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나눔_코로나 사태와 굶주림
마가복음 8:1-10
1. 그 무렵 사람들이 또 많이 모여들었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불러
2. "이 많은 사람들이 벌써 사흘이나 나와 함께 지냈는데 이제 먹을 것이 없으니 참 보기에 안됐다.
3. 그들을 굶겨서 집으로 돌려보낸다면 길에서 쓰러질 것이다. 더구나 그중에는 먼 데서 온 사람들도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4. 제자들이 "여기는 외딴곳인데 이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일 빵을 어디서 구해 오겠습니까?"하고 반문하자
5. 예수께서 "빵이 몇 개나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들이 "일곱 개가 있습니다." 하니까
6.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땅에 앉게 하시고 빵 일곱 개를 손에 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며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시키시는 대로 나누어주었다.
7. 또 작은 물고기도 몇 마리 있었는데 예수께서는 그것도 축복하신 뒤에 나누어주라고 하셨다.
8. 군중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주워 모으니 일곱 바구니나 되었고
9. 먹은 사람은 약 사천 명이었다. 그 뒤 예수께서는 군중을 헤쳐 보내신 다음
10. 곧 제자들과 함께 배를 타고 달마누타 지방으로 가셨다.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종교학부 학장인 바트 D. 어만 (Bart D. Ehrman, 1955년-)은 미국의 유명한 성서학자입니다. 뉴욕타임스에서 선정한 베스트셀러 <성경 왜곡의 역사>를 비롯하여 <하나님의 문제> <잃어버린 기독교의 비밀> <예수 왜곡의 역사> 등 20여권의 책을 썼죠.
그가 쓴 책 중에 <고통, 인간의 문제인가 신의 문제인가(2016. 12. 6)>라는 책이 있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절실한 주제인 고통의 문제에 대해 성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가를 분석한 책입니다. 바트 어만은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사고방식과 세계관을 결정짓는 데 큰 역할을 한 성서가 고통에 대해 어떤 답변을 내놓는지 살펴봅니다.
그는 ‘전능한 신이 있다면 왜 이렇게 많은 고통과 불행이 존재하는가?’를 살피면서 에피쿠로스의 오래된 질문을 상기시킵니다.
“신은 악을 없애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무능력하다. 능력은 있지만 그렇게 할 의지가 없는가? 그렇다면 그는 선하지 않다. 신이 능력도 있고 선한 의지도 있는가? 그렇다면 왜 이 세상에 악이 만연한가?”
이 세상에는 기아, 전염병, 가뭄, 허리케인, 대학살, 전쟁 등과 같이 우리를 괴롭히는 고통이 너무도 많습니다. 이 고통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누구는 종교에 귀의하고 다른 누구는 무신론자나 인도주의지가 됩니다.
‘고통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우리가 고통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고통은 신이 인간에게 내리는 징벌인가? 고통은 다른 사람의 죄가 불러온 결과인가? 신이 신앙을 시험하려는 것인가? 악의 세력이 세상을 장악하였기 때문인가?’
바트 어만은 고통에 대한 성서의 해석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우리의 이웃들이 겪는 고통에 무심해지지 않기를 촉구합니다. 인간의 삶에서 가장 절실한 주제인 고통의 문제에 대해 우리는 어떤 해답을 찾을 수 있을까요?
구약의 저자들에게 고통은 신의 징벌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전능하고 선한 존재지만 사람들이 그의 법을 어기고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고통을 내려 다시금 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려 한다는 게 이들의 생각이었던 거죠.
그렇다면 선한 사람들이 고통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성서는 불의한 사람들 때문에 선한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지만 하느님은 그 불의한 자들을 벌한다고 말합니다. 혹은 선한 사람의 고통을 통해 더 큰 선이 오기도 한다고 말합니다. 요셉은 형제들에 의해 이집트로 팔려가 지만, 이집트의 총리가 되어 이스라엘 민족이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이주할 수 있도록 합니다. 때로 고통은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라고도 말합니다. 하느님은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가진 재산과 자녀를 모두 빼앗고 급기야는 욥을 병들게 합니다. 하지만 욥의 고통에 대해 하느님은 충분한 보상을 해줍니다.
구약시대를 마감할 때까지 온갖 고통과 벌을 다 받았음에도 좋은 세상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성서 저자들은 고통을 받는 이유가 하느님 때문이 아니라 세상을 장악한 악의 세력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습니다. 지금은 악의 세력 때문에 고통스럽지만 언젠가 종말이 올 것이며, 그날 악의 세력은 심판받아 멸망하고 고통 받던 선한 사람들은 구원 받게 된다는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워졌으니 회개하라”고 외쳤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와 요한묵시록 역시 종말이 가까워졌으며 곧 신의 심판이 시작될 것이라 경고합니다. 신약의 종말론자들은 자신들이 죽기 전에 심판의 날이 올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이 다 죽어 사라져도 기대했던 종말은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고통 받는 자들의 구원 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천국과 지옥의 교리가 탄생합니다. 심판은 살아있을 때 받는 것이 아니라 죽고 나서 받는다는 것이죠. 예수를 믿고 선하게 산 사람들은 사후 세계의 심판에서 천국으로, 악한 자들은 영원한 지옥 불에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바트 어만은 구약과 신약의 고통에 대한 해석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고통이 죄에 대한 신의 벌이거나 신앙에 대한 시험으로 볼 수 없다는 거죠. 다른 누군가의 고통이 더 큰 선을 가져온다는 것도, 언젠가 하느님이 나타나 심판과 보상을 할 것이라는 종말론적 관점에도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고통에 대한 책임을 뒤로 미뤄버리는 것이며, 고통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고통에 대한 성서의 해답이 없는 것일까? 바트 어만은 고통에 대한 해답을 전도서에서 찾습니다. 전도서는 허무한 인생을 직시하며 지금 누리는 삶에 만족하라고 가르칩니다. 바트 어만은 이러한 전도서의 생각에 동의하며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보다 좋고 행복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고통의 원인과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간이 당하는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 가능한 한 자신의 인생을 즐겁게 사는 것이 고통에 대한 최선의 대응이라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력 일간지 ‘Die Zeit’가 지난 5월1일 “기아: 다른 유행병”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냈습니다. 북반구의 국가들은 코로나19로 인해 인명과 경제적 타격을 받고 있지만 남반구 국가,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은 더 이상 원조를 미루어서는 안 되는 심각한 기아 위기를 겪고 있다는 것이죠. 전 세계적 봉쇄 조치의 결과로, 30개 이상의 국가에서 수백만 명의 사망자를 초래하는 굶주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기사에 의하면 현재 8억 2천 2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합니다. 2013년에 7억7천5백만 명이었는데 지금은 1억 3천 5백만 명이나 늘었습니다. 더군다나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 일부는 전쟁과 내전으로 더 큰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현재 동아프리카에서는 메뚜기 떼가 창궐하고 있으며 다른 국가들은 앞서 언급한 모든 위기를 겪고 있습니다. 여기에 코로나19 대유행으로 인해 단행된 국가 봉쇄 조치는 이러한 굶주림을 가속화시키고 있습니다. 농부들은 경작을 하지 못하고 상인들은 시장의 폐쇄 조치에 따라 판매를 할 수 없습니다. 전 세계 빈곤 국가들에서는 굶주림으로 인한 폭동이 빈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Die Zeit’는 세계 원조국들의 협조가 절실하다고 강조합니다. 세계식량기구 책임자인 데이비드 비슬리는 코로나 관련 유엔 안보리 화상 회의에서 “코로나19 전염병으로 최악의 경우, 몇 달 안에 매일 30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총 3천만 명 정도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습니다.
2015년 유엔 파리기후협약에서 기아 퇴치를 약속했던 제1세계 국가들이 약속한 원조에 나서지 않는다면 끔찍한 결과를 우리 눈으로 목격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말씀은 보리떡 7개와 물고기 2마리로 4천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 6:35-44의 오병이어 사건과 흡사한 내용입니다. 이 기적들이 일어난 지역을 보면 오병이어의 이야기는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 곳이고, 7병2어의 이야기는 이방인들이 많은 곳입니다.
이야기 내용은 이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며 3일간을 지냈는데 먹을 것이 없어 쫄쫄 굶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사흘 동안이나 먹지 못하고 지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려면 먼 길을 가야할 사람들도 있는데, 그냥 돌아가다가는 길바닥에 쓰러져 큰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 이들을 어떻게 해서라도 요기를 해서 보내야겠다. 불쌍해서 볼 수 없구나.’
제자들은 이 광야에서는 저들에게 줄 음식을 찾을 수 없다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제자들이 지금 갖고 있는 음식이 얼마 있는가를 묻습니다. 제자들에게 남은 것은 보리떡 일곱 개와 몇 마리 생선이 전부였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음식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기도를 드린 후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명하십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거기 모인 4천명쯤 되는 사람들이 충분히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일곱 바구니나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시고 제자들과 함께 달마누다 지방으로 가십니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어떤 방법으로도 해결될 수 없는 굶주림입니다. 이 굶주림의 문제에 예수님의 해결책은 무엇인가요? 제자들이 내놓은 일곱 개의 떡에서 해결책이 나오는데 그 의미를 살펴봅시다.
1. 굶주림의 문제는 나눔의 문제입니다.
일곱 개의 떡은 근본적으로 우리에게 나눔의 삶이 무언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약 제자 중에 어느 누가 이 떡을 감추어 두고 내놓지 않았다면 그 당시 굶주림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앞의 ‘Die Zeit’의 기사에서 현재 지구상에는 8억 2천 2백만 명의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최근 통계에 의하면 먹지 않고 전 세계에서 버려지는 음식물은 1/3정도이며 돈으로 따지면 4천억 달러(438조 원)이상이 된다고 합니다. 이는 기아에 허덕이는 전 세계 8억7천만 명을 먹여 살릴 수 있는 막대한 규모라고 유엔 식량농업기구(FAO)가 지적했습니다. 이런 추세는 계속되어 2030년에는 버려지는 음식물이 6천억 달러(657조원)에 달할 것이라고 합니다.
잘 사는 나라에서 버려지는 음식물만 나눈다 해도 굶주림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미국이나 프랑스 개들이 먹어대는 통조림 소고기만 절약한다 해도 아프리카 어린아이들의 영양실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하니 나눔의 문제는 공존의 지혜이기도 합니다.
이번 코로나 팬데믹에서 보듯 나눔을 삶의 기초로 삼지 않는 다면 인류는 멸망으로 한걸음 다가설 수밖에 없습니다. 자국의 문을 닫고 홀로 살아남으려 한다고 팬데믹이 해결되지 않습니다. 소통과 나눔을 기반으로 한 전 지구적 협력이 필요합니다.
2. 나눔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일곱 개의 떡은 그곳에 모인 사람 수에 비하면 턱없이 작은 것입니다. 하지만 작은 나눔의 실천이 사랑으로 커져가니 4천명을 먹이고도 남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배고파 죽을 지경인데도 자신들의 먹을 것을 내놓는 예수님의 사랑에 거기 모인 군중들은 격한 감동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작은 나눔의 실천에 동참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작은 나눔의 실천이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세계의 굶주림을 종식시킬 하나님의 능력이 될 것입니다.
5.18 광주민중항쟁 때 광주시민들이 자발적 나눔을 기억합니다. 시민군에게 뿐만 아니라 계엄군에도 정성스런 음식이 나누어졌습니다. 40년이 흐른 오늘 우리가 구가하고 있는 삶은 그 나눔과 피흘림의 결과물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광주의 진실이 밝혀지고 신군부의 죄상이 낳낳이 밝혀져 광주의 명예가 회복되고 군부독재의 잔재가 말끔히 청소되길 기도합니다.
자신의 삶속에서 작은 나눔을 실천하려 결단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2020. 5. 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