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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도
지리가 가장 아름다운 경상도는 강원도 남쪽에 있으며 서쪽으로는 충청도. 전라도와 경계가 맞닿았다.
북쪽에는 태백산이 있는데 감여가의 말로는 하늘에 치솟은 수성형국(산봉우리의 모양이 굽은 듯한 것) 이라 한다.
태백산 왼쪽에서 나온 하나의 큰 지맥은 동해로 바싹 붙어 내려오다가 동래 바닷가에서 그쳤고, 오른쪽에서 나온 하나의 큰 지맥은 소백.작성.주흘. 희양 . 청화. 속리. 황악. 덕유. 지리 등 산이 된 다음, 남해가에서 그쳤는데 두 지맥 사이에 기름진 들판이 천 리이다.
황지는 천연적으로 된 못으로 태백산 상봉 밑에 있으며, 물이 산을 뚫고 흘러나온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내려와 예안에 이르고, 동쪽으로 굽어졌다가 다시 서쪽으로 흐르면서 안동남쪽을 둘러 흐른다. 용궁과 함창경계에 이르러 비로소 남쪽으로 굽어지며 낙동강이 된다. 낙동이란 것은 상주 동쪽이란 뜻이고, 강은 김해로 들어간다.
강이 온 도의 한복판을 가로질러서 강 동쪽은 좌도라 하고 강 서쪽은 우도라 한다.
두 지맥은 김해에서 크게 합쳐지고, 70개 고을의 물이 하나의 수구로 빠져 나가면서 큰 형국을 만들어 놓았다.
상고 적에 지역이 100리 되는 나라가 이 도 안에 매우 많았으나, 신라가 건국하면서 통일 되었다.
신라는 국운을 천 년 동안 누렸고 경주에 도읍하였는데, 바로 옛날에 일컫던 계림 군자국이다.
지금은 동경이라 하며 부윤을 두어 백성을 다스린다. 고을 관아는 태백산 왼쪽 지맥 한복판에 위치하여, 형가는 회룡고조(그 산에서 나온 지맥이 휘돌아 본디 산과 마주 대한 지세)하는 지형이라 한다. 터가 서북쪽을 향해 펼쳐졌으며, 그 터 안의 물은 동쪽으로 흐르면서 큰강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신라 시대의 반월성 . 포석정 . 괘릉 등 옛터가 있다.
신라는 영남 여러 나라를 다 차지하고, 또 고구려와 백제가 쇠망하는 틈을 엿보아 삼국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말엽에 여왕이 즉위하자 정치상의 모든 명령이 시행되지 않고, 불도를 너무 숭봉하여 사찰이 산골짜기마다 꽉 들어섰으며, 평민이 중이 되었다. 그러자 궁예는 고구려 지역을 차지하고 견훤도 백제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 고려 태조가 고구려 지역과 백제 지역을 통합하자, 신라 또한 땅을 바치고 통합되었다.
신라 때 북쪽은 대사막과 거란 때문에 길이 막혀, 오로지 뱃길로 당나라에 조공하였다. 오가는 관원의 행차가 길에 잇따랐고,명예와 문물은 중국을 본받아 제법 아름다웠다.
고려에서 아조까지 또 천 년인데 옛부터 지금까지 수천 년 동안 이 도 안에서 장상. 공경과 문장과 덕행이 있는 선비와 공을 세웟거나 절의를 세운 사람, 선도. 불도. 도교에 통한 사람 등이 많이 나와서, 이 도를 인재의 광이라 한다.
조선에 와서도 선조 이전에는 국정을 잡은 자들이 모두 이도 사람이고, 문묘에 종사된 사현 또한 이도 사람이었다.
그런데 인조가 율곡 이이, 우계 성혼, 백사 이항복의 문인 자제들과 어지러운 정국을 진정시킨 후부터는 경성에 여러 대를 살고 있는 집 사람들만 치우치게 등용하였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100년 동안에 영남 사람으로서 정경이 된 자가 두 사람, 아경이 네다섯 사람이고, 정승된 사람은 없어, 관직이 높다 하여도 3품이고 아래로는 고을 수령 정도였다.
그러나 옛날 선배가 남긴 풍습과 혜택이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아, 풍속이 예의와 문학을 숭상하며 지금도 과거에 많이 합격하는 것은 여러 지방에서 으뜸이다.
좌도는 땅이 메마르고 백성이 가난하여 비록 군색하게 살아도 문학하는 선비가 많다. 우도는 땅이 기름지고 백성이 부유하나 호사하기를 좋아하고 게을러서 문학에 힘쓰지 않아 훌륭하게 된 사람이 적은데, 이것은 대체적으로 비교한 것이다.
그러나 땅의 기름지고 메마름의 혹 섞여 있고 인재 또한 좌도, 우도에 섞여 나왔다.
예안. 안동. 순흥. 영천. 예천등의 고을은 이백의 남쪽에 위치하였는데 여기가 산이 알려준 복된 지역이다.
태백산 밑은 산이 평평하고 들이 넓어 명랑하고 수려하며, 흰 모래와 단단한 토질로 기색이 완연히 한양과 같다.
예안은 퇴계 이황의 고향이며, 안동은 서애 유성룡의 고향이다. 고을 사람들이 이 두 분이 살던 곳에다 각각 사당을 짓고 제사한다. 그러므고 서로 가까운 이 다섯 고을에 사대부가 가장 많으며, 모두 퇴계와 서애 문하생의 자손들이다. 의리를 밝히고 도학을 중히 여겨, 비록 외딴 마을, 쇠잔한 동리라도 문득 글 읽는 소리가 들리며, 해진 옷을 입고 항아리 창을 한 집에 살아도 모두 도덕과 성명을 말한다.
그런데 이런 풍습이 근래에 와서는 점점 쇠해져서, 비록 정성스럽고 삼가나 도량이 좁고, 실질이 적으면서 말다툼을 좋아하니, 또한 옛날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우도 여러 고을은 모두 이보다 더 못하다.
안동부 관아는 화산 남쪽에 있다. 황강 물은 동북방에서 흘러오고 청송읍 냇물은 임하를 지나온다. 이 두 물이 동남방에서 합쳐져 고을 성을 돌며 서남쪽으로 흘러간다.
남쪽에 영호호가 있는데, 고려 공민왕이 남쪽으로 피란왔을 때 이 누각 위에서 잔치하며 놀았고, 누각에 걸린 현판은 바로 공민왕이 쓴 것이다.
영호루 북쪽에는 신라 때 지은 옛 절이 있다. 지금은 절이 망해 스님은 없어도 그 정전은 들 복판에 따로 서 있어, 조금도 기울지 않아 사람들이 노나라의 영광전에 견준다.
서쪽에는 서악사가 있고 절에 관왕묘의 석상이 있는데 임진년에 왜적을 토벌하던 명나라 장수가 세운 것이다.
동남쪽에 있는 귀래정은 예전에 유수를 지낸 이광이 지은 것이고, 동쪽에 있는 임청각은 이씨가 대를 이어 사는 집인데, 이것들이 영호루와 함께 고을 안 명승지이다.
고을에서 북쪽으로 200리쯤 되는 곳에 태백산이 있고 산 밑에 내성. 춘양. 소천. 재산등 네 마을이 있다. 모두 깊은 두메이며, 두메 백성들이 모여 산다. 관동 연안 지방에서 생산되는 생선과 소금이 이들 마을을 통하며, 또한 병란과 세상을 피해 살 만한곳이다.
네 마을 동쪽에 있는 영양.진보 두 고을도 풍속이 대략 비슷하고 진보에서 동쪽으로 읍령을 넘으면 바로 영해 지역인데, 북쪽은 강원도 평해와 경계가 맞닿았다.
안동에서 남쪽으로 황수를 건너면 팔공산이 있다. 산 북쪽황수 남쪽에 의성등 여덟, 아홉 고을이 있고 그 동남쪽은 경주이다.
북쪽 영해에서 남쪽 동래에 이르기까지 무릇 아홉 고을이 모두 산등성이 너머에 있는데, 남북이 길고 동서는 좁다. 아울러 바닷가에 가까이 있어 고기잡이와 소금 굽는 이익이 있다.
이 가운데 오직 경주만 아홉 고을 중에서 가장 큰 도회지 이다. 아직도 옛 도읍으로서의 풍습이 남아 있고, 조선에 와서는 회재이언적의 고향이다.
팔공산 남쪽 큰 강 서쪽이 칠곡이고 그 동남쪽은 하양. 경산. 자인 등의 고을이다.
온 도에 성을 쌓아 지킬 만한 곳이 없으나, 오직 칠곡 관아가 있는 성이 만 길이나 되는 산 위에 있어 남북으로 통하는 큰 길을 가로지르는 큰 요해처 이다.
대구는 감사가 있는 곳이다. 산이 사방을 높게 막아 복판에 큰들을 감추었으며, 들 복판에는 금호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흐르다가 낙동강 하류에 합친다.
고을 관아는 낙동강 뒤쪽에 있다. 한 도의 한복판에 위치항여 남북으로 거리가 매우 고르니, 또한 지형이 훌륭한 도회지이다.
대구 동남쪽에서 동래 사이 여덟 고을이 있는데, 땅은 비록 기름지나 왜국과 가까워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오직 밀양은 점필재 김종직의 고향이며, 현풍은 한훤당 김굉필의 고향이다. 강을 끼고 있고 바다와 가까워서 생선. 소금과 배로 통상하는 이익이 있으니 또한 번화한 좋은 곳이다.
한양 역관들이 여기에 많이 머물면서 많은 재물로 왜인과 장사하여 많은 이익을 얻는다.
밀양 동남쪽이 동래이며, 동래는 동남 바닷가에 있어 외국에서 우리 나라에 상륙하는 첫 경계이다. 임진년 전부터 고을 남쪽 바닷가에 왜관을 설치하고, 둘레 수십 리에다 나무 울타리를 쳐서 한계를 정하였다.
군졸을 두어 지키게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이 드나들며 교제하는 것을 금하였다.
해마다 대마도 사람이 도주의 문서를 받고, 왜인 수백명을 인솔하여 와서 왜관에 머문다. 우리 조정에서는 경상도에서 바치는 조세 중에서 약간을 떼어, 절반은 왜관에 머무는 왜인에게 주어 도주에게 보내게 하고, 남은 반은 조금씩 조금씩 주어서 그들이 공동으로 쓰게 한다.
그들은 하는 일이 없이 다만 피차간에 왕래하는 서신과 물자를 교역하는 일을 관장할 뿐이다. 그리고 교역한 물건값을 바로 주지 못하고 분할하여 다음 해에 갚기로 약속하기도 하는데, 이것을 잡혔다고 한다.
왜국 전 지역에는 장독이 있는 샘이 많아 풍토병이 있는데, 인삼을 물 주발에 넣으면 탁한 장기가 녹아 없어진다. 그러므로 인삼을 가장 귀하게 여기며, 먼 곳에 있는 왜인은 대마도에 와서 구해 간다. 우리 조정에서는 일정한 수량의 인삼을 하사하고, 사사로 매매하는 것은 엄금한다. 그러나 이익이 많으므로 밀매하는 자를 베어 죽여도, 완전히 금하지 못했는데, 근래에는 금령이 점점 느슨해져서 범법하는 자가 많고 우리 나라 인삼값도 나날이 치솟게 되었다.
예전에 장헌대왕이 장수를 보내 대마도를 토벌하였으나, 관원을 두어 지키지 않고 다시 도주에게 돌려준 일이 있었다. 그때는 우리 나라에서 왜인을 관에 머물게 하지 않았을 것이니, 이런 일이 어느 때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거니와 실상 의미 없는 일이다.
이 섬이 원래 왜국에 딸린 것이 아니라, 두 나라 사이에 있으면서 왜국을 빙자하여 우리에게 요긴한 체하고, 우리를 빙자하여 또 왜국에게 요긴하게 보이는, 박쥐 노릇을 하여 스스로 이로움을 취하니, 토벌하여 우리에게 복종하게 하는 것이 상책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주를 해마다 한 번씩 우리 조정에 조회하게 하여 순종하거든 신하에게 상주는 예로써 전일에 주던 액수와 같이 후하게 주는 것은 옳지만, 관을 지어 주어 머물게 하고 조세를 실어다 주는 것은 마치 공을 바치는 것과 같아 명분이 정당하지 못하니 빨리 폐지하는 것이 옳다.
대마도는 땅이 매우 메마른데 인구는 많아서, 고려 말기에 해적질하던 자는 모두 이 섬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은 그들을 달래 도둑질하지 않게 하려고 하지만 그것은 모두 임시방편일 뿐이고 구차한 노릇이다. 예전에도 이와 같은 예는 없었다. 하물며 그들이 이미 우리 경내에 있고, 또 우리 나라 복색으로 변장하고 말까지 배워 나랏일을 염탐할 염려마저 있음에랴.
임진년에는 아무 까닭 없이 모두 철수하여, 두 나라가 전쟁하는 동안 털끝만한 힘도 빌리지 못했고, 도리어 해만 되었다.
그러나 이를 시행해 온 지가 오래 되어, 갑자기 사단을 일으키는 것도 좋지 않다. 먼저 군사로 위엄을 보인 다음 다시 약속을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우도에는 조령밑에 문경이 있다. 북쪽에는 우뚝하게 솟은 주흘산이 있고, 남쪽에는 대탄이 있다. 서쪽에는 희양산과 청화산이, 동쪽에는 천주산과 대원산이 있다. 사방 산속이나 들판이 제법 넓게 펼쳐져서 영남 경계의 첫 고을이고 남북으로 통하는 큰 길이 닿아 았다.
임진년에 왜적이 북쪽으로 쳐 올라오다가 대탄에 이르러 크게 두려워하였는데, 지키는 사람이 없음을 염탐한 다음에 비로소 지나갔고, 조령에 이르러서도 또한 그러하였다. 그러나 지대가 놓은 고을이면서 아주 험한 산속이어서 살기를 조금은 벗었다고 풍수를 보는 감여가는 말한다.
남쪽은 함창 들이고 함창 남쪽은 상주다. 상주의 다른 이름은 낙양이며, 조령 밑에 있는 하나의 큰 도회지로서 산이 웅장하고 들이 넓다. 북쪽으로 조령과 가까워 충청도. 경기도와 통하고, 동쪽으로는 낙동강에 임해서 김해. 동래와 통한다. 운반하는 말과 짐실은 배가 남쪽과 북쪽에서 물길과 육로로 모여드는데, 이것은 무역하기에 편리하기 때문이다.
이 지방에는 부유한 자가 많고 또 이름난 선비와 높은 벼슬을 지낸 사람도 많다. 우복 정경세와 창석 이준이 모두 이 고을 사람이다.
상주 서쪽은 화령이고 화령 서쪽은 충청도 보은 땅이다. 화령은 소재 노수신의 고향이며, 동쪽에 있는 인동은 여헌 장현광의 고향이다.
남쪽에 있는 선산은 산천이 상주보다 더욱 깨끗하고 밝다. 전해 오는 말에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일선에 있다" 한다. 까닭에 문학하는 선비가 많았다.
임진년에 명나라 군사가 이곳을 지나가다 명나라 술사가 외국에 인재가 많은 것을 꺼리어, 군사를 시켜 고을 뒤 산맥을 끊고 숯불을 피워 뜸질하게 하였다. 또 큰 쇠못을 박아 땅의 정기를 눌렀는데 그 후로는 인재가 나지 않는다.
금산 서쪽이 곧 추풍령이고, 추풍령 서쪽이 황간 땅이다. 황악산과 덕유산 동쪽 물이 합쳐져서 감천이 되어 동쪽으로 낙동강에 흘러든다. 감천을 낀 고을이 지례. 금산. 개령이며, 선산과 함께 감천 물을 관개하는 이로움을 누린다.
논밭이 아주 기름져 백성들이 안락하게 살며, 죄를 두려워하고 간사함을 멀리하는 까닭에 여러 대를 사는 사대부 집이 많다. 금산은 판서 최선문의 고향이며, 선산에는 금오산이 있는데 주서 길재의 고향이다. 최선문은 노산군을 위하여 절의를 지켰고, 길재는 고려를 위하여 충절을 지켰다.
감천 남쪽은 선석산이고, 선석산 남쪽은 성주와 고령이다. 고령은 옛 가야국 지역이며, 고령 남쪽은 합천으로 고령과 더불어 가야산 동쪽에 있다. 이 세 고을 논이 영남에서 가장 기름져 적은 종자로 많이 수확한다. 그러므고 고향에 뿌리박은 자는 모두 넉넉하게 살며 떠동아다니는 자가 없다.
성주는 산천이 명랑하고 수려하여 고려 때부터 이름난 사람과 높은 선비가 많았다. 우리 나라에 와서는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가 이 고을 사람이다.
합천 남쪽은 삼가로 남명 조식의 고향인데, 김우옹과 정구 . 정인홍이 모두 남명의 문인이다. 정인홍이 학자로 자처하면서 남명을 높이고 퇴계를 공격하였는데, 정인홍에게 와서 배우던 많은 사람이 그의 잘못된 지도로 해를 당하였다. 그러나 동강은 벼슬을 그만두고 돌아오면서 정인홍을 피해 성주로 돌아가지 않고 청주 정좌산 밑에 터를 잡아 살다가 생을 마쳤다. 정인홍은 광해군때 대북파의 우두머리로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으나, 인조 반정으로 저자에서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성주 사람들은 옳은 행실을 좋아하여 집을 보전하였으니 이것은 동강과 한강의 가르침 덕택이었다.
덕유산 동남쪽에 있는 안음현은 동계 정온의 고향인데, 그는 벼슬이 이조 참판 까지 이르렀다. 병자년에 청나라 군사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을때 정온은 명나라를 배반하고 청나라에 항복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하였다. 인조가 항복하려고 서에서 내려가자 스스로 배를 찔러 죽으려 했다. 그의 자제가 창자를 배에다 넣고 꿰매었더니 오랜 후에 깨어났다. 청나라 군사가 돌아가자 곧 시골로 돌아가 다시는 조정에 나가 벼슬하지 않았다.
안음 동쪽은 거창이고, 남쪽은 함양이며, 산음은 지리산 북쪽에 있는데 네 고을은 모두 땅이 기름지다. 함양은 더구나 산수굴이라 부르며, 거창. 안음과 함께 이름난 고을로 일컫는다. 그러나 산음만은 음침하여 살 만한 곳이 못 된다.
네 고을 물이 합쳐져 영강이 되고 진주읍 남쪽을 돌아 낙동강으로 들어간다. 진주는 지리산 동쪽에 있는 큰 고을이며, 장수와 정승이 될 만한 인재가 많이 나왔다. 땅이 기름지고 또 강과 산의 경치가 좋아 사대부는 넉넉한 살림을 자랑하고, 제택과 정자 꾸미기를 좋아하여, 비록 벼슬은 못하더라도 한유하는 공자라는 명칭이 있다.
임진년에 고을이 왜적에게 함락되어, 창의사 김천일과 병사 최경회가 죽었다. 지방 사람들은 그들의 사당을 세워 제사 지내고, 조정에서는 충렬사라는 현판을 내려 표창하였다.
숙종 때 어느 목사가 사당을 중수하려고 병사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병사가 들어주지 않아 목사 혼자 자신의 봉급을 추렴하여 사당을 꾸몄는데 사당 모양이 일신하였다. 그날 밤 목사의 꿈에 여러 무장들이 나타나 사례를 하고, 또"공은 문관이면서 우리들을 추념하는데 저 병사는 무장으로서 돌보지 않으니 그 죄를 다스리겠다." 하였다. 새벽에 들으니 병사가 밤 사이 갑자기 죽었다 하니, 귀신의 이치가 없다 할 수는 없다.
진주 동쪽은 의령과 초계인데 진주와 풍습이 거의 같다. 영강 남쪽 13개 고을에는 옛부터 출세한 사람이 적다. 그리고 바다와 가까워 왜국과 이웃했고, 샘물에 장기가 있어 살 곳이 못 된다. 오직 하동은 일두 정여창의 고향으로 지리산 남쪽에 있으며, 전라도 광양현과 경계가 맞닿았다.
그러므로 "좌도에는 벼슬한 잡이 많고, 우도에는 부자가 많으며, 간간이 천 년이나 된 유명한 마을이 있다" 고 말한다. 그러나 지역이 경성과 멀어 본래부터 이 지방 사람이 아니면 사대부로서 갑자기 가기가 쉽지 않다. 다만 사세가 그럴 뿐 아니라 시대를 보아서도 또한 갈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