寒空 최 성 열
서울 경복고등학교 졸업(1963), 공군사관학교 졸업(1967), 미국 공군대학원 (Air war college)
졸업(1987), 공군 전투조종사(1967~ 1993), 공군 준장 전역(1993), 삼성테크윈 임원(1993~ 2005),
중부대학교 초빙교수(2005~2015), 일현문학회 회장(2015~2017), 계간《에세이피아》발행인, 현)
대한민국공군역사자문위원
손자의 작은 손이
결혼 후 첫 애를 가져 아내 배가 불러 올 때. 새로운 생명에 대한 신비와 환희보다는 어떻게 키울 것인가 하는 생각이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 그 구체적 표현을 이름으로 하는 것 같았다.
나의 소망을 이름에 담아 짓기로 했다. 그런데 한글세대인 나는 항렬에 맞추어 한문으로 이름을 지을 실력이 되지 못했다. 그러자니 작명소에 가서 지어야 했고 그러면 내 소망을 담지 못할 뿐 아니라 나중에 이름이 좋으니 어쩌니 말도 많을 것 같았다. 그럴 바에는 순수 한글로 이름을 짓자는 생각이 들었다.
어머니께서 아내 배가 많이 부른 걸 보고 아들 같다고 짐작을 하셨다. 장장 몇 달에 걸쳐 아들 이름을 지었다. 마루한. 마루는 정상, 사나이라는 뜻이 담겼고 한은 큰, 으뜸, 한국이라는 뜻이 있어 사나이로 태어나 큰 산처럼 우뚝 섰으면 하는 바램에서였다.
그런데 정작 출산하고 나니 딸이었다. 어머니께 딸을 순산했다고 전화를 했다.
“딸 이야?”
어머니의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다시 한 달 동안 머리를 싸매고 딸 이름을 지어야 했다. 나리한. 나리는 백합. 한 떨기 백합처럼 자랐으면 하는 마음을 담았다.
출생신고를 하러 동사무소에 갔다. 이름 옆에 한문을 표기하라고 했다. 한글 이름이라 한문이 없다고 하니 세상에 그런 이름이 어디 있느냐고 받아줄 수 없단다. 왜 우리말 이름을 못 받아주느냐고 승강이를 했다. 한참 언쟁을 하다 직원이 심통이 났는지 출생신고 기간을 어겼으니 시말서를 쓰라고 했다.
시말서 어떻게 쓰는지 모르겠다고 버텼다. 그러자 책상 모서리에 붙은 샘플을 베끼라고 했다. 결국 나는 “본인本人이 무지無知 하야…” 로 시작되는 시말서를 쓰고 나서야 호적에 올릴 수 있었다.
뒤이어 아들을 낳았다. 이번에는 이름은 먼저 지어 놓은 터라 곧바로 신고를 했다. 이렇게 나는 애들에 대한 소망을 담아 출생신고를 했다. 아마 자식교육에 대한 내 자신의 다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자식 키우는 것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지만 재롱 보는 것만으로도 본전 찾고도 남는다고 한다. 사실 그때는 며칠 출장이라도 가면 딸 아들이 눈앞에서 어른거리곤 했다.
하지만 애들이 커가면서 마냥 재롱만 즐기고 있을 수는 없었다.
以身敎者 從 以言敎者 訟
실제 행동하며 몸으로 가르치면 따르고 말로만 하면 후에 따지고 달려든다는 후한서에 나오는 말씀처럼 모범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대화가 가능한 나이가 될 때까지는 타율에 의해서라도 규범 안에 넣어야 한다는 생각도 했다.
애들이 한참 자랄 때, 나는 군생활로 잦은 이동을 해야 했다. 때로는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했고 같이 생활한다 해도 교육에 마음을 많이 쓸 수가 없었다. 더구나 비행 생활은 매 비행 마다 최상의 컨디션을 요구했다. 군 작전상 필요하면 먹기 싫어도 먹어야 했고 자기 싫어도 자야 했다. 그래서 그랬던가 나는 애들하고 같이 자본 적이 없다. 비행 전 숙면을 위해 그것은 아내 몫이었다. 어쩌면 육아의 일차 담당은 아내고 나는 이차 담당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세월이 흘렀다. 딸애는 시집가서 손녀 둘을 두었다. 가끔 집에 오는 손녀들이 한없이 귀여웠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를 무서워했다. 제 엄마가 그랬듯이 할머니 한테만 매달렸다. 항상 나만 혼자인 것 같았다.
아들이 장가를 가서 손자를 낳았다. 강보에 싸인 녀석이 나를 보고 벙긋 웃었다. 짐짓 할머니 보다 나를 더 좋아한다고 되풀이 말했다.
아들이 누나와 상의해 가족여행을 계획했다. 몇 년 전 내 칠순 때 아무 행사도 못해 섭섭하다며 저희들끼리 돈을 모아서 우리 보고는 몸만 오라고 했다.
그런데 정작 여행 계약을 하고 나니 며느리가 둘째 애를 갖게 되어 아들네는 가지 못하게 되었다. 하는 수 없이 딸네 가족과 손자만 데리고 가기로 했다. 두 돌이 안 된 녀석을 데리고 여행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아내도 있고 옆 동에 살아 손자를 돌봐주는 제 고모와 누나들도 있으니 괜찮을 듯도 싶었다.
중국 해남도로 갔다. 그런데 손자 녀석이 정말로 할머니보다 나를 더 좋아했다. 종일 껌 딱지처럼 찰싹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아마도 저를 물고 빠는 나를 제 아비로 생각하지 않았나 싶었다. 잘 때도 아내보다도 내 품속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해서 내 평생 처음으로 손자를 데리고 자게 되었다.
녀석은 잠들어서도 손을 쥐어 주어야 잤다. 입을 조물조물 하며 잠든 얼굴은 천사 같았다. 나는 하염없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결에 앙증맞은 손가락이 내 손바닥을 간질였다. 그러자 그 작은 손놀림이 고목나무 뿌리에서 수액을 위로 뿜어 올리듯 내 가슴을 덥혀 올라왔다.
천천히 일어나 앉으며 그 까닭을 생각해 봤다.
피가 당겨서 그럴까?
아니면 모든 짐과 소망을 아들에게 넘기고 나니 홀가분해서 그럴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럴까?
녀석이 자다가 깨려고 뒤척였다. 얼른 등이라도 토닥여 주려고 녀석 옆에 황급히 누웠다. 괜히 마음이 바빴다.
녀석이 내 손을 잡고 다시 잠이 들었다. 내 손안의 작은 손이 따스한 체온을 전해왔다. 그 따스함 속에 내편도 생겼다는 생각이 묻어났다. 드디어 경주 최씨 관가정공 청파 33세손이 내 편이 된 것이다. 이렇게 나는 할아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