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문경시 산양면 위만리 109, 474 상의재 앞
신도비 뒷편 구 학교건물 뒷편에 상의재가 있음
충의공엄선생신도비(忠毅公嚴先生神道碑) 비문 / 원문`해역
匹夫而仗精忠之大節隻手而扶網常之正義昭乎日月不足以爲明嵬乎泰率不足以爲高者其惟特立獨行之士素養弘毅剛正之氣臨大難處大變雖湯火在前桁楊在後少不挫志奮勇以赴之以證夫天理之未泯彛性之不墜莊陵遇變之日若忠毅嚴公卽其人也公諱興道寧越人以郡戶長首于諸吏端宗丙子王遜于寧越翌年丁丑禍作遺弓劍于觀風樓時倫綱倒地殃咎屛息相戒莫近公往來獄街號泣具衣對以劍家人咸爲公懼之公曰爲善而遇害吾所甘心又恐有異議夜半竊負而崩于冬乙旨卽今之珠邱也旣封率家族亡去不知所終東鶴誌云公以龍袍招魂入東鶴寺與金時習成聃壽諸公服喪三年公所守之義盡于此矣後其子潛歸故土葬公于八溪卯向之原又亡去卒以免禍此公盡忠端廟之大略也顯宗戊申右議政宋時烈筵奏曰衰世尤當崇尙節義請錄嚴某之後以作世道勸上嘉納肅宗乙丑建六臣祠以公綴于南壁戊寅追封莊陵命贈工曹佐郞訪其後其後乙丑賜額彰節書院英朝丙午命旌閭戊寅致祭癸亥加贈公工曹參議有收用子孫之敎庚午士林議立尙節祠于醴泉義山卽子孫所居地也其後癸未陞爲院廟號忠節戊寅贈工曹參判親製文賜祭墓所正廟辛亥命配食于忠臣壇純祖癸巳加贈資憲大夫工曹判書高宗丁丑贈諡忠毅庚子命不挑祀此累朝奬公忠義之顚末也於乎莊光之際尙忍言哉天地飜覆禍患慘酷至於六臣就戮極矣雖素所煦濡於上王之庭者皆凜然莫敢出一口氣公獨挻身於衆胥之中奮忠於危難之際毅然爲莊陵盡節使弓劍無損珠丘永妥亦安知非出於天意耶向所謂仗大節扶正義以證夫天理未泯彛性不墜者舍公而其誰耶彼狐媚狗苟背恩貪利朝爲君臣暮爲讐敵전然而立于世者皆公之罪人也噫公有三子長好賢次光舜次聖賢好賢二男長曰和次曰順和二男曰希齡承軫順二男曰潤海潤河希齡子曰漢禮漢義漢輔承軫子曰天一定一宗一思一漢禮子曰應坦應平應一漢義子曰天雲天豪天遜天龍漢輔子曰應瑞應鶴應仁應發應坦无后以天雲子壽吉入系餘竝略十五世祀孫柱鎬送琦變聖燮以隧道文屬柱完曰令公先大人肅敏公曾識之而今將營竪神道碑上以答聖朝奬忠之優恩下以慰先祖泉臺之精靈令公其識之柱完在同宗之列承先考之遺志義不敢辭因序之而銘曰天道茫昧有常有變常者易知變者難辨孰云邪正混淆莫定必待百世公義始彰莊陵遜位兩儀昏朦淸浦月黑痛矣泣弓一呼一吸頃刻霹靂臣隣因舌道塗側目公時奮忠半夜含聲親具棺劍竊負而崩象設追擧珠邱永寧陵谷依然松栢凄凉公與六臣精爽不昧奉慰王靈陟降左右累朝贈弛恩渥禮優煌煌寶誥榮施九幽樹風千載扶倫立極凡具彛性視此牲石
崇禎紀元後五甲戌月日前承旨宗後生柱完記宗人允變書成均博士完山李昇圭篆
충의공엄선생신도비(忠毅公嚴先生神道碑) 비문해제
필부가 되어 정충의 대절을 쫓아 독력으로 망상의 정의를 지키니 日月보다 밝다 해도 밝음이 부족할 것이요. 태산보다 높다 해도 높힘이 부족하다 함은 그 오직 특립하고 독행하는 지사가 본래 크고 의연하며 굳고 바른 기상을 길러서 대난대변에 임하고 처함에 비록 불로 지지는 형벌이 앞에 있고 손발을 꼭꼭 묶는 질형이 뒤에서 핍박한다 하더라도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아니하고 분연히 나아가니 대저 천리의 잠기지 않음과 이성이 떨어지지 않음을 증험함이라. 단종이 변을 당한 날의 충의엄공 같은 분이 곧 그런 분이다. 공의 휘는 흥도요 영월사람이니 군의 호장으로 뭇 향리의 우두머리이다. 단종병자년에 왕이 영월에 피둔하시고, 이듬해 정축에 화를 입으셔서 관풍루에 궁검을 버리시니(승하하시니), 때에 윤강이 땅에 떨어져서(사람들이) 재앙과 책망을 당할까봐 숨을 죽이고 두려워하여 서로 경계하여 접근하는 이가 없었는데 공이 옥가를 왕래하고 호읍하면서 황실의 의대를 갖추어 염(斂)하니 집안사람들이 모두 공을 위하여 두렵게 느끼거늘 공이 가로대 선한 일을 하다가 해를 입는 것은 내가 달게 생각하는 바라하고, 또 다른 의론이 있을까 걱정하여 야반에 가만히 업고 동을지에 장사지내니 곧 지금의 주구이다. 봉분을 다 짓고는 가족을 이끌고 사라지니 마친 곳을 알지 못하더라. 동학지에 말하되 공이 용포로 초혼을 하고, 동학사에 들어가서 김시습성담수 등 제공으로 더불어 삼년의 상을 입었다하니 공이 지키는바 의를 이에 다 하였다 할 것이다. 후에 그의 아들이 몰래 옛 땅에 돌아와서 공을 팔계의 묘향의 원에 장사지내고 또 타향으로 사라저서 마침내 화를 면하니 이것이 공이 단종에게 충성을 다 한 대략이다. 현종구년 무신(1668)에 우의정 송시열이 경연에서 상주하여 아뢰기를 쇠세엔 절의를 숭상함이 더욱 마땅하니 청하옵건대 엄모의 후를 록하여 써 세상의 도리를 삼아 권장하소서. 상께서 가납하시고 숙종11년 을축(1685)에 육신사를 세워 공을 봉향케 하시고, 24년 무인(1698)에〔단종의 능을〕장릉으로 추봉하시고, 〔공을〕공조좌랑으로 추증할 것을 명하시고, 그 후손을 찾게 하셨다. 그 후 을축년에 창절서원이라 사액하시고, 영조32년 병자(1756)에 정려를 세우도록 명하시고, 무인년에 치제케 하시고, 계해년에 공에게 공조참의를 가증하시고 자손을 관에 임명하도록 하는 하교가 있었다. 경오년에 사림에서 의논하여 예천 땅 의산리에 상절사를 세우니 곧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이다. 그 후 계미년에 원으로 승격하여 묘호를 충절이라 하고, 무인년에 공조참판을 추증하시고 친히 글을 지어 공의 묘소에 사제토록 하셨다. 정조15년 신해(1791)에 자헌대부공조판서를 추증하시고, 고종14년 정축(1877)에 충의라 증시하시고, 경자년에 불도사(제사를 폐하지 않는 것)를 명하시니 이것이 누대 왕조에서 공의 충의를 표창한 전말이다. 오회라. 단종과 세조의 일을 참아 어떻게 말하겠는가. 천지가 번복함에 화환이 참혹하여 육신이 취륙되는 극황에 이르렀다. 비록 평소 상왕의 조정에서 길러진 신하들도 모두 늠연하게 감히 한 말씀을 내지 못하거늘 공이 홀로 뭇 서리 중에서 몸을 던져 위란에 즈음하여 충의를 떨쳐 의연하게 단종을 위하여 정의를 다하고 유체를 온전하게 주구에 안장하니 또한 어찌 하늘의 뜻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것인가. 앞에서 소위 대절을 쫓아 정의를 지킴은 대저 천리가 물에 잠기지 아니하였고 이성이 떨어지지 않았음을 증명한 사람이 공 말고 그 누가 있는가. 저 여우의 미태와 개의 아양으로 배은탐리하여 아침에 군신이였다가 저녁에 원수사이가 되어서도 얼굴을 들고 세상에 서는 자는 모두 공의 죄인이라 할 것이다. 슬프다. 공에게 셋 아들이 있으니 맏은 호현이요, 다음은 광순이요, 다음은 성현이다. 호현이 두 아들을 두니 맏이 화, 다음 순이요, 화는 두 아들을 두니 희령, 승진이요, 순이 두 아들을 두니 윤해 윤하요, 희령의 아들은 한례 한의 한보요, 승진의 아들은 천일 정일 사일이요, 한례의 아들은 응탄 응평 응일이요, 한의 의 아들은 천운 천호 천손 천룡이요, 한보의 아들은 응서 응학 응인 응발이요, 응탄은 무후하여 천운의 아들 수길을 입계하였고 나머지는 생략하니라. 十五世祀孫柱鎬(십오세 사손 주호)가 기변 성변을 보내어 주완에게 묘도문을 위촉하면서 가로대 령공의 선대인 숙민공께서 일찍이 기록하신 적이 있으나 이번에 신도비를 세워서 위로는 성조에서 충의를 표장하는 우악하신 은혜에 보답하고, 아래로는 선조 묘소의 정령을 위로하노니 공께서 기록하여 주소서라 하니 주완이 동종의 자리에 있고 선효의 유지를 이어 받아야 하니 의리로도 감히 사양하지 못하는 지라 인하여 序(서)하고 명하여 가로대 천도가 망망하고 암매하니 유상유변이라. 상자는 알기 쉽고 변자는 분별하기 어렵구나. 누가 邪(사)와 正이 뒤섞여 定함이 없고 반듯이 下世를 기다려야 공의가 비로소 드러난다 했던가. 단종이 손위함에 음양이 혼몽이라. 청포에 달이 검으니 돌아가심을 통곡하는도다. 一호흡 경각에 벽력이 치는지라 보필하는 신하가 입을 다물고 말문을 닫아 곁눈질 하거늘 공이 그 때 분연히 충성하여 야반에 울음소리를 머금고 염습 입관하여 몰래 업어 장사지내니 상설이 추거되어 주옥언덕에 길이 평안하시리. 능곡이 의연하고 송백이 처량하도다. 공이 六臣으로 더불어 정혼이 불매하여 왕의 령을 위로함에 좌우를 오르내리는 도다. 누조에서 증예하시니 은례가 우악하였다. 밝고 밝으신 寶敎(보교)시어 영광이 구천에 미쳤도다. 수풍천년에 인륜을 부존하고 본을 세우니 무릇 이성을 갖추려면 이 비석을 볼지어다.
숭정 기원후 오갑술(1874) 월일에 前承旨宗後生柱完(전 승지 종후생 주완)이 記(기)하고, 宗人允燮(종인 윤섭)이 書(서)하고, 成均博士完山李昇圭(성균박사 완산 이승규)가 篆書(전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