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비단을 펼쳐놓은 해안가를 거닐다가
소매물도 다솔커피숍에 철없이 앉아풀을 뜯고 있는 흑염소들의 뿔 사이로
지는 저녁 해를 바라봅니다
누님이 왜 섬이 되셨는지
이제야 알겠습니다
하룻밤 묵고 갈 작정입니다
<정호승의 ‘소매물도에서 쓴 엽서’에서>》
섬이 이른다, 욕심의 바람 견디고 서 있으라고
경남 통영 미륵섬 꼭대기에 오르면, 발밑에 수많은 섬들이 연꽃처럼 떠 있다. 아니다. 섬들은 멈춰 있다. 물길 따라 흐르다가, 한순간 얼어붙은 듯 서 있다. 그래서 ‘섬’이다. 사람들도 그 섬들처럼, 어느 날 문득 바쁜 발을 멈추고, 저 하늘의 붉은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본다.소매물도는 손바닥만 한 섬이다. 메뚜기 이마빡만 한 땅이다. 면적 0.51km²에 해안선 길이 3.8km. 11가구 주민 20여 명(2010년 4월 현재)이 산비탈에 제비둥지 같은 집을 달고 산다. 섬마을 뒤쪽은 삐죽삐죽 바위산들이 둘러싸고 있다. 섬의 어깨가 미식축구 선수처럼 완강하다. 마을은 양팔 사이 가슴 아래 배꼽쯤에 붙어 있다. 오목거울 안쪽 가운데 옴폭 들어간 곳이다. 굴 딱지처럼 옹기종기 낮게 들어앉았다.
새로 들어선 펜션과 건축에 한창인 현대식 건물들이 공룡의 가슴뼈처럼 눈엣가시로 찌른다. 이제 섬의 대부분 땅은 외지사람들이 소유하고 있다. 주민들도 살고는 있지만 땅은 이미 넘어간 집이 많다. 곰삭아 허물어지고 무너져 내린 빈집들이 꼬부랑 할머니처럼 안쓰럽다. 주민들은 언젠가부터 하나 둘 땅을 팔아버리고 뭍으로 떠났다. 그 자리는 자본과 현대식 건축물이 대신했다. 소매물도는 이제 하루 서너 시간만 전기가 들어오는 곳이 아니다. 빗물을 받아 식수로 쓰는 곳도 아니다. 전기와 식수는 24시간 아무 이상 없다.소매물도는 통영 미륵산 정상(461m)에서 보면 한산도 너머 끝자리에 엎드려 있다. 동남쪽 4시 방향, 통영에서 직선거리 26km. 매물도-소매물도-등대섬의 삼형제 중 둘째다. 주민들은 웃매미섬이라고 부른다. 소매물도 선착장에선 통영미륵산 봉우리가 뾰족하게 솟아있는 게 보인다. 미륵산은 소매물도 보고 웃고, 소매물도는 미륵산 보고 웃는다.‘소매물도(
小每勿島)/바람 따라 가다보면/갈매기도 되돌아오는 곳/그곳에 사는 정씨 할머니보고/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더니/모른다고 하면서도/어려선 소꿉장난/시집가선 남편사랑/김도 매고 미역도 따고/애들 키우느라 뭐가 뭔지 몰랐다고/구부러진 그의 허리가/세월을 펴며 말하더라’<이생진의 ‘사랑이 어디 있느냐고’에서>
섬마을에서 위로 올라가다보면 잔등에 소매물도 분교 터가 있다. ‘매물도 초등학교 소매물도 분교장터. 1969년 4월 29일 개교하여 졸업생 131명을 배출하고 1996년 3월 1일 폐교되었음. 1997년 3월 1일 경상남도교육감’이라고 쓰인 교적비가 서 있다. 졸업생 131명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아직도 꿈결에 고향의 파도소리를 들을까? 그 눈물 없던 시절을 목메어 그리워할까? 하기야, 이 세상 그 누군들, 어찌 고향을 꿈엔들 잊을까. 언젠가 꼭 돌아가 살겠다고 다짐하지 않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학교는 아담하다. 언덕배기 양지바른 곳에서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다. 누렁이가 눈을 게슴츠레 뜨고 엎드려 있는 것 같다. 아래 선착장과 바다가 한눈에 보인다. 크고 작은 파도 떼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깔깔거린다. 둘레엔 늙은 동백나무와 후박나무들이 숲을 이뤄 어두컴컴하다. 모가지째 꺾인 붉은 동백꽃이 땅바닥에 흥건하다. 교실 앞에는 녹슨 종이 매달려 있다. 그 속에서 아이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쏟아져 나올 것 같다. 거무튀튀하게 삭은 그네와 미끄럼틀. 문틀이 뒤틀어지고 여기저기 허물어진 관사. 현재 학교 터는 산장처럼 나그네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관광객들이 운동장에 텐트를 치고 자거나, 빈 교실에서 큰 비나 눈을 피한다.소매물도 동쪽엔 등대섬이 있다. 등대섬은 소매물도 등짝 해변 길을 짚으며 간다. 길은 깎아지른 절벽 위를 따라 나 있다. 발바닥이 간질간질하다. 바람이 얼굴을 아프게 때린다. 자칫 두 다리에 힘을 주지 않으면 날아갈 것 같다. 땅바닥에 떨어진 동백의 통꽃과 산벚꽃잎이 서로 껴안고 이리저리 나뒹군다. 파도소리가 우렁차다. 저 멀리 고기잡이 통통배가 갈매기 떼를 한 아름 싣고 간다. “끼룩∼끼룩∼” 갈매기들은 지악스럽게 따라붙는다.
소매물도와 등대섬 사이는 자라목 같은 잘록한 길로 이어진다. 길이 70m의 열목개 몽돌길이다. 열목개에는 수시로 물보라가 인다. 바닷물이 빠지면 열렸다가, 바닷물이 부풀어 오르면 지워진다. 사람들은 길이 열린 틈을 타서 등대섬으로 오른다. 일단 등대섬에 들어가면 물이 차기 전에 서둘러 되돌아 나와야한다. 1917년 불을 밝힌 등대(16m) 불빛은 48km까지 퍼져나간다. 주위엔 병풍바위 촛대바위 등이 우뚝우뚝 호위하듯 서 있다. 등대섬에서 소매물도 오른쪽으로 보면 영락없이 공룡을 빼닮은 공룡바위가 눈에 걸린다.
등대섬은 소매물도에서 가장 높은 망태봉(157m)에서 내려다보는 게 일품이다. 망태봉 바로 아래 해상밀수감시소 꼭대기에 올라가도 잘 보인다. 감시소는 1987년 폐쇄돼 시멘트 망루만 남아 있다. 하얀 등대와 푸른 하늘, 그리고 등대에 오르는 푸른 풀밭이 그림 같다. 여기에 코발트빛 바다와 그 뒤에 점점이 서 있는 거무튀튀한 갯바위들…. 이생진 시인이 이렇게 넋 나갈 듯한 등대섬을 지나칠 리 없다.
‘산 하나 넘어서/물이 길을 내주면/맨발 벗고 가는 길/엉겅퀴 민들레 진달래/모두 빠져 죽는 것들의 넋/왜 이곳에서 피느냐 했더니/‘살아서 등대를 좋아한 탓’이라며/쓸쓸히 웃는다/그 ‘탓’/나도 그 탓 때문에 등대로 가는 거다’<‘소매물도 등대-등대이야기 29’에서>
소매물도 섬마을 왼쪽 길은 후박나무 동백나무 숲길이다. 바람도 섬 등짝 안쪽이라 거의 불지 않는다. 아늑하고 호젓하다. 가끔 나오는 오솔길 걷는 맛도 쏠쏠하다. 군데군데 낮은 무덤들이 누워 있다. 섬에서 태어나 살다가 섬에 묻힌 사람들. 그들은 죽어서도 말없이 섬을 지키고 있다.
나무들은 마을을 향해 굽어 있다. 등으로 바람을 막아낸 탓이다. 쏴아! 쏴아! 나무들의 수런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추임새로 새소리도 섞인다. 미니해수욕장 모래밭 길도 꿈같다. 남매인 줄 모르고 서로 사랑했다가 죽었다는 슬픈 전설의 남매바위도 만난다.
소매물도에 해가 저물면 바람이 우당탕탕 찾아와 대문을 흔든다. 밤새 덜컹거리는 소리. 빈집 양철지붕 밟고 지나가는 소리, 차르르 철썩! 파도가 해안절벽에 부딪치는 소리…. 아침 해가 바람을 몰아내기 시작하면, 안개가 스멀스멀 기어나와 어디론가 사라진다. 안개는 바다얼굴을 말갛게 씻겨주고, 새끼 섬들 사이로 띠처럼 흘러간다. 고깃배는 섬과 섬 사이에서 코를 박고 그물을 친다. 금빛 갈매기들은 어김없이 아침바다를 떠돈다.
소매물도는 머흘다. 비바람이 휘몰아치면 뱃길이 끊긴다. 바다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 섬을 찾은 사람들도 발이 묶인다. 파도가 거품을 품으며 으르렁거린다. 섬마을은 오로지 바람만 활개 친다. 사람들은 방에 처박혀 쥐죽은 듯 꼼짝하지 않는다. 나무들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출렁인다. 잔뜩 물을 머금은 하늘은 먹빛이다. 선착장 마을은 그렇게 며칠씩, 눈썹달처럼 휜 섬 품안에서 비바람을 견딘다.
김화성 전문기자 mars@donga.com
|트레킹 정보|
◇교통 ▽승용차=서울→경부고속도로→대전통영고속도로 ▽고속버스=서울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이나 남부터미널 통영행 4시간 30분∼5시간 소요 ▽비행기=서울 김포공항∼사천비행장(사천에서 통영행 버스로 1시간 소요) ▽통영∼소매물도=통영여객선터미널에서 1시간 30분∼2시간 소요. 거제 저구항에선 30분 거리.
◇먹을거리 통영은 먹을거리 천지다. 섬에선 싱싱한 해산물은 먹을 수 있지만 요리는 힘들다. ▽해장국=원조시락국집(055-646-5973) ▽졸복국=요즘 도다리쑥국(사진)은 거의 끝물. 대신 졸복국이 한창. 분소식당(055-644-0495), 수정식당(055-644-0396), 호동식당(055-645-3138), 만성식당(055-645-2140) ▽충무김밥=뚱보할매김밥(055-645-2619), 소문난 3대할매김밥(055-643-0336) ▽다찌집=울산다찌(055-645-1350) ▽굴=굴향토집(055-645-4808) ▽멸치=멸치마을(055-645-6729) ▽해물뚝배기=미주뚝배기(055-642-0742), 도남식당(055-643-5888)◇숙박 등대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소매물도 펜션(055-644-5377)과 다솔산장(017-858-2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