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몽(立春夢)
소정 하선옥
입춘 즈음에 긴 꿈을 꿨다. 은빛 고운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인이 산자락을 오르고 있다. 단아하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에 화려하지 않은 장식을 꽂고, 앞쪽 치맛자락을 살포시 거머쥔 고운 손아래로 하얀 속치마와 버선과 신발이 보일 듯 말 듯 하다. 그녀를 바라보며 애틋한 눈빛을 보이는 남자가 손을 내밀어 이끌어 준다. 깔끔한 흰색 정장을 차려입은 그 남자의 손길에 여인은 따뜻함을 느낀다.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얼굴에는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와 함께 행복이 묻어있다.
윤슬이 일렁거리는 바다를 손끝으로 가리키며, 서로의 어깨에 살포시 기대고 이마에 살짝 뽀뽀하며 미소를 건넨다. 사람 사는 행복이란 서로 그윽하게 바라봐주고, 손잡아 이끌어 주고, 포근하게 안아주고, 마음으로 사랑해주는 것임을 그들은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한적한 바닷가에 마련한 아담한 집. 그 남자의 손을 잡고 그 집을 들어서려는 순간, '엄마야, 이게 무슨 일이고?' 꿈이었다.
절대로 깨고 싶지 않은 꿈. 깨어나는 순간 허탈하다. 내 복에 언감생심 대갓집 마나님 같고 들국화 같은 다소곳한 어여쁜 여인의 모습은 뭐며, 저 멋진 남자는 누구인가? 내 나이가 몇인데 망측스레 이런 꿈을 꾸고 그럴까? 그러나 이런 꿈을 꿀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며칠 동안 내가 꾼 꿈을 곰곰이 생각해봤다. 평소에 내가 소망했던 삶이 꿈속에 스며들었나 보다. 자애로움으로 다가오는 사랑과 소망했던 사람 사는 모습이 저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갈망하며 부러워했던 삶. 사랑받고 싶었고 사랑하고 싶었던 시간. 꿈처럼 저렇게 살아보는 게 내 생애의 꿈이 아니었을까? 그 누군들 저런 시간을 바라지 않았을까? 꿈과 현실은 항상 동떨어져 있어, 꿈은 꿈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남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이 아닐까? 세파에 휘둘리고 사는 게 힘들어 잠시 쉬어가고 싶다는 생각이 엉뚱한 모습으로 꿈에 나타났나 보다. 며칠 동안 내게 일어난 일들이 힘겨워서 내가 나를 달래주는 모습이었나보다.
꿈에서 깨어난 나는 거울을 봤다. 푸석푸석하게 부어있는 얼굴에 들국화 같기엔 너무 먼, 시들고 비틀어져 가는 호박꽃 같은 나. 세월도 무심하고 야속하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그 삶은 사랑으로 채워져야 하고, 사랑이 있어야 살아가는 힘도 생긴다는 걸 부모를 사랑하고 배우자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고 그 가족들을 사랑하면서 살아야 하는 게 최고의 행복이 아닐까? 내가 주는 사랑이 있어야 타인에게서도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현실의 나는 병원 대기실에 앉아 두 군데 찍은 MRI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 이를 어째야 하나? 오른쪽 발은 6주 깁스, 오른쪽 무릎은 수술이 시급하다네. 연습 없는 인생길이 고달프긴 하지만 왜 이리 하루하루가 고달픈가? 버리지 못한 욕심과 아집이 매일 나를 힘들게 옥죄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지 못한 내 탓이겠지.
세상살이 곤란함이 없기를 바래지 마라. 곤란함이 없으면 업신여기는 마음과 사치스러운 생각이 생긴다 했고, 그래서 삶은 곤란함과 근심으로 세상을 살아가라고 옛 성현들께서 말씀하셨으니.
스멀스멀 타고 넘은 인생길. 한잔 술에 취하고 싶고, 내가 꾼 꿈에 취하고 싶고, 아직 오지 않은 봄볕에 취하고 싶어진다. 입춘을 넘겼지만 내 마음의 봄은 아직 멀리 있다. 한바탕 일장춘몽을 멋들어지게 꾼 나 자신이 어이없긴 하지만, 내가 이 세상을 이별할 때 저런 모습이면 얼마나 좋을까? 다음 생에, 내게 사랑이 남아있다면, 꿈속에서 만난 멋진 남자 만나 후회 없이 사랑받고 사랑하며 살고 싶다.
2025년 2월 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