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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 일본 불교사
5. 무로마치[室町: 1336~1573] 시대 불교
일본의 제96대 덴노, 고다이고[後醍醐, 재위 1318~1339]는 막부를 타도하고 황실의 권위를 되찾으려고 군사를 일으킨다. 1333년 결국 유력한 무사였던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의 도움으로 약 140여 년 동안 유지되던 가마쿠라 막부를 쓰러뜨린다. 고다이고는 이어 율령 정치의 재흥을 내세우며 신정新政에 착수하는데, 이를 겐무 신정[建武の新政]이라고 한다. 1334년 1월 겐무[建武]라는 연호를 정하고 개원改元하여 천황 친정親政 체제를 부활하게 된 것이다.
일반적인 역사구분에서 중세로 규정되는 가마쿠라시대는 이른바 ‘어은(御恩)’과 ‘봉공(奉公)’에 의한 지배구조로 유지되었다. 천황으로부터 통치를 위한 모든 권력을 이양 받은 쇼군(将軍)이 가신(御家人)들에게 영지를 주거나 지역의 수호, 지령 등의 관직을 하사(어은, 御恩)하여 해당 지역을 관할케 하였고, 이에 대해 가신들은 교토나 가마쿠라의 경비를 담당하거나 유사시에 병력을 동원하여 참전하는 봉공(奉公)이 의무시되었다. 이와 같이 쇼군과 어가인이 토지를 매개로 ‘어은과 봉공’의 주종관계를 맺는 봉건제도가 가마쿠라 막부체제를 지탱하는 기본 골격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1274년과 1281년의 두 차례에 걸친 원(元)의 침입으로 인해, 어은과 봉공을 축으로 지탱되던 가마쿠라막부 체제가 크게 흔들리기 시작한다. 원의 침략을 무사히 막아내기는 하였지만 전리품을 얻은 승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원의 침입에 대항하여 활약하였던 가신들에 대한 포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로 인해 막부에 불만을 가지는 가신들이 늘어났고, 어은과 봉공의 막부체제가 크게 흔들리게 된다. 게다가 다시 있을지 모르는 원의 침입을 대비하기 위해 각지의 방어시설 확충 등으로 인해 막부의 막대한 제정이 지출되었고, 인력동원 등의 봉공의 강요로 인한 가신들의 불만은 더욱 심해졌던 것이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3. 가마쿠라막부의 몰락에서 전국시대의 도래까지.)
원元의 침입을 막아낸 가신들을 부추겨 가마쿠라 막부를 제거한 고다이고는 가마쿠라 막부를 타도하는 데 공헌한 무사들에 대한 보상을 등한시한다. 별다른 공헌이 없는 귀족들을 중용하면서도 거병擧兵을 도와 쇼군으로 임명되리라 기대하고 있던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제치고, 그의 아들을 쇼군으로 임명한다. 이에 불만을 품은 아시카가는 무사들과 난을 일으켜 교토를 점령하고, 다이카쿠지 계통[大覚寺統]인 고다이고와는 다른 지묘인 계통[持明院統]의 고곤[光嚴, 재위 1331~1333]을 황위에 앉힌다.
고곤은 제89대 고후카쿠사[後深草, 재위 1246~1260] 천황 계열로 90대 가메야마[亀山, 재위 1260~1274] 계열인 고다이고와는 다른 왕통이다. 교토에서 쫓겨난 고다이고는 나라[奈良]로 내려가 요시노 산지[吉野山地]를 거점으로 투쟁하는데, 다이카쿠지와 지묘인 계통의 천황 두 파가 대립하여 격렬한 싸움을 벌이게 된 것이다. 이를 남조南朝와 북조北朝, 두 천황이 이끄는 난보쿠초[南北朝, 1336~1392] 시대라고 한다. 일본의 남북조시대는 전국의 무사단이 개입한 전국적 전란으로 약 60여 년간 지속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는 고곤의 동생이자 북조 제2대 고묘[光明, 재위 1336~1348] 천황 때 세이이타이[征夷] 대장군으로 임명되어, 교토에 무로마치[室町] 막부幕府를 세우고 무로마치 시대를 연다. 아시카가[足利] 시대라고도 불리는 무로마치 시대는 1573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멸망될 때까지 약 240년간 지속된다.
가마쿠라 시대까지는 천황을 받드는 구게[公家] 정권과 막부의 부케[武家] 정권이 양립하는 2원 체제였다. 가마쿠라 막부는 동일본 지역을 지배했고, 교토의 천황은 서일본을 세력권으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는 공가公家 정권을 물리치고 무가武家에 의한 단독정권이 수립된다. 이로써 천황을 정점으로 한 귀족정권은 막을 내리고, 천황은 존재하지만 통치하지 않는 상징적인 존재로 남게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재위 1449~1473] 때인 1467년, 일본은 후계 문제와 다이묘 하타케야마[畠山] 가문의 상속 다툼 등에 휘말린 오닌의 난[應仁の乱]이 일어난다. 1467년이 일본의 연호로 오닌[應仁] 원년이었으므로 여기서 이름을 따서 오닌의 난이라고 한다. 아시카가 요시마사의 후계자 분쟁이 직접적인 발단이 되었지만, 이미 1459년에서 1460년 사이 교토를 휩쓴 대기근 같은 자연재해 등과 겹쳐 사회적으로 불안하고 정치적으로 혼란한 시대였다.
호소카와 가츠모토[細川勝元]는 동군東軍의 주장主将으로, 서군西軍의 야마나 소젠[山名宗全]과 다투게 되었는데, 1467~1477년 사이 11년 동안 있었던 오닌의 난으로 교토는 황폐화 되었으며 수많은 사찰과 집들이 불탄다. 쇼군의 권위는 실추되고 쇼군의 세력이 유명무실해지면서, 무로마치 막부는 교토만을 지배하는 일개 지방 정권으로 전락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다이묘나 쇼군이 되겠다며 들고 일어나, 무로마치 막부 후기 잘게 쪼개진 수많은 세력들 간의 크고 작은 전쟁이 끊이지 않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가 전개된다. 약 100여 년 동안 혼란한 슈고다이묘들 간의 세력다툼의 각축전이 벌어지고, 세력들 간의 전투가 반복되는 전란의 시대인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겪은 뒤 무로마치 막부는 결국 멸망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막부의 권위는 크게 실추되었고, 이를 틈타 지방에서는 막부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자치권을 행사하는 이른바 전국대명(戦国大名)들이 나타난다. 응인의 난 이후 1573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 의해 15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照)가 추방되면서 무로마치막부시대가 막을 내릴 때까지, 쇼군은 상징적인 존재로서 유력 대명(大名)들에게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존재에 불과하였다.
일반적으로 1467년 발발한 응인의 난 이후부터 오다 노부나가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해 천하가 통일되는 1590년 무렵까지의 약 120여 년간을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한다. 막부의 실질적 질서유지 능력이 상실된 상황에서, 각지의 전국대명들은 자신들의 이권수호를 위해 스스로의 세력을 확장시켜 갔고, 그 과정에서 거의 항시적으로 세력들 간의 상호전투가 반복되는 그야말로 상잔의 전란시대였다. (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3. 가마쿠라막부의 몰락에서 전국시대의 도래까지.)
1) 장원제도莊園制度의 붕괴와 관승화官僧化
무로마치 막부는 농민과 지방무사들을 통제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시카가[足利] 가문 일족이나 유력 무사들을 슈고[守護]로 임명한다. 무사들을 관리하는 지방관인 슈고의 지위는 세습되었고, 영지 지배권이 강화되면서 슈고 다이묘[守護大名]가 등장하게 되었다. 장원莊園을 관리하고 통제하게 되면서 기존의 장원제도莊園制度는 점차 붕괴되었고, 장원제도에 경제 기반을 두고 있던 나라나 교토의 사찰들은 곤란을 겪게 된다.
원구2년(元龜:1571)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에게 비예산이 화공을 당한 곳은 구불교의 대사원 세력이 새로운 무가의 무력에 의해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지만, 이미 그 이전부터 구불교 교단의 사회적 권위는 쇠퇴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 장원제가 붕괴되면서 궁핍해지고, 이를 기반으로 열렸던 법회나 논의가 뜸해지고 그 결과 교학도 쇠퇴하게 된다. 무의미하게 옛 형식을 지키는 상황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천기용지川崎庸之·입원일남笠原一男 지음, 계환스님 옮김,『일본불교사』p. 330.)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나타난 것이 가지기도加持祈禱이다. 가지기도는 병이나 재난, 부정 따위를 면하기 위해 신불神佛 들에게 드리는 기도祈禱다. 이것이 유행하면서 불교계는 밀교화密敎化하는 경향을 보였다. 15세기 중엽이후로 일본은 이른바 전국시대戰國時代로 들어가게 되고 불교계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는 경향을 보인다.
불교계 교단들은 이러한 전란의 시대 속에서도 착실히 포교활동 계속한다. 그 결과 각각의 교세가 지역적으로는 물론 신분적으로도 크게 확산된다. 특히, 각각의 교단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교의와는 별도로 신불습합적인 민간신앙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상례(喪禮)나 추선공양(追善供養) 등 친서민적 불교의례를 통해 민중들의 삶속으로 보다 깊숙이 침투해 간다는 것이 이시기 포교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5.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불교, “전란에 권익 지키려 무장한 일본 불교도”.)
교학적으로 무로마치 시대 불교는 뚜렷한 특성이 없는 이른바 가마쿠라 불교의 연장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가마쿠라 시대를 대표하는 둔세승 불교가 사회적 정치적으로 정착되어 가는 시기이다. 신불교의 가르침이 정치 체제에 의해 받아들여지면서 임제종 선사들은 막부와 결탁하여 관료화하는 관승화官僧化가 이루어진다. 남송南宋의 오산십찰五山十刹 제도를 본뜬 이른바 5산10찰五山十刹을 지정되었는데, 문제는 이들 사찰이 모두 임제종 종단에 속했다는 것이다. 헤이안 시대 유입된 선종을 무사 집단들이 신봉했기 때문이다.
5산10찰의 선정과 주지 임면권을 쇼군이 행사하게 되면서 정치권력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게 되었고 불교를 통제하는 수단이 되었다. 오산五山 아래 십찰十刹이 있고 십찰 아래 제산諸山을 두는 등 등급을 매겨 선종 사찰들을 통제하였다. 막부의 외호를 받은 이가 이들 관사官寺의 주지가 되었다. 무로마치 막부와 결탁한 관승官僧이 등장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면 이를 계기로 임제종 임제선臨濟禪이 귀족들과 무사들 사이에 더욱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24류의 일본의 임제선도, 오늘날 남아있는 것은 다만 ‘대응파(大應派)’라고 하는 하나의 유파뿐으로, 나머지는 모두 도쿠가와 시대에 없어져버리고 만 것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대부분의 선승은 가마쿠라 ․ 무로마치시대에 막부의 두터운 외호를 받아, 송나라의 오산(五山)을 모방하여 개창된 이른바 ‘오산의 관사(官寺)’에 주지로써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선림의 생활이 점차로 문화적인 공간이 되어, 가장 중시되어야 할 좌선수행이 경시되어 선승으로써의 힘이 약해져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응파(대응국사(南浦紹明. 1235-1308)의 선종은, 대등(大燈)국사(종봉묘초 (宗峰妙超), 1282-1337), 무상대사(관산혜현(關山慧玄), 1277-1360)의 계보로 확실히 전수되어, 후에 도쿠가와 시대 중기에 이 대응파에서 백은혜학(白隱慧鶴), 1685 -1768)이 나와 독특한 공안선을 확립하고, 이것이 오늘날의 일본 임제선이 되어 발전한 것이다. (니시무라 에신(西村惠信), 일본 하나조노대학 명예교수, 선문화연구소소장「일본 간화선의 전통과 변용(日本看話禪伝統と変容)」.)
2) 선禪 문화의 일본유입
선禪 불교가 본격적으로 일본에 유입된 것은 임제종 에이사이[榮西, 1141∼1215]와 조동종 도겐[道元, 1200∼1253]에 의해서이다. 이후 선불교와 선禪문화의 유입은 계속되는데, 특히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전반 중국 출신 선승들에 의해 직접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들 선종 관련 승려들은 대륙문화의 수입과 보급의 창구와도 같은 역할을 하였으며, 일본 선문화의 기초를 마련한 인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에이사이와 도겐 이후에도 대륙으로부터의 선문화 유입은 계속되는데, 특히 13세기 중반부터 14세기 전반에 걸쳐 중국출신 선승들에 의한 유입과 이후 명나라와의 감합(勘合)무역을 통한 유입이 주목된다. 전자는 막부의 최고 권력자나 입송구법승(入宋求法僧)의 초청에 의해 중국의 선승들이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선문화를 보급한 경우인데, 대표적인 예가 난계도륭(蘭溪道隆, 1213∼1278), 올암보녕(兀菴普寧, 1197∼1276), 동명혜일(東明慧日, 1272∼1340) 등이다. (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4.선(禪)문화의 융성, 명-일 조공무역 선승이 주도…다도·미술·정원 등 대중화.)
그들 중 임제종 송원파松源派 란케이 도류[蘭溪道隆, 1213∼1278]는 남송의 허당 지우(虚堂智愚 1185~1269) 계열로 1246년 일본에 와 당시 막부의 최고 실력자였던 호조 토키요리[北条時頼, 1227∼1263]의 후원으로 선종사찰 겐초지[建長寺]를 가마쿠라에 개산開山하였다. 송원파松源派는 임제종 양기파楊岐派 중 대혜파(大慧宗杲), 호구파(虎丘紹隆), 송원파(松源崇岳), 파암파(破庵祖先) 등 5개 부파 중 하나이다.
또 파암파破庵派 곳탄 후네이[兀菴普寧, 1197~1276]는 1260년 토후쿠지[東福寺]를 개산한 엔니[圓爾, 1202∼1280]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와 역시 호조 토키요리의 요청으로 난계도륭에 이어 건장사建長寺 제2대 주지가 되었다. 잇산 이치네이[一山一寧, 1247~1317] 역시 원元의 사자使者로 1299년 일본으로 와, 조정과 막부의 두터운 신임을 받고 건장사, 엔카쿠지[圓覺寺], 난젠지[南禅寺]의 주지를 지낸다.
조동종 선사 도우묘 에니치[東明慧日, 1272∼1340]는 1309년 가마쿠라막부 제9대 호조 사다도키[北条貞時, 1272∼1311]의 초청으로 일본으로 와, 조동종 굉지파宏智派의 법을 전한다. 그는 원각사圓覺寺와 건장사의 주지를 역임하였다.
이후 선禪문화의 유입은 명나라와의 감합勘合무역에서 두드러진다. 감합무역이란 중국과 주변국들 간에 이루어진 일종의 무역으로, 중국의 황제에게 종속의 표시로 공물貢物을 바치고 그 반대급부로 하사품下賜品 내지 회사품回賜品을 받는 이른바 조공무역朝貢貿易이다. 조공무역이라고는 하지만 겉으로는 조공의 형식을 취하면서도 실제로는 서로 물품을 매매하는 말 그대로 무역이다.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에 있어서 조공은 본래의 종속적 의미와는 상관없이 국가 대 국가로서의 위치와 관계를 확정짓는 외교外交이면서 주변국들에게 많은 경제적 이익을 주었다.
무로마치막부의 경제적 기반은 무엇보다도 명나라와의 감합무역(勘合貿易)을 통한 이익이었다. 명나라와 일본과의 무역은 1401년 무로마치막부의 제3대 쇼군이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足利義満)가 스스로를 일본국왕이라고 명기한 국서와 함께 명나라 황제에게 사신을 보내어 신하의 예를 취함으로써 1404년부터 시작되었다.
감합무역이라는 말은 해적집단인 왜구(倭寇)와 일본 무역선과의 구별을 위해 명나라에서 교부된 감합(勘合)의 지참이 의무시된 것에서 유래한다. 감합무역은 이른바 조공무역이었다. 조공을 바치고 그 답례품을 가지고 돌아오는 사신과 함께 동행한 상인들에 의해 행해지는 무역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는 명나라에 전하는 국서의 작성 및 감수는 물론, 사신단의 대표인 견명사(遣明使)에 선종의 승려들이 임명되었던 것이다. 당시 선종은 전대부터 막부의 대륙문물 수입을 담당하며 대륙의 사정에 밝았고, 중국출신 선승이나 입송구법승의 영향으로 중국어 및 중국고전, 시문 등에 능통한 인재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견명사로 파견된 이들 선승들에 의해 대륙의 선문화유입이 계속되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4.선(禪)문화의 융성, 명-일 조공무역 선승이 주도…다도·미술·정원 등 대중화.)
1404년부터 150여 년간 지속된 명과 일본 막부 사이의 감합무역은 선진 문물을 배우는 창구가 되었으며, 종교, 사회, 문화, 정치 등 다양한 영역에서 큰 영향을 미친다. 특히 회화에서는 셋슈[雪舟]라는 화승의 등장으로 종래의 중국선종화의 모방에서 탈피한 일본수묵화의 완성이 이루어지고, 그 외 다도茶道, 화도[生け花, 꽃꽂이], 노가쿠[能樂] 등 독특한 일본 문화로 발전한다. 문학, 건축, 회화, 다도, 예능, 음식 등 일본문화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3) 일본 대표하는 무로마치[室町] 문화文化
가마쿠라 시대는 정치적 중심지가 가마쿠라였기 때문에, 일본의 문화적 중심 또한 교토와 가마쿠라로 분리된 상황이었다. 천황의 어소御所는 교토에 있었고, 막부는 가마쿠라에 있었기 때문에, 천황가天皇家와 귀족들의 공가문화公家文化는 교토를 중심으로, 무사들의 무가문화武家文化는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존재하였다. 그러나 무로마치 시대는 막부가 교토에 개설됨으로써 공가公家와 무가武家, 두 문화는 어쩔 수없이 만나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통합의 길을 가게 된다.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 1358~1408] 집권기에는 남북조의 통일이 실현되어 막부가 안정되었고, 명明과의 수교가 재개되어 대륙문화가 유입되기 시작한다. 공가와 무가 문화에 중국에서 수입된 대륙문화까지 뒤섞이고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왕실과 귀족의 공가公家, 막부의 무가武家, 그리고 선승들의 불가佛家(禪家) 문화가 융합되면서 세 개의 문화가 조화를 이루며 발전하는 이른바 무로마치[室町] 문화가 꽃피게 된다.
무로마치 문화는 기타야마[北山] 문화와 히가시야마[東山] 문화로 나누어진다. 북산北山 문화는 교토 북쪽 기타야마에 세워진 긴카쿠지[金閣寺, 임제종 로쿠온지[鹿苑寺]의 다른 이름]를 대표로 하는 문화이고, 동산東山 문화는 동쪽 히가시야마에 세워진 긴카쿠지[銀閣寺, 정식 명칭은 히가시야마지쇼지[東山慈照寺]이지만 보통 지쇼지[慈照寺]라 부른다]를 대표로 한다.
금각사金閣寺가 북산北山문화의 상징인 반면 은각사銀閣寺는 동산東山문화의 상징으로 대비되지만, 두 사찰은 동시대에 조성된 것은 아니다. 금각사는 무로마치 막부 3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미쓰[足利義滿]가, 은각사는 그의 손자인 8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마사[足利義政, 1436~1490]가 세운 것으로 약 50년의 시간 차이가 난다. 시간차를 두고 무로마치 문화의 중심이 북산문화에서 동산문화로 전환되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동산문화와 북산문화는 모두 무가武家를 중심으로 공가公家와 선가禪家가 결합된 형태形態로 공통점이 많다. 그러나 금각사가 북산문화의 특징인 귀족적 건축양식으로 화려한 반면 은각사는 선종禪宗 선사禪寺의 분위기로 선적인 안정감을 준다. 선종이 유행하면서 반세기의 시간만큼 선가문화가 접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북산문화와 동산문화의 차이를 유홍준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북산문화가 공가의 우아한 품위를 받아들였다면, 동산문화에서는 선가의 정신적 가치가 한껏 고양되었다. 그래서 금각사에 축제의 분위기 같은 화려함이 있었다면, 은각사에서는 참선을 유도하는 조용한 기품을 만나게 된다.
요시마사[足利義政]는 오닌[應仁]의 난을 전후하여 막부의 권위가 실추되고 세상이 불안정해지자, 교토의 동쪽에 할아버지인 요시미쓰가 세운 금각사를 본떠 히가시야마 산장을 세우고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곳이 지금의 은각사로, 당시 유행하던 선禪 정신에 입각해 소박함과 고요함이 강조되었던 것이다. 일본 정신의 한 축으로 회자膾炙되는 선禪이 이때는 이미 무르익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 전통적 귀족 문화와 무가 문화, 그리고 대륙 문화 및 서민 문화가 융합된 문화가 꽃을 피우는데, 일본 건축양식의 모델인 서원창書院窓 서원정書院庭이 있는 쇼인즈쿠리[書院造] 양식의 건축이 나타나고,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가 조성한 텐류지[天龍寺] 정원 등 수많은 가레산스이[枯山水] 정원들이 조영되었으며, 꽃꽂이, 다도 등 현재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가 이때 완성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고로 금각사에 금박이 입혀져 있는 것처럼 은각사에는 은박이 입혀져 있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는데, 그런 것은 아니고 17세기 어느 때부터 금각사와 대비해 은각사라는 애칭으로 불리게 되면서 오늘에 이른 것이다.
4) 임제종臨濟宗 선승禪僧들의 활약
무소 소세키[夢窓疎石, 1275~1351]
무소 소세키[夢窓疎石]는 남북조 시대 임제선을 크게 부흥시킨 선승으로, 고다이고 천황과 쇼군인 아시카가 다카우지, 그리고 그의 동생 다다요시의 귀의를 받았던 막부의 관승이다. 처음에는 천태종天台宗, 진언종真言宗 등에서 배웠으나 후에 선문禅門에 들어, 임제종을 전국으로 확산시키는데 공헌하였다. 가마쿠라 시대 말기에서 무로마치 시대 초기에 걸쳐 활약했는데, 남북조로 갈려 있는 상황에서 양측 모두에게 존경을 받았다. 천황들로부터 일곱 번에 걸친 국사國師 칭호를 하사받아 시치초노테이시[七朝の帝師], 칠조제사七朝帝師로도 불린다.
이 시기에 등장하는 정원들은 이른바 가레산스이[枯山水]로 불리는 석정石庭으로, 연못이나 계곡 등을 물이 없이 돌과 모래로만 표현하는 것이 특색이다. 무소 소세키는 오늘날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는 이들 전원들을 만든 것으로 유명한데, 교토 이끼 사원 사이호지[西芳寺] (이끼로 덮여 있어 고케데라[苔寺]로 통칭), 덴류지[天龍寺]의 소겐지[曹源池], 다이토쿠지[大徳寺]의 료겐인[龍源院], 가마쿠라 즈이젠지[水前寺]의 조주엔[成趣園] 그리고 가쿠린보[覚林房]등을 설계하였다. 이외 에이호지[永保寺], 에린지[恵林寺] 등 사찰들을 개산開山하면서 오늘날 일본을 대표하는 정원들을 만들었다.
문학적 측면에서는 이른바 오산선종(五山禪宗)의 선승들을 주축으로 중국풍의 한시문(五山文學)이 크게 유행하였고, 회화에서도 중국의 선종화의 영향을 받아, 여졸(如拙), 주문(周文) 등의 걸출한 화승(畵僧)이 등장한다. 이들의 화풍은 중국풍의 선종화를 충실히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본정원도 이시기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는데, 히가시야마문화의 대표적인 정원은 무소 소세키(夢窓疎石)에 의해 만들어진 사이호지(西芳寺)정원과 텐류지(天龍寺)정원 등이 유명하다.
(중략)
전쟁 없이 남북조의 통일을 이끈 주역이자, 많은 정원을 만들기도 한 임제종 승려 무소 소세키(夢窓疎石)는 자신의 저서 《몽중문답집(夢中問答集)》에서 “정원을 만드는 것은 단순히 주거를 꾸미고, 진기한 것을 가지고 놀기 위함이 아니다. 선(禪)수행자는 산하대지(山河大地), 초목와석(草木瓦石)을 자신의 본분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산수(山水)에는 득실(得失)이 없고, 득실은 사람의 마음에 있다”라고 하였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4.선(禪)문화의 융성, 명-일 조공무역 선승이 주도…다도·미술·정원 등 대중화.)
잇큐 소준[一休宗純, 1394∼1481]
잇큐 소준[一休宗純]은 무애행으로 유명한 임제종 선승이자 시인이다. 일본 남북조 시대가 종말을 구하고 2년 후인 1394년 고코마쓰[後小松, 재위: 1382~1412] 천황의 아들로 태어났다. 6살 어린 나이에 정치적인 이유로 천황가에 의해 교토 안코쿠지[安國寺]로 보내진다. 한시漢詩 짓는 법을 배우고 불교 교리를 공부하다가 17세 되던 해인 1410년, 사이곤지[西金寺] 겐오 소이[謙翁宗為]의 제자가 되어 참선을 배우고 계명을 소준[宗純]으로 바꾼다. 5년간 선을 배우고 스승인 겐오가 세상을 떠나자, 22세 때인 1415년 임하林下인 대덕사大德寺파 카소 소돈[華叟宗曇, 1352~1428]의 제자로 들어간다.
『무문관』15칙「洞山三頓の棒」에 대해 ‘有ろじより 無ろじへ帰る 一休み 雨ふらば降れ 風ふかば吹け’, 즉 번뇌에서(有ろじ) 벗어나 깨달음으로(無ろじ) 돌아가는, 잠깐 쉬는 이 순간, 비 오면 비 맞고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라고 대답하여, 스승인 화수종담華叟宗曇 선사로부터 ‘크게 한 번 쉰다’는 뜻의 잇큐[一休]라는 도호道號를 얻는다. 그로부터 2년 뒤인 오오나가[応永] 27년, 1420년 어느 밤, 까마귀 의 울음소리를 듣고 마침내 대오大悟했다고 한다.
다시 용맹정진하기 2년 뒤의 어느 여름 밤, 잇꾸우는 근처 호반에 떠 있는 작은 배 가운데에서 좌선삼매에 들어 있었다. 그때 어디에서인지 까마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까마귀 소리를 듣는 순간, 잇뀨우는 마침내 대오하였다.
「십년 이전, 我執分別에 어리석었던 마음
노여움과 오만이 이제 드러나도다.
따마귀가 웃는다. 티끌을 벗어난 羅漢의 깨달음.
밝게 빛나는 햇살 속에 아름다운 面目이 노래 부른다.」
잇꾸우는 바로 가소오에게 달려가 이 시와 함께 자신의 깨달은 바를 말하였다. 그러나 가소오는,
「이것은 소승(小乘)의 나한(羅漢)의 경지일 뿐, 진정으로 깨달은 선승의 경지가 아니다」
라고 하면서 차갑게 내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잇꾸우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것이 나한의 경지라면 이것으로 족합니다. 저는 결코 선승의 경지를 바라지 않습니다.」
잇꾸우는 당당했다. 누구의 어떤 말에도 넘어가지 않는 내면의 확신이 있었다. 그러자 가소오는 미소를 띠며,
「그대야말로 진정한 선승이다.」
라고 칭찬하면서 잇뀨우에게 인가증(認可證)을 주었다. 그러나 잇꾸우는 그 인가증을 거들떠 보지도 않고 가소오의 방을 나와 버렸다. (이호준 엮음,『일본의 십대선사』pp. 97~98.)
잇큐는 인가증 받기를 거부하였는데, 당시 인가증을 남발하는 일본 선종에 대한 반발이었다고 한다. 권력자에게 굽실거리는 타락한 불교계를 비판하는 시를 짓는 등 자기가 속한 오산五山파 선승들의 허식과 위선을 혐오하며 유행遊行하였다. 그는 빈부나 귀천, 직업, 신분에 차별이 없는 사민평등士民平等의 ‘서민선庶民禪’을 제창하며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잇큐는 또 남송 허당지우(虛堂智偶: 1185∼1269)로부터 난포조묘[(南浦紹明: 1235∼1308]를 거쳐 잇큐로 이어지는 일본 다도의 대가이기도 하다. 무라타 쥬코우[村田珠光, 1423∼1502]를 포함한 히가시야마[東山] 문화 인사들이 잇큐의 영향을 받았는데, 일본 다도茶道의 시조로 불리는 무라타 쥬코우는 잇큐에게 다도와 선을 배원다. 무라타는 차선일미茶禪一味를 설파하였고, 조용하게 한 잔의 차를 맛보는 와비차[わび茶]를 시작한 인물이다.
일본의 다도는 크게 두 축으로 나뉜다. 남송 말년 일본 다도의 비조(鼻祖)인 에이사이(榮西·1141∼1215) 선사가 송나라로부터 차씨를 가져와 세후리산(背振山)에 심은 것이 한 갈래다. 에이사이는 “차란 말세에는 양생의 선약(仙藥)이요, 사람으로 누려야 할 목숨을 늘리는 기묘한 술법이다”고 말했는데, 이때만 해도 차는 양생의 차원에서 시음되었다.
다른 하나는 난포쇼묘(南浦紹明·1235∼1308)에서 잇큐소준(一休宗純·1394∼1481)으로 이어지는 경산다연(徑山茶宴·차 탁자와 茶典)을 들 수 있다. 난포쇼묘는 중국 절강성 항주 여항(余杭)의 경산사(徑山寺)로 들어가 경산다연을 일본의 소후쿠지(崇福寺)에 전했다.
일본다도는 잇큐소준, 무라타 주코(村田珠光·1433∼1502), 다케노 조우오우(武野紹鷗·1502∼1555), 센리큐(千利休·1522∼1591)로 이어지는 선에서 완성된다. 일본 다도는 이들 가문에 전해 내려오는 ‘다선일미’(茶禪一味)와 ‘화경청적’(和敬淸寂)으로 요약된다. 일본 다도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불교를 바탕으로 전개되었으며, 다도의 대가들은 모두 승려였다. ([박정진의 차맥] (7) 다도는 한국의 브랜드가 될 수 없다 (2) 일본 다도는 사무라이 다도, ⓒ 세계일보 & Segye.com,)
분메이[文明] 5년(1473년) 교토를 불태운 오닌의 난에 의해 다이토쿠지[大德寺] 역시 불탔다. 1474년 고츠치미카도[後土御門] 천황의 칙명을 받은 잇큐는 일시적으로 대덕사大德寺 주지(47대)를 맡아 대덕사를 부흥시킨다.
선의 대중화에 힘 쓴 잇큐는 술을 마시고 여색 또한 마다하지 않았는데, 70세가 넘은 나이에 젊고 아리따운 눈 먼 여인(森侍者)을 만나 88세에 입적할 때까지 옆에 두었다. 그녀를 향해 쓴 여러 편의 연시가 시집『광운집狂雲集』(잇큐의 호가 광운자狂雲子)에 실려 있는데, 그중 난세시亂世詩가 유명하다.
十年花下理芳盟(십년화하리방맹) 십 년 동안 꽃 아래서 아름다운 약속 잘 지켰으니
一段風流無限情(일단풍류무한정) 한 가닥 풍류는 무한한 정이로다.
惜別枕豆兒女膝(석별침두아여슬) 그녀 무릎에 머리 베고 이별을 아쉬워하며
夜深雲雨約三生(야심운우약삼생) 깊은 밤 운우 속 삼생을 기약하네.
잇큐와 교분이 있던 인물 중에는 렌뇨[蓮如, 1415~1499]가 있었다. 렌뇨[蓮如]는 신란[親鸞]의 법을 이은 정토진종靜土眞宗의 승려였다. 신란이 죽자 정토진종은 본원사파本願寺派와 전수사파專修寺派로 갈라지는데, 본원사파를 장악한 이가 렌뇨다. 잇큐와 교분이 있던 인물 중에는 렌뇨[蓮如, 1415~1499]가 있었다. 렌뇨[蓮如]는 신란[親鸞]의 법을 이은 정토진종靜土眞宗의 승려였다. 신란이 죽자 정토진종은 신란의 혈맥을 잇는 혼간지파[本願寺派]와 이후 오타니파[大谷派], 다카다파[高田派], 붓코지파[佛光寺派], 산몬토파[三門徒派] 등등으로 갈라지는데, 본원사파를 장악한 이가 렌뇨다.
렌뇨는 선승은 아니었고 잇뀨우보다 스물 한 살이나 어렸으나 원래 인품이 호방하고 대인의 풍모가 있어 잇뀨우와는 매우 절친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한 번은 잇뀨우가 렌뇨를 찾아 本願寺로 갔는데 마침 렌뇨가 부재중이었다. 렌뇨의 방에 들어가 기다리고 있던 잇뀨우는 좀처럼 그가 돌아오지 않자 불단에 모셔 놓은 아미타불상을 불단에서 끌어내려 베개로 삼고 누워 잠이 들어 버렸다. 이윽고 렌뇨가 돌아와 이 모습을 보더니 빙긋이 웃으며 잇뀨우를 흔들어 깨웠다.
「스님, 스님, 제 쌀통을 뒤집어엎어서야 곤란하지 않습니까?」
「어어, 참 그렇군.」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며 껄껄 웃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유명한 화가로부터 말을 그린 그림을 받아서 잇뀨우에게 찬(讚)을 청했다. 그러자 잇뀨우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말인 것 같다.」
라고 써 주었다. 그 사람은 어안이 벙벙해졌다가 화를 내고 돌아갔는데, 그것을 다시 렌뇨에게 가지고 가서 어떻게든 잘 고쳐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랬더니 렌뇨는 잇뀨우의 글 다음에 역시 망설이지 않고,
「그런 것 같다.」
라고 썼다. 그 사람, 마침내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러나 그 그림이 점점 유명해져 나중에는 천하의 명보(名寶)가 되었다 한다. (이호준 엮음,『일본의 십대선사』pp. 105~106.)
참고로 일제 강점기 우리나라 경성, 부산, 인천, 목포 등지에 일본 동본원사가 들어서 있었다. 지금은 사찰에서 교회로 바뀌었다가 다시 문화재로 등록된(등록문화재 제340호) 동본원사 목포별원 만이 남아 있다. 일본은 1897년 10월6일 목포에 일본 영사관을 개설하였고, 1898년 4월 동본원사 목포별원이 개원한다. 정식명칭은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真宗 大谷派 東本願寺’로 목포에 들어선 일본의 첫 불교사원이다. 불교를 전한다는 명목 하에 침략의 전진 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고 하겠다. 동본원사 목포별원은 목포심상고등학교 설립인가를 받아, 목포 내에 최초 일본인 소학교로 정식 운영되기도 하였다.
해방 이후 정광사定光寺에서 관리하게 되면서, 1946년 백양사 주지 만암 송종헌 대종사(曼庵 大宗師: 1876∼1957)의 주도 하에 전남 지역 5개 거대 사찰, 백양사, 송광사, 화엄사, 대흥사, 선암사 등이 합동으로 학교법인 정광학원을 설립, 불교 종립 정광중학교의 출발지가 되었다. 1946년 당시에는 정광중학교만 개교하였으나 1951년 10월 10일에는 정광고등학교도 개교하였다(지금은 광주광역시로 이전).
1957년 목포중앙교회에서 사들여 2007년까지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한때는 주차장 부지 확보를 위해 철거하여 하였으나 시민 단체 등의 노력으로 보존되었다. 1980년 5‧18 민주화 운동과 1987년 6‧10 민주 항쟁 당시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인 장소이자 치열한 현장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2010년 1월 19일에 오거리문화센터로 새롭게 개관하여 지금은 시민을 위한 각종 문화행사 및 전시회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5) 정토진종靜土眞宗의 농민봉기 잇코잇키[一向一揆]
15세기 말에서 16세기 말까지의 약 100여 년간, 무로마치 막부는 내부 갈등으로 인해 실질적인 통제력을 상실하였고, 지방에서는 해당지역의 자치권을 확보한 이른바 센고쿠 다이묘[戦国大名]들이 나타나 세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혼란한 전국시대에도 불교계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 나름의 방식으로 포교활동을 계속하였다.
불교계 교단들은 이러한 전란의 시대 속에서도 착실히 포교활동 계속한다. 그 결과 각각의 교세가 지역적으로는 물론 신분적으로도 크게 확산된다. 특히, 각각의 교단들이 자신들의 전통적인 교의와는 별도로 신불습합적인 민간신앙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고, 상례(喪禮)나 추선공양(追善供養) 등 친서민적 불교의례를 통해 민중들의 삶속으로 보다 깊숙이 침투해 간다는 것이 이시기 포교의 일반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교세의 확장이라는 흐름과 더불어 주목해야할 불교계의 특징은 이른바 잇코잇키(一向一揆)와 홋케잇키(法華一揆)라고 불리는 불교신도들의 반체제운동이다. 잇키(一揆)는 막부나 영주의 폭정에 항거하여 일어난 일종의 민란이라고 할 수 있는데, 정토진종 혼간지파(本願寺派)의 승려와 신도들이 주축이 되어 일어난 것이 잇코잇키(一向一揆)이고, 교토의 법화종 승려와 신도들이 주축이 된 것이 홋케잇키(法華一揆)이다. ([연재] 김춘호의 <일본 불교문화 강좌> 25.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불교, “전란에 권익 지키려 무장한 일본 불교도”.)
신란[親鸞]의 법을 이은 렌뇨는 정토진종靜土眞宗을 크게 일으키는데, 곧 누구나 행하기 쉬운 ‘칭명염불稱名念佛’을 제창, 농민과 수공업자들을 끌어들인다. 일본재래의 조상숭배 신앙과 습합한 정토진종의 세력이 점점 커져, 정토진종 혼간지 교단은 무수한 농민 봉기 잇코잇키[一向一揆]를 이끌었으며, 다이묘를 제거하여 봉건영주나 다름없게 되었다. 카가노쿠니[加賀国]을 멸망시킨 카가 잇코잇키 사건은 전국 다이묘들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를 경계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 1534~1582]가 그들을 공격하게 되는데, 천하 통일을 꿈꾸던 노부나가는 정토진종 뿐만 아니라, 연이어 비예산 연력사를 공격해 연력사를 불태우고 당시 막강했던 불교계 군사력을 와해시킨다. 뒤를 이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6~1598] 역시 당시 새로운 8종, 즉 진언종, 천태종, 율종, 오산종, 일련종, 정토종, 유행종遊行宗, 일향종一向宗(정토진종)을 공인하면서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하였다.
織田信長의 天下統一사업이 진척되면서 1571년의 比叡山 火力공격, 1580년의 一向宗의 顯如의 大阪石山城의 퇴거에 이어, 豊臣秀吉이 1585년 根來를 격멸하고 高野山을 굴복시킨 것을 최후로 하여 佛敎寺院은 모두가 무장을 해제당하고, 어떤 곳은 절멸하도록 까지 되었다. (도변조굉渡辺照宏(와다나베 쇼오꼬오) 저著, 이영자李永子 역譯,『일본불교日本佛敎』 p. 143.)
6) 기독교基督敎 금지령
당시 특기할 만한 사항은 그리스도교, 즉 기독교基督敎의 유입이다. 1549년 7월 예수회 창립 멤버이자 가톨릭의 성인 프란치스코 하비에르(Francis Xavier, 1506~1552)가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하여 기독교를 전파한 것이다. 처음에는 무역을 통한 이윤 추구와 더불어 기독교를 통해 막강한 불교세력을 누르려는 오다 노부나가 등 다이묘들의 보호로 그 세력이 커진다. 그러나 그 신도가 늘어나고, 나가사키[長崎]가 기독교 교회의 영지가 되는 것을 두려워한 히데요시에 의해 기독교 금지령이 내려진다. 에도막부 역시 기독교 금교 정책을 이어받아 1612년 금교령을 내린다.
1641년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1543~1616]가 극단적인 쇄국정책을 펴는 바람에 선교사와 일본인 신자 사이에 연결이 끊어진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의 종교적 색깔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 기존 종교문화 전통 속으로 숨을 수밖에 없었는데, 불교나 신도 같은 종교 언어로 그리스도교 신앙을 표현하던 이들을 ‘잠복 그리스도교도, 가쿠레 기리시단[潜伏切支丹]라고 부른다.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 지난 2012년 3월 8일 방영된 KBS 역사스페셜,「임진왜란 포로 빈센트 권, 일본서 화형당한 이유는?」이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천주교 신자는 1784년 세례를 받은 이승훈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보다 무려 200년가량 앞선 시기에 천주교 신자가 된 조선인이 있다. 1617~1632년에 일본에서 순교한 사람들을 작성한 ‘205인 순교복자 명단’, 이 명단엔 ‘빈센트 카운(권)’이라는 이름의 조선인이 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기록에 의하면 빈센트 권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잡혀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를 일본으로 데려간 사람은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 그는 천주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으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이었고, 세스페데스의 도움으로 빈센트 권은 신학교에 입학해 선교사 수업을 받는다.
당시 일본엔 빈센트 권처럼 천주교를 믿는 조선인이 5천 명에서 1만 명가량 있었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신부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다. 신부들은 일본 내 조선인 노예 매매 사실을 알고 일본인 신도 중 노예 매매를 하는 자들은 파문에 처할 것이라는 강력한 결의를 한다. 그들은 기금을 모아 조선인 노예들을 사서 풀어주기도 했다. 정신적인 구원을 뛰어넘어 실천적 행동에 큰 감명을 받은 조선 포로들은 앞 다퉈 천주교 신자가 됐다.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2년 기리시탄 금지령을 발표한 이후 지속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다. 일본에서 자선과 포교에 매진하고 있던 빈센트 권 역시 시마바라에서 체포되어 니시사카 언덕에서 끝내 화형 당한다. (김효정 기자,「임진왜란 포로 빈센트 권, 일본서 화형당한 이유는?」부산일보, 2012년 3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