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에도시대
무로마찌시대는 장원제가 붕괴하고 嶺國制로 전환하는 시기였다. 권력을 장악한 지방 영주들은 영토내의 법질서 유지를 위해서 각각 分國法을 제정 하였다. 이분국법 에는 불교정책이 상당 부분을 차지했는데, 이것은 사실상 불교를 이용하여 嶺國을 지배하려는 영주들의 의도를 반영한 것이었다.
당시에 영토를 확장하여 마침내 무로마찌 막부를 멸망(1573)시킨 이가 織田信長 이다. 그는 전국을 제패하려는 목표에 가장 큰 방해세력인 불교교단을 무차별하게 짓밟았다. 사찰과 불상, 경전 등을 모두 불태우고 승속의 남녀노소를 닥치는 대로 죽이는등 그 잔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러나 모든 교단 가운데 그다지 무장하지 않았던 선종에게만은 탄압대신에 호의를 보였다. 또한 불교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기독교의 포교를 허락하기도 하였다. 그에 이어 세력을 잡은 이가 秀吉이다. 그는 불교교단이 무장화하는 원인 은 교단이 소유한 장원이라는 방대한 재산에 있음을 간파하였다.
그리하여 사찰토지를 모두 몰수한 다음 다시 분배하는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어서 그 는 기독교 유포를 금지하였다. 불교세력을 약화시킨 이상 기독교 세력이 더 욱 커지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였다. 반면에 불사를 일으키고 불교 교학을 장려하는 등 불교에 대한 회유책을 씀으로서 그의 천하통일의 권세를 과시하려 하였다.
秀吉이 죽은 후 통일정권의 주역으로서 에도(江戶)막부를 개창(1603)한 것은 家康이었다. 막부는 먼저 많은 사원법을 공포하였다. 그 중 천태종과 진언종에 관한 것이 가장 많고 다음으로는 정토종, 임제종, 조동종 및 일련종에 대한 것이었다. 전체적으로는 불법흥륭을 위하여 학문을 장려하고 출가생활규범과 자격 등 에 관하여 정해졌다. 이에 따라 각 宗의 사원은 법도를 바꾸고, 1665년에 이르러서는 모든 제도가 완비되고 더불어 `제종사원법도'가 공포되었다.
여기 에는 각 종단의 법식을 준수할 것과 본말사의 규정 존중, 신도들의 신앙자 유, 승려들의 도당 조직 금지, 사찰영역의 매매와 저당금지, 사제 관계 계약의 제한, 여성의 사찰내 숙식 금지 등이 공시되었다. 그후 1687년에는 가톨릭교의 금지, 宗門병경, 寺檀 관계 법도 등의 정책이 정해졌으며, 1722년에는 각 종단의 승려에 대한 書가 공포되었다.
그 내용 은 앞의 `제종사원법도'보다 훨신 상세한 것으로, 막부의 간섭이 더욱 심해 졌음을 알 수 있다. 막부의 사원법도에 의하여 本末寺의 조직이 더욱 확고 해졌다. 본사와 말사의 주종적 관계는 헤이안시대 이래로 있어왔다. 그러나 에도막부 하에서는 새로운 사찰건립의 금지와 더불어 각 종파의 본 산에 소속된 말사를 모두 보고하도록 함으로써 그 상하 결속구조를 확고히 하였다.
아울러 막부와 각 종단의 중개기구로서 觸頭制를 채용했다. 이는 막 부의 명령을 종단에 전달하는 역할과 함께 각 사찰의 사정을 막부에 알리는 기능을 담당하였다. 또한 촉두는 본산과 말사의 중개역할까지 담당하였다. 즉 종파내의 사원이 본산으로 서류신청을 하거나 본산에서 말사로 전달하는 일을 하였다.
나아가 말사의 주지적 임명 등에도 촉두의 품신과 직인이 필요할 정도의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다. 이런 제도 속에서 본사는 절대적 우위를 보장받았으며, 반면에 말사는 본사로부터 상납금 요구 등의 갖가지 압력을 받았다. 에도 막부의 불교정책 가운데 주목할 만한 것은 寺請제도이다.
이것은 기 독교 금지에 이어 가톨릭교 금지책의 일환으로, 천주교인이 아님을 증명하 는 문서를 절에 맡기는 것이었다. 사청제도는 1635년 무렵 전국적으로 행해 졌으며, 1671년에 이르러서는 서식이 통일되었다. 각자 이름과 宗 그리고 檀那寺(신도로 소속된 절)등을 적어 단나사 승려의 증명을 얻어서 장부로 만들었다가 마을마다 모아서 일괄적으로 매년 10월에 제출하였다.
또 결혼이나 사망등의 변동이 있을 때에도 단나사에서 그를 증명하는 문서 를 발행했다. 이 제도는 사실상 천주교 탄압이라는 명목 하에 사찰을 통하여 민중들을 장악하려는 뜻을 관찰시킨 것이었다. 동시에 사찰측에서는 절 과 신도와의 관계를 강화하는 절호의 기회였으며, 나아가 사찰은 점점 민중 에 대하여 권력을 행사하며 새로운 수탈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한편 막부는 민중 봉기의 정신적 지주가 되는 승려들을 관리하는 일환으로 학문을 장려하였다. 즉 승려들의 학문 정도에 따라 위계진급이나 주지직 또 는 교화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연히 불교학이 부흥 하고 각 종파에서는 전문연구기관이 곳곳에 세워지며 우수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반면에 비대해진 종단내에서 많은 논쟁과 대립, 분열도 일어났다. 정토진종 의 본원사가 동서로 분열되었으며, 고야산의 진언종도 학려방과 행인방의 대립이 있어서 결국은 막부의 개입으로 진정되었다. 수험도 또한 두 파로 대립하였다. 오래전부터 영험한 산을 거점으로 행해져온 수험도는 무로마찌 시대부터 진언종과 천태종의 교의를 끌어다 그 이론적 토대를 마련하였다.
에도시대에 이르러 각 지역의 산이 사찰과 막부의 통치하에 편제됨에 따라 수험도 도한 크게는 진언과 천태 계통의 두갈래로 대립하게 되어 결국은 정 치적인 규제를 받게 되었다. 종파 사이의 논쟁으로 가장 큰 것은 정토종과 진종사이에 일어난 宗名논쟁이었다.
眞宗은 옛부터 일향종, 문도종 또는 본 원사문도 등으로 불려져 일정한 호칭이 없었다. 따라서 종조 친란이 사용한 `정토진종'이란 말을 종명으로 삼고 싶다는 요 구가 있었다.(1773) 그러나 정토종에서 개조 법연이 이미 정토종을 정토진종 이라 부르고 있어서 종명에 혼란이 온다는 이유로 이의를 제기하였다.
결국 이것은 두 종파간의 항쟁으로 발전하여 명치 5년(1872)이 되어서야 매듭지 어졌다. 이 시대에 불교의 모든 종파가 부흥하였으나 유독 일련종의 不受不施派만 은 탄압을 면할 수 없었다. `불수불시'란 믿음이 없는 자에게는 보시를 받지도 않고 불법을 베풀지도 않는다는 일련종의 원칙이다.
일각에서는 그 대상 으로 왕후는 제외한다는 타협적 논리를 펼치기도 하였으나, 그 기본적인 입 장 때문에 일련종은 막부의 지속적인 탄압을 받았다. 따라서 자연히 염불 중심의신앙활동이 지하에서 행해지게 되었는데, 그것 을 `은둔염불'이라 한다. 막부의 학문 장려책에 따라 불교교학은 더욱 충실해졌으나 불교의 민중교화와 사회활동은 지조하였다.
서민들은 대부분 조상 신 숭배나 기복, 치병과 재앙방지를 구하는 수준에서 종교활동에 참여하였다. 열반회.관불회.우란분회같은 연중행사는 단지 오락적 행사로 변모해갔으며, 지장.약사.관음재일도 운수대통과 치병을 기원하는 것외에는 별다른 뜻이 없었다.
민중교화의 방편으로 사원에서 행해지던 講도 이시대에는 오락적 요소를 띤 지역적인 것으로서 주로 현세이익적 신앙 모임에 지나지 않았다. 막부의 종교정책하에서 제약과 동시에 비호받던 교단은 막부말기로 가면서 날로 비대해지고 승려들의 타락은 극으로 치닫게 된다.
이에 현실주의적 인간의 자아의식을 기반으로하는 국학자와 유학자들 사이에서 排佛論이 대두 하였다. 특히 국학자들은 불교는 현세를 예토라 하고 내세를 정토라 하며 神國을 부정한다고 비판하였다. 이러한 국수주의적 신도사상은 이후 메이지 유신의 논리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