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4일
양동리 마을
삶이 그대로 배어있는 우리 옛마을
경주의 양동마을(慶州 良洞)은 우리 옛 마을의 모습을 거의 그대로 온전하게 보존하고 있다. 특히 전통이나 풍속이란 거창한 말로 포장할 것도 없이 그저 있는 살림살이 그대로, 현재까지도 주민들이 대부분 거주하며 살고 있다.
해설사는 “경주가 고향인 사람들은 참 복받은 사람이란 생각이 듭니다. 선조들의 전통유산을 물려받아 현재의 삶과 참 조화롭게 어울려 살아가고 있습니다. 양동마을은 천년 신라의 문화 안에서 조선시대의 가옥과 문화를 오래도록 지켜온 마을”이라고 말했다.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지난해 7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습니다.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 두 집안이 500년 가까이 한 마을에 어울려 마을을 형성한 양반마을인데, 현재도 400여 세대의 자손들이 실제 거주하면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경북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에 자리한 양동마을은 국내 최대 규모의 대표적 조선시대 동성취락으로 수많은 조선시대의 상류주택을 포함하여 500년이 넘는 고색창연한 54호의 고가와 이를 에워싸는 고즈넉한 110여호의 초가로 이루어져 있다. “마을은 안계(安溪)라는 시내를 경계로 동서와 남북으로 나누어집니다. 마을 앞으로 흐르는 물줄기인 안계는 밖에서 물이 돌아들어 마을 안에서 드는데, 드는 물길은 보이나 물이 나는 것이 보이지 않아 이를 부(富)의 기운이 밖으로 새진 않는 형세라 전해집니다. 또 마을은 안계를 경계로 하촌(下村)과 상촌(上村), 남북으로는 남촌과 북촌의 4개 영역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이는 초가가 기와집을 에워싸고 있는 형세입니다. 특히 양반과 상민이 가까이에 살았는데, 이는 중국의 종족마을이나 일본의 전통마을에서는 볼 수 없는 형식입니다. 초가집 중 일부는 과거에 상민이나 노비가 살던 집입니다.”
한국의 사계와 어우러진 전통 풍경
토담길 사이를 걸으니 긴 역사의 향기와 현재의 삶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모습이다. 마을을 둘러 보면 옛 마을의 풍모와 살림살이가 한눈에 보이는데, 수백년 된 기와집은 하늘 아래 큰기침을 하는 형세이고, 마을 앞 들판을 중심으로 나지막한 초가들이 빙 둘러 들녘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품새에서 삶의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진다.
“거의 마을의 형태가 온전히 남아있기 때문에 우리의 전통문화와 관습 등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습니다. 봄, 가을이면 유치원 아이들부터 학생들 수학여행, 우리 문화에 관심있는 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습니다. 또 아름다운 우리의 사계와 어우러진 한국적 풍경에 반해 외국인 관광객들도 눈에 띄게 늘어가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 오래도록 그 자리를 지켜온 수백년 된 기와집과 나지막한 초가들, 그리고 작은 토담들 사이로 정겨움이 넘쳐난다.. “마을의 규모와 보존상태, 보유 문화재와 전통성 등이 빼어납니다. 그리고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때묻지 않은 향토색 등으로 가히 우리나라를 대표할 만합니다. 특히 그 어느 곳보다 볼거리가 많아 1992년에는 영국의 찰스 왕세자가 이곳을 방문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양동마을은 마을 전체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으며, 국보 1점과 보물 4점을 비롯해 총 24점의 문화재가 보존되어 있다. 먼저 마을 들머리에서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관가정(觀稼亭·보물 제442호)과 향단을 둘러본다. 향단은 많은 건축가들로부터 가장 사랑받은 건축물 중 하나. 관가정과 더불어 마을 초입에 자리해 양동마을의 첫 풍모를 가늠케 한다. 관가정이 월성 손씨의 상징물이라면 향단은 여강 이씨의 상징물. 향단은 우리나라에서 비슷한 사례를 볼 수 없는 이채로운 공간감을 느낄 수 있다. 이어 양동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 중 하나인 서백당 가옥을 둘러 볼 수 있다.
안락천과 형산강이 이 평야를 흐르는 데 마을 위쪽에 안계댐이 생기기 전인 옛날에는 고깃배들이 마을 어귀까지 들어와 해산물도 풍성했다고 한다. 평야가 있고 강이 흐르고, 해산물까지 부족함이 없었으니 살기에 더 바랄 게 없는 마을이었다. 그래서인지 인물도 많이 나와 조선시대에는 과거급제자만 1백16명이나 배출됐다.
안골 중심지에 자리잡은 규모와 격식을 갖춘 대가옥인 서백당(書百堂, 중요민속자료 제23호)은 양민공 손소(養敏公 孫昭) 공이 1454년(성종 15)에 지은 월성 손씨(月城 孫氏)의 종가집이다. ‘서백당(書百堂)’ 또는 ‘송첨(松詹)’이라 부르며, 서백당(書百堂)은 ‘하루에 참을 인(忍) 자를 백 번 쓴다’는 뜻이며 근래에 와서 굳어진 당호이다.
서백당에 들어서면 사당으로 가는 길목에 고목인 향나무 한 그루가 한껏 위엄을 부리며 기품있게 서있다. 일반 나무처럼 곧게 자라지 않고 마치 분재를 보는 것처럼 자라는 향나무(경상북도기념물 제8호)는 손소가 1456년(세조 2)에 집을 새로 짓고 그 기념으로 심었다고 하니 수령 550년이 넘은 고목이다. 높이 9m, 둘레가 2.92m로 가지의 길이가 6m가 넘어 지랫대 몇 개가 향나무를 버티고 있다. 군데군데 시멘트로 쓰러지는 것을 방지한 흔적이 있지만 아직까지 죽지 않고 여전히 잎이 푸르며 큰 가지를 드리우고 있다. 이 마을에서는 이 향나무 외에도 수령이 수백년 된 향나무를 흔하게 볼 수 있다.
출입허락이 안되어 안채에 가보지 못했지만 서백당의 안채에 들어가 보면 맨 오른쪽에 작은 문이 있는데, 여기에 ‘삼현선생지지’(三賢先生之地)라고 이곳에 세 사람의 현인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으로 풍수적으로 전해오는 말이 있다. 이곳에서 우재가 태어났고 이언적 또한 여기에서 태어났다.
이제 두 명의 현인이 태어났으니 손씨 집안의 사람들은 남은 한 사람의 현인이 손씨 집안에서 태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으며, 다만 회재 이후로 외손이 큰 인물이 된다면 다른 문중에 현인을 뺏기는 것으로 생각하여 시집간 딸이 몸을 풀러 친정에 와도 해산만은 다른 집에서 시킨다고 하며, 외부인이 들어와도 절대 보여주지 않는다고 한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입지에 있는 향단(香壇, 보물 제42호)은 특이한 외관, 일반적인 격식을 과감히 벗어난 대담성 등이 그대로 드러난 건축이다. 회재가 경상감사로 재직할 때 중종이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그가 전임하면서 그의 동생인 이언괄에게 물려주어 그의 손자인 이언관의 호를 따서 향단이라고 이름짓고, 그의 후손들이 살게 됨에 따라 여주 이씨의 파종가가 되었다.
앞쪽에 세워진 향나무 한 그루가 상징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외견상으로 보아 무척이나 화려하고 과시적이다. 특히 마당을 앞에 둔 사랑채는 두 개의 나란한 지붕을 연결하여 풍판을 정면으로 향하도록 한 독특한 구조를 하고 있다.
옥산서원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위치한 옥산서원은 대원군의 서원철폐시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중에 하나로 사적 154호로 지정되어 있다.
회재 이언적 선생을 모신 서원. 선조 8년부터 옥산서원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는데 지어진 것은 선조 5년때이다. 주변에 자옥산, 도덕산, 화개산, 무학산이 옥산서원을 둘러싸고 있고 증심대, 관어대, 세심대 등의 수려한 자연과 함께 하여 그 아름다움이 극에 달한다.
옥산서원내 건물은 원내 행사와 유림의 회합, 학문의 토론장소로 사용된 구인당과 향례에 사용하는 제기를 보관하는 곳인 제기실, 유생들의 거처 암수재와 민구재, 2층 누각으로 유생들이 휴식하는 무변루, 무변루의 문인 역락문, 이인직의 신도비를 모시고 각종 판각과 어서를 보관한 신도비각이 있다.
이 외에도 여러 유물들이 있는데, 특히 보물 제 525호로 지정된 삼국사기와 총 866 종 4,111권의 서적을 보관하고 있다
정혜사지 13층 석탑
우리가 본 마지막 일정은 정혜사지 13층 석탑이다. 정혜사지는 경북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에 자리잡고 있다. 옥산서원에서 독락당을 지나 옥산지 방향으로 150m 정도를 더 가면 나타나는데, 정혜사는 창건연대를 알 수 없는 신라 때의 사찰로 추정되고 있다. 동경통지에는 "신라 제37대 선덕왕 원년(780)에 당의 첨의사 백우경이 참소를 입어 이 곳 자옥산 아래에 우거하게 되었다. 그는 뛰어난 경치 터를 골라서 영월당과 만세암을 세웠는데 선덕왕도 행차한 바가 있다. 후에 이것을 고쳐 절을 마련했는데 곧 정혜사라 한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정혜사터에 남아 있는 13층 석탑이 바로 국보 제40호로 지정되어 있는 정혜사 13층 석탑인데, 형태가 매우 독특해 눈길을 끈다. 크기도 기초 지대석의 폭이 2m, 탑 전체의 높이가 5.9m로 큰 편인데다, 처음 층을 크게 부각시키고 2층부터 줄여나가 전체적으로 안정된 조화를 보여줘 돋보인다. 또 2층 옥신 4면에 감실 모양의 열린 공간을 설치하고 있는 것도 전형적인 기단축조 양식에서 벗어난 특수한 구조를 보이고 있다.
불국사 다보탑,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과 함께 우리나라 이형(異形) 석탑의 걸작으로 평가받을 만큼 조형미가 빼어난 것으로 평가받고 있지만, 이 석탑은 현재 버려진 듯 방치되고 있어 안타까움을 준다. 지금은 정혜사지 발굴조사가 한창이었다.
골짜기 바람이 쌩쌩 불어 나그네의 길을 재촉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2박3일의 여정을 접고 목포로 향하였지만 더 여유가 있는 분은 며칠 더 일정을 잡고 경주 답사를 즐긴다. 모든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All things work together for the good)고 했다. 오늘까지 아무 탈 없이 즐겁고 유익한 답사를 할 수 있게 협조하신 남사모 회원님들께 감사를 드리고, 일이 있어 참여하지 못한 회원님께도 다음 답사 때까지 안녕과 축복을 빌어본다.
첫댓글 이번 답사는 매월당 김시습과 회재 이언적을 입체감있게, 한 인간으로서 느끼고 마무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 회원님들 특히, 사모님의 열성이 우리를 이렇게 갈 수 있게 만들었지요..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진 자료를 하나하나 살피다보면 다시 공부가 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