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도 위태로워서 앉기를 꺼려했다는 아슬아슬한 칼바위와 송림이 한데 어우러진 암릉이
스릴만점이다.
게다가 도도하게 흐르는 섬진강물과 바둑판같은 들녘이 한눈에 잡히는 조망이야말로 산행의
백미다. 용아장성의 축소판을 방불케 하는 기이한 형상의 바위와 수영선수들처럼 섬진강으로
풍덩 뛰어들 기세로 곳곳에 버티고 선 두꺼비바위들이 발길을 잡는다.
이 때문에 예부터 책여산(冊如山일명 채계산 釵山)은 회문산, 강천산과 함께
순창의 3대 명산으로 불려왔으며, 낮은 산이지만 섬진강변에 위치해 있어 고산지대의 1,000m에 버금간다.
규산질이 풍부한 화강암 때문에 동쪽 산허리가 광산개발로 잘려나가 흉물스런 몰골을 하고 있어
보는 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산줄기는 금남호남정맥 팔공산에서 남쪽으로 갈래를 친 뒤
문덕봉 못미처에서 서쪽으로 뻗어나와 섬진강 앞에 멈춰 섰는데 이곳에서는 섬진강을 적성강
으로 부른다. 옛날에는 중국 상선들이 복흥 도자기, 적성의 옥 등을 실어 나르기 위해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적성강에서 많이 잡히는 민물고기 요리가 유명해서 전국 각지의 미식가들이
몰려와서 화탄 매운탕집은 아예 예약도 받지 않을 정도다.
아마도 이 산처럼 전설과 이름이 많은 산도 없을 게다.
향토문화 연구에 관심이 많은 최운권 적성면장은 적성강변의 임동 매미터에서 보면 책여산이
월하미인(月下美人), 즉 비녀를 꼽은 아름다운 여인이 누어서 달을 보고 창을 읊는 모습이라고
했다. 이 때문에 이곳에는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르는 소리꾼들이 많이 나왔고, 적성강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나 1:25,000 지형도에 나와 있는 화산(華山)은 이 산의 들머리인 산기슭에 백발노인이 우뚝 서 있는 30m의 화산옹바위 전설 때문이라 했다.
유등면 체육공원에서 보면 서우유천(犀牛遊川), 즉 물소가 강가에서 한가로이 노는 모습의 형상이고 화산(花山)은 이 산의 기묘한 바위들을 꽃으로 비유했지 않나 싶다.
그러나 지역 주민(정남조, 정천섭, 김금석씨 등)들은 괴정리와 평남리에서 바라보면 암벽 층이
마치 책을 차곡차곡 쌓아 놓은 모습이라서 옛날부터 책여산(冊如山)이라 했고, 지도상의 화산(송대봉·341m)은 순창 책여산, 북쪽의 361m봉은 남원 책여산으로 불렀다고 했다.
송대봉은 날아가는 새들도 위태로워서 앉기를 꺼려했는데 고려 말 최영 장군이 무술을 익히며
장수군 산서면의 마치대에서 화를 쏜 뒤 화살보다 일찍 도착했으나 늦게 도착한 줄 알고 말의
목을 쳤다는 전설이 있다.
무량사 위 322m봉에 있는 금돼지굴은 적성원님으로 부임만하면 부인이 실종되자 궁리 끝에
한 원님이 부인의 허리에 명주실을 달아놓고 부인을 끌고 가는 금돼지를 쫓아가서 죽였다는
전설이 있다. 그리고 황굴은 선비들이 과거시험을 위해 공부했던 곳으로, 수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사찰이 있었으나 폐허가 됐다고 한다.
동쪽 산기슭에 백발노인처럼 30m 높이의 화산옹바위가 우뚝 서 있는데 장군바위, 미륵바위,
메뚜기바위로도 불린다. 풍년이 들면 바위 색깔이 희고 아름답지만, 흉년이 들면 검은색으로
적성현에 큰 재앙이 있으면 파란 색을 띠게 된다고 한다.
그러나 아직껏 이 바위의 색깔이 변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주민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사람들이 화산옹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거나 경의를 표하지 않으면 화를 당했다.
그런데 김삼용이란 사람이 이를 어기고 지나다가 말이 죽자 칼로 화산옹의 오른쪽 어깨를 쳐서 적성강에 빠트린 뒤부터 화산옹의 영험은 없어지고 천재지변이 계속되어 고려 말에 적성현이
폐현됐다고 한다. 화산옹바위에서 동쪽으로 오르면 당재~송대봉의 지름길이다. 산행의 묘미를 느끼고자 남쪽은 무량사 앞마당을 지나 322m봉(금돼지굴)~당재~송대봉을 거치는 코스를
택했다. 남쪽 시멘트 길을 따라가면 조립식 건물인 무량사를 만난다.
양해를 구한 뒤 약수로 목을 축이고 사찰 앞마당을 거쳐 동쪽 소나무숲과 묘소를 지나면 너덜지대를 오르게 된다. 급경사 능선에 마귀할멈바위가 눈길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