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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자왕 16년 봄 3월,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음란과 향락에 빠져서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으므로 좌평 성충[혹은 정충이라고도 한다.]이 적극 말렸더니, 왕이 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하려는 자가 없었다. 성충은 옥에서 굶주려 죽었다. 그가 죽을 때 왕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충신은 죽어도 임금을 잊지 않는 것이니 한 마디 말만 하고 죽겠습니다. 제가 항상 형세의 변화를 관찰하였는 바, 전쟁은 틀림없이 일어날 것입니다. 무릇 전쟁에는 반드시 지형을 잘 선택해야 하는데 상류에서 적을 맞아야만 군사를 보전할 수 있습니다. 만일 다른 나라 군사가 오거든 육로로는 침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의 언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십시오.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방어하여야만 방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를 명심하지 않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20년 봄 2월, 서울의 우물이 핏빛으로 변했다. 서해에 조그만 물고기들이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이 모두 먹을 수 없이 많았다.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여름 4월, 두꺼비 수 만 마리가 나무 꼭대기에 모였다. 서울 시민들이 까닭도 없이 놀래 달아나니 누가 잡으러 오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쓰러져 죽은 자가 1백여 명이나 되고 재물을 잃어버린 자는 셀 수도 없었다.
5월, 폭풍우가 몰아치고 천왕사와 도양사의 탑에 벼락이 쳤으며, 또한 백석사 강당에도 벼락이 쳤다. 검은 구름이 용처럼 공중에서 동서로 나뉘어 서로 싸우는 듯하였다.
6월, 왕흥사의 여러 중들이 모두 배의 돛대와 같은 것이 큰 물을 따라 절 문간으로 들어 오는 것을 보았다. 들사슴 같은 개 한 마리가 서쪽으로부터 사비하 언덕에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후에 행방이 묘연해졌다. 서울의 모든 개가 노상에 모여서 짖거나 울어대다가, 얼마 후에 흩어졌다. 귀신이 하나 대궐 안에 들어 와서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고 크게 외치다가 곧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사람을 시켜 땅을 파게 하였다. 석자 가량 파내려 가니 거북이 한 마리가 발견되었다. 그 등에 "백제는 둥근 달 같고, 신라는 초승달 같다."라는 글이 있었다. 왕이 무당에게 물으니 무당이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차면 기울며, 초승달 같다는 것은 가득 차지 못한 것이니, 가득 차지 못하면 점점 차게 된다."고 하니 왕이 노하여 그를 죽여 버렸다. 어떤 자가 말하기를 "둥근 달 같다는 것은 왕성하다는 것이요, 초승달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생각컨대 우리 나라는 왕성하여지고 신라는 차츰 쇠약하여 간다는 것인가 합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였다.
당 나라 고종이 조서를 내려 좌위 대장군 소 정방을 신구도 행군 대총관으로 임명하여, 좌위장군 유 백영과 우무위 장군 풍 사귀와 좌효위 장군 방 효공 등과 함께 군사 13만 명을 거느리고 백제로 와서 공격하게 하였다. 아울러 신라왕 김 춘추를 우이도 행군 총관으로 임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에서 바다를 건너 나라 서쪽 덕물도에 이르자, 신라왕이 장군 김 유신을 보내 정예 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당 나라 군사와 합세하게 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군신들을 모아 공격과 수비 중에 어느 것이 마땅한지를 물으니, 좌평 의직이 나서서 말하기를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바다를 건너 왔습니다. 그들은 물에 익숙하지 못하므로 배를 오래 탄 탓에 분명 피곤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상륙하여 사기가 회복되지 못했을 때 급습하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사람들은 큰 나라의 도움을 믿기 때문에 우리를 경시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니 만일 당 나라 사람들이 불리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주저하고 두려워서 감히 빨리 진격해 오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선 당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달솔 상영 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 나라 군사는 멀리서 왔으므로 속전하려 할 것이니 그 서슬을 당할 수 없을 것이며, 신라 군사들은 이전에 여러번 우리 군사에게 패하였기 때문에 우리 군사의 기세를 보면 겁을 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계책으로는 당 나라 군사들이 들어 오는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곤하여지기를 기다리면서, 먼저 일부 군사로 하여금 신라 군사를 쳐서 예봉을 꺾은 후에, 형편을 보아 싸우게 하면 군사를 온전히 유지하면서 나라를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왕이 주저하면서 어느 말을 따라야할지를 몰랐다. 이 때 좌평 흥수는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는데, 왕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 물었다. "사태가 위급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흥수가 말했다.
"당 나라 군사는 숫자가 많을 뿐 아니라 군율이 엄하고 분명합니다. 더구나 신라와 함께 우리의 앞뒤를 견제하고 있으니 만일 평탄한 벌판과 넓은 들에서 마주하고 진을 친다면 승패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백강[혹은 기벌포라고도 한다.]과 탄현[혹은 침현이라고도 한다.]은 우리 나라의 요충지로서, 한 명의 군사와 한 자루의 창을 가지고도 만 명을 당할 수 있을 것이니, 마땅히 용감한 군사를 선발하여 그곳에 가서 지키게 하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면서, 대왕께서는 성문을 굳게 닫고 든든히 지키면서 그들의 물자와 군량이 떨어지고 군사들이 피곤하여질 때를 기다린 후에 분발하여 갑자기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했다.
"흥수는 오랫 동안 옥중에 있으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니, 그 말을 따를 수 없습니다. 차라리 당 나라 군사로 하여금 백강으로 들어오게 하여 강흐름에 따라 배를 나란히 가지 못하게 하고, 신라 군사로 하여금 탄현에 올라가서 소롯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몰 수 없게 합시다. 이 때가 되어 군사를 풀어 공격하게 하면 마치 닭장에 든 닭이나 그물에 걸린 고기를 잡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왕은 이 말을 따랐다. 왕은 또한 당 나라와 신라 군사들이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을 듣고 장군 계백을 시켜 결사대 5천 명을 거느리고 황산으로 가서 신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적고 힘이 모자라서 마침내 패하고 계백이 사망하였다. 이에 왕은 군사를 모아 웅진 어귀를 막고 강가에 주둔시켰다. 소 정방이 강 왼쪽 언덕으로 나와 산 위에 진을 치니 그들과 싸워서 아군이 크게 패하였다. 이 때 당 나라 군사는 조수가 밀려 오는 기회를 타고 배를 잇대어 북을 치고 떠들면서 들어 오고, 소 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거느리고 곧장 진도성 30리 밖까지 와서 멈추었다. 우리 군사들이 모두 나가서 싸웠으나 다시 패배하여, 사망자가 1만여 명에 달하였다. 당 나라 군사는 승세를 타고 성으로 육박하였다. 왕이 패망을 면할 수 없음을 알고 탄식하며 말했다.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가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 후회스럽구나."
왕은 마침내 태자 효를 데리고 북쪽 변경으로 도주하였다. 소 정방이 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가 스스로 왕이 되어 군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태자의 아들 문사가 왕의 아들 융에게 이르기를 "왕께서는 태자와 함께 나가 버렸고, 숙부는 자기 마음대로 왕노릇을 하고 있으니 만일 당 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가버리면 우리들이 어떻게 안전할 수 있겠는가?"라 하고, 마침내 측근들을 데리고 밧줄을 타고 성을 빠져 나가고 백성들도 모두 그를 뒤따르니, 태가 이를 만류하지 못하였다. 소 정방이 군사들을 시켜 성에 뛰어 올라 당 나라 깃발을 세우게 하자, 태는 다급하여 성문을 열고 목숨을 살려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때 왕과 태자 효가 여러 성과 함께 모두 항복하였다. 소 정방이 왕과 태자 효, 왕자 태, 융, 연 및 대신과 장병 88명과 주민 1만 2천 8백 7명을 당 나라 서울로 호송하였다.
백제는 원래 5부, 37군, 200성, 76만 호로 되어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지역을 나누어 웅진, 마한, 동명, 금련, 덕안 등 5개의 도독부를 두어 각각 주, 현들을 통할하게 하고, 우두머리를 뽑아서 도독, 자사, 현령을 삼아 관리하게 하고, 낭장 유 인원에게 명령하여 도성을 지키게 하였다. 또한 좌위 낭장 왕 문도를 웅진 도독으로 삼아 유민들을 무마하게 하였다. 소 정방이 포로들을 임금에게 바치니 임금이 그들을 꾸짖고 용서하여 주었다. 왕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를 금자광록대부위위경으로 추증하고 옛 신하들의 문상을 허락하였다. 조서를 내려 손 호, 진 숙보의 무덤 곁에 장사지내고, 그 무덤과 함께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왕자 융을 사가경으로 임명하였다. 왕 문도가 바다를 건너다가 사망하자 유 인궤로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무왕의 조카 복신은 일찌기 군사를 거느리는 장수였는데, 이 때 중 도침을 데리고 주류성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켜서, 전 임금의 아들로서 왜국에 인질로 가있던 부여 풍을 맞아서 왕으로 추대하였다. 서북부에서 모두 이에 호응하니, 군사를 이끌고 도성에 있는 유 인원을 포위했다.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유 인궤를 검교 대방주 자사로 임명하여, 왕 문도의 군사를 거느리고 지름길로 신라 군사를 보내 유 인원을 구원하게 하였다. 유 인궤가 기뻐하며 "하늘이 장차 이 늙은이를 부귀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 나라 책력과 묘휘를 요청하여 가지고 떠나면서 "내가 동쪽 오랑캐를 평정하고 대당의 정삭을 해외에 반포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인궤가 군사를 엄하게 통솔하고 이동하면서 싸우고 전진하니, 복신 등이 웅진강 어귀에 두 개의 목책을 세워 그들을 방어하였다. 인궤가 신라 군사들과 합세하여 공격하니, 우리 군사들이 퇴각하여 목책 안으로 들어와 강을 저지선으로 삼으니, 다리가 좁아서 물에 빠지고 전사한 자가 1만여 명이었다. 복신 등이 이에 도성의 포위를 풀고 물러와서 임존성을 확보하고 있으니, 신라 군사들이 군량이 떨어져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 때가 당 나라 용삭 원년 3월이었다. 이 때 도침은 영군 장군으로 자칭하고 복신은 상잠 장군으로 자칭하며 여러 무리들을 불러 모으니 그 세력이 더욱 확장되었다. 그들은 사람을 보내 인궤에게 말했다.
"듣건대, 당 나라가 신라와 약속하기를 백제 사람은 노소를 막론하고 모두 죽이고, 그후에는 우리 나라를 신라에 넘겨 주기로 하였다고 하니, 죽음을 기다리기 보다는 차라리 싸우다가 죽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여, 이렇게 모여 진지를 고수하고 있을 뿐이다."
인궤는 편지로 화복에 대하여 설명하고, 사람을 보내 타일렀다. 도침 등은 군사가 많은 것을 믿고 교만해져서 인궤의 사자를 바깥 숙소에 재우고 비웃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자의 벼슬은 낮고, 나는 일국의 대장이므로 함께 말할 수 없다."
그는 답장을 주지 않고 그냥 돌려 보냈다. 인궤는 군사가 적었으므로, 인원의 군사와 합쳐서 군사들을 휴식시키면서 표문을 올려 신라와 협력하여 공격하기를 요청하였다. 신라왕 춘추가 당 나라의 조서를 받고, 장수 김 흠에게 군사를 주어 인궤 등을 구원하게 하였다. 김 흠이 고사에 이르자 복신이 그와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김 흠이 갈령도에서 도망하여 돌아간 후 신라는 감히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군사를 합쳤는데, 풍은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제사만 주관하였다.
복신 등은, 인원 등이 성이 고립되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위로하면서 말했다.
"대사 등은 언제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가? 그 때 우리가 사람을 보내 전송하여 주겠다."
(당 용삭) 2년 7월에 인원, 인궤 등이 웅진 동쪽에서 복신의 남은 군사를 대파하고, 지라성 및 윤성, 대산, 사정 등의 목책을 함락시켰는데, 군사를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매우 많았으며, 군사들을 나누어 그곳에 계속하여 주둔시키고 수비하게 하였다. 복신 등은 진현성이 강가에 있으며, 높고 험하여 요충지로 적당하다고 판단하여 군사를 증파하여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인궤가 밤에 신라 군사를 거느리고, 성에 가까이 접근하여 새벽에 입성하여 8백 명의 목을 베어 죽이니, 마침내 신라에서 오는 군량 수송로가 소통되었다. 인원이 증원병을 요청하니, 당 나라에서 조서를 내려 치주, 청주, 내주, 해주의 군사 7천 명을 징발하고, 좌위위 장군 손 인사에게 이 군사를 주어 바다를 건너 인원의 군사를 보충하게 하였다. 이 때 복신은 이미 권력을 독차지하여 부여 풍과 서로 질투하고 시기하게 되었다. 복신은 병이 들었다는 구실로 굴속에 누어서 풍이 문병하러 오기를 기다려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풍이 이를 알고 심복들을 거느리고 복신을 급습하여 죽이고 고구려와 왜국에 사람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당 나라 군사를 막았는데, 손 인사가 중도에서 이들을 맞아 쳐부수고, 마침내 인원의 군사와 합세하니 군사의 사기가 크게 올랐다. 이에 모든 장수들이 공격의 방향을 의논하는데 어떤 자가 "가림성이 수륙의 요충이므로 먼저 쳐버려야 한다"고 말하니, 인궤가 대답하였다.
"병법에는 강한 곳을 피하고 약한 곳을 공격해야 한다고 하였다. 가림성은 험하고 튼튼하므로 공격하면 군사들이 상할 것이요, 밖에서 지키자면 날짜가 오래 걸릴 것이다. 주류성은 백제의 소굴로서 무리들이 모여 있으니, 만일 이곳을 쳐서 이기게 되면 여러 성은 저절로 항복할 것이다."
이에 인사, 인원과 신라왕 김 법민은 육군을 거느리고 나아가고, 유 인궤와 별수 두상과 부여 융은 수군과 군량 실은 배를 거느리고, 웅진강으로부터 백강으로 가서 육군과 합세하여 주류성으로 갔다. 백강 어귀에서 왜국 군사를 만나 네 번 싸워서 모두 이기고, 그들의 배 4백 척을 불사르니, 연기와 불꽃이 하늘로 오르고 바닷물도 붉은 빛을 띄웠다. 이 때 왕 부여 풍은 탈출하여 도주하였으므로 거처를 알지 못하게 되었는데 어떤 사람은 고구려로 달아났다고 말하기도 한다.당 나라 군사들이 그의 보검을 노획하였다. 왕자 부여 충승과 충지 등이 부여 풍의 군사를 거느리고 왜국 군사들과 함께 항복하고, 지 수신이 혼자 남아 임존성에서 버티며 항복하지 않았다.
처음에 흑치 상지가 도망하여 흩어진 무리들을 모으니, 열흘 사이에 따르는 자가 3만여 명이었다. 소 정방이 이들을 공격하니 상지가 이들과 싸워서 승리하고, 다시 2백여 성을 빼앗으니 정방이 이길 수 없었다. 상지는 별부장 사타상여를 데리고 험준한 곳에 웅거하여 복신과 호응하다가, 이 때에 이르러 모두 항복하였다. 인궤가 그들에게 진심을 보이면서, 그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빼앗아 그들 자신의 성의를 나타내는 기회를 갖게 하려고 갑옷과 병기, 군량 등을 주었다. 인사가 말하기를 "그들은 야심이 있어 믿기 어렵다. 만일 그들이 무기와 곡식을 얻는다면 이는 그들에게 도적질을 할 방책을 제공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인궤가 말하기를 "내가 상여와 상지를 보니, 그들에게는 충심과 지모가 있다. 그들에게 기회를 주면 공을 세울 것이니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들 두 사람이 성을 빼앗으니, 지수신은 처자를 버리고 고구려로 달아났으며 잔당들도 모두 평정되었다. 인사 등이 군사를 정돈하여 돌아가니, 당 나라에서는 조서를 내려 인궤로 하여금 그곳에 주둔하며 수비하게 하였다.
전쟁의 여파로 집집마다 영락하고, 시체가 풀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인궤가 이 때 처음으로 명령을 내려 해골을 묻고, 호구를 등록하며, 촌락을 정리하고, 관리들을 임명하였다. 또한 도로를 개통하고, 교량을 가설하고, 제방을 수축하고, 저수지를 복구하며, 농업을 장려하고,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고, 고아와 노인을 양육하게 하였으며, 당 나라의 사직을 세우고 정삭과 묘휘를 반포하니, 백성들이 기뻐하여 각각 자기 집에 안주하게 되었다. 당 나라 임금이 부여 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신라와의 오래된 감정을 풀고 나머지 무리들을 불러 오게 하였다.
인덕 2년, 융이 신라왕과 웅진성에서 만나 흰 말을 잡아 맹세하였다. 인궤가 맹세하는 글을 지었으며, 이것을 금으로 새기고, 무쇠로 책을 만들어 신라 종묘 안에 두었는데, 이 맹세의 글은 [신라기]에 보인다.
인원 등이 귀국하니, 융은 군사가 흩어질 것을 염려하여 그 또한 당 나라 서울로 돌아갔다. 당 의봉 년간에 융을 웅진도독대방군왕으로 삼아 귀국하게 하여 남은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곧이어 안동 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 통할하게 하였다. 이 때 신라가 강성하여지니 융이 감히 고국으로 들어오지 못하고, 고구려에 가서 의탁하고 있다가 사망하였다. 무후가 또한 그의 손자 경으로 하여금 왕위를 계승케 하려 했으나, 그 지역이 이미 신라, 발해, 말갈에 의하여 분할 통치되고 있었으므로 나라의 계통이 마침내 단절되었다.
저자의 견해 : 신라 고사에는 "하늘이 금궤를 내려 보냈기에 성을 김씨로 삼았다"고 하는데, 그 말이 괴이하여 믿을 수 없으나, 내가 역사를 편찬함에 있어서, 이 말이 전해 내려온지 오래되니, 이를 없앨 수가 없었다. 그러나 또한 듣건대 "신라 사람들은 스스로 소호 금천씨의 후손이라 하여 김씨로 성을 삼았고,[이는 신라 국자박사 설 인선이 지은 김 유신의 비문과 박 거물이 지었고 요 극일이 쓴 삼랑사 비문에 보인다.] 고구려는 또한 고신씨의 후손이라 하여 고씨로 성을 삼았다"고 한다.[[진서]의 기록에 보인다.] 옛 사기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모두 부여에서 나왔다"고 하며, 또한 "진, 한의 난리 때, 중국 사람이 해동으로 많이 도망왔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삼국의 조상들은 옛 성인의 후예가 아니겠는가? 어찌하여 그렇게 오래도록 나라를 향유할 수 있었는가? 백제 말기에 와서는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 많았으며, 또한 대대로 신라와는 원수를 맺고, 고구려와는 화친을 계속하면서 신라를 침공하여, 유리한 조건과 적당한 기회만 있으면 신라의 중요한 성과 큰 진을 빼앗기를 그치지 않았으니, 이른바 어진 사람을 가까이 하고 이웃과 잘 사귀는 것이 나라의 보배라는 말과는 달랐다. 이에 당 나라의 천자가 두 번이나 조서를 내려 백제와 신라 사이의 원한을 풀기 위하여 노력했으나, 겉으로는 순종하는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이를 어겨 대국에 죄를 졌으니, 그들이 패망한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