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의(權檥,1475~1558)는 예천군 용궁면 제곡리 작은 맛질 사람이다. 자는 백구(伯懼), 호는 야옹(野翁), 본관은 안동(安東)이다. 아버지 권사빈(權士彬)의 맏아들로, 충정공(忠定公) 권벌(權橃)의 형이다.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조광조는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으로 김종직(金宗直)의 학통을 이른 사림파의 영수다. 김굉필, 정여창, 이황과 함께 동방4현(東方四賢)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1510년(중종 5)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고, 성균관에 들어가 학업에 전념하였다. 1515년(중종 10) 학행으로 천거받아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초임되었고, 같은 해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전적, 감찰, 공조좌랑, 홍문관부수찬, 교리, 응교 등을 역임하였다. 정언으로 재직 중 박원종(朴元宗), 김안로(金安老) 등 반정(反正) 공신들이 주장한 왕비 신씨(愼氏) 폐출론에 반대하는 한편, 유교를 정치와 교화의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는 왕도정치의 실현을 역설하였다. 1517년 경연시족관과 춘추관기주관을 겸임하면서 향촌의 상호부조를 위하여 여씨향약(呂氏鄕約)을 주창, 8도에 걸쳐 실시하게 하였다.
1518년 부제학으로 있을 당시 미신 타파를 내세워 소격서의 폐지를 강력하게 주창(奏請)하여, 많은 이가 반대하는데도 이를 관철시켰다. 이해 11월 대사헌에 승진하고 현량과를 처음 실시하게 하여 김식(金湜) 등 소장 학자들을 선발, 요직에 배치하였다. 이들 신진 사류들은 훈구 세력의 타도와 구제의 개혁 및 그에 따른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박차를 가해 나갔다. 1519년(중종 14) 정국공신(靖國功臣) 위훈삭제(僞勳削除)를 강력하게 청하다 훈구파인 남곤(南袞), 홍경주(洪景舟) 등에게서 강하게 반발을 사서 전라도 능주(綾州)로 유배되었고, 이어 사사(賜死)되었다.
그의 지치주의적(至治主義的) 도학정신(道學精神)을 계승하여 이황, 이이 등 많은 후학에게 영향을 주었고, 사림의 정신적 표상이 되었으며, 조선 유학의 기본적인 성격을 형성하였다. 선조 초에 신원되어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문묘에 배향되었으며, 능주의 죽수서원(竹樹書院), 양주의 도봉서원(道峰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문집은 당초 이기주(李箕疇) 등이 유문(遺文)과 사적(事蹟)을 수집하여 그의 5세손 조위수(趙渭叟)에게 준 것을 선조의 어명으로 김굉필, 이언적(李彦迪), 정여창(鄭汝昌) 등의 문집과 함께 『유선록(儒先錄)』이라는 이름으로 찬록(贊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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