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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7 시흥동 성당
본당 약사
1952년-대림동 분당 시흥 공소 설치
1968.-대방동 본당으로 인관 (시흥동 자치 공소)
1970.01.05.-성당 부지 마련 (시흥2동 184, 185번지 대지 706평, 교구청에서 매입)
1970.09.20.-사제관 완공 (건평 24평, 공사비 140만원)
1970.12.20.-성전 완공 (건평 48평, 공사비 130만원)
1971.09.21.-시흥동 본당 승격
1971.10.30.-초대 주임신부 이기명(프란치스코) 신부 부임 구성전 축성 (노기남 대주교 주례)
1973.06.-제 2대 주임신부 임덕일(아마뚜스) 신부 부임
사목회 구성, 초대회장 정순교(토마스) 임명
1975.11.16.-제 3대 주임신부 이문주(프란치스코) 신부 부임
1976.06.-제 2대 사목회장 권대복(아오스딩) 임명
1976.11.독산동 지역 분리 결정
1977.10.23.-새선전 신축 부지 매입(현위치)
(대지 640평, 공사비 63,810,000원)
1977.11.15.-성전 기공식 (경갑룡 주교 주례)
1978.05.14.-신축성당 지하실에서 첫미사 봉헌
1978.06.24.-제 3대 사목회장 김중권(베드로) 임명
1979.02.-제 4대 주임신부 최서식(라우렌시오) 신부 부임
1979.06.-제 4대 사목회장 김병기(베드로) 임명
1980.01.-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성전 축성 (연건평 513평, 총공사비 233.746.340원)
1980.11.23.-제 5대 사목회장 권대복(아오스딩) 임명
1980.01.-제 5대 주임신부 전창문(기브리엘) 신부 부임
1982.09.09.-제 6대 사목회장 황석근(베드로) 임명
1984.01.-김수환 추기경 주례로 삼위일체 기념관 낙성식
(연건평 264평, 총공사비 159,000,000원)
1984.02.04.-초대 보좌신부 김승구(마르띠노) 신부 부임
0984.05.11.-지하 교리실 개수공사 완공
(총 공사비 120,000,000원)
1985.12.-제 7대 사목회장 권택진(사비노) 임명
1986.02.01.-제 2대 보좌신부 서경룡(아오스딩) 신부 부임
1986.03.07.-성당 확장 부지 매입 (79평 154,000,000원)
1987.03.31.-제 6대 주임신부 김수길(루도비꼬) 신부 부임
1987.09.04.-강원도 함백 본당과 자매결연
1988.01.01.-지속적인 성체조배 실시
1976년 6월 15일, 시흥동 성당 주임 신부님들이 오고 가셨고, 권대복 아오스딩이 총회장직을 맡게 된다. 새로 오신분은 이문주 프란치스코 신부님, 1972년에서 3년간 독일 프라이브르크 대학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할 때 마음에 지닌 포부가 유별난 분이셨다. 귀국하여 사목할 때는 서울에서 가장 낙후된 성당에 가셔서 일하고 싶다고 교구장님께 자청하신 분이셨다. 교구장이신 추기경님께서는 시흥동 성당을 추천하시어 그는 결심하게 된 것이었다.
우리 시흥동 본당은 서울 변두리의 작은 마을로 원주민보다 이주민이 더 많은 지역으로 정말 낙후된 곳이었다. 이문주 프란치스코 신부님은 아무도 모르게 시흥동 답사를 마치고 돌아 와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추기경에게 신고를 마친다. 신부님은 부활 첫 소감으로 새 성전 건립을 결심하신다. 그러나 이 일은 현지 여건상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흥 지역은 허허벌판 이었고, 주민들은 대부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난민촌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지역에서 자발적으로 성전 건립을 한다는 것은 정말 어렵고 힘든일이 아닐 수 없었다. 취임 첫해 신부님은 허술한 가게 하나를 전세를 내어 집무실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신다. 이 곳은 환경이 열악하여 수돗물도 나오지 않아 이웃하는 신자의 도움을 많이 지게 되었고, 화장실까지 신세를 형편이었다. 함께하는 이웃 젊은 부부는 신자로서 피아노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곳의 생활은 매우 불편하고 힘들었으나, 이미 결심한바가 있어서 잘 견디어 내고 있었다.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신자들과 하나가 되는 일이었고, 그 안에서 보람을 찾는 일이었다. 본당 신부님이 제일 먼저 시작한 사목은 주일학교 운영이었다. 먼 앞을 바라보고 본당 운영의 중심이 되는 미래 일꾼 양성에 방점을 둔것이었다. 신부님은 즉시 이 일을 시작하셨고, 한편으로 교사들에게 교리 상식, 성서 주해등을 강의하셨다. 당시 지도부 구성은 아래와 같았다.
지도 신부-이문주 프란치스코
지도 수녀-진 안젤라
교사-이수진 요한
교감-최창춘 라파엘(중등부), 공석(초등부)
당시 성당은 매우 협소하여 교육장으로 쓰기에 불편하였다. 성당 주변 신자들의 집을 빌려서 주일 학교를 꾸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다행이도 신자들 열성이 높아 자신들의 안방까지 서슴어뵤이 내 주는등 열성이 지극 정성이었다. 신부님 역시 전체적인 본당 개척을 착수하셨다.
새 성전 건립 계획
본당 신부님(이문주 프란치스코)은 1977년 1월 4일, 사목회 협의회에서 새성전 건립을 위한 준비의 해로 선포하시고 권대복 아오스딩 회장과 임원등을 고무(高撫) 시킨다. 성전 건립에 앞서서 신자들 교육이 선행(先行)을 결심하고 5회에 걸처 본당 세미나를 개최하였고, 10개 팀의 성서 연구반을 구성하여 신자 교육에 매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동안 고생하셨던 수녀님의 이취임이 실시되었다.
1977년 7월 8일, 사실로 잊지 못할 참극이 시흥동 일대에서 일어났다. 이틀동안 호우가 쏟아져 내려 시흥2동 일대가 홍수가 나고, 산사태가 일어나 가옥 파괴가 심했고, 60여명의 사상자와 부상자가 속출한 겄이다. 엄청난 재난이었다. 저지대는 집들이 유실되거나 파괴되어 집체만한 돌덩어리들이 굴러와 난장판이 된 것이다. 본당 신자 13세대가 이 안에 포함되었다.
7월9일, 본당 사목회는 각 단체장 및 반장들의 긴급 회의를 소집하고, 본당 신자 구호품을 포함, 이재민을 돕기위한 단체별, 개인별 임무를 전하며 봉사 활동을 전개하였다.
7월 17일, 김수환 추기경, 경갑용 주교 및 도세나 루이지 교황 대사 일행이 본당을 방문하시고, 수재 현장을 답사하여, 이재민을 위로하고 의약품, 식료품을 전달하였다. 또한 서울의 각 본당과 사회 각계 각층 단체로부터 많은 위로품과 선물이 답지(遝至)되었다.
*성당 신축 허가
수해 복구가 어느 정도 정리되자 성당 신축 논의가 다시 되었다. 1977년10월, 본당 주임 신부는 인사 문제를 마무리 하여
총회장-권대복 아오스딩, 부회장- 류인섭 시몬, 그리고 4개 분과위와 분과장을 임명했다. 곧 이어 신축 기성회를 조직하고 본격적인 본당 신축 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교구에서는 성당 신축 문제에 매우 부정적이었다. 성당 건축은 불가능하다는 반응에 본당 신부(이문주 프란치스코)는 뚝심을 발휘하여 서울 교구나 다른 본당에 일체 원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내세워 억지로 허가를 받아 내었다. 이문주 프란치스코 신부는 기성회 임원들과 회합에서 ‘몇년이 걸리더라도 우리 성당 건축은 반드시 우리 손으로 해낼 것이라는 결의를 표명하였다.
이 즈음 시흥은 많은 인구가 급증하여 기존 성당은 협소하여 새 성당 건축이 시급한 문제, 당면 과제로 제기되어 갔다. 현존 성당은 통행로가 협소하여 구급차, 영구차 통과 어려운 상태였었다. 부득히 새 성전은 다른 부지를 구입해야만 했다. 그러나 문제는 기금 이었다. 어떻게 마련하지? 주임 신부님은 단안을 내렸다. 오직 노력 봉사뿐이다. 매서운 결심이었다. 1977년 5월, 어느 주일 미사때였다. 평신도 대표 권대복 아오스딩 사목협의회 회장의 중대 발표였다.
신자 여러분! 우리 시흥동 천주교회, 새 성전을 짓습니다. 이 소리에 신자들의 우뢰같은 박수 소리에 천지가 진동했다. 얼마나 목 말랐으면~~!
*본당 부지 물색
권대복 아오스딩은 하번 결심한 것은 좀체로 멈 추는 법이 없고 밀어 부치는 성격이었다. 성전 신축지 구입이 시급했다. 시흥동 땅은 넓고, 공터는 많았지만 개발지역 이라는 점에서 땅값은 만만치 않았다. 모두 고가(高價)였기 때문이다. 이 일에 대한 책임자로 선정된 사람은 사목회장 권대복 아오스딩과 사무장 정인영이었기에 남다른 발품을 많이 팔았다. 그러던 중 적당한 땅을 찾아 냈다. 그곳은 포도밭 농장으로 지대가 높아 가격도 저렴할 뿐만아니라 크기도 적당했다. 일단 지주와 부딯쳐 보았고 드디어 합의에 이르렀다. 땅은 결정되었지만 자금이 문제였다. 금고는 텅빈 상태였다. 당장 필요한 자금이 적어도 억대 정도 였는데 이를 어쩌나...
*구세주 할머니
어느날, 할머니 한 분으로부터 권대복 아오스딩에게 전화 한통이 걸려 왔다. 식복사 할머니였다.
’회장님, 제 집에 한번 와 주셔요.‘ 하시기에 권대복 회장이 자전거를 타고 식복사 할머님 댁으로 달려 갔다. 이 할머니는 70대 노인으로 사고무친(四顧無親-의지할 때가 전혀 없는 사람), 혼자 사시는 분이었다. 고향이 북한 땅, 한국 전쟁때 홀로 남하 하셔서평생 동정녀로써 오직 하느님만 의지하며 사신 분이었다. 권회장을 맞이한 식복사 할머니는 대뜸 말씀하시기를
‘새 성전 지으신다는 말씀 이신가요?’
‘그렇습니다.’ 권회장이 대답하자 이 할머니가 농문을 열더니 맨 밑바닥에서 주머니를 꺼내더니 말없이 내미는 것이었다. 뭘까? 하고 열어보니, 몇 번이고 겹치게 싸고 싼 수건 속에서 새 지폐 뭉치가 쏟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그 당시 231,000원 할머니로서는 정말 거금이었다.
‘회장님, 이돈 성당 짓는데 부태여 쓰십시오.’ 권회장은 어안(御鞍)이 벙벙했다.
‘할머니, 이러시면 안됩니다. 할머니 혼자 사시는데 병이 나시면 병원에 가실 돈도 있어야 하고, 돈 쓰실 일이 한 두가지 아닌데 다 주시면 어떻게 사시려고 합니까? 이돈 일부만 받겠습니다. 나머지는 잘 간수하십시오.’ 했더니 역정을 내시는 것입니다.
‘회장님, 섭섭합니다. 나는 이북 땅에서 내려와 혼자 살며 하느님 은혜를 많이 받고 살았습니다. 늙도록 신부님 시중을 들게 된 것은 하느님 뜻이었고, 매사 하느님 은혜였는데 하느님 사업에 모아 논 돈 쓰겠다는데 왜 거절하십니까? 정말 섭섭합니다.’ 권회장은 하는 수 없이 이 돈을 받아들고 사제관으로 가 신부님께 모든 것을 말씀드렸더니, 신부님이 눈물을 글썽 거리시면서 다음 미사때 회장님이 신자들 앞에서 발표하십시오. 그래서 주일 미사후 권회장이 앞에 나가서 색동주머니를 흔들며
‘누구의 것인지 아십니까? 이 안에 213,000원이 들어 있습니다. 이 돈은 식복사 할머니가 일생 동안 모으신 전 재산입니다. 내게 이 돈을 주시면서 새 성전 건립에 쓰라고 주셨습니다. 여러분, 식복사 할머니 은혜 잊지 맙시다.’ 이 말에 성당안이 침묵속에 가라 앉으며, 여기저기 훌쩍이는 소리....., 결국 이 할머니 덕택으로 성전 터를 구입할 수 있었고, 231,000원, 그것은 시흥동 성당 새 성전 건설에 초석이 되었던 것이다.
*설계에서 기공식 까지
어느날 이문주 프란치스코 신부님이 권회장님을 부르신다. 사제관으로 가보니 손님이 와 있었다. 강석원 교수로 성전 설계를 맡기실 분이었다. 권회장 역시 동의하였다. 그는 대한민국 건축 설계 전시회에서 대통령 상을 받았고, 부상으로 파리 유학을 다녀 온 사람이었다. 설계비는 이쪽 상황을 아시고 실비로 정하였으며, 발주를 했다. 돈보다는 뜻이 있는바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건축의 주제는 빛과 자연이었다. 종탑이 있으나, 종을 치기 위한 것이 아니고,하늘의 빛을 모아 선전 안으로 빛을 굴절 시키는 통로의 역할이었단다. 이 빛은 자연 스럽게 제대위로 쏟아 지도록 한 것이다. 성전 출입구는 성전 전체와 어울리는 것으로, 흡사 베드로의 천국 열쇠 모양을 하여 성전 존재의 상징성을 표현하였다. 또다른 상징성 표현은 성전 남쪽 벽의 스테인그리스였다. 이 작품의 아이디어는 당시 종교의 대가(大家)이신 서울대학교의 이순식 교수의 조언아래 강석원 교수가 설계를 한 것이다. 이 당시 주임 신부님은 4대 최서식 라우렌시오였다.
1978년 5월 14일, 기공식 날이었다. 이날, 성전 건축 기공식을 겸한 야외 미사가 있었다. 이 날은 시흥 성당의 공소 설립 16년째 되는 해요, 본당 설정 7주년 만의 쾌거였다. 이 자리에는 경갑룡 주교를 비롯하여 많은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성전 건립의 첫 삽질을 했다. 성전 규모는 1층 150평에 지하150평, 2층 231평 총 531평, 당시 성당 규모로는 매우 큰 건물이었다. 이전의 41평 성전에 비하면 대 궁전인 것이다.
이윤주 신부님을 비롯하여 본당 기성회는 송사 자금 모으기 위한 운동에 총력을 다하고 있었다. 신자들의 성금 신입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행사를 벌려 갔다. 첫 사업은 어머니들의 모임인 성모회의 젓갈 장사였다. 인천이나 소래 포구에서 젓갈을 대량 구입하여 소포장하여 판매에 나섰고, 소금, 멸치, 다시마, 참기를, 들기름등 돈이 되는 것이라고는 무엇이든지 하려고 했다. 이로인하여 남편들로부터 여자가 집안 살림살이 안 돌보고 밖으로 나돈다면서 가정불화까지 일어나가도 했지만, 일은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때때로 남자들도 적극성을 보여 모아진 돈은 모두 성전 건립 비용으로 충당 되었다. 본래 성전 건축 사업은 적수공권(赤手空拳-맨손과 맨주먹을 의미한 것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에서 시작한다는 뜻) 사업이었다. 그러나 힘을 모으면 못할 일이 없다는 생각으로 단결력을 보여준 사업이었다. 이 중에서도 특별한 분, 장현주 요한나를 중심으로 한 성모회 활동이 그것이었다. 요한나는 시흥 성당 공소 시절부터 성당일 이라면 빠짐이 없었 약방감초라는 별명의 아줌마였다. 성전 기금 마련을 위해 수녀님으로부터 미사보 만드는 기술을 전수 받아 신자들 상대로 팔았고, 각종 성물과 책을 판매하여 거금 일백만원을 봉헌하였다. 또 다른 그릅 김희연 안나 자매는 미숫가루 장사에 심혈을 기우렸다. 이미 봉헌금으로 마련한 50만원을 종자 돈으로 삼은 것이었다. 1976년 4월부터 장사를 시작하였는데 맛이 일품이었던 것이다. 물품은 본당과 타본당으로도 팔려 나갔다. 일을 하다보면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억측과 소문, 때로는 모함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모두 극복하고 시종일관 성전건립 기금 조성에만 집중했다. 그녀는 수천만원 성전 건립 기금을 봉헌하였다. 이 돈은 성전 건립 기금중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 것은 사실이었다. 결산 결과 거래 성당이 27개소, 소비한 곡물이 총 220가마, 통장에 쌓인 금액이 당시 집 여러채 값이 될 정도였다. 수입금 전액은 성전 건립 기금으로 투입되었다. 처음 시작은 일백만원이 목표였다. 결과가 이렇게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동안의 육체적 고통뿐만 아니라 가정을 제대로 돌보지 못하여 가족 모두를 고생 시킨 일이 아련한 추억으로 남았다.
*권대복 아오스딩 회장과 사목 위원들
권대복 아오스딩 회장은 시흥 본당이 가장 어렵고 힘들 때 회장직 임무를 수행하였다. 그는 맡은 일에 집중하며 박력있고 지속적인 추진력으로 새성전 건립을 최선을 다했다. 그는 모두에게 인정받는 최고의 본당 총회장이었다. 그가 늘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현재의 성당은 입구가 좁아서 영구차등이 진입하기가 불가능하다.
현재의 성당은 위치는 그런대로 적당하다. 그러나 앞으로 인구가 증가하고 신자수가 많아질 경우, 문제가 발생된다.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지가상승으로 인한 어려움이 발생하여 그때 가서는 성전 이전이 어려워 질 수 있다.(미리 문제를 예견한 안목이 보인 대목들이었다)
1979년 11월 20일, 공사는 마침내 완공되어 모두에게 큰 기쁨을 안겨 주었다. 무일푼으로 시작한 공사는 공사비 2억3천만원 이라는 믿지 못할 성과 앞에 숙연해지지 않을수 없었다. 1980년 11월 23일 축성일 날, 서울 대교구장 김수환 추기경이 경축식에서 하신 말씀,‘시흥동 성당에 기적이 일어났다.’ 이 한마디 말씀에 권대복 회장은 온 몸에서 그동안 쌓인 긴장이 아련히 녹아 내리고 있었다.
‘하느님, 저희들이 정말 해 낸 것 맞습니까?’하고 합장한다.
무(無)에서 유(有)로 창조케 역사하신 주님께 영광드립니다
주여, 영광과 찬미를, 주여, 영원히 받으소서.
시흥성당 신화(神話)
앞서서 시흥동 성전 건립 기금 식복사 할머니 이야기, 계속 이어 주시오.
사실 난 신부님께서 시흥 성당 성전 건축 문제 이야기 하고 난후 박수 소리가 너무도 열광적이어서 신입금 용지에 10만원 정도 생각했다가, 한 단위 올려 100만원을 써 버린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내가 그렇게 약속할 때에는 돈 많은 사람들 역시 나와 같을 생각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확인해 보니, ..3만, 5만등 예측과 전혀 다른 결과였습니다. 많이 속상했습니다. 나만 흥분한 모양입니다. 되돌릴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벙어리 냉가슴이었지요. 이때 식복사 할머니가 절 부른 것입니다. 자전거를 타고 할머니 댁에 갔습니다, 할머니가 농에서 꺼낸 색동주머니에 싸고 또 몇 겹이나 싼 새돈으로 291,000원, 이 돈을 제게 주시면서
‘회장님, 이 돈 성당 짓는데 써 주십시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할머니, 약 사서 드셔요, 할머니, 주변의 가족이 아무도 없지 않습니까? 지금도 골골하시는데 몸이 더 아프시면 어찌하시려고 그러하십니까? 이 돈으로 병원비 하셔요. 할머니, 제가 이 돈에서 십분지 일만 떼어 내겠습니다. 이거면 충분합니다. 남은 돈은 도루 넣으셔요.’ 하였더니, 할머니 바락 화를 내시는 거예요.
‘회장님, 내가 오늘 처음으로 하느님 한테 사랑을 드리려고 하는데 왜 거절합니까?’ 이러 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칠십이 넘도록 동정(童貞)을 지킬 수 있었던 것도 하느님 은혜입니다. 전쟁중에 고향인 이북 땅에서 죽지 않고 살아 넘어 온것과 이 나이 70을 넘어 살아 온 것도 하느님 은혜요, 병든 내가 신부님 식복사로 살아 온 것등 이 모두가 하느님 은혜였습니다. 내가 이토록 이나 하느님 은총 받고서도 단 한번도 하느님 은혜 보답한 일이 없습니다. 이 번에 성당을 지으신다고 하여 내 마지막 정성을 바쳐 하느님 사업에 도움을 주려하니 절대로 거절하지 마시고 요긴하게 써 주시기 바랍니다.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그래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서 손을 내 밀어 돈을 받으니, 손이 떨려요. 이 길로 나는 신부님 한테 말하기로 하고 사제관엘 갔어요. 그리고 자초지종(自初至終) 말씀을 드렸더니, 신부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눈물이 흘러요. 신부님 말씀이
‘이 일을 신자들 여러분 한테 전해 주십시오.’ 하셨어요.
‘ 예, 그게 좋겠습니다.’ 그래서 다음 미사 시간에 앞으로 나가서 할머니 색동 주머니를 흔들어 보이면서
‘여러분, 이것이 무엇인줄 아십니까? 이것은 식복사 할머니 돈주머니입니다. 이 안에는 식복사 할머니 전재산, 이십삼만천원이 들어 있습니다. 식복사 할머니는 평생 먹을 것 못 먹고 입을 것 못입고 쓸 것 안쓰시고 모으신 이 돈으로 성당 짓는 기금으로 써 달라 하시면서 제게 주셨습니다. 할머니는 자기의 모든 것을 하느님 사업에 바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랬더니 실내가 숙연해 지면서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끝내 울음바다가 돼 버려요. 이 모습을 내려다 보고 서 있던 나는 이 기회다 싶어
‘여러분, 여러분들도 어서 신입을 하셔서 식복사 할머니 부끄럽지 않은 사랑이 되십시오.’ 라고 했어요. 이래서 신입이 시작 되었는데 이날 신입한 기금이 무려 3천6백만원 이었어요. 우리 시흥동은 전체 가난한 마을이라서 많은 기금 모으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3천6백 만원이나 식복사 할머니의 231,000원은 지금 되돌아 보아도 보면 볼수록 거금은 확실합니다. 이런 돈이 하루에 신입되다니..., 아무리 보아도 믿어지지 않습니다. 우선 식복사의 돈으로 땅을 계약하고, 땅값을 치르기로 했습니다. 당시 땅 한평에 1만원 이었는데 조금 지나서 5만원으로 껑쭝 튀어 오릅니다. 그런데 그날 이후 식복사 할머니는 제 앞으로 편지 한 장 써 놓고서는 자취를 감추고 말았습니다. 내용인즉
‘회장님, 찾지 마십시오. 몸이 병든 내가 이 성당에 머물러 있다가는 성당 짓는 일에 걸림돌이 될지도 모릅니다. 저 홀가분이 떠 나오니 저를 찾지 말아 주십시오.’ 짧은 한마디, 이것이 식복사 할머니의 마지막 발자취였습니다. 신부님과 나는 몇 개월 동안 찾아 다녔지만, 종무소식에 허탕이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세월은 흘러가고 3년이 지나 시흥 성당은 준공을 마칩니다. 외부 도움 한푼도 없이 자체 힘만으로도 성당 건축 기금 만드랴 신자들 공을 잊을 수 없습니다. 성모 회원들이 머리에 물건을 이고 다니면서 행상으로 돈을 모았고, 미숫가루 장사 이야기는 시흥성당의 신활를 낳게 하였습니다. 돈이 없는 사람은 몸으로 노동을 하여 공사를 도왔고, 어린 학생들은 하교하면, 책가방 던져 놓고서 벽돌 한 장 나르면서 땀을 흘렸답니다. 마치 개미 역사하는 것과 같은 광경이었습니다. 이렇듯 한 마음, 한 뜻으로 이루어 낸 것이 우리 시흥 성당의 탄생인 것입니다. 완공하고 결산해 보니, 그때(1978년도) 3억7천만원이었습니다. 참으로 거금이었습니다.
준공식에 추기경님이 오셔서 시흥성당에 기적이 생겼다 하신 것은 이를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기적이 어디서 왔느냐고요? 옥합을 깨뜨린 그 식복사 할머니, 하느님께 드린 그 분의 지극 정성스런 사랑의 기적임을 생각할 때, 당시 내 마음 한없이 서글펐답니다. 내가 신자들 앞에서 그랬습니다. 우리 시흥동 성당에 기적이 왔다고 하는데, 이것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서 시작되었느냐? 그것은 식복사 할머니, 깨여진 옥합, 이 향기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할머니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여러분, 이 할머니를 위해 한번 이라도 기도한 적 있으십니까?
그리고 몇 달이 지나갔습니다. 어느 날, 외출에서 돌아오니, 편지 한 장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미국에서 온 편지인데 자세히 살펴보니 전혀 모르는 사람의 편지 였습니다. 개봉을 해 보니, 자기 소개가 있는데 자신이 식복사 할머니 조카랍니다. 전쟁이 났을 때, 고모님은 남한으로 가시고 자신은 어느 인정있는 미국인 병사를 만나서 미국으로 와 그의 도움으로 공부를 했고, 사업가가 되어 많은 돈을 벌었답니다. 그래서 단 한분의 고모님을 찾기위해 한국에 와 전국으로 살펴보니, 어느 수녀원에서 은거하시는 고모님을 기적적으로 만나서 미국으로 모셔왔고, 기금은 건강하게 지내시며, 손자들 보는 즐거움으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계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편지를 읽고 나서 나는 나도 모르게 오, 주여 감사합니다. 하며 감격스러워 울었답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위해 봉헌하는 사람들, 결코 버리시지 않고 반드시 당신 은혜속에 걷으신다는 것, 나는 식복사 할머니에게서 체험하였습니다.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성당 공사중 비용이 떨어질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럴때마다 십일조를 거두었습니다. 최소 두세번 씩을 그러 했습니다. 그때마다 불만이 터져요. 그도 그럴 것이 신자들의 생활이 어떠하냐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형편의 주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지나고보니 서너번씩 성당짓는데 돈 냈다고 굶어 죽는 사람 없었고 학자금 못내 학교 못다닌 사람 없었습니다. 병든 사람들은 성령으로 치유를 받았고, 사업 하는 사람들은 점차 일거리가 많아져 잘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인가 공사 비용이 바닥이 나, 신부님 모시고 가정 방문하기로 약속하고 시흥 2동으로 갔습니다. 이곳은 시흥동에서도 가장 가난한 지역이라서 선 듯 내키지 않았지만, 가난하다고 차별을 둘 수가 없었습니다. 비탈길을 오르다 보니, 신자 가정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들어 가자니, 정말 망서려 지는 것입니다. 이 집은 가장이 직업이 없고, 어느 공장에서 임시 청소부로 월 8만원 받아서 병든 아내와 나이가 지긋한 어머니, 그리고 세아이들 6식구가 살아가고 있는 가정입니다. 생활비 외에 병든 아내의 약값이 월 수 만원씩 들어가는 형편인데, 이런 사정을 알고있는 우리로써 건축 헌금 내라고 어떻게 합니까? 신부님도 나도 이 집을 지나쳐 가기로 하고, 앞으로 조금 가고 있는데 마침 가장되는 형제가 집에서 나오다가 우리를 발견한 것입니다.
‘아니 신부님, 회장님, 왠 일이셔요? 오셨으면 제 집도 들리셔야지요. 자 가시죠!’ 그래서 내가 나섰습니다.
‘조금 있다가 내려 오는 길에 들리려 했지 뭐!’ 하니 우리들 손을 잡아 끌며 안으로 들어 가는 것입니다. 하는 수 없이 따라 들어 갔습니다.
‘신부님, 회장님, 신입서 때문에 나오셨지요?’ 눈치가 족집게였습니다.
‘신입서 저에게도 주셔요.’하며 신입서 받아 돌아 앉아서 내용을 적고 도장까지 찍고나서 내 놓는 것을 자세히 보니, 일금 50만원이었습니다. 내가 그랬습니다.
‘이 사람아, 주제 파악을 해,’ 라고 하니
‘왜요?’
‘50만원이 뉘집 강아지 이름인줄 아는가? 돈벌이도 시원치 않은 사람이...,’라고 힐난하니
‘누가 한꺼번에 일시불로 낸다고 했어요? 스므날 나누어 낸다고 했지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회장님, 걱정하지 마세요. 하느님은 많이 내면 그만큼 보태여 주십니다.’라고 합니다. 난 이런 말 처음 들었답니다. 난 내 이마를 탁~치며 내가 이 사람에게 배우는구나. 했습니다. 그러나 속으로 생각하기를 이사람, 분명히 약속대로 신입금 내지 못할 거야..., 한달 8만원 벌어서 2만원씩 어떻게 낼 수 있겠는가. 난 그렇게 단정 지었습니다. 그리고 월말이 되는 날, 사무장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시흥2동 그 박씨, 입금되었습니까?’하니
‘넷, 납부했습니다.’
속으로 놀라며 첫달이어서 어떻게 했겠지 하면서 다음 달, 다시한번 사무장에게 확인 전화 했더니, 또 입금 했다고 합니다. 그 순간 기쁘다는 마음보다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 사람 필경 어떤 못된짓 하며 돈 버는 것은 아닌가? 나는 궁금증이 나서 그 형제집에 전화했습니다.
‘자네, 헌금 내는 일 힘들지? 이제부터 내가 대신 내 줄터이니 그리 알게나.’ 이 사람 벌쩍 뛰면서 하는 말이
‘회자임, 걱정 마셔요. 하느님이 갚아 주셨습니다.’
‘아니 어떻게, 누가갚아줘?’ 하니
‘회장님, 제 아내 약값이 한 달에 5만원 듭니다. 그런데 지난 달, 성당 신입금 내고 나니, 아 이제 아내가 몸 아프다는 말을 하지 않아요. 왠 일인가 하여 병원에 데리고 갔더니, 의사 선생님 말이 병이 전부 낳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달 약값이 안들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느님이 갚아 주신 것 아닙니까?’ 아, 이것이 신앙이로다. 내가 은혜를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난 예수님을 믿은지 30여년에 이런 놀라운 일이 다 있다니.... 이 후로도 이 형제는 꼬박꼬박 신입금을 내어 모두 완납 하였답니다. 신앙 생활도 지극 정성이었습니다. 그후 다시 일 반이 지난 어느날입니다. 이 사람이 제게 달려와 하는 말이
‘회장님, 감사합니다.’
‘뭐가?’
‘제가 이 달부터 기아 산업 정식 생산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월급이 한 달에 30만원이나 됩니다. 기뻐해 주십시오. 회장님!’ 나는 참 기뻣어요. 가난하면서도 충직하다보니 하느님이 보답을 하시는구나. 난 그 형제의 손을 모아 잡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형제가 와서
‘회장님, 저 안양으로 이사갑니다.’
‘그래? 전셋집이라도 얻었어?’하니
‘아니에요. 기아 산업에서 안양시에 사원아파트를 지었습니다. 집 없는 사원에게 분양권을 주었는데 제가 그 안에 들었습니다. 이십층 넘는 아파트 입주자가 된 것입니다.’ 오 하느님 감사합니다. 나도 축복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저희 시흥 성당 참 어렵게 지었습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입니다. 당시 우리 시흥성당은 서울 교구에서 정말 작은 본당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신자들이 1만 명이 넘어 갑니다. 지역 환경이 무척 어려웠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앞으로 더 많은 번창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아멘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이 남긴 글
악운의 '톱니바퀴'에 걸린 진보당 운명
(https://cafe.daum.net/suntong)
아주 유명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무명도 아닌, 그러면서 고난의 길을 걷기도 하고, 역사에 의미도 없지 않은 인물들이 있다.
때로는 좌절의 인생이기도 하고, 때로는 회색 지대의 인물이기도 하다.
(중략)
나는 대학 재학 시절부터 권대복 씨를 알아왔고 그 후에도 고비 때마다 간헐적으로 접촉해온 지기이기에, 평생을 고생만 하다 69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친 그가 너무도 안쓰러워 그에 대한 추억이 계속 머릿속을 맴돈다.
권 형을 처음 만난 건 1950년대 중반 자유당정권 시절. 그는 국학대(우석대와 합쳤다가 다시 고려대에 합병) 정치과 학생이고 나는 서울법대 학생으로 신범식(申範植) 씨가 소장으로 있던 사회문제연구소에서다. 신 씨는 경향신문 논설위원, 서울신문 사장 등 언론계와도 인연이 있고 청와대 대변인, 문공부 장관, 국회의원 등 정치 경력도 화려하나, 당시는 국학대와 성균관대에서 정치학을 강의하는 강사였다.
(중략)
사회문제연구소는 적당히 진보적인 성향을 보여 왔었다. 신 씨가 경북대 강사로 있을 때 사숙하던 분이 두산 이동화(斗山 李東華) 선생이었으니 그 영향도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선배에 대한 실례를 무릅쓰고 반대 의견을 말했다. 80% 우리 주장을 관철시킨다고 하나 활동 자금을 받으면 물주의 뜻을 거역할 수 없는 게 현실 아니냐는 이유에서다. 여하튼 나는 나와 버렸고 권대복, 김용기 씨 등은 시기는 모르겠으나 죽산(竹山)의 진보당에 합류하였다. 진보당 일제 구속사건이 일어나고서야 나는 권 형이 진보당 청년학생조직인 여명회(黎明會)의 책임자라는 것을 알았다.
권대복이 만난 조봉암…'요즘 담배 못 피우는 학생이 어디 있나'
하긴 권 형은 좀 뛰어나 보였다. 말도 조리 있게 잘할 뿐만 아니라 조직력도 있어 당시 영등포 학우회장을 하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영등포는 서울 중심과는 구별되는 변두리로, 영등포 학우회가 생길 정도의 독자적인 분위기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하겠으나 그때는 지금의 영등포·동작·관악·구로·양천·강서구 등은 영등포를 중심으로 하나의 뚜렷한 별도의 생활권을 이루었다.
권대복 형은 '영원한 정치 지도자의 위상 조봉암'이란 그의 글에서 죽산과 만난 과정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죽산을 만난 것은 1956년 여름이었다. 그해 초여름, 나는 현재 고려대학교 정치학 교수인 김용기 군과 함께 약수동에 있는 죽산 댁을 처음 찾아갔다. 그 당시 나는 대학 졸업반 학생이었다. 학생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처지이기에 정치 상황과 정치운동에 대한 남다른 열정을 지니고 있었다. 그 시절에는 많은 정치지도자가 있었지만 그중에서 나에게 강한 매력과 호기심을 안겨준 정치인은 오직 죽산뿐이었다. (중략)
조그만 양옥집 2층으로 안내를 받아 올라갔다. 우리에게 다가온 죽산은 말없이 손을 내밀었다. 묵직한 악수였다. 그의 왼손이 나의 손등을 감싸는 순간, 내 가슴이 뭉클해지는 충동을 느꼈다. 왼쪽 손 새끼손가락과 무명지가 잘려나간 죽산의 손등이 보였다. 나는 자리에 앉자마자 그 사연을 물었다. 일제 당시 왜경의 고문에 의해 손가락 두 개가 잘려나갔다는 것이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말문을 잇지 못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단단한 체구였다. 그렇지만 순간적으로 풍기는 그의 모습은 무언가 강력하게 추구하는 신념과 의지로써 응결된 결정체였다.
침묵이 흐르는 순간, 죽산은 담배를 권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못 피운다고 사양했다. 그랬지만 죽산은 '요즘 대학생 중 담배 못 피우는 학생이 어디 있나' 하시면서 강권하시는 것이었다. 할 수 없이 못 이기는 체하면서 담배를 받아 입에 물었다. 죽산과 맞담배를 하면서 '아, 권위주의에 빠져있는 어른들과는 너무나 다른 점이 있구나. 정말 소탈한 분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건방지게 담배를 빨면서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께서는 왜 일정 때 공산당운동을 하셨습니까?'
그때 죽산은 '어허, 내가 공산당운동을 했나, 우리나라 독립운동을 했지' 하면서 웃더니 말문을 이어나갔다. 그 요지는 '미국에 건너간 독립운동가들은 미국의 보호를 받았고, 중국에 건너간 독립지사들은 장개석의 지원과 보호를 받았다네. 그러나 국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은 혹독한 강압과 박해 속에서 어쩔 수 없는 극한 상황에 놓여 있었네. 그때 러시아 혁명에 성공한 레닌의 소비에트 정부가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돕겠다고 하기에, 우리나라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지리적으로 우리와 가까운 소련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겠다 싶어 그들과 가까이하면서 공산당에 참여한 것이네. 그렇지만 그때 나의 지상 목표는 우리의 독립이지, 공산당운동이 아니었네.'
이 말을 들으면서 소비에트와 공산당을 조국 독립 쟁취의 수단과 방편으로 살아왔다는 전술적 측면을 엿볼 수 있었다." (중략)
진보당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권대복 씨는 4·19 후 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 청년국장을 하였으며, 사대당이 분열되고 혁신계가 통일사회당(統一社會黨), 사회당(社會黨), 혁신당(革新黨), 고수파 사대당(社大黨)으로 4분되었을 때는 혁신당에서 장건상(張建相) 씨를 모시고 정책위원장으로 있다가 5·16을 당했다. 그때 민국일보(民國日報) 정치부 기자로 그를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국회 출입기자단의 일원으로 혁신 정당들을 맡았었다.
(중략)
그때의 일이 생생하다. 5월 17일 권 형이 내가 근무하던 남대문 근처 민국일보사로 찾아와선 5·16 세력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독립운동가이며 혁신적인 신숙(申肅) 선생 등도 5·16 지지 성명을 내는 것을 보면 기대할 만도 하지 않겠냐는 것이다. 그때 장건상 씨를 비롯한 많은 혁신정객들이 군인들이 그들의 생각과 같이 혁신정치를 할 것으로 착각했던 것 같다. 나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며 피신할 것을 권유했는데 미적미적하다가 그는 덜컥 구속되어 혁명재판에서 15년 언도를 받고 68년에야 출옥할 수 있었다.
(중략)
그 당시 권 형의 부인은 동아방송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조선일보 정치부에 있던 나에게 석방 전망을 자주 물어왔다. 정태영 박사 연구소에서 권 형을 회고하다 그 때의 일을 말하니 정 형은 권 형의 정치판단이 좀 느렸다고 예를 들기도 했다.
그 후 공화당 정권이 삼선개헌을 강행하고 야당 진영이 신민당(新民黨)으로 뭉치자 윤길중(尹吉重)·박기출(朴己出)·권대복·정태영 등의 진보당계는 거의 모두 신민당에 가담했다. 자유당의 4사5입 삼선개헌 후 야당 진영이 모두 민주당에 뭉칠 때 죽산도 참여하려 했으나 김성수(金性洙)·서상일(徐相日)씨 등의 찬동에도 불구하고 조병옥(趙炳玉)·김준연(金俊淵)씨 등이 완강히 반대하여 불발에 그치고 진보당을 만들게 된 일에 견주어 생각하면 이들의 신민당 참여는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윤길중 씨는 그의 회고록 <이 시대를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혁신계와는 정치적 견해 차이가 있는 신민당이 삼선개헌 반대투쟁의 중심이 되자, 범재야 세력은 우선 민주주의의 기본을 찾은 다음에 정치투쟁을 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모두 신민당에 입당했다."
그 후 양일동(梁一東) 씨가 신민당에서 갈라져 나와 통일당을 만들자 권 형은 그를 따라나와 정치위원 겸 조직국장을 맡게 되었다. 양일동 씨가 아나키스트 유림(柳林) 선생의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고위간부였음에 비추어 의기투합이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 후 권 형은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12년을 언도받고 76년까지 세 번째 옥살이를 한다. 나는 그때 '악운의 톱니바퀴'를 떠올렸다. 이 톱니바퀴에 재수 없게 한번 말려들면 계속해서 옥살이를 하는 악운이 따른다는 느낌이었다. 친구인 권 형은 약간의 차로 갈림길이 달라 옥살이라는 운명의 톱니바퀴에 계속 말려들고 있음을 볼 때 참으로 불쌍하다고 느껴졌다.
민추협 지도위원으로 '유종의 미' 거둔 권대복
(중략)
권대복 형의 정치경력은 YS와 DJ 중심의 민주화추진협의회(民推協) 지도위원을 한 것으로 유종의 미를 거둔다.
그동안 생업으로는 미곡상도 하고, 단청(丹靑) 사업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일을 하며 고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면서 일찍이 가톨릭에 귀의, 독실한 신자가 되었으며 그의 강론이 매우 인기 있어서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고, 해외로는 중국의 조선족을 상대로 자주 왕래했다. 조선족들이 강론을 듣고 싶다고 자주 초청했다는 것이다. 말재주는 타고나는 것 같기도 하다.
(중략)
5분 명상(시편 24)
주님 것이라네, 세상과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大地和其中的萬物,屬於上主, 世界和其間的居民,屬於上主。
그분께서 물 위에 그것을 세우시고 강 위에 그것을 굳히신 까닭일세.
是他在海洋上奠定了大地, 是他在江河上建立了全世。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분의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誰能登上上主的聖山? 誰能居留在他的聖殿?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옳지 않은 것에 정신을 쏟지 않는 이
거짓으로 맹세하지 않는 이라네.
是那手潔心清,不慕虛幻的人, 是那不發假誓,不行欺騙的人。
그는 주님께 복을 받고 자기 구원의 하느님께 의로움을 인정받으리라.
他必獲得上主的祝福; 和拯救者天主的報酬。
이들이 그분을 찾는 이들의 세대,
그분 얼굴을 찾는 이들의 세대 야곱이라네. 셀라
這樣的人是尋求上主的苖裔, 追求雅各伯天主儀容的子息。(休止)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城門,請提高你們的門楣,古老的門戶,請加大門扉,因為要歡迎光榮的君王。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힘세고 용맹하신 주님,
싸움에 용맹하신 주님이시다.
誰是這位光榮的君主? 就是英勇大能的上主, 是那有力作戰的天主。
성문들아, 머리를 들어라. 오랜 문들아, 일어서라.
영광의 임금님께서 들어가신다.
城門,請提高你們的門楣,古老的門戶,請加大門扉,因為要歡迎光榮的君主,
누가 영광의 임금이신가? 만군의 주님 그분께서 영광의 임금이시다. 셀라
誰是這位光榮的君主? 其實這位光榮的君主, 就是萬軍之軍的上主。(休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