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8년 드디어 청주에서는 세종의 아들 임영대군의 후손 이인좌(李麟佐)가 ,경상도 거창
안음현에서 동계 정온의 후손 정희량(鄭希亮)이 감사와 현감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고
전라도 나주에서는 羅崇大가 동조하였다. 영조는 즉위 하자마자 世弟시절 반대파였던
소론을 제거하고 노론을 중용하였고 영남의 남인은 관직에서 배제되었을 때였다. 자연히
불만이 많은 소론은 소현세자의 증손인 밀풍군(密豊君)탄(坦)을 왕으로 추대하고
군중에는 죽은 선왕 경종임금의 위패까지 모시고 우세를 떨쳤다.
어느날 안동의 가일 마을의 屛谷 권구(權구) 의 집에 이인좌의 동생 이능좌(李能坐)가
세벽 이슬을 맞으며 찾아와서 거사에 동참을 요구하니 벽을 보고 돌아 앉으며 거절하여
안동사회가 무사하였다.그때 안동사회가 동참하였다면 영남 각 지방도 거사에 참여하여
반정에 성공하여 1622년 인조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율곡학파와 서인들처럼 남인들도
정권을 잡을 절호의 기회였지만 안동 선비는 그 길을 가지 않았다.
그것은 성리학과 퇴계의 가르침인 忠과 孝가 아니였기에 안동인은 죽어도 그길을
갈 수없었던 것이다. 역사에서 안동의 위대함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권구는 연산군때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죽은 權柱의 후손으로 퇴계학맥의 정통 맥을
이은 갈암(葛庵) 이현일의 제자로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향리에서 학문을 하는 추앙 받는
선비였다. 난이 평정되고 권구는 安撫使 朴師洙에게 연행되어 영조 임금 앞에 나아갔는데
그의 인품에 감동받아 그를 특별사면하였다.권구의 아들 권보라는 사람은 영남의 남인이
정치에 배제된 현실을 한탄하며 다음과 같이 읊었다.
승침유수 유청명 昇沈有數 惟聽命 오르고 내리는 것은 운수가 있으니
천명을 따를 뿐인데 오남기운 기시환 吾南氣運 幾時還 우리 영남의 운수와
기운은 언제 다시 회복하려나.
길고 긴 52년간의 영조임금의 재위도 끝나고 1776년 정조가 등극하자 1792년 (정조 16년)
영남 유생 10,075명이 연명으로 사도세자의 伸寃을 상소하였으니 후일 嶺南 萬人疎라
부른다. 정조 임금은 영남 사람 특히 안동 사람들이 너무나 고마웠다.노론 강경파인 경
주 김씨.풍산 홍씨들로 짜여진 정국을 영남 사람들을 등용하여 명실상부 탕평책을
실시하고 영남의 인재를 뽑기위해 특별히 과거시험을 도산서원에서 실시하고 후일 크게
등용할려고 하였으나 1800년 재위 24년 만에 갑자기 죽자 또한번 영남 남인의 꿈도
허사가 되고 말았다.
퇴계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고 성리학을 발전시킨 영남의 남인 그 중심에 안동이
있으며 높은 학문과 선비의 기풍으로 국가를 이끈 인재를 배출하였지만 당쟁의 중심에서
벗어나 뜻을 펼수 없게되자 더욱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나라가 망하자 그 기상을 오직
독립에 쏟은 그의 후손이 있으니 일본 와세다 대학 출신 그가 곧 권오설이다. 그 외 많은
독립투사가 있음은 그 연장 선상이라 할수있다.
안동! 품격 높은 유교적 지식사회,독립운동은 유교적 사회 실현이였으며 그것은
안동이 후대에도 우리민족의 자존으로 길이 기억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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