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미니크파(派)의 신학자. 튀링겐 지방 호호하임에서 독일 기사(騎士)의 아들로 태어났다. 청년시절에 도미니크 수도원에 들어갔고, 파리대학에서 수학한 다음, 1302년 수사(修士) 학위를 받았다. 그를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라고 부르는 것은 여기에서 유래한 존칭이다. 1304년 도미니크파의 작센 관구장(管區長), 1307년 보헤미아의 주교 총대리가 되었다. 그후 한때 파리대학교에서 강의도 했으나, 1313년경 귀국하여 슈트라스부르크와 프랑크푸르트 등지에서 생활하다가 쾰른에 정착, 그 시대의 가장 저명한 설교자의 한 사람으로 각광을 받았다.
만년에는 쾰른의 대주교 밑에 있으면서 이단적 설교를 했다는 이유로 재판에 회부되어 유죄선고를 받고, 교황에게 상소하였으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죽었다. 1329년 요하네스 22세가 그의 '26가지 명제(命題)'를 이단 내지 위험한 사상이라고 단죄한 까닭에 그의 저작물 배포의 길이 막혀 오늘날 남아 있는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의 사상에는 토마스의 영향이 두드러졌으며, 가장 큰 특색은 신비적 체험을 설교하는 데 있었다.
즉, 영혼의 깊은 곳에서의 '영혼의 불꽃'과 신과의 합일(合一)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 합일의 극치를 '영혼에 있어서의 신의 탄생'이라 하였고, 더구나 그 신은 삼위격(三位格:페르소나)의 구별을 초월한 근원적 신성(神性)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경지에 이르기 위하여서는 모든 피조물뿐만 아니라 자신에게서도 벗어나 자신을 완전히 비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설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