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욥기 15장 1~35
서론: 엘리바스의 차가운 계산기와 스크루지의 장부
본문은 친구 엘리바스가 고난받는 욥을 향해 퍼붓는 두 번째 공세입니다. 엘리바스는 고통당하는 형제의 아픔에 공감하기보다, 자신이 가진 정통 인과응보 교리("죄가 있으니 벌을 받는다")라는 차가운 계산기를 두드리며 욥을 더욱 정죄합니다.
이러한 엘리바스의 모습은 찰스 디킨스의 소설『크리스마스 캐럴』에 등장하는 에베네저 스크루지(Ebenezer Scrooge)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스크루지는 단순히 돈만 밝히는 구두쇠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자들은 감옥이나 빈민굴에 가야 하며, 죽을 사람은 죽어서 인구 과잉을 줄이는 것이 합리적이고 자본주의적 법칙에 맞다"는 철저한 '상식과 인과율의 봉사자'였습니다. 스크루지에게 가난하고 병든 이들은 따뜻한 손길을 내밀 이웃이 아니라, 효율적인 시스템을 방해하는 '불합리한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오늘 본문를 통해, 우리 안에 숨어 있는 '엘리바스적 오만'과 '스크루지적 차가운 계산법'을 내려놓고 십자가의 은혜로 나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1. 자기 의(義)에 빠진 인간의 교만
"이는 그의 손을 들어 하나님을 대적하며 교만하여(가바르) 전능자에게 힘을 과시하였음이니라" (욥 15:25) '가바르(גָּבַר)'는 "스스로 힘을 과시하다, 강하다고 착각하여 교만해지다"라는 뜻입니다. 엘리바스는 욥이 하나님께 대적하여 '가바르'한다고 비난하지만, 정작 교만한 자는 엘리바스 자신입니다. 자기 신학적 지식이 절대적이라고 믿고, 하나님을 자신의 논리 틀 안에 가두려는 행위가 바로 영적 '가바르'입니다.
스크루지는 자신이 평생 일구어낸 재산과 차가운 이성적 판단이 세상의 유일한 질서라고 믿었습니다. 자신의 신념을 과신하며 타인을 정죄하던 스크루지의 '가바르'는, 긍휼과 은혜가 들어설 여지를 완전히 차단해 버렸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율법 준수를 자랑하며 스스로 강하다('가바르') 착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 의를 과신하는 자들을 향해 "겉은 희게 칠했으나 속은 죽은 뼈가 가득하다" (마 23:27)고 경고하셨습니다.
이는 니체(F. Nietzsche)가 말한 '권력에의 의지'가 종교적 형태로 변질된 모습입니다. 자기 확신이 신앙이라는 탈을 쓸 때, 인간은 신마저 자기 논리의 종으로 만들려 합니다.
공동체의 전통이나 효율성 중심의 논리가 하나님의 은혜보다 앞서는 '신학적 독선'을 경계해야 합니다. 자신의 신앙 경력이나 도덕적 무결함으로 이웃을 심판하는 영적 우월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2. 속이 다른 영적 외식
"경건하지 못한(하네프) 무리는 자식을 낳지 못할 것이며..." (욥 15:34) '하네프(חָנֵף)'는 단순히 '경건하지 않다'는 뜻을 넘어, "영적으로 부패했으나 겉으로는 경건한 척 외식하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엘리바스는 욥을 '하네프'한 악인으로 낙인찍습니다. 그러나 정작 겉으로는 정통 신학을 말하면서 속으로는 고난받는 형제를 향한 사랑과 긍휼이 마른 엘리바스 자신이야말로 '하네프'의 상태에 빠져 있었습니다.
스크루지는 사회 법규를 완벽히 지키고 세금을 내는 '모범적 시민'의 탈을 쓰고 있었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 구호금을 요청하는 이들에게 차갑게 거절했습니다. 사회적 정당함 뒤에 숨어 사람을 사랑하는 본질을 잃어버린 영적 '하네프'의 전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엄히 책망하신 자들은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마 23:28).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지켰으나, 율법의 더 중요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습니다.
키르케고르(S. Kierkegaard)는 신 앞에 홀로 서지 못하고 종교적 시스템과 겉모습 뒤에 숨는 대중의 종교성을 '외식'이라 비판했습니다. 진정한 신앙은 겉포장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함입니다.
교회가 겉으로는 거룩한 종교적 수식어와 업적들로 가득하나 속으로는 형제 사랑과 긍휼이 마른 냉혹한 곳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난당하는 형제 앞에서 신앙의 말로 쉽게 정죄하지 말고, 그 아픔에 진실하게 동참하는 내면의 경건을 회복해야 합니다.
3. 허무한 신념을 진리로 착각하는 맹신
"그가 스스로 속아 허망한 것을 믿지(아만) 아니할 것은..." (욥 15:31) '아만(אָמַן)'은 "확신하다, 신뢰하다, 아멘으로 받아들이다"라는 뜻입니다(우리가 기도 끝에 하는 '아멘'의 원형). 본문에서 엘리바스는 악인이 허망한 것을 '아만(신뢰)'하다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정작 하나님을 '아만'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인과응보의 교리와 법칙을 절대적 진리로 '아만(맹신)'한 자는 엘리바스 자신이었습니다.
스크루지는 평생 숫자와 금전 장부의 법칙만을 절대적 진리로 신뢰하고 의지('아만')했습니다. 그러나 유령들을 통해 자신이 죽은 뒤 아무도 슬퍼하지 않고 차갑게 외면당하는 비극적 미래를 보았을 때, 자신이 절대적이라 믿었던 세상의 계산법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깨닫고 비로소 통곡하며 회개하게 됩니다.
십자가는 인간이 신뢰하던('아만') 정죄와 인과율의 세상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역설입니다. "죄의 댓가는 사망"이라는 법칙 위에, 죄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죽으심으로 은혜라는 완전한 구원의 신비를 이루셨습니다(롬 5:8).
레비나스(E. Levinas)는 타자의 고통이라는 실제적 마주침이 인간의 굳어진 이성적 틀을 깨뜨린다고 보았습니다. 자신이 가진 신념(아만)을 절대화하기보다, 타자의 아픔 앞에서 자기 이성을 내려놓는 것이 참된 영적 전환입니다.
세상의 인과응보적 계산법이나 기계적 평가 기준을 교회의 원리로 삼지 말고, 오직 십자가의 역설적 은혜를 세워야 합니다. 내가 만든 신념이나 세상적 상식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하는 맹신을 버리고, 이해할 수 없는 순간에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해야 합니다.
결론: 교만을 해체하고 십자가 은혜를 신뢰
오늘 우리는 본문의 엘리바스와 스크루지의 모습을 통해, 영적으로 자만하고 타인을 판단하기 쉬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았습니다. 이들은 결코 도덕적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의 '정의와 신학, 차가운 계산법'을 하나님보다 더 높였기에 고난받는 이웃을 정죄하는 영적 비극에 빠졌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나 자신의 의(義)와 신학적 지식을 과신하지 말고, 겉으로 경건과 정의를 외치지 않으며, 인간이 만든 기계적 인과율과 굳어진 신념을 절대 진리로 맹신하지 말아야 합니다.
ㆍ스스로 강하다 착각하는 교만(גָּבַר, 가바르)을 십자가 앞에 해체하십시오.
ㆍ형제를 향한 긍휼과 사랑이 마른 영적 외식(חָנֵף, 하네프)을 깨부수십시오.
ㆍ오직 나를 살리신 '십자가의 신비와 은혜'만을 온전히 신뢰(אָמַן, 아만)하십시오.
새벽에 깨어나 회개의 눈물을 흘리며 불쌍한 이웃에게 거위 고기를 보내고 따뜻한 손을 내밀었던 스크루지처럼, 정죄의 장부를 찢어버리고 십자가의 은혜로 이웃의 고난을 함께 품는 거룩한 교회와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