로도 마태가 훨씬 더 풍부하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 본문에서도 마태는, 마가복음에 밋밋하게 담겨있는 내용에 더하여, 하늘의 징조와 요나의 표적까지 동원하여 내용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확장시켰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대학생들이 리포트를 제출할 때 친구의 보고서를 베끼는 경우가 있는데, 베낀 친구가 더 점수를 잘 받는 경우가 많습니다. 원본에서 미숙하다고 느끼는 부분은 빼기도 하고, 자기의 관점을 세련되게 다듬어서 끼워놓으면, 빌려준 친구의 것보다 훨씬 더 잘 쓴 것처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성서보다 늦게 쓰여진 신약성서가 모든 면에서 훨씬 더 합리적이고, 기독교성서보다 600년 이상 늦게 쓰여진 꾸란이 기독교성서보다 더 합리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 많습니다. 그게 당연한 것입니다. 원래 원본보다 복사본이나 인용본이 더 화려하고 그럴듯한 법이니까요.
그러면 저는 왜 이렇게 두 복음서를 비교하면서 표현이나 내용의 다름을 드러내는 것일까요? 그러니까 쓰여진 성서의 문자를 절대화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성서는 일점일획도 오류가 없다는 성서무오설이 얼마나 비합리적인 교리인지 직접 느껴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서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성서의 노예가 아닌 주인이 되어, 성서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잘 구분하고, 성서에 담긴 내용을 진정한 생명의 양식으로 요리하고 섭취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헤롯의 누룩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바리새파 사람과 헤롯의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셨는데, 제자들은 ‘빵이 없어서 그러시나 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빵 몇 덩이와 물고기 몇 마리로 수천 명을 먹이신 이야기를 상기시키시면서 ‘너희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고 책망하신 것으로 마가복음의 이야기가 끝납니다.
그런데 이 본문의 이야기만으로는, 기록된 글을 읽는 사람들도 무슨 뜻인지 파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마태는 이 원문을 자기의 복음서에 옮기면서 뜻풀이까지 담았습니다. 마태복음 16장 11~12절을 보겠습니다.
11 내가 빵을 두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 아님을, 너희는 어찌하여 깨닫지 못하느냐?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누룩을 경계하여라."
12 그제서야 그들은, 빵의 누룩이 아니라,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파 사람들의 가르침을 경계하라고 하시는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이런 해석을 첨부함으로써 마태는 이 이야기의 뜻을 정확하게 독자들에게 전달합니다. 이렇게 때로는 원본보다 복사본이나 인용본이 훨씬 더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문학적 감성 뿐 아니라 논리적인 면에서도 마태는 탁월한 저자라고 평가받을 만합니다.
이어지는 본문은 예수께서 눈먼 사람을 고쳐주시는 이야기입니다. 22~26절을 보겠습니다.
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3 예수께서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 사람이 쳐다보고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런 다음에, 그가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 하셨다.
이 이야기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나오지 않는 마가복음만의 기록입니다. 이렇게 다른 복음서에는 없고 마가복음에만 나오는 기록은 마가복음 전체의 약 5% 정도 밖에 안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래서 희귀하고 가치를 더 인정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태와 누가가 외면할 만큼 별다른 의미나 매력이 없는 이야기일 가능성이 큽니다.
이 이야기에는, 무엇을 했다는 내용만 있고 별다른 설명이나 암시가 없습니다. 성서학자들 중에는, 이 사람이 앞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치료로 부분적으로 보게 되었다가 2차 치료로 완전히 보게 된 것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도 영적인 맹인 상태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 부분적으로 보게 되었고, 십자가와 부활 승천 이후 완전히 보게 될 것을 암시적으로 나타낸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위험한 연결입니다. 그렇게 해석할 근거가 본문에 나타나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단순히 예수님의 위대한 능력을 소개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마태와 누가가 이 본문을 가져가지 않은 것은, 아마도 뜻이 불명확한 이야기를 자신들의 복음서에 싣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 아닐까요?
이어지는 본문은 베드로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본문은 마태복음 16장에도 같은 내용으로 담겨있는데, 마가의 기록을 마태가 가져가서 더욱 확장시켰습니다. 어떻게 확장되었는지 마가복음 원본과 비교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마가복음 8장 27~30절을 보겠습니다.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빌립보의 가이사랴에 있는 여러 마을로 길을 나서셨는데, 도중에 제자들에게 물으시기를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셨다.
28 제자들이 예수께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어서 마태복음 16장 13~20절을 보겠습니다.
13 예수께서 빌립보의 가이사랴 지방에 이르러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고 하느냐?"
14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레미야나 예언자들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15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1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바요나야, 너는 복이 있다.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18 나도 너에게 말한다. 너는 베드로다. 나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다. 죽음의 세력이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19 내가 너에게 하늘 나라의 열쇠를 주겠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20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엄명하시기를, 자기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
마가의 본문이 마태로 가서 많이 확장된 것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차이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마가복음에는 베드로가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만 대답했는데, 마태복음에는 ‘선생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십니다.’ 라고 대답하는 부분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메시아로 불린 인물들은 많았습니다. 바벨론 포로기에서 돌아온 지도자들 가운데 스룹바벨도 메시아로 기대를 모았던 인물이었고, 서기전 2세기 유다 마카비우스도 당시 민중들에게 메시아로 기대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메시아로 기대를 모았던 인물들이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한 것은 어떤 면에서는 특별한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의 기록에 나타난 베드로는, 단지 메시아로만 고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당시 주변 세계에서 탁월한 능력을 가진 인물에게 신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붙이는 것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로마 황제도 신의 아들로 불렸습니다. 그러나 유일신을 믿는 유대 사회에서 누군가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건 신성모독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매우 위험한 고백을 한 베드로를 칭찬하시면서 마가복음에는 없는 내용을 말씀하신 것으로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너에게 이것을 알려 주신 분은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시다.’ 라고 하시면서, 그때까지는 시몬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에게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신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 반석 위에다가 내 교회를 세우겠고, 또한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겠다’고 하시며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라는 말씀까지 해주십니다. 가톨릭교회는 이 말씀에 근거해서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해석한다고 마태복음을 강해할 때 말씀드렸습니다.
원본인 마가복음에는 없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베드로의 고백을 근거로, 예수님을 본질상 신의 아들이며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규정하여, 다른 종교에는 구원이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다는 배타적인 교리를 만든 것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 냉철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8장의 마지막 본문에는, 예수께서 자신이 고난을 받고 죽을 것이지만 사흘 뒤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고하시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는 이 본문을 가져가서 16장에 담았는데 표현상의 차이가 조금 있을 뿐 내용은 거의 같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없는 내용을 마태가 덧붙인 것처럼 착각할 수 있는 내용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 28절을 보겠습니다.
28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 죽음을 맛보지 않고 살아서, 인자가 자기 왕권을 차지하고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이 본문은 마가복음 8장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마가복음 9장 1절이 이렇게 시작됩니다.
1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에 서 있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기 전에 하나님의 나라가 권능으로 오는 것을 볼 사람들도 있다."
표현이 조금 다르지만 같은 내용입니다. 원래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에는 장과 절이 없었습니다. 장은 서기 13세기에, 절은 15세기에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니까 마태는 마가의 본문을 그대로 가져가서 자기의 복음서에 표현만 조금 다르게 실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13세기에 장을 만든 스테판 랑튼 경이 마태복음의 본문은 제대로 장을 구분했는데, 마가복음에서는 8장의 마지막 절에 넣었어야 할 본문을 9장의 첫 절로 구분한 것입니다.
성서는 이렇게 여러 가지로 미숙한 부분을 안고 있는 책입니다. 기록될 당시에는 물론이고, 그 이후 장과 절이 만들어졌을 때도 ‘사람의 미숙함과 한계’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라는 베드로후서 1장 21절(개역개정) 본문 역시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기록자의 신앙고백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