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12. 대구여! 한강 선생을 잊지 말라 【한강공원】
글·송은석(대구시청년유도회 사무국장·유교칼럼니스트)
프롤로그
요즘 지자체별로 역사적 인물발굴에 혈안이다. 관광자원화가 가능한 인물을 찾는 것이다. 관광자원화란 결국 수입창출과 연결되는 것이다. 남원시는 ‘춘향’이라는 인물 하나로 먹고 산다고 한다. 「춘향테마파크」가 그 좋은 예다. 대한민국 제3대 도시인 대구. 이 거대한 도시 대구를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은 누구일까? 솔직히 퍼뜩 떠오르지는 않는다. 물론 정치, 문화, 경제, 역사 등 분야별로 대구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여럿 선정(?)되어 있긴 하다. 하지만 전국적인 인지도를 감안하면 약하다. 다 합쳐도 ‘춘향’이라는 한 여인을 이겨먹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강 정구’라는 인물이 있다. 조선 중기를 살다간 조선의 거유(巨儒·큰 선비)이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는 생소한 인물일 수는 있다. 하지만 유교·유학에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한강선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퇴계 이황, 남명 조식 이후 영남을 넘어 조선의 유학을 이끈 대표적인 선비이다.
한강선생은 대구와 밀접한 관계에 맺은 인물이었다. 인근의 성주 태생이었지만 그는 만년에 대구 북구 금호강변의 사수동으로 이거(移居·이사)했다. 그리고 사수동에서 6년간 살다가 그곳에서 운명했다.
‘한강과 대구’
오늘은 그 스토리텔링의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북구 사수동 「한강근린공원」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을 기준으로 북대구 ic와 금호분기점을 지나자마자 우측으로 한창 개발이 진행 중인 너른 땅이 나타난다. 이름 하여 ‘금호지구’이다. 대구의 젖줄인 금호강을 끼고 있는 지역이라 ‘금호지구’로 불린다. 인근에 있는 경부고속도로 금호분기점 역시 이에 연유한 것이다.
금호지구라는 말은 택지개발이 시작되면서 붙은 이름이다. 본래의 동명은 ‘사수동(泗水洞)’이다. 그런데 사수동이라는 동명은 발음이 좀 고약하다. ‘죽을 사(死)’자와 발음이 같다거나, 총을 쏘는 사수(射手)가 연상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사수’를 버리고 ‘금호’를 취한 것이다. 택지개발지구의 네이밍 작업은 분양사업의 성패를 가늠할 만큼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뒤에 언급이 되겠지만 본래 이곳은 ‘사빈(泗濱)’이라 불렸다. 마을의 북쪽은 영남의 명산 팔공산 자락이다. 남으로는 금호강이 접해 있고 강 건너는 성서 와룡산이 있다. 본래 이곳은 ‘안마을’과 ‘장기터’, ‘샛터’의 구분이 있었다. 안마을에는 ‘동래정씨, 창원황씨, 순천박씨’가 세거하였고, 장기터에는 ‘청주한씨’, 샛터에는 ‘문화류씨’가 세거하였다.
아직 한창 개발 중인 이 ‘금호지구’에 최근 명물이 하나 생겼다. 풀네임 「한강근린공원」, 약칭 「한강공원」이다. 전통적인 마을개념에는 ‘마을 숲’이라는 게 있다. ‘동산, 당산’ 등을 말하는 것으로 마을의 인문·생태·환경 조성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요소이다. 본래 사수동은 금호강변의 넓은 평야지대였다. 택지개발 이전에는 마을 초입에 마치 철모를 엎어놓은 형태의 둥그런 마을 숲이 하나 있었다. 두꺼비 숲, 일명 ‘섬뫼숲’으로 불리던 사수동의 얼굴이자 랜드마크였다. 강 건너 편에서 바라본 이 숲은 짙은 녹색의 반원형 숲으로 보기에도 참 좋았다. 하지만 택지개발의 여파로 섬뫼숲은 정상부 일대를 제외한 대부분이 깎여나갔다. 이때 살아남은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서쪽 사면에 조성된 공원이 바로 「한강공원」이다.
「한강공원」이라는 이름은 조선중기 대유학자인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선생의 호를 취한 것이다. 한강 선생은 말년인 1614년(광해군6), 72세의 노구를 이끌고 이곳 사수동으로 이거했다. 고향인 성주에서 이곳으로 바로 온 것은 아니었다. 인근 칠곡의 노곡에서 2년간 우거(寓居·잠시 머묾)했다가 이곳으로 온 것이다. 당시 마을이름은 사빈(泗濱)이었다. 한강선생은 사빈이라는 동명을 ‘사수(泗水)’로 바꾸었다. 이는 공자가 태어난 고향에 있는 ‘사수’라는 강의 이름을 빌려온 것이었다. 기왕에 ‘사빈’이라는 이름도 ‘사수’와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지만 굳이 ‘사수’로 바꾼 이유는 정확하지 않다. 아무튼 노년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곳에 사양정사(泗陽精舍)를 짓고 강학활동을 전개했다. 또한 선생의 대표작인 심경발휘와 오선생예설분류를 이곳에서 저술했다. 이처럼 조선의 대유학자인 한강 선생은 생애의 마지막 6년을 이곳에서 강학과 저술로 보냈다. 그는 1620년 이곳 사양정사에서 운명했으니 향년 78세였다.
한강! 그는 누구인가?
한강 정구라는 인물은 그 이름에 따라 붙는 수식어들이 많다. ‘퇴계, 남명 양선생의 학맥을 이은 인물’, ‘퇴계의 3대 제자 학봉, 서애, 한강’, ‘조선 실학의 태두’, ‘예학의 대가’, ‘엄청난 독서량과 천재적인 저술활동’, ‘대구유학의 중시조’ 등등...
이 중 우리 대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수식어는 ‘대구유학의 중시조 한강’이라는 것이다. 성주출신인 한강이 우리 대구에 어떤 영향을 끼쳤기에 중시조라는 별칭이 붙었을까?
조선 중기 영남학파는 크게 ‘퇴계학파, 남명학파, 한강학파, 여헌학파’로 구분할 수 있다. 영남지역을 좌우로 양분하는 낙동강을 끼고 ‘퇴계학파’는 경상좌도, ‘남명학파’는 경상우도, ‘한강학파’와 ‘여헌학파’는 낙동강 중류지역을 그 학맥권에 두고 있었다. 대구는 지리적으로 경상좌우도의 경계지점에 있으면서 동시에 낙동강의 중류, 곧 영남의 중심부에 위치했다. 이러한 지리적 특수성에 기인하여 대구의 학풍은 ‘퇴계학파, 남명학파, 한강학파, 여헌학파’가 모두 공존하는 특징이 있었다.
▖16세기 초·중반: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공존
▖16세 후반-17세기 초반: 한강학파 주도하에 여헌학파 공존
▖17세기 중반 이후: 퇴계학파
대구유학의 절정기는 ‘한·려학파’가 득세를 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으로 볼 수 있다. 이 시기는 「대구유림 2세대」 그룹에 속하는 ‘서사원, 손처눌, 이주, 곽재겸, 류요신, 정광천’ 같은 인물들이 활동을 하던 때이다. 대체로 이들은 임란을 거쳐 광해군대(1609-1623)에 말년을 보낸 인물들로서 ‘퇴계학파·남명학파·한강학파’의 성향을 함께 지닌 인물들이었다. 이는 영남의 중심이자 낙동강 중류지역이라는 지리적 이유와 함께 ‘한강 정구’라는 인물의 등장에 기인한 바가 컸다.
한강은 성주 출신으로 20대 초에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의 양 문하에 나아간 인물이다. 내외의 여러 관직을 두루 거치고 대사헌으로 있던 1608년(광해군 즉위년)에 ‘임해군 역모사건’과 관련해 소를 올리고 성주로 낙향했다. 그 뒤 1610년에 일어난 ‘한강 무고사건’의 영향으로 2년 뒤인 1612년(광해군4), 그의 나이 70세 때 고향인 성주를 떠나 칠곡(대구)의 노곡으로 이거했다. 2년 뒤 노곡정사의 화재로 평생의 저술을 비롯한 만권서책이 모두 한줌의 재가 되는 큰 아픔을 겪었다.
1614년 한강은 다시 인근의 사수동으로 또 다시 이거했다. 당시 서사원, 손처눌 등의 대구유림들은 한강의 ‘노곡·사수 이거’ 와는 상관없이 그 이전부터 이미 성주의 한강 문하에 출입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퇴계와 남명’ 양 선생의 학맥을 이어받은 대학자 정구가 대구에 정착하면서 대구유림은 급속하게 한강학파로 전도되는 양상을 보였다. 그와 동시에 구미출신인 장현광(張顯光·1554-1637)도 대구유림과 활발한 사우(師友) 관계를 맺었다. 따라서 당시 대구의 학풍은 한강학파 주도하에 여헌학파도 함께 성장을 했다. 참고로 「회연급문록(檜淵及門錄·정구의 제자록)」에 등재된 한강의 문인 342명 중 우리 대구지역 출신 33명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곽재겸(현풍), 서사원(달성), 손처눌(일직), 정광천(동래), 손처약(일직), 채몽연(인천), 손린(일직), 채선수(인천), 이윤우(광주), 채선길(인천), 유시번(문화), 도성유(성주), 이문우(광주), 박수춘(밀양), 도응유(성주), 도여유(성주), 채선견(인천), 정기(동래), 채선근(인천), 도언유(성주), 서사선(달성), 최동율(경주), 최동집(경주), 박종우(순천), 채무(인천), 이도창(광주), 도경유(성주), 도신수(성주), 도신징(성주), 이도장(광주), 배경가(성주), 최흥국(경주), 서시립(달성)」
한강공원에서 우리 할배를 찾아보자
사수동 한강공원 주진입로 입구에는 「한강근린공원」이라는 큰 표지석이 하나 서 있다. 이 표지석의 뒷면에는 무려 357명의 명단이 관향과 함께 새겨져 있다. 이른바 한강선생 제자록인 「한강급문제현록(寒岡及門諸賢錄)」이다. 한강선생 제자록은 본디 성주 회연서원에 있었던 「회연급문제현록」에서 출발했다. 「회연급문제현록」 당시에는 인원이 50여명에 그쳤다. 하지만 이후 수차례 추가 작업을 통해 최종 342명으로 정리가 되었다. 현재 사수동 한강공원의 제현록에는 여기에 15명이 더 추가되어 총 357명이 등재되어 있다.
아무리 큰 스승이라 해도 제자가 끊기면 그 스승의 학맥도 끊어지는 법이다. 퇴계의 3대 제자라 불리는 ‘학봉, 서애, 한강’ 중 가장 큰 학맥을 이룬 것은 한강학맥이다. 학봉은 임난 중에 순국했고, 서애는 오랜 관직생활을 한 탓에 유명세에 비해 큰 학맥을 형성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사실상 현재 대구유림의 뿌리는 한강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대구유학은 한강 정구라는 걸출한 인물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그에 의해 조선중기 대구유림 2세대를 이끈 ‘낙재 서사원, 모당 손처눌, 괴헌 곽재겸, 태암 이주, 연당 류요신, 낙애 정광천’ 같은 인물들이 배출될 수 있었다. 2세대는 3세대로, 3세대는 다시 4세대로...
현재 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거의가 다 그 선조들 중에 반드시 한강선생의 제자가 있다. 뭐 그렇기까지야 하겠는가? 싶겠지만 이는 엄연한 사실이다. 의심스럽다면 한강공원의 「한강선생급문제현록」을 한번 살펴보시라. 친절하게도 가나다순에 본관까지 기재가 되어 있어 찾기도 쉽다. 이런 의미 있는 표지석에서 우리 할배의 휘자를 발견하는 재미도 가히 솔솔할 것이다.
한강공원 돌아보기
한강공원은 아직 준공식은 하지 않았다. 내년인 2015년에 한강공원의 랜드마크인 「사양정사」의 낙성고유제를 겸해 계획 중에 있다고 한다. 그렇다고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현재 상태만 해도 한강선생을 추모하며 둘러보기에는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다. 공원의 볼거리는 크게 ‘사양정사’, ‘섬뫼숲’, ‘시비’, ‘무흘구곡(실개천)’, ‘관어대’ 정도를 들 수 있다.
1. 사양정사
‘사양정사(泗陽精舍)’는 앞서 잠깐 언급한 적이 있다. 한강선생 만년의 ‘강학소’이자 ‘휴식소’였다. 지금 한강공원에 복원된 사양정사는 ‘섬뫼숲’ 정상부에 자리하고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 겹처마에 풍판을 단 맞배지붕으로 누정형식을 취하고 있다. 정면만 예로 들자면 말이 3칸이지 기둥간 거리가 멀어 실제로는 5칸 건물과 맞먹는 규모이다. 이 건물은 현재 칠곡군 신동의 웃갓에 남아있는 ‘사양서당’의 강당을 모델로 하여 복원한 것이라고 한다.
신동의 ‘사양서당’은 본래 이곳 사수동에 있었다. 한강선생 사후 30년이 흐른 뒤인 1651년(효종2)에 사수동 향인들이 한강선생을 추모하여 건립했다. 이 사양서당은 1694년(숙종20)에 지금의 신동으로 이건, 사양서원으로 승격이 되었다. 그 뒤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현재 남아 있는 강당건물을 제외한 사당, 폄우재, 정완재, 봉하문, 양현청주고 등이 모두 헐렸다. 참고로 사양서당 강당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런데 신동의 사양서당 강당과 이를 모델로 하여 복원된 사수동의 사양정사는 실제로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사양서당은 정면 5칸에 좌우 1칸씩은 방, 가운데 3칸은 대청이다. 전형적인 서원 강당의 형태이다. 하지만 사양정사는 칸수는 고사하고 방 없이 사방이 툭 터진 누정의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양정사라는 재호(齋號·요즘의 문패)는 금호강을 ‘사수’에 비유한 표현이다. ‘산남수북(山南水北)’이라는 말이 있다. 산은 남쪽이 양이요, 물은 북쪽이 양이란 의미다. 따라서 사수(금호강)의 북쪽에 있는 집이란 뜻이 된다.
정서향을 하고 있는 「사양정사」에 오르면 정면으로 3개의 편액(扁額·현판)이 보인다. 좌측에서부터 「지경재(持敬齋)」, 「명의재(明義齋)」, 「경회당(景晦堂)」의 순이다. 옛 사람들의 ‘호’ 또는 ‘편액’ 같은 것은 절대 쉽게 보면 안 된다. 이는 수백글자의 의미를 단 몇 자로 압축한 한자문화권의 독특한 ‘상징·암호’이기 때문이다. ‘경’이라는 글자는 퇴계선생을 상징한다. ‘의’는 남명선생, ‘회’는 주자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런데 눈 밝은 이는 편액의 위치가 눈에 거슬릴 것이다. 유교에서는 사람은 물론 사물에도 위계질서를 부여한다. 다시 말해 편액의 서차(序次·순서)에 문제가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필자가 관계자에게 문의해본 결과 이러한 회신을 받았다.
‘신동의 사양서당 강당의 편액 위치 그리고 한강문집의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
말인즉슨, 방과 대청으로 이루어진 사양서당 강당의 편액위치를 기준으로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곳 사양정사는 방이 없는 구조이다 보니 하는 수 없이 동·서만을 고려하여 걸었다는 것이다.
한편 사수동의 오리지널 사양정사 터는 현재 공사 중인 LH공사 아파트 부지에 편입되었다. 그래서 부득이 인근의 섬뫼숲 정상에 복원이 되어 있는 것이다.
2. 섬뫼숲
섬뫼(蟾山)는 ‘두꺼비산’이라는 이름이다. 사수동의 ‘마을숲’으로 풍수적·생태학적 측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본래는 숲의 규모가 컸다. 개발이전까지만 해도 금호강 건너편에서 사수동을 바라보면 철모를 엎어 놓은 형상의 이 섬뫼숲이 제일 먼저 시선을 사로잡았다. 요즘말로 사수동의 랜드마크였던 셈이다.
마을숲인 섬뫼숲의 중요성은 3가지 정도의 관점에서 살펴볼 수 있다.
○ 풍수적 관점
‘수구막이’로써의 중요성이다. 배산임수라는 지형은 뒷산에서 흘러내린 여러 물줄기가 마을 앞에서 모여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는 특징을 지닌다. 이때 물이 빠져나가는 방향이 휑하니 열려 있으면 좋지 않다고 본다. 그곳을 통해 마을의 지기(地氣), 복록, 재물, 번영 등의 기운이 빠져나간다고 보기 때문이다. 한편 외부의 좋지 못한 기운들은 반대로 그곳을 통해 마을 안으로 유입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전통마을에는 수구막이로써의 마을숲이 있는 것이다.
○ 생태적 관점
마을숲은 기본적으로 마을생태를 공유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쉼터가 된다. 동식물은 물론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즉 생물다양성을 증진시키는 중요한 산실인 것이다. 또한 마을숲은 마을 밖으로 빠져나가는 물을 적절하게 막음으로써 마을 내에 수량을 풍부하게 한다. 반대로 마을 밖에서 들어오는 바람이나 범람하는 물은 막아주기도 한다. 금호강은 동에서 서로 흘러 낙동강으로 합류한다. 그런데 사수동 앞에서는 약간 북쪽으로 곡선을 그리며 지나간다. 다시 말해 강물이 마을을 안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등을 돌리고 지나는 형국이다. 금호강의 수량이 늘어나면 결국 사수동은 범람의 위기를 피할 수 없다. 하지만 이 섬뫼숲이 마을 입구에 서서 방수림의 역할을 해내고 있는 것이다.
○ 전통문화적 관점
마을숲은 전통적인 토착신앙에 근거해 대부분이 ‘당산’의 지위를 가지고 있다. 서양에서도 숲의 정령들을 운운하듯, 마을숲에는 마을신이 깃들어 있다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마을주민 전체의 축제인 ‘동제’ 등이 마을숲에서 거행된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마을숲은 성스러운 공간 곧 마을의 ‘성지’인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섬뫼숲은 택지개발로 사양정사가 복원되어 있는 정상부일대를 제외하면 모두 깎여나갔다. 하지만 하늘이 도운 것일까?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은 숲 정상부만으로도 옛 섬뫼숲을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는 있다. 현재는 수령 100년 전후한 토종 소나무만 남기고 잡목들은 정리가 된 상태이다.
이제는 ‘제2기 섬뫼숲 시대’가 시작될 것이다. 한강공원과 함께 유지관리가 잘 된다면 ‘사수동의 섬뫼숲’을 넘어 ‘대구의 섬뫼숲’이 되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3. 시비(詩碑)
「한강공원」에는 성주의 ‘무흘구곡(武屹九谷)’을 본떠 조성한 조그만 인공 실개천이 있다. 이 도랑을 따라 모두 10개의 시비가 세워져 있다. 본래는 8개였는데 뒤에 2개가 추가되면서 10개가 된 것이다.
첫댓글 봄에 여기서 대구풍물굿한마당 전체 길놀이 연습했습니다..
한강공원이 정식 개장전이라서 덕분에 맘 것 풍물을 울리고 막걸리 한잔 하던 곳입니다.
앞으로 대구의 역사와 인문학 그리고 대구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살아있는 유명장소가 되겠지요!
특히나 봄이면 매화(한강 정구선생께서 매화를 사랑하시어 주변에 매화를 많이 심었다고 합니다.)가 만발하는 아름다운 공원이 될 겁니다
그날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던 이곳을 누가 잘 정리 해 놓았내요 즐감 하세요.
한강선생님에 대한 열정 대단하십니다.
그 제자였던 낙재할아버지를 찾아 여기까지 와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언제....만남을 가져 술한잔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
@徐輔均(현감26세) 서낙재선생님은 정한강선생님을 얘기 할 때 뺄 수 없는 중요한 분이시지요 더구나 두분의 일화도 많고 특히나 서낙재선생님께서 정한강선생님을 위해서 하신 정성과 역활은 영남지역에서는 누구나 아시는 미담입니다.
서낙재선생님의 학문과 업적도 제대로 평가 받아야 하는데...
앞으로 좋은 인연이 있으리라 기대 합니다.
@얼씨구 한강선생님에 이어서 오늘날에도 그 후손님에게 많이 배워야 겠습니다. ^^
좋은 인연 기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