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후반에서 1950년대 초반의 재즈스윙이나 비밥에 대한 구분은 비교적 명료하다. 어디까지가 스윙이고 어디까지가 비밥인지에 대한 논의가 충분히 이루어져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쿨을 바라보는 관점은 무척 다양해서 우리를 당혹시킨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쿨 역시 독립성을 띤 재즈의 하위 장르인 것은 틀림없지만 그 형성 과정에 있어서 적잖은 의문의 소지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레너드 페더의 저서들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1958년 마일즈 데이비스의 쿨에 대한 언급을 인용해보자. 이 내용은 Down Beat지를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쿨이라는 것은 사람들이 임의로 붙인 표현에 지나지 않습니다. ..... 나는 내가 녹음한 음악들을 쿨이라 명명한 적이 없어요."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 사실이지만 마일즈 데이비스가 서부 출신 음악인들과 함께 발표한 앨범 Birth of the Cool에 삽입되어 있는 'Cool'이라는 단어는 음반 제작사인 캐피탈에서 임의로 선정한 단어였다. 그러나 어쨌든 마일즈 데이비스는 이 앨범을 계기로 쿨 음악인으로 불리게 된다. 이 앨범은 이미 SP로 발매되었던 여러 스튜디오 녹음들을 LP로 모아 편집한 앨범이며 실제 발매 시기는 제작 후 4년이 지난 1954년이었다. 이 앨범은 이후 많은 서부 출신 음악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러한 배경을 등에 업고 'Cool의 효시'라는 이름을 얻게 된다.
따라서 정확히 표현하자면 1949년에서 1950년 사이에 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일련의 SP 앨범들이 진정한 쿨의 효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 역시 역사적으로 불투명한 사실이다. 이미 서부의 백인 음악인들이 마일즈 데이비스의 이전에 혹은 그와 비슷한 시기에 새로운 방식의 연주 성향과 편곡 등에 대해 구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물론 그것이 마일즈 데이비스의 역량없이 순수하게 이들의 힘으로만 만들어질 수 있었을까 하는 점에는 의문이 남는다. 실제로 1949년과 1950년 사이에 마일즈 데이비스와의 공동작업으로 만들어진 이 음악들에는 데이비스의 영향이 적잖이 남아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대체로 두가지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 하나는 역시 데이비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관점이고, 또 다른 하나는 데이비스가 없었다 해도 서부의 음악인들은 지금 우리가 쿨로 알고 있는 음악을 탄생시켰을 것이라는 관점이다. 물론 전자가 공인을 받고 있지만 후자의 논리도 반드시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만큼 1940년대 후반의 서부 음악인들은 분명 '색다른' 것을 연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밥의 중요성에 집중하는 보수적인 시각에서는 마일즈 데이비스의 정통성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 마일즈 데이비스가 비밥 연주로 인정받지 못하자 LA로 가서 일련의 백인 연주자들과 손을 잡은 것 아니냐는 의심의 눈길을 보냈으며 이에 따라 마일즈 데이비스는 'black face, white soul'이라는 혹독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마일즈 데이비스는 찰리 파커와의 활동을 통해 본격적으로 재즈의 전면에 부상했지만 엄격하게 말해 당시 그의 연주는 '빈약하게' 들렸던 것이 사실이다.그러나 그는 분명 재즈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가운데 하나였다. 특히 그의 풍부한 음악적 소양과 가능성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한 부분이다. 찰리 파커와 연주를 할 당시 그는 갓 20세를 넘긴 젊은 연주자였고 전체 경력을 통해음악적으로 가장 화려했던 시기는 아직 소개되지 않은 1950년대 중반 이후이다. 따라서 당시의 그에 대한 비판은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았는가 하는 느낌이 든다. 실제로 그를 통한 '찾아 듣기'의 실행은 비밥과 쿨 모두를 아우르는 것이며 재즈의 역사를 살피는 데 있어 매우 유용한 일이다.
대체로 이러한 논의를 바탕으로 할 때 쿨은 그 출생 배경이 베일에 가려진 사생아일 가능성도 있다. 그리고 흔히 말하는 것처럼, 쿨이 비밥에 대한 음악적 반성에서 생겨났다는 논리도 학문적 근거를 찾을 수 없는 말이다. 당시 음악인들은 비밥에 대해 '반성'할 수 있는 시간을 아직 부여받지 못하고 있었다. 비밥이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이 1940년대 후반이었고 쿨이 제시된 것을 1950년으로 계산해 본다면, 이는 명백한 사실이다. 하지만 보다 명확한 것은 비밥과 쿨에 대한 음악적 비교를 통해 가능할 것이다. 사실 어느 음악이나 그렇지만, 선배들의 음악에 대한 반응이나 영향이 전혀 배제된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후배들이 조금이라도 새로운 것을 만들었다면 그것은 이미 행해졌던 음악에 대한 기본적인 고찰이 선행됨으로써만 가능하다. 새롭다는 개념 자체가 그렇다. 절대적 가치의 '새롭다'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그런 맥락에서 살펴 볼 때 쿨이 비밥에 대한 반성이라는 논리는 불성실한 태도이다. 오히려 이 시기에 이르면 수많은 음악인들이 비밥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만약 마일즈 데이비스가 쿨을 창시했다고 가정하더라도 그는 분명 비밥을 통해 재즈를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인 음악인이었다.
서부 출신 음악인들이 비밥에 집중하고 있던 뉴욕의 흘인 음악인들에 대한 대립구도로써 쿨을 이끌기 시작했다는 논리는 점검해 볼 가치가 있다. 이것은 흑백문제와 마찬가지로 비밥과 쿨을 대립적인 것으로 파악하는 태도이다. 앞서 필자는 비밥에 대한 글을 통해 '비밥은 흑인들의 음악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그에 반해서 공교롭게도 쿨을 백인들의 음악이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은 아니다. 아마도 쿨에 있어서 마일즈 데이비스의 역량을 높이 사는 이들은 의아하게 생각할수 있겠지만 쿨의 물결에 합류했던 마일즈 데이비스나 피아노 주자 존 루이스 등은 모두 백인들과 영합하여 비밥을 버렸다는 정서적인 죄목으로 인해 흑인들에게 경원시된 면이 없지 않다. 어쨌든 비밥이 융성한 이후 흑인들은 재즈를 통해 비로소 자신들의 미학적 자존심을 획득하게 되었고 약간의 시간적 격차를 둔 채 백인을 중심으로 한 쿨의 등장을 지켜 보는 것은 적잖이 흥미로운 일이다.
그러나 재즈 역사가들은 더 이상 이런 논리에 점수를 주고 있지 않다. 쿨 자체가 음악적으로 비밥과 같은 뿌리를 지니고 있고 또 비밥의 영향 속에서 쿨이 이루어졌다는 대전제 때문이다. 그렇다고 흑백 대립 구조의 논리에 대해 부정의 태도를 취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다만 그런 논리로 쿨을 설명하려는 태도 자체가 학술적으로 적절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공론이 형성되기까지 적잖은 학자들은 흑백 구조의 갈등 속에서 고심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런 사회적 압력에도 불구하고 '음악은 일단 음악적으로 설명되어야 한다'는 객관적 태도가 공인을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김현준의 재즈파일'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