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茶書一如로 불후의 茶詩를 남기신
韓末 우국지사 日峰 李敎文 선생
한국문인협회 보성지부 회장 李南燮
1. 머리말
日峰 李敎文 선생은 韓末 유학자, 憂國之士로 기울어가는 불행한 시대에 태어나 亡國의 悲運을 겪으며, 義兵운동에 몸소 참여했던 행동하는 선비였다. 선생은 斯文의 遺風이 가득한 名門家에서 태어나 부친으로부터 율곡의 『격몽요결』,『대학』등을 배웠으며 蘆沙 奇正鎭의 門下에서 1863년부터 10년간 修學하였다. 26세에 성균관에 나아가 공부했으며 성균관 서재의 당의를 지내면서 많은 학자들과 교류하였는데, 이 가운데 명필가로 이조판서와 전라도 관찰사를 2번 역임한, 서재필 선생 양외숙인 김성근(金聲根), 그리고 정언 민치량(閔致良), 승지 이건창 등을 알게 되어 평생 교유했다. 그밖에 교류한 인물들 가운데는 당대의 지성이라고 할 수 있는 김석구(金錫龜).최재철(崔在澈).정시림(鄭時林).정재규(鄭載圭).조성가(趙性家).정의림(鄭義林),기우만(奇宇萬),기양연(奇陽衍)등이 있다. 선생은『일봉유고』를 남기셨는데. 문집에는 많은 憂國 문장이 수록되어 있다. 유학자 後石 吳駿善이 序文을 쓰고, 韓末 의병장 松沙 奇宇 萬 이 行 狀 을 晋 山 姜 永 植 이 墓 碣 文을 지 었 다.
보성은 녹차수도로서 자타가 인정하는 차의 고향이다. 전국 녹차 생산의 40%를 생산하는 고장에 아직까지 이러다 할 茶人이 없었다. 하지만 日峰 李敎文 선생이 1895년에 지은 불후의 명시 啜茶 二首가 발견됨으로써 보성은 차의 역사성과 전통을 증명하게 되었다. 정찬주『다인 기행』책에 보성의 茶人로 공식 소개되었으며, 또한 광주대학교 이희재(李曦載) 교수가 발표한《19세기 儒生 李敎文의 衛正斥邪사상》논문이 공자학회 제31호에 발표되어 학계에 주목을 받았다. 특히 2017. 5.15. 보성문화원에서 「일봉 이교문 선생 철학 사상과 시문학 연구」 세미나를 개최하여 많은 보성 군민으로 큰 호응을 받은바 있다.
2. 日峰居士 李敎文의 생애
公은 星州 李氏로 字는 禮伯이요, 號는 日峰, 諱는 敎文이다. 1846년(병오) 4월 21일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리 가내마을에서 석성 현감을 지낸 부친 小松 志容(1825-1891)公과 長澤 高氏 사이에서 4男 2女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公이 태어난 가내마을 뒤편은 용이 승천하는 형국의 望日峰이 우뚝 서 있고 왼쪽 남쪽에는 옥녀봉이, 서쪽에는 유유히 흐르는 보성강을 끼고 있으며, 북쪽으로 멀리 타관 명산인 무등산 정상이 아득하게 보인다. 마을 입구에는 공룡 발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용암과 용보 등이 남아 있다. 가내마을 오른쪽 바로 옆에는 公의 祖父 가은공의 일천여 평의 큰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당대 발복하는 명당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公은 고려 말 多情歌로 유명한 정당문학(政堂文學) 문열공(文烈公) 이조년(李兆年)의 후손으로, 조선 세종조 때 영의정을 지내신 문경공(文景公) 이직(李稷)의 16代孫이다. 공의 선대(先代)는 본시 서울에서 살았으며, 代代로 높은 벼슬을 하였던 명문거족(名門巨族)이었다. 그러나 公의 九代祖 참판공 이성(李珹)이 (都正公 玄孫) 光海君 때 페비 사건이 일어나자 도덕이 무너진 이 마당에 벼슬은 해서 무엇하랴 하면서, 직려에서 관모를 찢어버리고 즉일로 강을 건너 우계(牛溪)성혼(成渾)선생 같은 門人으로 망년지교(忘年之交)인 우산 안방준 선생을 따라 南下하여 보성에 隱居하면서 오직 학문과 후진 교육에 전념하셨다. 이후 참판공 이성(李珹)의 자손들은 보성과 곡성에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이성(李珹) 후손 중에 출중한 인물이 다수였는데 그중 널리 알려진 인물로, 보성 문덕 출신으로 숙종 때 공조판서를 역임한 정헌공 이광적(14世), 곡성 출신으로 철종 때 병조참판을 지낸 이교인(21世), 유학자 낙천 이교천(21세), 글씨와 통소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전예경산전팔쌍절첨 (篆隸京山篆八雙絶帖)(보물 제1681호)의 작가 경산 이한진(17世), 백접도 화가 석전 이희순(23世), 한학자 송담 이백순(23世)등 수많은 문인들이 배출되었다.
日峰公의 曾祖는 가내 입향조 참판공 諱 유원(有源)이며, 祖父는 可隱公 李箕大로 송재 서재필의 외조부이다. 가은공은 유학자로서 鄕約을 만들어 民風敎化에 앞장섰고, 可隱堂,川上齋,一監軒 3학당을 지어 후학들을 양성하였으며 學行으로 通訓大夫 司憲府持平에 追贈되었다. 父親 이지용(李志容),은 진사시에 합격하고 석성현감(石城縣監)을 역임했다. 公은 송재 서재필 선생의 외종형이 된다.
3. 學脈과 思想
公은 巨儒 蘆沙 奇正鎭의 門下에서 1863년부터 10년간 修學하면서 수많은 유학자들과 교류하면서 高第(고제: 제자들 가운데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로 주위의 존경을 받았으며, 26세에 성균관에 나가 장의를 지내면서 儒宗의 師表가 되었다. 노사의 같은 門人으로 동창생이었던 後石 吳駿善(1851~1931, 한말 호남의병의 사표로 추앙 받은 인물)이『일봉유고』서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어찌 훌륭하다 하지 않으리오. 公을 澹對軒(노사 강학하였던 서원)에서 엎드려 존모 하였으며, 公은 재주와 덕을 구비하여 능히 사람들로 하여금 悅服하게 하는 분이라고 하겠다. 아! 公의 재주와 학덕으로 일찍이 當時에 등용되었다면 문장은 족히 나라를 빛냈을 것이요 재주는 족히 복잡한 일을 해냈으련만 운명이 세상과 違反되어 마침내 不遇한 환경에서 본래 쌓았던 학문을 펴지 못하였으니 어떻다고 말하랴. 그러나 뒷날 이 遺稿를 읽은 자 또한 文章의 밖에 우리 儒家의 法門이 별도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리라. 이에 이 遺稿를 만지며 한숨을 쉬며 序文을 쓰노라.) ” 또한 스승 노사 기정진은 이교문에게 보낸 편지에 마음을 잘 다스려 의리를 잃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고 충고한다.“의리가 무엇이며 진리가 무엇인가에 대한 사색이야 말로 학문의 본령이므로 항상 성찰하는 삶을 살라”고 기정진은 편지에 쓰고 있다. 진리가 무엇인지를 사색하는 것이야말로 학문의 본질이라고 했다. 평생 책 한 권을 읽지 않았더라도 자못 능히 반복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필시 깨달음에 있을 것이라고 사색을 강조하기도 한다. 비록 천권의 책을 독파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반복 사랑을 알지 못하면 이른바 전연 무디고 거칠어서 다투는 바만 있을 뿐이라고 하면서 理가 무엇인지 사유하는 것이 학문의 본질이라고 가르친다.
일봉 선생은 公과 私에 있어서 理는 公이고 天命이며 氣는 私이고 人欲에 해당된다고 하면서 理를 중시한다.
“대저 천지의 사이에 公과 私의 두 길이 있으니 하려고 하지 않은데도 되는 것은 천명이요 하려고 해서 되는 것은 인욕이다. 天人의 즈음에 理를 분명히 본다면 천명은 公이요 인욕은 私다.”
일봉 선생은 아들에게 당부하는 편지에서도 세상이 이익과 탐욕의 세상으로 가는 것을 개탄하고 결코 명리에 탐닉하지 말고 정도를 걸어야 하며 의리에 충실한 삶을 사는 것이 비록 가난하고 어렵더라도 훨씬 훌륭한 삶이라는 것을 말한다. 바로 理를 귀하게 여기고 氣를 천박하게 여기는 그의 사상을 읽을 수 있다.
“온 세상이 휩쓸려 利로만 급하게 달려가고 있으니 이런 때를 당하여 正大하고 光明하여 義理를 쾌히 알고 보면 천하의 사물에 대하여 닥치는 곳마다 알 수가 있을 것이니 그때에는 문을 나서도 좋다 그렇지 못할 바에야 산간의 한 농부가 되어야 마땅하리니 더 무엇을 바라겠느냐?”
돈과 풍요로움, 사회적 성공과 높은 지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광명정대한 의리를 지키는 일 이것이야 말로 다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삶이라는 것을 아들에게 당부한다. 세상이 문명개화라는 이름으로 물질주의를 향하는 때일수록 욕망을 극복하고 참된 이치를 생각하라는 것 이다.
4. 茶書一如에서 발로한 진정한 茶人
옛사람은 차 한 잔으로, 마음 한 잔을 나누며 소통하였다.
보성은 녹차수도로서 자타가 인정하는 차의 고향이다. 전국 녹차 생산의 40%를 생산하는 고장에 아직까지 이러다 할 茶人이 없었다. 하지만 日峰 李敎文 선생이 1895년에 지은 불후의 명시 啜茶 二首가 발견됨으로써 보성은 차의 역사성과 전통을 증명하게 되었다.
啜茶二首(차를 마심 二首)
百艸誰如嘗我茶(백초수여상아다) 온갖 풀로 만든 것 중에서 내가 애용하는 이 차 맛과 누가 같다 하겠는가
鍊修妙法此無加(연수묘법차무가)정미하게 닦고 신기한 방법으로 만 들었으니 이것에 더할 것이 없네
引年長飮登仙籍(인년장음등가자) 오래 마시면 수명이 연장되고 신선 하고 온화하게 이루어지고
活火新烹護胃家(활화신팽호위가)불 살려 막 우려낸 차 마시니 위를 보호 하네
鶴避細烟還怪事(학피세연환괴사) 학이 적은 연기도 피해가듯이 차 마시면 나쁜 생각들을 돌려보내고
龍團千片足生涯(용단천편족생애) 최고로 좋은 차 천 편이면 일생이 만족하다오
胸中多少難平事(흉중다소난평사) 마음속에 다소 평소의 일이 어려운 것이 있거든
一椀消磨二椀佳(일완소마이완가) 한 사발 다 마시고 두 사발 마시면 더없이 좋아 지네
靑銅煎水揀山茶(청동전수간산다) 청동 솔에 물 끓이고 산다를 가려 우려 마시니
塵世鮮知淡味加(진세선지담미가) 속세에도 신선함 있음을 알고 담백한 맛까지 더하여 주는 구려
相似縱云天下口(상사종운천하구) 세상사람 입맛이 서로 같다고 말하지만
孰如此飮雪中家(숙여차음설중가) 눈 내리는 집에서 마시는 이 차를 누가 같다고 하겠는가
香葉於吾眞有分(향엽어오진유분) 나로서는 향내 나는 잎과 참 좋은 차를 구분할 수 있어서
初筵供客喜無涯(초연공객희무애) 지난번 대자리 깔고 손님을 접대하니 끝없이 기뻤네
孩兒雀舌名雖異(해아작설명수이) 해아 차나 작설차는 이름 비록 다르나 맛은 같고
半雜生薑第一佳(반잡생강제일가) 생강을 반 조각 섞어 마시면 맛이 더욱 좋다네.
이 시를 소설가 정찬주는『茶人기행』106페이지에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보성에서 또 하나의 차 정신이 있다면 선비정신에서 발로한 다서일여(多書一如)일 것이다. 차와 글이 하나인 경지가 다서일여이다. 일봉 이교문 선생은 차를 즐겨 마셨던 문장가이며 보성으로 유배 온 한말 대 문장가 이건창과 서로 탁마 한 사이였다. 그의 다시,〈차를 마시다(啜茶)를 보자. 보성의 다인으로 추앙한다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譯者 정상현 씨는 또 이렇게 말한다. “일봉유고 540 수 중 철다 二首는 한국의 茶 3대 경전(다부, 다신전, 동다송)에 나타난 차의 정신과 사상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다부에 수록된 차의 6덕(수수, 병이, 기청, 심일, 선, 예)이 詩 내용에 잘 표현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5자 각운(茶,加,家,涯,佳/ 차를 더하면 집안이 평생 아름답다)이 조화롭고 절묘하게 철다 一首와 二首에 압운되었음은 불후의 명작으로 영원무궁 절찬 감동을 줄 것이다.” 이렇게 차를 잘 아는 차인들은 선생의 시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위 啜茶 二首는 현재 보성 차 박물관, 봇재 건물(관광종합 안내소), 보성 군수실에 각각 게시되어 많은 사람들로부터 애송되면서 녹차 수도 보성의 茶人으로 추앙받고 있다.
5 義를 실천한 行動하는 선비
근세에 일본 침략이 노골화한 乙巳勒約이 체결되자 많은 애국지사들이 신명을 바쳐 구국 대열에 앞장섰다. 崔益鉉이 1906년 윤 4월8일 抗日倡義檄文을 각지에 배포하고, 13일 泰仁에서 擧義하자 崔益鉉선생이 있는 定山으로 달려가셨다. 이후 전남지방에서는 이에 호응 李白來 梁會一 白景寅 등이 회합하여 화순 雙鳳寺에 湖南義兵倡義所를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日峰 선생은 1907년 4월 19일 의병 21명을 인솔하고 本陣에 합류, 都大將에 李白來, 大將에 梁會一을 추대하고, 선생은 62세의 고령으로 軍律司監將에 취임하여 의병들의 존경을 받았다. 1909년 7월 4일 李白來 都大將의 殉國으로 抗爭의 士氣가 약화되자, 부득이 鄕里로 돌아와 寶城 義兵將 安圭洪을 도와 군수물자를 조달하여 巴靑 眞山 등지에서 큰 戰果를 올렸다. 그러나 9월 25일 安圭洪이 체포되어 지원 사실이 탄로 되자, 왜병들의 모진 고문으로 별세할 때까지 運身조차 할 수 없는 불구의 몸이 되었으며, 선생의 집은 왜병의 주둔소가 되고 말았다. 이에 妻子는 뿔뿔이 흩어지고 家産은 탕진되었으며, 후손들은 선생의 崇高한 항일정신을 계승하여 일제에 협력을 거부하고 1940년 소위 創氏改名에 끝까지 抗拒하였다. 그토록 열망하던 조국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14년 陰 1월 23일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마쳤다. 선생의 이러한 抗日 공적은 1988년 7월 초 李白來 都大將의 本家에서『臨戰日錄』이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알려졌고, 관련 학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이교문 선생은 송사 기우만과의 서신에서도 “의병이 일어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며 충성스러운 것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각 지역에서 의병들의 함성이 높아진 것은 실로 오 백년 동안 선비들의 사기를 배양한데서 나온 것이고 열강의 기세는 전에 없는 일이라고 본다. 이런 위기의 시기에 나라 일을 보는 자는 충성을 해야 하고 뜻이 있는 자는 쌓은 재주를 펴야 할 때라고 하였다. 선비로써 의롭게 싸워야 하기 때문에 병풍 아래서 벙어리가 되고 귀머거리 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는 1906년 1월 새해에 보성군 웅치면 장춘재에서 최익현의 뜻이 담긴 勸告士民書를 주민들에게 배포한다. 이교문이라는 구체적인 이름이 등장한 것은 1910년 호남창의소를 이끈 이백래의 아들 이용식이 정리한 『임전일록』이다. 그러한 가운데 또한 1907년 4월 19일로 “군율참모 이교문이 21명을 이끌고 참여했다.”고 되어있다. 이교문은 최익현이나 기우만과 마찬가지로 비장한 각오로 의병을 이끌고 젊은이들과 함께 의진에 합류하고 직책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고령으로 전투에 직접 참여하기보다는 정신적인 후원을 하는 軍律참모의 역을 수행했다고 생각된다. 호남창의소 임장록(任將錄)에 의하면 그는 다음과 같이 이력으로 소개된다.
“軍律司監將 李敎文 字 禮伯 星州人 居寶城 盧沙門人”
그 당시 이 의진을 돕고 후원한 사람을 익명으로 처리한 경우가 있었지만, 이교문의 경우는 뒷전의 후원자가 아니라 구체적인 임원의 직책을 가지고 또 실제 전투할 수 있는 인원을 이끌고 참여했다는 점에서 호남창의소 의진의 사기를 크게 높였고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도록 독려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고령이므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전투에 참여하지 못함으로써 투옥되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1914년 1월에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유언은 “종묘사직이 회복되는 것을 보지 못한 것이 무궁한 한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6. 맺음 말
日峰 李敎文 선생은 필자의 고조부가 되신다. 남겨주신 遺訓과 글을 대할 때마다 존경과 哀慕하는 마음 금을 수 없다. 그러던 차 2016년 광주대학교 이희재 교수가 공자학회 제31호에《19세기 儒生 李敎文의 衛正斥邪사상》에 대해 논문을 발표하였고, 정찬주 작가가 『다인 기행』에 啜茶 二首를 상재(上梓)하여 세상에 알리면서 日峰 李敎文 선생이 오늘날 부각되고 있다. 이에 따라서 보성군 후원 시가 흐르는 행복학교 주관으로 『 일봉 이교문 선생의 철학사상과 시문학 연구』라는 주제로 2017. 5. 15. 보성문화원에서 학술 세미나를 성황리에 개최하여 보성의 다인으로 부각한바 있다. 재주와 학덕을 두루 갖추어 주위 사람들을 悅服(열복:기쁜 마음으로 따르게 함)하게 하였던 참된 선비, 그러나 시대를 잘못 만나 벼슬을 마다하시고 悲運의 居士로 남으셨지만 유학자로서 義를 실천하셨고 茶書一如로 맑은 삶을 사셨던 영원한 茶人이셨다. 끝으로 그 정신을 엿볼 수 있는 遺筆 詩(柱聯)을 소개하고자 한다.
柱聯
道直天地有形外 (도직천지유형외) 진리는 세상의 겉모습 너머에 있지만
萬物靜觀皆自得(만물정관개자득)고요한 마음으로 만물을 보면 모두 알 수 있네
四時佳興與人同 (사시가흥여인동) 계절의 좋은 흥취 그대와 함께 하려하니
莫辭盞酒十分醉 (막사잔주십분취) 마음껏 취하면서 술잔을 사양하지 말게나
旦入風雲變態中 (단입풍운변태중) 아침이면 풍운이 몰아치며 변하는 세상,
只恐風花一片飛 (지공풍화일편비) 다만, 바람에 흩날리는 꽃이 걱정이지
(가내마을 월백당(필자의 당호)에 걸려 있다.)
참고문헌
일봉 이교문 『日峰遺稿』학민문화사. 2008.
정찬주 『茶人기행』도서출판 열림원, 2016.
이희재 논문《19세기 儒生 李敎文의 衛正斥邪사상》 2016.
※ 광주대학교 이희재(李曦載) 교수 논문은 공자학회 제31호에 실려 있으며, 네이버에 '李敎文'을 입력하면 공자학회 제 31호를 열람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