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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7.11. 15:56 rev` 역주 장릉지속편에서의 기록 발췌 기록 추가
2015.07.03. 11:12 rev' 역주 장릉지 속편에서의 해석 지덕암중건기(홍양호) 기록 추가
2015.07.02. 12:59 rev' 역주 장릉지 속편에서의 해석 지덕암중건기(윤순거) 기록 추가
2013.11.10.00:03 rev` 영월군수 윤순거 중수기록 추가 및 기록 보충
금몽암(禁夢庵)●보덕사(報德寺)
●강원도문화재자료 제25호. 1984년 6월2일 지정
● 시대 : 고대
● 소재지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12리 1117
● 문의처 : 영월군문화관광 1577-0545
금몽암은 보덕사에 소속된 암자로, 신라 문무왕 20년(680)에 의상조사가 지덕암(旨德庵)으로 창건하여, 조선 세조 3년(1457)에 금몽암(禁夢庵)이라 개칭하였으며, 1662년(현종3년) 영월군수 윤순거(尹舜擧)가 다시 크게 수리하고 지덕암이라 하였다. 광해군 2年(1610)에 군수 김택룡(金澤龍)이 증축하면서 노릉사(魯陵寺)로 개칭하였다가, 1698년(숙종24)에 단종이 복위되고 보덕사가 원당이 되자 폐사되었다.
1745년(영조21) 단종의 능인 장릉(莊陵) 참봉(參奉) 나삼(羅蔘)이 옛터에 암자를 다시 세우고 금몽암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모습과 같이 사찰건물과는 다른 민가형태로 재건하여 일반가옥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다. 1770년(영조 46)에 금몽암이라 개칭되어 보덕사에 예속되었다.
전설에 의하면 단종(1441~1457, 재위 1452~1455)이 영월로 유배된 후 이 암자가 궁에 있을 때, 꿈속에서 유람하던 곳과 흡사하다고 하여 ‘금몽암’이라고 하였다 한다.
평면형태는 ‘ㄱ’자형으로 동편의 높이 150cm가량의 석축기단 위에 있는 정면 5간, 측면 2간의 건물과 북편의 정면 3간, 측면 1간의 누각식 2층 건물이 연결되어 있다. 건물 뒤쪽에는 정면 2칸, 측면 4칸의 누각식 마루가 있는 금당 성격의 산운각이라는 작은 암자가 있다.
*역주 장릉지속편
금몽암은 단종께서 꿈속에서 현몽했기 때문에 지은 암자다. 병란을 거치며 전소되었는데, 광해 경술년(1610, 광해2) 군수 김택룡(金澤龍 1547~1627)이 승려를 모아 개건한 뒤, 노릉암(魯陵庵)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현종顯宗 경자년更子年(1660, 현종1) 윤순거(尹舜擧 1596~1668)가 영월군에 부임한 뒤, 승려를 모아 중건하고는 ‘지덕암 旨德庵’으로 개명하였다. 당시 윤순거는 중수기를 찬술하였다. 병오년(1666, 현종7)에 이르러 터를 새로 정하여 보덕사報德寺를 창건했는데, 능陵으로 봉해진 후에는 두부를 만들고 능침을 수호하는 사찰이 되었다. 현재 금몽암은 보덕사의 속암屬庵이다.
정조 경술년(1790, 정조14), 본 사찰의 승려 한명漢溟이 글을 올려 세금을 면해주기를 요청하자, 주상께서 비국備局에 계하啓下하셨고, 호조가 다시 회계回啓하여 수호승守護僧 5명에게 요미料米를 정급定給 하였다. 그리고 예조에서 팔도八道에 권선문 勸善文을 보내어 사찰을 건립하고 보수케 하였는데, 금몽암도 이때 개건하였다.
임자년(1792, 정조16) 예조에서 보덕사는 능침을 수호하는 사찰로서 사체가 다른 절과 다르니 도내도승통 겸수호총섭(道內都僧統兼守護總攝)을 설치할 것을 입계하였다. 이에 주상께서는 승통僧統에게 인신印信을 만들어 보내고, 해당 사찰의 망보望報와 예조의 차첩差帖을 작성하여 도내道內의 여러 사찰에 발송한 뒤 시행하도록 판하判下하셨다.
병진년(1796, 정조20) 예조 당상관이 장릉을 봉심하고 복명하며 사찰의 폐단을 아뢰자, 보도에 행회行會하여 오대산사고五臺山史庫의 번승番僧 규례에 따라 도승통都僧統에게 요미를 정급하게 하였다.
당저 6년 병인, 예조 당상관이 봉심한 뒤, 속사屬寺를 정급定給할 것을 연석에서 아뢰었다.
童土先生文集卷之五 雜著 魯陵旨德庵重建記 / 尹舜擧
동토선생문집권지오 잡저 노릉지덕암중건기
郡望鉢山西。有僧庵。庵之設何居。爲魯陵也。魯陵何以稱是。魯山上王之墟也。
군망발산서。유승암。암지설하거。위로릉야。노릉하이칭시。노산상왕지허야。
越昔上王出居而終於此。槁葬。不識者六十年。至正德丙子。始命改築致祭。萬曆庚辰。
월석상왕출거이종어차。고장。불식자육십년。지정덕병자。시명개축치제。만력경진。
乃命崇土豎石。旣又爲之建廟貌。立木主。常祀春秋。而二直以奉之。六僕以守之。
내명숭토수석。기우위지건묘모。립목주。상사춘추。이2직이봉지。6복이수지。
庶得以慰神人矣。顧惟塋壖墳衍翳薈。歲有山火之虞。又距邑治六里而近。樵牧日相尋。
서득이위신인의。고유영연분연예회。세유산화지우。우거읍치6리이근。초목일상심。
非六戶守僕所能禁呵者。況邑弊民殘。六僕亦不能備乎。且齋室儉狹。庭僅旋馬。
비륙호수복소능금가자。황읍폐민잔。6복역불능비호。 차재실검협。정근선마。
常事尙難容。而或九重降香。近侍祼將。則每有偪側之患。於是乎不可無僧舍於旁。
상사상난용。이혹9중강향。근시관장。칙매유핍측지환。어시호불가무승사어방。
以之止焚禁伐。時入淸齋。此庵之所以設也。庵之始創。蓋在於壬辰前。命名禁夢。
이지지분금벌。시입청재。차암지소이설야。암지시창。개재어임진전。명명금몽。
而兵燹之後。頹廢久之。逮庚戌重修也。改稱曰魯陵庵。上請下施。一蠲百役。
이병선지후。퇴폐구지。체경술중수야。개칭왈로릉암。상청하시。일견백역。
而日遠侵擾。僧徒駭散。見今但有荊棘而已。叨守以來。慨然于玆。乃募鄕僧。
이일원침요。승도해산。견금단유형극이이。도수이래。개연우자。내모향승。
卽舊圖新。題疏而裒之。捐俸而益之。始事於壬寅。訖工於癸卯。爲屋凡十二楹。
즉구도신。제소이부지。연봉이익지。시사어임인。흘공어계묘。위옥범십이영。
幷廊橑摠廿四間。而瓦覆之。新其名曰旨德。蓋取諸乙旨分德地名 也。
병랑료총입사간。이와복지。신기명왈지덕。개취제을지분덕지명 야。
又輯魯陵志一編。述前後事蹟。而藏之庵中。庶來許有考信也。
우집노릉지일편。술전후사적。이장지암중。서래허유고신야。
嗚呼。上王。正體臨御。雖罹厄會而至於斯。國人傷之。久猶不衰。
오호。상왕。정체임어。수리액회이지어사。국인상지。구유불쇠。
若自朝家得講墜典。追復徽號。如皇明之於景皇帝。陵寢儀節。一依王者之制。
약자조가득강추전。추부휘호。여황명지어경황제。릉침의절。일의왕자지제。
則芒乎此庵之廢興成虧。有不足屑也。直以淺薄無似。不敢叫臚天閽。則姑致力於此。
칙망호차암지폐흥성휴。유불족설야。직이천박무사。불감규려천혼。칙고치력어차。
冀勿替永久而已。後之君子。倘因事機之會。白發幽隱。則豈不韙哉。斯役也。
기물체영구이이。후지군자。당인사기지회。백발유은。칙기불위재。사역야。
僧呂晶釋訔。實能幹當。而晶之師曰應岑老宿。終始主張而有力焉。
승려정석은。실능간당。이정지사왈응잠로숙。종시주장이유력언。
愚旣因其落而爲之記。又申其所感而終諗之云。
우기인기락이위지기。우신기소감이종심지운。
역주 장릉지 속편에서의 해석
지덕암중건기(윤순거)
영월군에서 멀찍이 바라보이는 발산(鉢山) 서쪽에 암자가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암자를 지었던가?
노릉(魯陵) 때문이지.
어째서 노릉이라 일컬었나?
바로 노산상왕(魯山上王)의 유허(遺墟)이기 때문이지.
옛날 상왕께서는 대궐에서 나와 이곳에 머물다가 훙서(薨逝)하셨다.
60년 동안 호장(蒿葬)한 곳을 알지 못하다가, 정덕(正德) 병자년(丙子年 1516년, 중종11년)에 이르러 비로소 개축하고 치제할 것을 명하셨고, 만력(萬曆) 경진년(庚辰年 1580년, 선조1년)에 봉토를 쌓아올리고 석물(石物)을 세우도록 명하셨다.
공력을 마친 뒤에는 ‘묘모(廟貌)’ 를 건립하고 목주(木主)를 마련하여 봄가을로 항상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2명의 묘직이 제사를 받들고, 6명의 수복이 이곳을 수호하는바, 그런대로 혼령을 위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무덤이 강가 나지막한 곳에 위치하고 초목이 무성했기 때문에, 해마다 산불이 일어날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읍치와의 거리가 6리도 채 되지 않아, 초동목수(樵童牧豎)가 허구한 날 찾아오므로, 6명의 수복이 금지시키고 꾸짖는 것은 역부족이었다. 하물며 고을 재정이 피폐하고 백성들이 곤궁해지자, 6명의 수복조차 갖추기 어려우니 어찌 하겠는가! 또한 재실은 협소하고 마당은 말 한 마리를 간신히 돌릴 정도여서, 일상적인 일도 감당하기 어려웠다.
혹시라도 대궐에서 향축을 내려주어 시종신이 제사를 설행하게 되면, 언제나 좁아터진 공간 때문에 근심스러웠다.
이러한 연유로 가까운 곳에 암자를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암자를 지음으로써 화재를 막고 벌목을 엄금하며, 때대로 그곳에 들어가 청재(淸齋.몸을 깨끗이 재계(齋戒)함)할 수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이 암자를 세운 까닭이다.
암자를 처음 세운 것은 대략 임진년(1592년, 선조 25년) 이전인데 당시에는 ‘금몽’ 이라 명명하였다.
전란이 일어난 뒤 오랫동안 퇴락한 채로 남아 있다가, 경술년(1610년, 광해2년)에 이르러 중수하고 ‘노릉암(魯陵庵)’이라 개칭하였다. 하지만 위에서 요청하면 아래에서 시행하고, 한 가지 일을 견감해주며 백 가지 일을 부리니, 침학과 혼란은 나날이 심해졌고 승려들은 화들짝 놀라 흩어졌다. 그리하여 지금은 가시나무 덩굴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나는 수령으로 부임한 뒤, 이 문제에 개연한 마음이 들었다.
이에 고을 승려를 모집하여 옛것을 새롭게 만들 요량으로 소장을 지어 올려 비용을 모았고 녹봉을 덜어내어 보태었다.
공역을 시작한 것은 임인년(1662년, 현종3년)이고, 공사를 마친 것은 계묘년(1663년, 현종4년)이다.
중건한 건물에는 도합 12개의 기둥을 세웠는데, 행랑까지 포함하여 총 24칸이며 모두 기와를 얹었다.
새롭게 명명한 ‘지덕(旨德)’이라는 이름은 을지분덕(乙旨分德) 이라는 지명에서 취한 것이다.
또한 『노릉지』한 책을 편집하여 전후 사적을 기술한 뒤, 암자에 이 책을 보관함으로서 후세(來許 내허)에 그 시말(始末 처음 과 끝)을 상고할 수 있게 하였다.
아아! 상왕께서는 적장자로서 왕위에 오르셨다.
비록 액운을 만나 이 지경까지 이르셨으나, 온 백성들의 슬퍼하는 마음은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가시질 않는다.
만약 조정에서 실추된 전례(典禮)를 강론하여, 명나라 경황제의 경우처럼 휘호(徽號)를 추복(追復)하고, 한결같이 군왕의 제도에 의거하여 능침의 의절(儀節 예절)을 정한다면, 까마득한 이 암자의 흥폐와 성쇠 따위는 개념할 필요조차도 없다.
다만 나는 천박하고 어리석은 탓에 임금이 계신 궁궐에 감히 조목조목 아뢰지 못하는바, 우선 이 부분에 힘을 쏟아 영구토록 폐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훗날의 군자가 적당한 기회를 통해 은폐된 문제를 환하게 드러낸다면 어찌 훌륭하지 않겠는가!
승려 여정과 은실이 본 공역을 잘 맡아 처리했는데, 여정의 스승 응잠 노숙(應岑 老宿)은 시종일관 이 일을 주장하며 공력을 기울였다.
나는 암자가 이미 낙성되었기에 그 기문을 짓고, 또한 그 감회를 표현하여 마침내 고하는 바이다. -역주 장릉지 속편 174~176쪽
금몽암중수기> 홍양호 1843년
관동의 영월은 바로 단종께서 왕위를 양보하신 곳이다.
아! 옛날 단종께서 대궐에 계실 때, 꿈속에서 이곳을 보신 적이 있다.
이에 터를 정하여 암자를 창건하고는 “금몽사(禁夢寺)”이라 명명했다.
암자는 노릉 동쪽에 있었는데 마침내 노릉의 원당(願堂)이 되었다.
만력 임진년(1592, 선조25)에 병화로 소실되고, 경술년(1610, 광해2)에 군수(郡守) 김택룡(金侯澤龍)이 승려를 모아 개축한 뒤, ‘노릉암(魯陵菴)’ 으로 이름을 바꿨다.
숭정 임인년(1662, 현종3) 동토(童土) 윤공(尹公)이 이 고을에 수령으로 부임하더니, 녹봉을 출연하고 재물을 모아, 법명이 ‘응잠(應岑)’인 ‘제운대사(霽雲大師)’에게 맡겨 중건하였다.
그리고 그 편액을 바꾸어 ‘지덕(旨德)’이라 했는데, 대개 능호(陵號)를 피휘(避諱*盖避 개피)하여 이곳 지명을 취한 것이다.
숙종 무인년(1698, 숙종24) 단종께서 복위되면서 묘에서 능으로 승격되자, 절터를 확장하여 커다란 사찰을 완성한 뒤, ‘보덕사(報德寺)’라 명명했고 ‘금몽암(禁夢菴)’은 마침내 폐사가 되었다.
영조 을축년(1745, 영조21)에 참봉 ‘나삼(羅侯蔘)’이 개연히 탄식하며 “금몽암은 바로 단종께서 꿈속에서 현몽하여 창건한 곳이거늘, 어찌 폐사로 남긴 채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 말하고는, 사재를 출연하고 조력자를 모아, 옛터에 암자를 도로 지었다.
이에 노릉의 고사가 누락되지 않고 선왕의 유적이 인멸되지 않게 되었으니, 나삼의 뜻과 공적은 후대에 전할 만하다.
이제부터 이 나라 사람들은 소나무와 잣나무로 울창한 숲과 ‘의관(衣冠)이 출유(出遊)하는 모습’을 바라보게 될 것이다.
초록 풀과 밝은 꽃, 서늘한 달빛과 수심에 찬 구름, 오르내리는 두견새 울음소리, 그리고 두견새 울음과 호응하는 범종소리, 이것을 보고 듣는 사람 가운데 슬퍼하며 눈물을 쏟지 않을 자가 어디 있겠는가!
나는 일찍이 ‘자규루 상량문’을 지은 적이 있는데, 한번 노래할 때마다 한번 탄식하게 되니, 차마 읽을 수 없는 지경이었다.
지금 ‘금몽암 중수기’ 를 짓노라니 거듭 예전처럼 번뇌에 휩싸였다.
암자는 도합 31개의 기둥으로 지어졌는데, 보덕사와 함께 임자년(1792, 정조16) 정월에 보수를 시작하여 8월에 공역을 마쳤다.
발원한 자는 승려 ‘한명(漢溟)’이고, 공역을 감독한 자는 ‘재선(載禪)’이며, 내게 기문을 청한 자는 ‘지첨(知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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耳溪集卷十四
記
禁夢菴重修記 / 홍양호(洪良浩) 1843년
關東之寧越。卽我莊陵遜位之地也。粤昔端廟在禁中。發夢於此地。占基而建寺。命曰禁夢寺。在魯陵之左。遂爲願堂。萬曆壬辰。燬於兵。庚戌郡守金侯澤龍。募僧改構。更名曰魯陵菴。崇禎壬寅。童土尹公宰是郡。捐俸鳩財。付霽雲大師名應岑者。重建而易其額曰旨德。盖避陵號而取地名也。肅宗戊寅。端廟復位。墓陞爲陵。拓寺基成大刹。名曰報德寺。而禁夢菴遂廢。英廟乙丑。參奉羅侯蔘。慨然曰。禁夢。卽端廟感夢而肇建者也。豈可廢而不傳。乃出私財。募諸緣。還構菴於舊址。於是乎魯陵之故事無闕。而先王之遺跡不泯。羅侯之志若功。可傳於後世矣。自今此邦之人。望松栢之欝蓊。瞻衣冠之出遊。草綠花明。月冷雲愁。鵑聲上下。與鐘梵相應。其有不悽然而傷。汪然而涕者乎。余嘗撰子䂓樓兒郞之詞。一唱一噫。殆不忍讀。今於夢菴之記。重爲之於邑也。菴凡三十一楹。與報德寺。同修於壬子正月。訖事於八月。發願者僧漢溟。董役者載禪。請記於余者。知添云。
關東之寧越。관동지영월。
卽我莊陵遜位之地也。즉아장릉손위지지야。
粤昔端廟在禁中。 월석단묘재금중。
發夢於此地。 발몽어차지。
占基而建寺。 점기이건사。
命曰禁夢寺。 명왈금몽사。
在魯陵之左。 재노릉지좌。
遂爲願堂。 수위원당。
萬曆壬辰。 만력임진。
燬於兵。 훼어병。
庚戌郡守金侯澤龍。경술군수김후택룡。
募僧改構。모승개구。
更名曰魯陵菴。경명왈노릉암。
崇禎壬寅。숭정임인。
童土尹公宰是郡。동토윤공재시군。
捐俸鳩財。연봉구재。
付霽雲大師名應岑者。부제운대사명응잠자。
重建而易其額曰旨德。중건이역기액왈지덕。
盖避陵號而取地名也。개피릉호이취지명야。
肅宗戊寅。숙종무인。
端廟復位。단묘복위。
墓陞爲陵。묘승위릉。
拓寺基成大刹。척사기성대찰。
名曰報德寺。명왈보덕사。
而禁夢菴遂廢。이금몽암수폐。
英廟乙丑。영묘을축。
參奉羅侯蔘。참봉나후삼。
慨然曰。개연왈。
禁夢。금몽。
卽端廟感夢而肇建者也。즉단묘감몽이조건자야。
豈可廢而不傳。기가폐이불전。
乃出私財。내출사재。
募諸緣。모제연。
還構菴於舊址。환구암어구지。
於是乎魯陵之故事無闕。어시호노릉지고사무궐。
而先王之遺跡不泯。이선왕지유적불민。
羅侯之志若功。라후지지약공。
可傳於後世矣。가전어후세의。
自今此邦之人。자금차방지인。
望松栢之欝蓊。망송백지울옹。
瞻衣冠之出遊。첨의관지출유。
草綠花明。초록화명。
月冷雲愁。월냉운수。
鵑聲上下。견성상하。
與鐘梵相應。여종범상응。
其有不悽然而傷。기유불처연이상。
汪然而涕者乎。왕연이체자호。
余嘗撰子䂓樓兒郞之詞。여상찬자규루아랑지사。
一唱一噫。일창일희。
殆不忍讀。태불인독。
今於夢菴之記。금어몽암지기。
重爲之於邑也。중위지오읍야。
菴凡三十一楹。암범삼십일영。
與報德寺。여보덕사。
同修於壬子正月。동수어임자정월。
訖事於八月。흘사어팔월。
發願者僧漢溟。발원자승한명。
董役者載禪。동역자재선。
請記於余者。청기어여자。
知添云。지첨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