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유학자인 심산 김창숙(1879∼1962) 선생의 생가이다.
대가면 사월리에서 영남의 유학자 집안 출신이며, 선조 때의 정승 김우옹(金宇顒)의 12대손 칠봉(七峰) 김호림(金頀林)과 인동장씨 부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당시 이름이 높던 유학자 이종기(李種杞)·곽종석(郭鍾錫)·이승희(李承熙)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선생은 구한말 유학자이며 독립운동가이고 정치인으로 경상북도 성주 출신이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승희와 함께 상경하여 상소를 올리고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오적을 성토하였다. 3·1운동이 일어나자 130여명의 연명으로 한국 독립을 호소하는 진정서를 작성하여 만국평화회의에 보내기도 하였다. 1953년 전국에 흩어져 있는 향교 재단을 규합하여 성균관 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인가받고 성균관대학교 초대 총장에 취임하였다. 저서로 시문집인 『심산만초』와 『벽옹만초』 등이 있다.
생가는 선생이 22세 되던 해에 화재를 당하여 1901년 다시 지은 건물이다. 이전 건물을 언제 지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선조 대대로 살아온 것으로 보이며 고종 16년(1879)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