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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강좌《문예사조》11- 5작가연구-②
성기조
한국문학진흥재단 이사장, 《문예운동》, 《수필시대》 발행인 겸 편집인,
국제PEN한국본부 이사장(역임), 한국문인협회 명예회장, 한국교원대학교 교수(퇴임)
〈목차〉
A. 낭만주의 문학
1) 장 자크 루소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3) 윌리엄 블레이크 4) 윌리엄 워즈워드 5)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 6) 바이런 7) 퍼시 비시 셀리 | 8) 존 키츠 9) 프랑수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 10) 알프레드 테니슨 11) 로버트 브라우닝 12) 월트 휘트맨 13) 에밀리 디킨슨 14) 허먼 멜빌 |
1) 장 자크 루소(Rousseau, Jean Jacques 1712.6.28.~1778.7.2)
프랑스 계몽기의 천재적 사상가, 문학자, 시계 기술자의 아들로 제네바에서 출생. 출생 후 얼마 안 되어서 어머니와 사별. 10세 때 아버지는 사소한 사건 때문에 집을 나가 도망함. 루소 자신도 15세 때 각지로 방랑. 19세 때 귀국하여 앙시에서 바랑(Baronne de Warens) 부인과 같이 살았다(1731). 이때가 가장 즐거웠던 시기로 고전, 학문, 음악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수년 후 악보 기재법을 발명하여 출세하려고 파리에 갔으나(1741) 성공하지 못했고, 디드로, 마리보, 퐁트넬, 그림 등과 교우, 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두 세가지 직업을 가졌다. 그러나 도시 생활에 익숙치 못했으며, 하숙집의 침모인 테레스 루바스르와 관계하여 아이를 다섯이나 낳았으나, 아이들을 다 버려 후에 큰 물의를 일으켜 후회의 원인이 되었다.
가극 〈Les Muses galantes〉(1747:우아한 詩의 여신)을 집필, 또 볼테르의 가극 〈Fetes de Ramire〉를 개작했다. 1749년 달랑베르의 요청으로 《백과사전》의 음악 부분을 담당하고 그 해 디종의 아카데미가 모집한 ‘학문 및 예술의 부흥은 습속의 순화에 기여했는가’ 라는 제목에 응모, 부정적인 해답으로 쓴 〈학문 및 예술론〉(1750)이 일등으로 당선되어 이것이 후년 그의 낭만적 자연주의 사상의 출발점이 되었다. 또, 가극 〈마을의 점장이〉(Le Devin du village, 1752), 희극 〈Narcisses(1752)〉, 《인간 불평등 기원론》(1754) 등을 썼다. 에피네 부인의 호의로 갈대로 지붕을 인 집에서 살았고(1756∼57), 부인의 의매義妹 우드부인을 사랑했다. 〈Letters a Voltaire sur la providence〉(1752)를 썼으며, 얼마 안가서 에피네 부인과도 사이가 나빠졌다. 《관극에 관한 서신》(1758)을 썼고, 《백과사전》에 달랑베르가 기고한 제네바에 관한 항목에 반대했고, 연극이 사회에 미치는 해독을 강조했다. 이어서, 서간체의 소설 《신 엘로이즈》(1761, 중세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 아벨라르와 엘로이즈를 당시에 맞게 고쳐 쓴 것으로 인간 정열의 아름다움과 서정적인 자연묘사의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초기 낭만주의 소설의 대표), 《사회 계약론》(1762), 소설
《에밀》(1762, 창조자의 손에서 나올 때 일체는 선이지만 인간의 손에 있어서는 일체가 타락한다는 주제로 쓰여짐) 등을 발표했다. 《에밀》은 그의 자연신관自然神觀과 교육사상을 표명한 것으로, 그 논지가 카톨릭 교회의 비위를 상하게 하여 그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으므로 스위스로 도피했으며(1762), 《에밀》에 관한 파리 대사교大司敎의 서한에 대한 회답으로 〈파리 대주교 크리토프브몽에 대한 변박서辯駁書〉(1763)를 썼다. 후에 런던의 흄에게로 갔으나 사이가 나빠져,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1767) 테레스와 정식 결혼함. 파리에 살며(1770∼78) 《고백론》(1782∼88)을 완성 했고, 《고독한 산보자의 몽상》(1782)을 쓰기 시작했으나, 완성하지 못하고 에르메농빌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루소는 백과사전파百科辭典波와 같이 사회의 모순과 타락을 규탄하고 새로운 질서의 출현을 갈망하였다. 그러나 볼테르나 몽테스키외 와는 달리 사회의 문명, 그 자체의 피할 수 있는 해독을 고발함으로써 사회의 합리적인 개조나, 문명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거부하였다. 그는 자연적으로 선하게 태어난 인간이 사회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오염되고 타락한다는 기본 명제 위에 그의 모든 철학을 세워나갔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사회적 동물인 만큼 사회적 법을 전적으로 벗어날 수는 없다. 다만 이 사회적 법과 자연적 법 사이의 모순을 최소한으로 축소시키는 일이 남아 있다. 루소의 생애는 바로 사회의 필연 속에서 인간의 자연적 자유를 되찾으려는 고달픈 몸부림으로 일관되어 있는 듯하다.
그는 사회와 인간 집단 속에서 끊임없이 악의에 찬 비난을 받았고, 혹독한 매질을 당하였다. 그리하여 자연의 고요와 외로움 속에서 자신으로 되돌아 왔을 때, 비로소 마음의 평안과 행복을 누렸다. 그는 자연을 찬미하였고, 자연으로 회귀하기를 꿈꾸었다. 그것은 잃어버린 낙원, 돌이킬 수 없는 순수에의 애타는 향수였다.
그의 활동은 다방면이며, 그의 주권재민, 자유평등, 애국 등의 사상은 미국 독립과 프랑스 혁명의 이론적 기초와 원동력이 되었고, 사회주의, 인격주의, 영구 평화의 사상, 휴머니즘, 낭만주의, 고백문학, 민중예술 등 근대를 형성하는 여러 가지 요소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는 사상가, 작가일 뿐 아니라 사명감에 불타는 인생의 교사에 가까웠다. 예리한 통찰력과 섬세한 감수성으로 독창적 견해를 유니크한 명문名文으로 세인의 가슴 깊이 새겨 놓았다.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 1749.8.28.~1832.3.22)
독일의 시인, 작가. 청년기는 폭풍노도暴風怒濤, 중년기는 고전주의古典主義, 만년에는 낭만주의자浪漫主義者였다. 부친은 제실帝室 평의원, 모친 카테리나 엘리자베트는 시장의 딸로, 괴테는 푸랑크푸르트 암 마인에서 맏아들로 태어나 부친과 가정교사로부터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엄격한 기풍은 부친에게서, 명랑하며 공상력이 풍부한 예술적 성격은 모친에게서 받은 괴테는 부유한 상류층 가정에서 철저한 교육을 받아, 후일의 천재적 대성을 이룰 바탕이 마련되었다. 어릴 때부터 어학에도 뛰어
났다.
7년 전쟁 중, 그의 집이 점령군의 군정장관의 숙사가 되었을 때, 프랑스 말 및 프랑스의 극과 그림을 배우고 익힐 기회를 얻었다. 그래트헨(Gretchen)과 연애(1763∼64), 라이프찌히 대학 법과 재학(1765∼68)때는 미술과 문학에 더 흥미를 가졌고, 또 쇤코프와의 연에도 있어, 그 체험으로 시집 《Die Laune des Verliebten》을 썼다. 작은 파리라고 불리는 이 곳의 자유로운 생활로 말미암아 중병에 걸려 각혈, 3년 후 귀향하여 요양 중에 경건주의적 신앙이 아름다운 혼, 즉 크레텐 베르크양과 알게 되었고 한편 신비과학과 연금술鍊金術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건강을 회복한 후, 학업을 완성하기 위하여 시트라스부르크로 유학하여 이듬
해(1771)에 학위를 받았으며, 여기서 5년 선배인 헤르더를 알게 되어 민족과 개성을 존중하는 문예관의 영향을 받았고, 후일 시트름 운트 드랑(폭풍노도暴風怒濤, 합리주의에서 비합리주의로, 섭리의 질서에서 파괴의 카오스로, 프랑스적 고전비극에서 셰익스피어적 성격 비극으로)의 바탕이 마련됐다. 또 이때 순진한 목사의 딸 브리온과의 사랑은《사랑과 이별》, 《오월의 노래》를 쓰게 된 계기가 되었으며, 그녀를 버린 자책은 그 후 그의 시작의 테마가 되었다. 셰익스피어, 오시언, 호메로스 등의 작품
에 관심을 기울였고, 또 대성당을 보고 고딕 건축의 위대성을 깨달았다. 변호사 자격을 얻어 귀향하여 변호사를 개업했고(1771), 이듬해 법무 실습을 위해 잠시 베츨라르의 제국 고등 법원에 부임했으며(1772), 이 곳에서 후일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모델이 된 부프를 사랑했다. 프랑크푸르트로 돌아가서 발표한 역사극 《괴츠 폰 베를리힝겐》(1773, 많은 여성을 버린 자책이 나타나며, 사회적 예술적 전통에 대한 대담한 반항, 자연으로 향하는 뜨거운 정열문학으로 형식과 법칙을 벗어나는 분방한 태도가 나타나는 폭풍노도문학),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1774) 등에 의하여, 그는 ‘시트름 운트 드랑’의 대표자가 되었고, 그 이름은 독일 뿐만 아니라 전 유럽에 떨쳤다.
이 무렵부터 《파우스트》를 손대기 시작했다. 셰네만과 약혼했으나 같은 해에 취소했고(1775), 시톨베르크 형제와 스위스로 여행하여 스피노자 철학을 익혔고 정열의 진정을 발견했다. 영주의 고문관이 되어 치적을 쌓아 대신에까지 이르렀다. 2차 스위스 여행을 했으며(1779∼80), 귀족이 됐다(1782), 해부학, 지질학, 광물학, 식물학을 연구하는 한편, 인간의 악간골(顎間骨, 위턱 앞 부분 한 쌍의 뼈)을 발견했다(1784), 시타인 부인과의 12년간의 긴 연애와 부인으로부터 받은 감화, 1년 반 남짓의 이탈리아 여행(1786∼88)에 의한 고대 및 르네상스 미술의 접촉은 ‘시트름 운트 드랑’의 어두운 정열에서 벗어나게 했고, 명징과 질서를 존중하는 고전주의에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희곡 《이피게니아》(1787), 《에그몬트(Egmont)》(1788), 《타소》(1789)를 완성, 이탈리아에서 귀국 후, 번거롭고 바쁜 정무에서 해방되었으며, 1788년 어느 여름날, 바이마르의 공원을 산보하다가 조화업자造花業者의 딸 불피우스를 만났고, 함께 살다가 결혼하였으며(1806) 이 사이에서 아들 아우구스트 (1789∼1830)를 낳았고, 순진하고 상냥한 그녀와 더불어 비로소 가정적인 행복을 누리게 되었다. 불피우스와의 관계는 시타인 부인과의 오랜 관계를 끊게 했다. 이 무렵 식물관계에 몰두, 논문 《식물의 변태》(1790)를 발표했고, 제2차 이탈리아 여행을 했으며, 신설된 바이마르 궁정 극장의 감독을 맡아 진력했다.(27년간)
그 사이에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다. 카를 아우구스트 공을 따라 프랑스로 종군(1792), 바이마르에 있었던 실러와 알게 되었으며(1794), 이 교우는 실러가 작고하기까지(1805) 계속되어 독일 문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만약 실러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파우스트》 2부와, 《빌헬름 마이스터》의 후편을 끝내지 못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우정은 깊었다. 또, 실러의 자극으로 많은 서정시, 담시, 풍자시 등을 썼으며, 또 서사시 《헤르만과 도로테아》(1797)를 탈고했다. 제3차 스위스 여행(1797) 그리고 60노구로 소녀 헤르꼴리프를 사랑했고, 그의 소설 《친화력》 (1809)에는 그녀가 오틸리에라는 이름으로 모델이 되었으며, 괴테는 그녀를 위하여 《소네트(Sonnette)》(1807∼1808)를 썼다. 나폴레옹 1세를 알현했고(1808), 20년간의 광학상의 노작인 《색채론色彩論》(1810)을 발표했다. 자신의 과거를 회상한 《시와 진실》을 썼고, 세계 시민인 괴테는 해방 전쟁의 국민주의적 풍조에는 동조하지 않았으나 독일의 승리를 축하하는 축전극 《Des Epimenides Erwachen》(1815)을 부탁 받고 썼다. 아내 불피우스가 죽자(1816), 쓸쓸한 세월을 보내다가 페르시아의 시인인 시라지를 그의 독일어 번역에 의하여 알게 되었고, 또 빌레머를 사랑하게 되어 그녀를 사모하여 읊은 《서동시집》(1819)을 내었으며, 이 시집 속에는 빌레더 자신의 창작시 2편도 수록되어 있다. 또, 《마리엔바더의 비가》(1823)는 마리엔바더로 피서 여행을 갔다가 74세의 노령으로 19세의 꽃다운 처녀 레베쪼를 만나 열렬히 구애하였으나 거절된 연모의 정이 표현되어 있다. 또 《빌헬름 마이스터》를 완성했고(1829), 23세부터 쓰기 시작하여 무려 59년이나 걸린 생애의 대작인 비극 《파우스트》를 완성했다. 《파우스트》 완성 후, 반년 만에 “더 많은 광명을…”이라는 최후의 말
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의 종교관은 범신론적이나 복음서의 깊은 윤리관을 중시했다. 또 혁명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었으나, 인류의 진보와 행복에 대해서는 정열을 바쳤으며, 문학에서는 낭만주의의 병적 경향을 싫어하고 고전주의로 전향했으나 만년의 작품에는 낭만적 요소가 많다.
3) 윌리엄 블레이크(Blake, William 1757.11.28∼1828.8.12)
영국의 시인, 화가, 신비 사상가. 아일랜드계의 가난한 양말 직공의 아들로 런던에서 출생.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고, 14세부터 7년간 판화사의 도제가 되었다. 왕립미술학원에서 그림을 배우려 했으나(1778), 당시의 화풍이 마음에 맞지 않아 중단하고 판화가로서 생활을 시작했으나 가난을 면치 못했다. 뒤에 바우쳐 부인과 결혼했다.(1782)
12세부터 시를 쓰기 시작, 첫 시집 《소묘素描 시집》(Poetical Sketches,1783)은 당시의 고전주의 시풍을 벗어나지 못하고 엘리자베드 조의 서정시의 모방에 지나지 않았으나 뒷날 신비시인으로서의 소질을 충분히 발휘하고 있다. 그 뒤 자신의 삽화를 넣은 《무구의 노래》(Song of Innocence, 1789)는 사랑과 동정이 비애와 고뇌의 구렁텅이에까지 침투하여 이 세상에서 삶을 이어가는 모든 생명에 미친다는 신비주의적인 삶의 찬가로, 인생의 암흑면을 모르는 어린아이의 경건한 기쁨의 감정과 자연미의 소박한 애상을 청순하고 자유롭게 노래하였다. 인간적 감성을 독특한 이미지로 표현한 시법은 비로소 독창성을 나타내었고 나아가 현대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델의 서書》(The Book of Thel, 1789), 《경험의 노래》(Songs of Experience, 1794)에서는 초기 작품에서 볼 수 있었던 명랑성과 순진성은 먹구름에 휩싸이고, 세계를 회의적으로 보며, 선에 대하여 악의 힘이 머리를 들며 율법에 항거하는 부르짖음과 반항적 사랑의 격조가 넘쳐흐른다. 어른의 눈으로 세계를 회의적, 부정적으로 보아 간결한 시구 속에 인생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
이로써 그는 번즈 등과 함께 영국 시단에 있어서 낭만주의의 선구자가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한 동정적 태도와 용어 및 격조의 청순으로 종래의 영국 시단에 선풍을 일으켰다. 또 유니크한 상징 내지 신화 때문에 난해하여 ‘예언’(The Prophetic Books)라고도 일컬어졌다. 그 후 《천당과 지옥의 결혼》(The Marriage of Heaven and Hell, 1790)에서 육체의 실제와 영원의 형벌을 부정하는 혁명적 태도 표명하면서, 예언적 경향을 짙게 드러내었다. 그는 이 시집에서 ‘대립 없이 진보는 없다’, ‘견인
牽引과 반발’, ‘이성과 에네르기’, ‘사랑과 미움’은 “인간 존재에 필요한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긍정과 부정의 정신은 그의 2대 장시 《밀턴》(Milton,1804∼08), 《예루살렘》(1804~20)에서 종합되었다. 《TheBook of Urizen》(1794), 《The Book of Los》(1795)는 난해의 도를 더한 것인데 그 것에 나타낸 그의 사상은 율법에 의한 질서와 그것을 타파하려는 자유와의 사이에 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역시 그리스도 교의를 중심으로 하여 자기희생과 관용의 정신에 의하여 신의 품에 안긴다는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블레이크의 시는 너무나 현실과 동떨어져 이따금 난해하기 짝이 없는 것도 있으나, 장엄한 스타일과 순수한 정열 및 심원한 사상의 표현은 낭만주의와 일맥상통하는 것이며, 그의 환상과 극치에 다다른 판화 예술과 더불어 불후의 명작들이다.
그는 시정이 넘치는 한 시인임과 동시에 어렸을 때부터 이미 그 싹을 보인 천부적 화가이며, 죽을 때까지 고고한 예술가로 살았다. 그는 때때로 보는 환상을 그림으로 뿐만 아니라 언어로써 표현하고 싶어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그의 시가 표현하는 것은 단순한 현실의 시각적 인식이라기보다는, 그 위에 자연히 이루어지는 극히 순수한 종교적, 신비적인 이미지의 인식이었다. 그는 자작시에 손수 그림을 그려 출판했는데, 그 그림은 현대의 쉬르리얼리즘 작가에게, 그 시는 모든 현대인에게 강한 영향을 끼쳤다.
판화가로서도 유명한 그는 에드워드 영의 《밤의 사상》(1797)에 그린 573편이 채색 삽화와 그리고 블레어의 《무덤》, 그레이의 《욥기》, 단테의《신곡》 등에 삽화를 그렸다.
4) 윌리엄 워즈워드(Wordsworth, William 1770.4.7~1850.4.23)
영국의 자연시인, 낭만시인, 호반시인, 계관시인. 컴벌랜드(Cumberland)의 코커아우드에서 변호사의 아들로 출생. 케임브리지대학 졸업. 프랑스에 두 번 여행하며 13개월간 프랑스에 머물렀는데, 마침일어난 프랑스 혁명에 큰 영향 및 감화를 받고 인도주의적 전원문학, 특히 자연에 대한 심원한 정념의 문학작품을 쓰게 되었으나 공포 정치의 출현을 목도하고는 후년에는 보수적 성향이 되었다. 프랑스에 머물 때 프랑스 처녀 안네트 발롱과의 연애과정에서 딸을 낳았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결혼할 수 없었다.(이 사건은 1916년 하퍼에 의해 밝혀져, 그의 연구에 큰 충격을 줌) 뒤에 누이동생 친구인 메어리와 결혼했다(1802).
그 사이에 누이동생 도러디(W. Dorothy, 1771~1855)와 서머셋 주에서 같이 살았으며(1797), 또 근처에 거주하고 있었던 코울리지와도 친하게 지냈다. 코울리지와의 공저 《서정민요집》(Lyrical Ballads, 1798)의 서문에서, 시는 강렬한 감정이 저절로 넘쳐흐르는 것이라고 하여 신고전주의 시의 이론이나 실천을 뒤엎고 낭만파를 부흥시키려 하여, 19세기 영국 낭만주의의 발단이 되었다. 이 시집에 실린 그의 명상시 〈틴턴 사원〉(Lines Composed a Few Miles above Tintern Abbey)은 뛰어난 명상의 시로서, 두 차례 방문한 사원 부근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고 인간세상의 고통을 위로해 주고, 덜어 주는 것은 자연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노래하였다. 같은 해(1798) 이들 세 사람은 독일로 여행했으며, 그의 누이동생은 고슬라에서 겨울을 보내면서 시작에 전념했다. 귀국하여 호수 지방인 그래스미어(Grasmere)에 정주하였다.(1799부터) 이어 스코틀랜드에도 몇차례 여행하면서, 그 곳에서 스코트와도 친교를 맺고, 또 대륙도 수차 여행했다. 이어서 1843년 계관시인이 되었다.
그의 창작력은 《서곡序曲》(Prelude, 1805)을 쓸 무렵까지 가장 왕성했으며, 그 뒤의 시는 정채가 희박하다. 〈루시의 노래〉(Lucy Gitray), 〈추수하는 아가씨〉와 같은 단시와 소네트 〈의무의 부〉(Ode to Duty), 〈영혼 불멸을 생각하며〉, 〈Laodamia〉 등의 걸작은 대체로 1810년 이전의 작품이다.
단순하고 침착한 표현으로 자연과 인생과의 교감을 읊었으며, 진지하고 고매한 정신을 가진 시인으로서 코울리지와 더불어 호반시인으로 일컬어진다. 또한 워즈워드는 산문의 언어와 시의 언어에는 구별이 없으며, 농민이나 천민도 시에 쓰여져야 한다고 말하고, 시의 소재와 시의 언어와의 불가분리의 관계를 진술하여 종래의 기교에 치우친 문학에 반항하고 있다. 그러한 시가 〈우리들은 일곱사람〉(WeAre Seven)이다.
5)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Coleridge, Samuel Taylor 1772.10.21~1834.7.25)
영국의 시인, 비평가. 데번셔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 어릴 때 다감하고도 꿈이 많았던 그는, 런던의 크라이스트 호스피털 학교에 다닐 때 램과 교류하면서 케임브리지 대학에 다닐 때 사우디와 만난다. 일종의 이상사회, 즉 미국 펜실바니아 주에 세우려 만민평등사회萬民平等社會(Pantisocracy)를 계획하였다. 이 계획을 위한 연설문 작성 중 그는 자신이 웅변가로서 재능을 지니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또 이 계획을 추진하기 위한 시도 썼으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원인은 콜리지의 의지력 부족이었다. 그리고 대학도 중퇴했다. 사우디의 의매義妹 프리커와 결혼했으나(1795), 둘 사이는 그다지 원만하지 못해 몇 년 후 헤어졌다.
사우디와의 합작으로 희곡 〈로베스피에르의 몰락(The Fall of Robespierre,1794)〉을 냈으나, 그 뒤 워즈워스 남매와의 해후(1795)는 그의 시적 상상력의 전개에 큰 자극이 되었다. 그리하여 워즈워스와 공저로 《서정민요집抒情民謠集》(Lyrical Ballads, 1798)을 내면서, 여기에〈노수부행老水夫行〉(Ancient Mariner)을 수록했는데, 낭만주의의 한 성격을 드러내는 초자연적 몽환성은 이 밖에도 〈크리스타벨〉, 〈쿠빌라이칸〉에도 잘 나타내 그의 시정의 정점을 보여주는 듯하다. 그 후 워즈워스 남매와 함께 독일을 여행(1798)하며 독일의 철학과 문학을 가까이 하고, 귀국 후에는 실러의 희곡도 번역했다. 이 무렵부터 아편 중독으로 인한 심리적, 육체적 어려움으로, 지중해 연안으로 전지 요양(1804∼06)을 했음에도, 귀국 후에는 완전한 아편 중독자가 돼 있었다. 그러나 문학비평에 있어서의 그의 감수성은 더욱 심광을 번쩍이게 되어, 셰익스피어에 대한 강연을 하며, 주간지 〈친구〉(The Friend, 1809~10)를 발행하는 등 문학 활동은 오히려 더욱 왕성해졌다. 그리하여 《문학평전》(1817) 등의 명지에서 워즈워스를 논하고 상상론을 전개했다. 또 그는 철학, 종교, 정치 등 여러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 독일 관념론을 최초로 영국에 도입
소개했다. 만년은 의사의 집에 의탁하여 담론으로 세월을 보냈다.
콜리지의 시는 워즈워스의 시와는 전혀 다르다. 평범한 대상물의 은밀한 의미를 탐구하는 것 보다는 하늘, 땅과 같은 매혹적이고 화려한 상상의 세계로 영묘하게 독자를 이끌어 간다. 두 시인은 자연을 사랑하지만 콜리지는 저녁 하늘의 맑고 연한 초록색 같은 자연의 풍경을 보다 더 정교하게 관찰하고 표현하였다. 워즈워스가 자연 시인인 반면에 콜리지는 초자연의 환상, 언어의 음악미, 정교한 심리 해부를 중시하여 시의 목적은 미를 통하여, 쾌감을 주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 두 사람의 기품은 영국 낭만파 시풍의 확립을 위해 상호 협력한 것은 사실이다.
6) 바이런(Byron, George Gordon, 6th Baron 1788.1.22~1824.4.19)
시인, 영국 런던 출생. 스코틀랜드의 에버딘으로 옮겼다가(1790), 5대 바이런 남작의 사망으로 6대 바이런 경이 되어(1798), 노팅검 주로 옮겼다.
런던에 나와 케임브리지 대학에 입학했으나(1805), 학문에는 흥미가 없어 가끔 시작詩作을 즐겼다. 시집 《게으른 나날》(1807)을 내었으나, 이듬해 《에딘버러 평론》지에서 악평을 받아, 풍자시 〈영국 시인과 스코틀랜드 비평가〉(1809)를 써서 분풀이를 했다. 졸업 후, 청춘기의 우울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퇴폐적이며 기행을 일삼다가 스페인, 포르투갈, 알바니아, 그리스 등지을 여행했다.(1809~11) 귀국 후 런던에 거주하던 중 의회 상원에서 방적공의 소요를 탄압하는 지주에 항의하는 연설을 하여 이름을 떨쳤다.(1812) 같은 해 여행하며 취재한 운문 여행기를 《차일드헤럴드의 편력》(1~2권, 1812)으로 펴내 “하루아침에 눈 떠보니 유명해졌다”는 말을 남겼다. 그 내용은 끊임없는 정신의 편력을 그의 실질적 유럽 각지에의 방랑 속에 짜 넣은 운문 여행기로, 자신을 모험을 감행하는 내용을 차일드 해럴드의 기사 형식으로 하여, 낯선 고장의 풍광과 그곳에서 느껴지는 방만한 감정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자유분방한 시풍과 이국적 정조가 시대 상황과 어울리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때부터 사교계에 드나들면서 연애에 열중했다. 1815년 결혼했으나 얼마 안 가서 별거했다(1816). 그 사이에 《사교도邪敎徒》( The Giaour, 1813), 《해적海賊》(The Corsair, 1814), 《라라》(Lara, 1814)121 등의 담시를 발표, 악마파 시인(셀리 및 그 아류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우디가 붙인 명칭)의 명목을 드러냈다. 그러나, 윤리적 문제로 세론의 비방이 심해지자, 다시 영국을 떠나 스위스로 가 제네바에서 셀리를 만나 함께 스위스 각지를 다니다가 베네치아에 도착했다.
이어 로마, 피사, 제노바 등에서 방탕한 생활을 보냈으며, 특히 귀치올리 백작부인과의 관계는 유명하다. 그 사이에 시극의 걸작 《맨프래드》(Manfred, 1817)를 썼고, 《차일드 해럴드》(3권)을 냈다. 이어 《베포》(1818), 《마제파》(1819), 《카인》(Cain, 1822) 등을 냈고, 대작 《돈 주언》(1819~24)을 펴내 ‘느긋함과 명랑성과 진지성이 전편에 흐르는 영시 중 가장 훌륭한 작품’으로 밀턴의 《실락원》 이래 최대의 서사시로 극찬을 받으며 이 시기의 대표작으로 꼽히게 된다. 이탈리아의 여러 지역에서 수년을 지낸 후, 전제정치에 대한 혐오감으로 인해 그리스로 이주, 터키로부터의 그리스 독립을 위하여 싸울 군대를 창설하였다. 이 대의를 위하여 그는 생명과 재산을 다 희생했다. 말라리아에 걸려 1824년 4월 19일 Missolonghi에서의 죽음은 그가 혁명적 시인이며, 정열적인 자유수호자라는 명성을 전 구라파에 떨치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정묘한 시재의 소유자라고는 할 수 없으나, 당시의 위선과 편견을 통탄한, 정열과 냉소, 즉 바이러니즘은 영국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으며, 유럽 여러 나라의 문학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귀족으로 농민을 경멸하였고 농민을 소재로 한 워즈워스의 시를 경멸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대에서 가장 낭만파적인 시인이 되었으니, 개인들이 사회를 공격하였던 도전적인 반항의 시대를 대표하였기 때문이었다. Byron의 시는 본질적으로 반항시에 속한다. 그는 전제주의를 한편 고상하면서도 철저하고 강력하게 혐오하였으므로 영국사회에 대항하는 반항아로서 어디서나 압제에 항거하였다. 또한 그의 작품은 개성이 강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이 작품의 주인공이었으므로, 서사시나 극시에서도 그의 사상과 감정을 용이하게 찾아 볼 수가 있다. 그의 시정신은 자기중심적이고 거칠고 난폭하나, 독자의 공감을 획득하는 이상한 힘을 지니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일찍부터 그의 시집이 애독되었다.
저서로는 《아바이도스의 신부》(1813), 《헤브라이의 선율》(1815), 《파리시나》(Parisina, 1816), 《코린트의 포위》(1816), 《꿈》(1816), 《타소의 탄식》(The Lament of Tasso (1817), 《마리노 팔리에로》(1812), 《천상과 지상》(1823) 등이 있다.
7) 퍼시 비시 셀리(Shelley, Percy Bysshe 1792.8.4~1822.7.8)
영국의 시인. 열렬한 낭만파 시인 셀리는 대학 입학 준비 학교로 유명한 Eton 스쿨 재학 중 하급생이 상급생의 종복이 되는 전통적인 ‘하급생부려먹기 제도’에 반기를 들더나, 옥스퍼드 재학 중에는 《무신론의 필인성》(The Neccessity of Atheism,1811) 이라는 글을 인쇄하여 주교와 고위 인사에게 증정, 퇴학 처분을 받는다.(1811) 그리하여 부친의 송금이 중단되었으나, 탈세속적인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음.
이 해 런던에 나가, 16세의 소녀 해리어트와 결혼, 이어서 아일랜드, 웨일스 지방을 방랑하며 장시 〈맵 여왕〉(Queen Mab,1813)을 발표했다.
뒤에 《정치적 정의》의 저자인 William Godwin의 영향을 받아 압제적인 영국의 관습을 더욱 혐오하게 되었다. 그리고 고드윈의 딸 메리를 알게 되면서, 여러 가지 분규를 일으키어 해리어트는 마침내 투신자살했고(1816), 그는 메리와 결혼했다. 시인의 이상미를 추구한 《얼스터》(Alstor, or the Spirit of Solitude, 1816)를 발표 후 다시 대륙으로 건너가, 제네바에서 바이런을 만나 함께 여름을 보냈다. 당시의 작품으로 《Hymn to Intellectual Beauty》(1816), 《Mont Blanc》(1816) 등이 있다. 귀국(1816) 후, 연말부터 이듬해 사이에 헌트, 키츠, 해즐리트램 등과 알게 되었으며, 그해 겨울 마를로우에서 《회교도의 모반》(The Revolt of
Islam, 1818)의 전신인 〈Laon and Cynthia〉를 집필하였다. 뒤에 이탈리아로 가서(1819), 나포리 근처에서 〈Stanzas Written in Dejection Near Naples〉(1818)을 집필했으며, 또 로마에 가서는 고국의 정국을 개탄하여 《무정부의 가면극》(1819)을 썼다. 잔인한 늙은 백작을 묘사한 《첸치 일가一家》(The Cencil, 1819)를 발표했고, 이어 제우스의 압제에 항거한 인류 해방의 사도 프로메테우스의 승리를 읊은 4막의 서정극인 《사슬에서 풀린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Unbound, 1820)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키츠를 찬양한 만가 《아도나스》(Adonas, 1821)와 함께 그의 대표작이다. 피렌체에서 〈서풍부西風賦〉(Ode to the West Wind, 1819), 피사로 옮겨 〈종달새에게〉(To askylark, 1820), 〈구름〉(The Cloud,1820) 등의 서정시를 썼다.
Shelley는 본질적으로 정열적인 서정시인이다. 그는 새가 자연스럽게 노래하듯 시를 썼다. 그는 감정이 예민하고 섬세하였고, 고귀함과 미를 갈망하였다. 그는 자연스럽고도 간결하며, 음악적인 어구로 자신의 비애와 갈망을 표현할 수 있는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셀리의 시는 구름과 바람이 말을 속삭이고, 추상적인 관념마저도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게 하는 아름답고 생생한 의인법으로 가득 차있다.
1822년 Gulf of Spezia 건너에 사는 친구들을 방문하였다가 배편으로 자신의 주거지인 Lerici로 돌아오다가 돌풍에 휘말렸다. 10일 후 해안으로 밀려온 그의 시체는 화장되어 로마에서 이미 사망한 후배 동료인 Keats의 무덤 근처에 매장되었다. 익사한 그의 주머니에는 키츠의 시집이 들어 있었다.
8) 존 키츠(Kcats, John 1795.10.31.∼1821.2.23)
영국의 시인, 낭만주의 시대 후반기 세 번째 천재시인으로 미의 사도로 일컬어지며 3인 중 가장 단명하였다. 다른 두 시인과는 달리 천한 계층(경마장 마구간의 관리인을 부모로 하여) 출생이었다. 어릴 때 양친을 잃고, 의사가 되려고 외과 의(醫)의 조수가 되었다.
〈Chapman’s Homer〉를 쓴 1년 후부터 시에 온 정신을 쏟기로 결심하였다. 스펜서, 셰익스피어 등을 탐독하고 헌트와 친하게 된 그는, 21세기부터 3년간 시작 재능의 급격한 진전을 보였다. 헌트의 인정을 받은 몇 편의 소네트가 그의 잡지 《Examiner》에 발표되고(1816), 이어 셸리에게 소개되어 시단의 1인이 되었다. 첫 시집 《시집》(Poems, 1817)은 낭만적 향기 높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으나 별 호평을 받지 못했다. 그 다음의 장시 《엔디미언》(1818)도 보수적인 비평가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엔디미언은 ‘아름다운 것은 영원한 기쁨’(A Things of Beauty is a joy forever)으로 시작되며 유미주의, ‘라파엘로 전파前派(Pre-Raphaelite Brotherhood) 운동의 빌미가 되고 오스카 와일드의 탐미주의로 이어진다.
1818년 여름, Lake Country 등의 지방을 도보여행 하였는데 이로 인한 과로로 잠복해있던 폐결핵이 악화되었다. 이 무렵부터 건강이 나빠지고, 또 화니 브라운과의 연애 때문에 심신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그러나 그의 시적 상상력은 이상하리만큼 약동하여 《무정한 미인》(1819)과 같은 발라드 풍의 시와 《나이팅게일에게》(1818) 등의 송가頌歌(Ode)를 비롯하여 1818∼19년 동안에 《이자벨러》, 《레이미어》(Lamia), 《하이피어리언》, 《성 아그네스祭 전야》, 《그리스 항아리에 붙이는 노래》, 《가을에
게》(To Autumn) 등을 썼다.
그러나 이미 폐결핵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어, 친구들은 그를 이탈리아로 보냈으나, 로마에서 25세 4개월의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셸리의 〈Adonais〉는 키츠를 애도哀悼하는 비가悲歌이다.
셸리보다 더 짧은 일생이었지만, 키츠가 보여준 천재성은 기적과 같이 충만하고 빽빽한 풍요성, ‘무르익은 풍요豊饒(mellow fruitfulness)’를 가지고 있다. 그는 셸리의 시가 희박하다고 지적하면서, ‘모든 틈을 광석으로 틀어막으라’고 권고했는데, 권고 그 자체가 키츠의 시론이라고 할 수 있다. 섬세한 미적 감수성과 인간성의 근저를 탐구하려는 윤리적 정신과의 조화는 영국 낭만파의 한 전형이었다.
셸리는 영적이고 미적인 감각을 추구하였고, 키츠는 시각과 청각을 통해 포착하는 미美의 예찬자였다. 친구와 산책을 할 때도 주변 대상물을 소홀히 봐 넘기지 않았으니, 새의 노래, 수풀과 울타리에서 나오는 낮은 소리의 응답을 느꼈고, 초록색과 갈색의 빛과 은은한 그림자의 변화와, 광활한 보리밭으로 몰아치는 세친 바람 등을 세심하게 감지해냈다.
시각과 청각을 통해 예리한 기쁨을 느꼈으며, 워즈워스와 마찬가지로 ‘시인은 인간에게 계시를 진달하는 예언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위대한 시인이 되기 위하서 의식적으로 노력하였고, 인간의 기쁨과 슬픔을 일찍이 없었던 희귀한 표현으로 묘사하였다. 그의 서정시는 셸리의 서정시처럼 자연발생적이 아니다. 그의 송시는 덧없고 괴로운 현실에서, 영원히 지속하는 미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낭만주의적 욕구가 매혹적인 어구로 묘사되어 있다.
그의 묘비명은 ‘그의 이름을 물에다 쓴 사람, 여기에 잠들었다’이다. 저서로는 그의 정신적 발전의 해명에 불가결한 《서간집》(The Letters of Keats, M. B. Forman 편, 1947), 《제3시집》이 있다.
9) 프랑스와 르네 드 샤토브리앙(Chateaubriand, François René,
Vicomte de 1768.9.4.~1848.7.4)
프랑스의 소설가, 정치가. 쌩 말로에서 귀족의 아들로 태어남. 엄격하고 침울한 부친, 병약한 모친, 그리고 병적일 만큼 신경질적인 누님 등의 가정환경과 브르타뉴의 황량한 자연환경 속에서 고독하고 몽상에 잠긴 소년 시절을 보내고, 육군 소위가 되었으나(1786) 아버지의 사망으로 그만두고, 파리의 궁정과 사교계에 출입했다(1786∼91). 혁명(1789) 후, 타고난 몽상벽과J.J루소, 생 피에르 등에 의하여 고조된 원시 자연에 대한 동경으로 인하여 미국 여행(1791~92). 루이 16세가 바레느에서 체포 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급히 귀국하여 반혁명군에 가담했으나, 티옹빌 전투에서 부상하여(1792) 런던으로 도피, 이른바 망명 귀족의 신고를 맛보았다(1793~1800).
런던으로 도피 중 《혁명론》(1797)을 집필하였고 18세기의 무신론적 사상에 바탕을 둔 화려한 문체가 특징이다. 그러나 생계의 어려움 속에서 모친과 누이동생의 죽음으로 인하여 신앙을 회복한 그는 《기독교 정수》(1802)와 《아탈라》(Atala,1801), 《르네》(René,1802) 등을 연이어 발표했다. 《기독교의 정수》는 18세기의 무신론적 철학사조에 대항하여 그리스도의 옹호와 재건을 위한 내용이다. 교의와 교리, 시학, 미술과 문학, 제사(Culte)의 4부로 나누었고, 그리스도교야말로 지금까지 존재한 모든 종교에서 가장 시적이고, 인간적 자유의지를 긍정하며, 모든 예술, 그리고 문학에도 가장 친화적인 종교임을 논술하고 있다. 다소 주관적인 논술이지만 이 글을 통해 ‘서정의 새로운 원천’을 밝히며, 문학의 목적을 ‘미의 표현’으로 되돌렸다는 점에서 스탈 부인의 《문학론》과 함께 낭만주의 전기 문학 중에서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고 있다.
《아탈라》와 《르네》 두 책은 신대륙의 모습을 소개함으로써 낭만주의 특징의 하나인 이국의 정취를 잘 표현하였다. 《아틸라》에서는 미국의 대자연을 배경으로 하여 인디언 노추장의 청년 시대의 비련을 그렸다. 《르네》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등의 계보에 속하는 작품으로, 혁명의 심연과 새 시대적 혼란기의 와중에서 겪는 젊은이의 고독감과 권태로움을 세밀하게 그리고 있는데, 이것은 낭만주의 시대의 세기말(mal du siecle)의 페시미즘(pessimisme)을 낳게 한 원천이 되었다.
이후 나폴레옹 1세로부터 인정받아 로마 주재공사로 임명되었으나(1803) 앙기앵 공의 처형으로(1804) 나폴레옹과의 관계가 악화되어 평생 그를 적대시하였다. 정계에서 물러나 베네치아, 그리스, 콘스탄티노플을 거쳐 예루살렘에 이르는 동방을 여행(1806~07)하였고, 귀로에는 카르타고, 스페인에 들렸다. 귀국 후 대작 《순교자》(1809), 《파리로부터 예루살렘에의 순례》(1811)를 내었다.
나폴레옹의 몰락 후에는 《보나파르트와 부르봉가》(1814)를 내어 공공연하게 나폴레옹을 비난하였으며, 부르봉 왕통 복귀 후에는 이를 지지하여(1814) 베를린, 런던, 로마 등지의 대사와 외상을 역임했다(1823~24), 7월 혁명(1830) 후에는 퇴임하여, 루이 필립 정권을 공격했다. 만년에는 미모와 재치로 널리 알려진 레카미에 부인의 살롱에서 고독과 우울한 가운데 독서와 저술로 세월을 보냈다. 이 무렵 《역사적 연구》(1848~50), 《자서전:무덤 너머에서의 회상》(1848~50) 등을 남겼다. 이때 ‘나는 울었다. 그리고 나는 믿었다’ 라고 하며, 이성에 의해서가 아닌 ‘감성에 의한 믿음’이었음을 술회하고 있듯이 그의 내부에서는 이미 낭만주의 경향이 나타나 있다.
그는 스탈부인과 함께 프랑스 낭만주의 문학에서 선구자의 한 사람으로서, 고딕 예술의 부활, 미적 그리스도교의 발견, 개인의 감정의 토로, 시인의 우울 등 낭만주의 요소를 아름다운 필치로 전개하였다. 저서로 《서한집》(L, Thomas편, 1912~25)이 있다.
10) 알프레드 테니슨(Tennyson, Alfred Lord 1809.8.6.~1892.10.6)
영국의 시인, R.브라우닝과 함께 빅토리아조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 중부 지방 랭커셔의 서머스비(Somersby)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남. 어린 시절 그가 숭배하던 영웅은 바이런이었다. 1824년 바이런이 사망하자 15세의 소년은 ‘천지가 암흑으로 보이는 것 같이 느꼈다’ 그래서 집근처 숲으로 가 ‘바이런은 세상을 떠났다’ 라는 문구를 비문으로 바위에 새겼다. 엄격하면서도 교양이 있는 부친의 교육을 받아 형과 함께 일찍부터 詩作을 하여 《두 형제의 시집》(1827)을 발표하였다. 다음 해, 케임브리지에 입학하여 그곳에서 몇몇 친구들과 ‘사도’라는 모임을 만들 었다. 30년에 《시정시 중심의 시집》을 출판하였고 다음해 부친이 사망하자 대학을 중퇴하였다. 다시 《시집》(1832)을 출판하였으나, ‘막대기 사탕’이라는 등 혹평을 받았는데 누이동생의 약혼자인 친구 아아더 핼럼이 급사(1833)하여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런던으로 나와 카알라일을 중심으로 하는 문학자들과 사귀고 사상적인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다음에 출판된 《시집》(1,2권, 1842)에서, 세평은 좋지 않았지만, 시인의 발전이 엿보이는 〈아더왕의 죽음〉 등 수작이 많이 수록되었다.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랐으며 신비주의적인 사고 체계를 갖춘 시인은 과학에도 크게 흥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사색의 결과를 드러낸 ‘세계는 신의 질서가 지배하는가, 또는 맹목적인 자연의 힘에 의한 혼돈에 지나지 않는가’라는 글을 발표하였다. 1850년에는 대표작 《추억》(In memoriam)을 출판하였다. 이는 친구 핼럼이 비인에서 급사한 뒤 17년 동안 친구의 죽음을 명상하면서 때때로 써 내려간 서정시의 집대성이다. 당시의 사회는 이것을 종교와 과학의 훌륭한 융합이라고 높이 평가하였다. 회의의 구렁텅이에 빠져들어서 인간애의 실체를 직관적으로 포착하려는 시인의 노력이야말로 이 작품의 진정한 문학적 가치라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시의 종교적 갈등에 관한 아름다운 표현과 ‘공포와 회의 및 고통은 사랑의 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그 해답과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결론이 눈길을 끈다. 일관된 구성이 결여된 점도 있으나 애조, 선율, 사상, 감정의 깊이에 있어서 페트라르카의 시가와 셰익스피어 소네트에 견줄 만한 작품이다. 그 해에 계관시인으로 추대되었으며 오랜 동안의 약혼 기간을 거쳐 에밀리 셀우드와 결혼도 하였다(1850).
이 때부터 시인으로서의 사명에도 자신을 갖게 되고, 사회도 이 시인을 예언자로 기대하게 되었다. 극적 독백 형식으로 이루어진 《모우드》(1855)에서, 회의에서 행동으로 탈출하는 청년상을 그려 호평을 받은 것도 그 일례이다. 아더왕의 전설을 제재로 한 《국왕 목가牧歌》(The Idylls of the king 12권, 1859~71)에 이어 밀턴의 《해럴드》(1877) 등을 남겼으며 《복수》(The Revenge)는 69세에, 어떤 면에서는 그의 가장 완벽한 서정시 《장벽 넘어》(Crossing the Bar)는 80세 때의 작품이다. 1892년 사망 시까지 50년간 그는 ‘언어의 마술사’로 불리며 세련된 운율, 견실한 도덕 정신, 소박한 애국심을 표출한 시작을 통해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가장 훌륭한 시인으로 군림하였다.
11) 로버트 브라우닝(Browning, Robert 1812.5.7~1889.12.12)
영국의 시인, 런던의 부유한 은행가의 외아들, 모친은 신앙심이 깊은 스코틀랜드 출신, 한 때 런던 대학에 1년간 다녔으나, 주로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으며, 부친이 소장한 6천 권의 장서가 지성의 원천이 되었다.
백모伯母의 도움으로 장편 이야기詩 《폴린》(Pauline, 1833)을 내고, 이어 극시劇詩 《패러 셀서스》(1835)를 발표했다. 이 책의 내용은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도 지선至善을 목표로 매진하면 중도에 쓰러질지언정 실패는 없다는 그의 정신을 나타낸 것이다. 친구인 극장 주인의 권고로 비극 《스트래퍼드》(Strafford)를 써서 상연하고(1837), 이탈리아로 여행(1838). 중세 시인을 주제로 하여 이상과 세속의 대립을 그린 장시 《소델로우》(Sordello, 1840)는 ‘병으로 누워 있던 유명한 작가가 이 책을 꺼내 들고 몇 페이지 읽다가 하느님 맙소사! 내가 바보올시다’ 라고 소리칠 정도로 그의 작품 중 가장 난해한 작품이다.
브라우닝이 창작한 작품들은 애매모호하다는 의혹을 사곤 했다. ‘연결어의 생략, 어구의 도치 및 난해한 사상의 돌연한 표현, 산문에 적당한 소재를 시에 사용’하는 등이 그랬다. 《Bells and Ooemegranates》(1841~46)는 시의 총서叢書이며, 이는 《피파 지나가다》, 희곡 《A Soul‘s Tragedy》, 《Luria》 등 8편을 포함하고 있다.
말을 타다 떨어져 수년 간 집에서 은거하던 여류 시인 E.브라우닝이 이 시편들을 읽고 그를 열렬히 사랑하게 되어, 그녀와 비밀리에 결혼(1846), 이탈리아에서 살았다. 이때 플로렌스에서 보낸 15년간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남겼다. 그녀가 사망한 후에는 런던으로 이사했다. 이어서 《크리스마스 이브와 부활제》(1850), 《남녀》(1855), 《등장인물登場人物》 Dramatis Personae, 1864) 등의 명작을 발표했다. 이탈리아에서 구상한 장시 《반지와 책, 12책》(1868~69)을 발표했다. 이는 로마의 옛 살인 사건을 제재로 하여 시적 상상력을 전개시킨 그의 걸작이다. 이후에도 계속해서 극작품과 시집을 발표하고, 뒤에 애독자들에 의하여 브라우닝 협회가 설립되었다(1881). 시집 《애솔랜드》(Asolando,1889)는 그가 베네치아에서 사망한 날에 출판된 것이다.
대부분의 작품은 극적 독백(dramatic monologue)의 표현 형식으로 인간 심리의 묘사에 객관성을 곁들여 서정의 표현에 있어서 새 분야를 개척했다. 이리하여 그는 테니슨과 더불어 빅토리아 시대(낭만주의의 정열은 사라지고 실리주의와 공리주의가 유행하면서, 문학에서도 사실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룸) 영국시단의 대표자기 되었다.
테니슨을 언어의 마술사라고 한다면, 그의 표현은 생경, 난해하나 회화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복잡한 심리 묘사에 성공하고 있다. 테니슨은 《In Memoriam》에서 죽음과 영생에 관한 괴로운 회의를 나타내었는데, 브라우닝은 인생을 지극히 감미롭게 생각하였다. 그는 승마를 좋아하였고 미술과 음악 감상 및 만찬회가 끝난 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하였다. 시에서는 담대하고 정력적인 인간을 부각시키기를 좋아하였으나, 현실에서는 어떠한 노력과 투쟁도 완전한 성공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요? 이 지상에서 이루지 못한 일을 완벽하게 이룰 수 있는 하늘나라가 올 것입니다’라고 그는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내세에 대한 확실한 믿음에서 오는 이 풍요에 대한 낙천주의는 죽음의 공포로 동요하던 19세기 청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저서로는 《Fifine at the Fair》(1872), 《Dramatic Idylls》(1879~80) 등이 있다.
12) 월트 휘트맨(Whitman, Walt 1819.5.31~1892.3.26)
미국의 시인. 에머슨, 도로우, 호든, 멜빌 등이 영국문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면 휘트맨은 근대 미국 문명과 미국인의 감정을 노래한 가장 미국적인 시인이다. 뉴요크주 롱아일랜드의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이 다 열성적 Quaker 교도였다. 모친은 화란계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애정이 넘치는 훌륭한 부인이었으며, 휘트맨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어릴 때에 브루클린으로 옮겨(1823), 소학교를 졸업하고 여러 가지 직업에 종사하였으며, 후에 저널리스트로서 신문, 잡지 편집에 관여하였다(1830~50), 이 동안에 버스의 운전수, 수부, 노동자들과 사귀면서 그의 민주적 평등과 인간애의 정신이 배양되었다.
그는 책보다도 민중으로부터 많은 것을 배운 민중시인이다. 서부 지방의 분위기, 즉 거칠고 무지하기는 하나 모든 속박에서 해방되고 자유로우며 독립 정신에 충만 된, 인간미 있는 분위기(이것이 미국적인 것으로 미국 민주주의로 발전하여감) 속을 돌아다니며 시정을 넓힘. 또한 독서를 통하여 괴테, 칼라일 등의 영향과 특히 R.W.에머슨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
시집 《풀잎》(Leaves of Glass, 1885)을 출판했으나 에머슨의 추천을 받은 것 외에는 거의 주목을 끌지 못했다. 남북전쟁(1861~65) 때에는 간호원으로서 남북의 구별없이 부상자를 간호했다(1862~64). 전후에 정부의 말단 관리가 되었으나(1865~73) 중풍에 걸려 뉴저지주의 캄덴에 은퇴하였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냈으며, 《풀잎》의 초판은 서문과 12편의 시로 편집한 작은 책자였으나, 차차 작품을 써 보태어 제2판(1891~92)은 자신의 감수에 의한 생전의 최종판版으로서, 4백 페이지가 넘는 거창한 시집이 되었는데, 초판 때의 서문은 삭제하였다. 《풀잎》은 시인의 강렬한 자아의식, 평등주의, 민주주의, 동포애, 육체의 찬미(건강한 육체와 성애를 노래한 것으로 그의 가족은 신병, 폐결핵, 성병 등의 환자가 많았기에 건강한 육체에 남다른 매력을 느꼈다. 제1판에서 육체와 성을 노래 불렀기 때문에 비난과 공격이 심했으므로 제2판에서는 더욱더 이 테마의 시를 늘려서 비난에 답하였는데, 〈Children of Adam〉, 〈Calamus〉 등을 대담하게 노래했다. 이런 면에서 그의 문학적 특징이 잘 드러나고 있음과 동시에, 당시 거의 모든 미국 시인이 영시의 형태에 맞춘 데 비하여, 전통적 율격과 압운 등을 무시하고, 일상어를 자
유로운 리듬으로 구사하며 시재와 시형, 운율에 있어서 미국의 시에 새로운 전통을 수립한 중요한 작품을 발표했다. 세재 또한 록키 산맥 지대, 태평양 연안, 맨해턴 거리 등에서 시의 제재를 발견하여, 원시 자연의 모습에 있어서의 인간의 우애와 사랑과 죽음 및 종교 등에 관한 새로운 애상을 힘찬 리듬으로 노래하여, 근대 자유시의 선구적 작품을 발표하였다.
산문으로서는 새로운 미국의 시와 시인의 존재 방식(시인은 예언자로서 시인의 환영을 상징적으로 표현함으로써 ‘그 자체가 바로 위대한 시인 합중국’을 노래 부르는 것이다)에 대해서 설파한 초판 서문과, 그가 personalism이라고 칭한 개인주의에 입각해서 민주주의 문학론을 전개하여 남북 전쟁후의 퇴폐한 세정을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더욱 빛나는 민주주의 미래를 믿고서 자유, 평등이라는 미국의 꿈을 실현해야할 새로운 문학의 창조를 제창한 《Democratic Vistas》(민주주의 전망, 1871)은 매우 중요한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다.
처음에는 그의 진가가 이해되지 않아 부당한 비난을 받기도 했으나, 오늘날에는 미국 민주주의가 낳은 대표적인 시인으로 인정되어 내외에 사상적 영향을 끼치고 있다. 특히 암살된 Lincoln 대통령을 애도한 〈When Lilacs Last in the Dooryard Bloom’d〉는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13) 에밀리 디킨슨(Dickinson, Emily Elizabeth 1830.12.10~1886. 5.15)
미국의 여류 시인. 부친은 Amherst에서 유명한 법률가였다. 실연과 엄격한 부친의 성격 때문에 출생지에서 거의 숨어살다시피 일생을 보냈다. 생전에는 2편의 단시를 발표했는데, 원고를 소각할 것을 유언했다.
사후 4년이 지난 1890년 Thomas Wentworth Higginson에 의해 출판된 《시집》(Poems, 1890, 1891, 1896), 《The Complete Poems》(1924), 《Further Poems》(1929) 등에 의해 그 진가기 인정되었다.
문법, 수사, 운율 등을 무시하고 감정에 끌리는 대로 삶과 죽음, 사랑, 신, 시간, 영원을 에피그램(epigram, 경구시, 비시) 형식으로 읊었다. 간결, 명료한 표현, 대담하고 독창적인 사상寫象은 그 후의 이미지즘 운동의 선구가 되었으며, 엘리어트 등 제1차 대전 후의 시인들과 일맥 상통한다.
에밀리 디킨슨의 시는 1860년대, 즉 그녀의 실연 후에 쓰기 시작한 것이다. 뉴잉글랜드의 조용한 마을, 자신의 집 2층에서 거의 은둔자와 같은 생활을 하던 디킨슨이 쓴 시가 신과 인간의 자연과 죽음에 관하여 훌륭한 통찰과 예술적 표현에 도달해 있었다는 것은 문학사 중에 기적에 속할 것이다.
그녀는 홀로 시작에 몰두하였다. 다른 사람들은 그녀가 시를 썼다는 것조차 전연 모르고 있었다. 1700여 편에 이르는 시는 모두가 단시였고, 제명도 없고 작시한 연대도 분명치 않다. 한편 그의 무경험과 시 속에 그려져 있는 경험과의 사이에는 커다란 거리가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의 시는 영혼의 경험이 아니라, 하나의 가정이나 다만 공상에 지나지 않은 것은 아닐지. 디킨슨의 시와 생활은 전통적 Puritan의 생활과 사상에서 보이는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Puritan인의 성향을 다분히 느끼게 하면서도 더욱 더 밝고 개성적이다. 또한 디킨슨의 시세계에선 멜빌이나 호돈의 세계에 있어서처럼 인간 혹은 개인이 외부적 규율이나 운명에 의하여 벌과 제재를 받는 일이 없다. 어둠이 없는 것은 그 때문이다. 디킨슨에 있어서 신은 자못 친근감을 주는 존재이다. 무서워해야 할 존재도, 벌을 주는 존재도 아니며, 디킨슨은 신을 가까이서 느끼면서 담담하게 노래 부르고, 때로는 신의 관념과 장난치기조차 한다. 사회라는 것을 버리고 생활한 디킨슨은 사회 통념으로서의 신적 관념도 동시에 버리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의 은둔 생활은 자신의 생활 속에서 완전히 자유였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있는 이상, 그것이 강요된 부자연스러운 생활이 아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것은 그녀의 의지에 의해서 선택된 세계인 것이다. 억압된 생활이 아니라 자신이 자진하여 만들어 낸 지적인 생활이었다. 그런 그의 생활은 확실히 현실 사회를 단절해 버렸지만 현실 인생까지 단절해 버린 것은 아니었다. 남북전쟁 후의 현실적인 갈등과는 달리 2층의 자기방으로 불변의 세계를 가지고 들어가, 적어도 그 세계만은 완전히 정복함으로써 당당한 개성을 주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14) 허먼 멜빌(Melville, Herman 1819.8.1~1891.9.28)
미국 소설가, 뉴욕의 부유한 무역 상인의 집에서 8인의 형제, 자매 중 셋째로 출생, 처음에는 집안이 넉넉했으나 제2차 대영전對英戰 후에 닥쳐온 경제공황의 여파로, 부친이 뉴욕에 있는 점포를 닫고 사망하게 되자 소학교를 중퇴하게 됐다. 은행, 농장, 상점, 학교 교원 등의 일을 했다. 그 사이에 방랑벽과 바다에의 동경심이 곁들여, 리버플로 나가 화물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1839), 그 해 10월에 귀국, 학교 교원이 되었으나 그만두었고, 포경선 아큐시텟호를 타고 1년쯤 남태평양을 항해하다가(1841) 선상 생활에 싫증을 느껴 탈출, 식인종 타이피들이 사는 섬의 골짜기를 헤매었다. 1개월 후, 오스트리아 포경선에 의해 구출되었으나, 선장이 너무 횡포를 부려 타이티 섬에서 작업을 거부, 영국 영사관에 강제 수용되었다. 그 후 미국 포경선에서 반년쯤 일하다가 호놀룰루에서 상점원 등 몇가지 잡일을 했으며, 그후 미국 군함에 승선하여(1844) 보스턴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4년간의 해상 방랑은 예일이나 하버드의 대학 4년간 수학과 맞먹을 정도로 귀중한 체험이었다.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첫 소설 《타이피》(Typee,1846)를 완성했다. 식인종 타이족이 사는 골짜기에서 1개월간 헤맨 체험을 토대로 한 제2작 《오무》(Omoo, 1847) 발표해서 호평을 받았다. 이 두 작품을 D.H.Lawrence의 논문 〈Typee, Omoo 론〉에서는 이상적인 사회제도가 있는 Typee족이 사는 섬과, 마찬가지의 야만인이 살고 있는 타이티 섬을 버리고 왜곡된 문명이 있는 미국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상과 현실의 불일치, 이 속에 빠진 멜빌의 자기분열이 나타나 있다고 했다. 1847년 8월에 메사추세츠 주 재판장의 딸 에리자베드 쇼와 결혼하여 뉴욕에 정착하였다.
결혼 후에 쓴 《마디》(Mardi, 1849)는 정신적인 아름다움이 빛나는 미녀를 찾아 헤매는 남자 주인공의 모험적, 상징적 이야기이나 별로 호평을 받지 못했나, 계속하여 《레드번》, 《하얀 자켓》, 《백경》(Moby Dick, or the White Whale, 1851), 《피에르》(Pierre, 1852) 등의 역작을 발했다. 《레드번》은 리버플에서의 최초의 항해를, 《하얀 자켓》은 미국 군함에 승선한 체험을 각각 소재로 한 것이며, 《백경》은 그의 대표작이요, 세계문학사에 걸작 중의 하나로 모비 딕은 악의 힘, Ahab은 그 반대의 힘, 그리고 해양은 인생을 상징하며 이들이 어우러져 싸우고 있는 것을 비유하고 있다. 그리나 Ahab은 정의나 선의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라(용기는 상징하지만) 복수심의 덩어리로 모비 딕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
악의 있는 자연과 악의 있는 인간의 싸움, 즉 양자가 다같이 악이며 결국 인간과 자연의 싸움이다. 여하튼 이러한 테크닉은 이 소설의 이해를 곤란하게 하였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은 이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출판 후 10개월간 총 200부만 팔린 것으로 보아 얼마나 이 작품이 당시에 천시를 받았나를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후 30년간 멜빌은 완전히 독서계에서 망각되었다.
《피에르》는 《백경》의 평판 회복을 위하여 쓰여진 작품으로 이상주의자의 선의善意의 행동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악의 힘 때문에 패배하는 모습을 그려내어, 이상과 현실, 선과 악의 문제를 추구한 뛰어난 심리 소설이나, 전체가 음울하고 자살과 근친상간 등이 섞여 있어, 세평도 좋지 못했다. 이 밖에 플랭크린 등 실재 인물을 등장시켜 독립전쟁의 시대를 배경으로 한 전형적인 미국인의 생애를 그린 역사 소설 《이즈레이얼 포터》(1855), 단편집 《피아자 이야기》(1856), 사후에 출판된《빌리 버드》
(Billy Budd, 1888) 등이 있다. 이 밖에 시집 《Carel》(1891), 《Timolen》(1891) 등이 있다. 만년에는 불우했으며, 뉴욕의 세관에 근무(1866~86) 하다가 그 곳에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