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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목 관아(복원) 濟州牧 官衙(국가사적 제380호)
위치 ; 제주시 삼도2동 43-3번지 일대
조선시대(朝鮮時代) 제주지방 통치의 중심지였던 제주목(濟州牧) 관아는 지금의 관덕정(觀德亭)을 포함하는 주변 일대에 분포해 있었으며, 이미 탐라국(耽羅國)시대부터 성주청(星主廳) 등 주요 관아시설(官衙施設)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관아시설은 1434년(世宗 16) 관부(官府)의 화재로 건물이 모두 불 타 없어진 뒤 바로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그 다음해인 1435년에 골격(骨格)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시대 내내 중·개축(重·改築)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집중적으로 훼철(毁撤)되어 관덕정을 빼고는 그 흔적을 볼 수가 없었다.
제주목의 관아지는 한말·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 대한 일제의 식민통치는 제주인의 얼과 혼이 담긴 건축과 장소를 말살하는 데에서 가장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 과정을 잠시보면 다음과 같다. 1907년에 瀛洲館(영주관)자리에 학교를 설립하고, 1909년에는 세병헌 자리에 경찰서를 설치하였으며, 1912년에는 이아터에 자혜의원을 설치하였다. 다시 1913년에는 성문, 1914년에는 망경루, 동성문, 서성문, 간성문 등 여러 문루, 1915년에는 소민문과 북성을 헐었다. 1916년에는 포정사를 훼철하고, 이듬해인 1917년에는 경찰서를 공제당 옛 터에 옮겨 세웠다. 1918년에는 남성문루를 훼철하고, 1929년에는 동성 위에 측후소를 설치하였으며, 1924년에는 연희각을 헐어버렸다. 이어 부임한 島司 前田善次는 1924년 관덕정을 중수하면서 본래 관덕정의 모습에 많은 손실을 입혔다. 1926년에는 제주읍성을 헐어 산지항 축항을 쌓고 이아가 헐리었다. 그리고 1940년에는 홍화각이 훼철되었다.(제주특별자치도 홈피 제주의 문화재)
제주시에서는 탐라국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제주의 정치·행정·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던 제주목 관아를 원래의 양식(樣式)으로 복구(復舊)하고자, 1991년부터 1998년까지 4차례 발굴조사(發掘調査)를 마친 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여러 문화층(文化層)과 함께 문헌상(文獻上)에 나타난 중심 건물인 홍화각(弘化閣)·연희각(延曦閣)·우련당(友蓮堂)·귤림당(橘林堂) 등의 건물터와 유구(遺構)가 확인되고 유물(遺物)도 출토되었다.
1993년 3월 30일에 제주목 관아지 일대가 국가사적(國家史蹟) 제380호로 지정되었고, 발굴과정에서 확인된 초석·기단석(礎石·基壇石) 등을 토대로 하고,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와 『탐라방영총람(耽羅防營總覽)』 등 당대(當代)의 문헌(文獻) 및 중앙문화재위원·향토사학가·전문가 등의 고증(考證)과 자문(諮問)을 거쳐 관아지 복원(官衙址 復元) 기본설계를 완료하였다. 특히, 제주역사의 정체성(正體性)과 중심을 설정하는 이 뜻깊은 복원사업에 소요되는 기와 5만여 장 전량(全量)을 헌와(獻瓦)해 준 30만 제주시민의 혼(魂)을 담은 사업이기도 하다. 민관(民官)이 합심하여 복원하게 된 이 장대(壯大)한 제주목 관아는 20세기를 마감하는 1999년 9월에 시작하여 새로운 세기인 2002년 12월에 복원(復元)을 완료하였다.
연희각(延曦閣)
연희각은 목사(牧使)가 집무(執務)하던 곳으로, 상아(上衙)의 동헌(東軒), 목사의 정아(正衙) 등으로도 불리웠다. 상아라 한 것은 판관(判官)의 집무처(執務處)인 이아(二衙)와 구분해 명명(命名)된 것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연희각기(延曦閣記)'에 의하면,
"연희각은 예전에 기문(記文)이 없어서 건치(建置) 연월일을 상세히 알 수가 없다. 현판(懸板)도 누가 명명(命名)하고 누가 쓴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건물은 겹처마에 깊숙한 지붕으로 좌대(座臺) 위에 높게 지어져 있다. 그 이름을 연희(延曦)라고 한 것은 외신(外臣)이 충성(忠誠)을 다하고자 하는 정성(精誠)을 표현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탐라지(耽羅志)}에 의하면, 심연(沈演, 1638. 6∼1640. 9)의 시(詩)가 부기(附記)되어 있고 또 이 때 목사의 겸직(兼職)이었던 절제사(節制使)가 방어사(防禦使)로 바뀌는 것으로 보아 연희각도 이 때 건립되었거나 그 이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제주목사의 겸직은 1642년(仁祖 20)에 다시 절제사로 바뀌었다가 1713년(肅宗 39)부터 다시 방어사라 하였다. 그 뒤 이 건물은 1884년(高宗 21)에 홍규(洪圭) 목사가 중수(重修)하였으나 1924년 여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헐리고 말았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2고주 5량구조, 공포는 무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36.63㎡(41.33坪)이다.
홍화각(弘化閣)
홍화각은 예전에 절제사(節制使)가 사무를 보던 곳이다. 1435년(世宗 17) 최해산(崔海山) 안무사(按撫使)가 못 쓰게 된 절의 재목과 기와를 가져다가 절제사영 3칸을 짓고 옛 이름 만경루(萬景樓)를 고쳐 홍화각이라 하고, 고득종으로 하여금 記를 짓게 했다. 홍화각은 안무사영(按撫使營) 또는 영리청(營吏廳)이라고도 했다.(이도2동誌 187쪽) 그 뒤 1648년(仁祖 26)에 김여수(金汝水) 목사(牧使)가 중수하였으며, 1713년(肅宗 39)에 방어영(防禦營)으로 승격되어 별도로 정아(正衙)를 설치함에 따라 이 홍화각은 영리청(營吏廳)이 되었다. 그 뒤 1772년(英祖 48) 양세현(梁世絢) 방어사(防禦使)가 중수(重修)하였고 1829년(純祖 29)에는 이행교(李行敎) 방어사가 개건(改建)하였다.
홍화각이라 명명(命名)한 것은 왕(王)의 어진 덕화(德化)가 백성에게 두루 미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또한 홍화각은 탐라고각(耽羅高閣)이라 불리었을 정도로 관아건물(官衙建物) 중에서 가장 웅장하였다. 기문(記文)으로는 '고득종기(高得宗記)'와 '김진용중수기(金晉鎔重修記)', '이원조중수기(李源祚重修記)' 등이 전한다. 그러나 홍화각은 1940년에 일제(日帝)에 의해 강제로 훼철(毁撤)되었으며, 현재 고득종(高得宗)이 쓴 ‘홍화각(弘化閣)'이란 편액(扁額)과 '홍화각기(弘化閣記)'가 새겨진 현판(懸板)은 고.양.부삼성사(高.梁.夫三姓祠)에 보관되어 있다. 본 현판(懸板)은 탁본하여 새긴 것이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 가구는 2고주 7량구조, 공포는 외1출목 이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55.82㎡(47.13평)이다.
知瀛錄에는 김영수목사가 홍화각을 중수할 당시 중수기의 구절이 다음과 같이 남아 있다.
〈地本無瓦匠與木工之妙手皆沼於越海近邑而致之預先陶瓦於廣壤土黏之地而與其賃力之直焉是歲秋稍熟翌年戊子…〉(…이 땅에는 본래 기와쟁이와 목공으로 솜씨좋은 사람이 없었으므로 모두 바다 건너 가까운 읍에서 불러 데려왔다. 먼저 점토가 있는 곳인 광양에서 기와를 구우며 그 빌려온 사람들과 같이 바로 일을 했다. 이 해 가을은 어느 정도 풍년이 들었고, 이듬해 무자년…)
黏찰질점, 稍벼줄기끝초
우련당(友蓮堂)
우련당은 1526년(中宗 21)에 이수동(李壽童) 목사가 성(城) 안에 우물이 없으면 적(敵)이 침입하여 성(城)을 포위(包圍)하거나 화재(火災)가 발생하였을 때 구급(救急)하기 어렵다 하여, 못을 파고 물을 가두어 연꽃을 심은 뒤 그 위에 세웠던 정자(亭子)이며, 연회 장소로 사용되던 곳이다. 그 뒤 양대수(楊大樹) 목사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시끄럽다 하여 연못을 메워 평지(平地)로 만들었는데, 여기서 “양대수(楊大樹) 개구리 미워하듯 한다."는 속담이 유래되었다. 1694년(肅宗 20) 9월에는 이익태(李益泰) 목사가 중건(重建)하였다.
영조(英祖) 때에는 김정 목사가 다시 정자(亭子)를 중수(重修)하고 못 가운데 석대(石臺)를 쌓아서 꽃과 대나무를 심고 향의실(享儀室)이라 개명(改名)하여 공물(貢物)을 봉진(封進)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즉, '향의실기(享儀室記)'에 의하면, {서경(書經)} 낙고편(洛誥篇)에"공물(貢物)을 바치는 데는 의식(儀式)이 많은데, 의식(儀式)에 바치는 물건의 정성(精誠)에 미치지 못하면 공물을 잘 바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한 말을 인용하면서, 임금님께 바치는 것을 향(享)이라 하고 예(禮)를 갖추는 것을 의(儀)라 하니, 이에 그 집의 편액(扁額)을 고쳐서 향의(享儀)라 한다고 하였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88.98㎡(26.91평)이다.
영주협당(瀛洲協堂)
영주협당은 원래 군관(軍官)들이 근무하던 관청(官廳)이었다. 창건년대(創建年代)는 확실하지 않으나 예전의 군관청(軍官廳)이 영·목(營·牧) 소속으로 분리될 때 영군관청(營軍官廳)이 되었다. 군관의 수는 원래 15人이 있으나 효종(孝宗) 초기에 이경억(李慶億) 어사(御使)가 조정(朝廷)에 건의하여 10인으로 줄였다. 군관들이 왕래할 때에는 항상 말(馬)이 지급(支給)되었으나 사사로이 말(馬)을 소지(所持)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았다. 1832년(純宗 32)에 한응호(韓應浩) 목사(牧使)에 의해 중건(重建)되면서 공제당(共濟堂)으로 이름이 개칭되었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가구는 1고주 5량구조, 공포는 초익공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면적은 107.7㎡(32.58평)이다
귤림당(橘林堂)
귤림당은 거문고를 타고 바둑을 두거나 시(詩)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장소로 이용되던 곳이다.
이원조(李源祚) 목사의 '귤림당중수기(橘林堂重修記)'에 의하면, "이 땅에 귤명(橘名)으로 된 국과원(國果園)이 모두 36곳인데, 홀로 이 귤림당(橘林堂)만이 연희각(延曦閣) 가까이에 있다. 입추(立秋) 이후가 되면 서리가 내려서 많은 알갱이가 누렇게 읽는다. 공무(公務)를 보는 여가(餘暇)에 지팡이를 짚고 과원(果園)을 산책하노라면 맑은 향기가 코를 찌르고, 가지에 열매 가득한 나무들을 쳐다보노라면 심신(心神)이 다 상쾌해진다. 그러나 귤림당의 창건(創建) 연대는 알 수 없다"고 하였다.
1743년(英祖 19) 안경운(安慶運) 목사가 개건(改建)하였고, 1769년(英祖 45)에 다시 중수(重修)한 뒤 건물이 노후(老朽)하여 이원조(李源祚) 목사가 1842년(憲宗 8)에 다시 중수하였다. 본 건물의 규모는 정면 1칸 측면 1칸, 공포는 초익공 홑처마에 사모지붕으로 면적은 9㎡(2.72평)이다.
중대문(中大門)
중대문은 동헌(東軒)으로 통하는 외대문(外大門)과 내대문(內大門)의 중간에 있었던 대문이다. 탐라순력도(耽羅巡歷圖)의 제주전최도(濟州殿最圖)에 나타나 있다
외대문(外大門)
외대문은 문헌에 "탐라포정사(耽羅布政司)", "진해루(鎭海樓)"로 표기되어 있다.
관아의 관문으로 1435년 홍화각 창건시에 건립했다고 전하며, 1766년 남지훈 목사가 개건했다고 한다. 2층누각 건물로 종루로도 활용되었다. 여기서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서 성문을 여닫는다고 하며, 그 종은 묘련사의 옛 터에서 가져왔다고 전한다. 이형상의 [탐라순련도](1703년), [탐라방영총람](1760년대)에 목관아 정문으로 뚜렷하게 표시되어 있다. [남환박물]에 의하면 총 18칸으로 나오며, 관아가 존속했던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 있었던 대문이다.
(목관아에 대한 자료는 설명과 사진 등은 제주목관아지 홈페이지(http://mokgwana.jejusi.go.kr)에서 인용하였음)
선정비군
이곳에는 입구에 하마비를 비롯해서 안쪽에 6개의 선정비가 남아 있는데 왼(남)쪽에서부터 다음과 같은 차례로 서 있었으나 하마비는 외대문 밖에 세웠고 선정비들은 북동쪽으로 옮겨 세웠다.
영상이공최응영세불망비(領相李公最應永世不忘碑)
이최응은 흥선대원군의 친형이며 문신으로서 쇄국 정책에 반대했으며, 대원군(大院君) 실각 후 영의정이 되었다. 이 비석은 그가 이조판서 및 영의정으로서 제주 지역에 쌓은 공덕을 기리는 비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최응영세불망비를 검색하세요.)
사상양공헌수영세불망비(使相梁公憲洙永世不忘碑)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프랑스 함대를 격퇴시켜 명성을 올렸던 양헌수 장군의 기념비이다. 좌측면에 '同治六年三月 日 營牧鄕將吏及各廳'(동치6년삼월일영목향장리급각청)이라 새기고 있어 고종4년(1867)에 목부내(牧府內)의 각관청이 합동으로 건립한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헌수는 순조 16년(1816)에 태어나 증광무과(增廣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희천군수(熙川郡守)·갑산부사(甲山府使) 등을 거쳐 고종1년(1864) 2월 제주방어사(濟州防禦使)로 도임했다. 그의 재임기간중의 기록을 보면 "'훈민편'을 저술하여 백성을 가르쳤고, 1865년 가을 태풍으로 이재민이 생기자 그들과 슬픔을 같이 하면서 장계를 올려 기민구제에 힘썼다. 항상 정사를 명백하게 처리했으며 효열을 현창(顯彰)하고 폐를 일소하였으며 그가 떠날 때에는 백성들이 길을 메워서 석별을 아쉬워했다"고 되어 있다.
비의 크기를 보면 비신의 높이 171cm, 너비는 윗부분 70.5cm, 아랫부분 65cm, 두께는 29cm, 귀부는 높이 19cm, 앞너비 106cm, 옆너비 140cm로 전체 높이는 190cm이다. 건린년대는 同治六年(1867) 3월이다.(제주시 비석일람 50쪽)
양헌수의 비는 이곳 외에도 삼성혈 경내의 <使相梁憲洙記念碑>, 제주민속박물관 구내의 <使相梁公憲洙善政碑>, 제주시 외도동 월대의 <使相梁公憲洙善政碑>, 애월읍 애월리의 <使相梁公憲洙恤民善政碑>, 애월읍 구엄리 원동산의 <使相梁公憲洙淸德恤民碑>, 안덕면 창천리 옥밤물가의 <使相梁公憲洙除弊碑>, 구좌읍 김녕리 비석거리의 철비 <使相梁公憲洙永世不忘碑> 등 많은 곳에 비가 있어 그의 선정을 확인하여 주고 있다.(제주의 문화재 308쪽)
사상백공희수휼민선정비(使相白公希洙恤民善政碑)
백희수가 제주방어사로 재임한 기간은 철종2년(1851) 7월부터 철종4년(1853) 12월까지인데 증보탐라지 등에서 그의 재임 기간의 기록을 보면 귤림당(橘林堂)을 개건하고, 충암 김정(沖庵金淨)의 적려유허비에 비각을 세웠으며, 1852년 가뭄으로 농사가 잘 되지 않았으므로 장계를 올려 별저미(別儲米)와 내탕전(內帑錢) 일천냥을 지원받아 궁지에 빠진 백성을 구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는 제주목사를 이임한 후 전라도병사(兵使)·삼도수군통어사(統禦使)·한성부좌윤(左尹) 등을 역임하였다.
비의 좌측면에 <咸豊丁巳四月 日 三徒>(함풍정사4월일삼도)라고 새기고 있어 그가 떠난 지 4년 후인 철종8년(1857)에 세운 사실을 알 수 있다. 비신은 높이 112cm, 너비 윗부분 46cm, 아랫부분 42cm, 두께는 위 13.5cm, 아래 13cm이다.
백희수 목사의 선정비는 이곳 외에 화북동 비석거리의 <使相白公希洙恤民善政碑>, 조천리 비석거리의 <使相白公希洙淸德善政碑> 등이 있다.(제주의 문화재 312쪽)
사상조공희순영세불망비(使相趙公羲純永世不忘碑)
이 비에는 전면에 <使相趙公羲純永世不忘碑>라 새기고, 그 좌우로 「治者烹鮮 載其淸淨 惠給悅부 島民咸蘇」(치자팽선 재기청정 혜급열부 도민함소)라 새겨져 있으며, 우측면에 「光緖四年五月 日鄕將吏立」(광서4년5월일향장리립)이라 밝히고 있어 고종15년(1878)에 세운 것을 알 수 있다. 비의 높이는 103cm, 너비는 위 48cm, 아래 44cm, 두께는 14cm로 되어 있다.
趙羲純 목사는 재임중에 귤림서원을 철폐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고종5년(1868) 10월 제주방어사로 부임하여 고종9년(1872) 5월까지 임기를 훨씬 넘겨 4년 동안이나 재임했는데 공교롭게도 그의 재임기간 중에 전국에 내린 서원철폐령 때문에 고종8년(1871)에는 귤림서원(橘林書院)·영혜사(永惠祠)·송죽사(松竹祠)·의토사(義土祠) 등 3읍(三邑)의 서원을 헐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재임중에 한발과 홍수 등 재해가 잇달아 일어났으므로 그는 내탕미 이천석과 내탕전 이천냥을 계청하여 진휼에 힘썼으며 몸소 여러 관원을 거느리고 성밖에 나가 밭을 갈아 백성을 위로 격려했다. 또 그는 제주성의 격대(擊坮)를 개축하고 남북수문(南北水門)을 보수하였으며, 제주영(濟州營)에 병력을 늘리고 포과(砲科)를 창설하는 등 군사에도 대비하는 한편, 제주향교를 중수(重修)하였다.(제주의 문화재 314쪽)
그의 선정비로는 제주향교의 <牧使趙公羲純校官修改碑>, 한림읍 동명리의 <牧使趙公羲純善政碑> 등이 있다.
사상정공기원거사비(使相鄭公起源去思碑)
임술년 민란 때 사태 진압을 위해서 제주 목사로 도임했던 정기원 장군의 기념비이다. 비신의 높이는 108cm, 너비는 윗부분 45cm, 아랫부분 43cm, 두께 13cm로 되어 있다. 비의 전면 좌우로 '誅魁矯俗 恩威 著 損 恤民 心恩自存'(주괴교속은위병저손름휼민심은자존)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난을 일으킨 우두머리를 죽여 질서를 바로잡았으니 은혜와 위광이 아울러 현저하며, 관청의 창고를 털어 백성을 구제했으니 이제는 걱정없이 살아가게 되었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비의 우측면에 건립연대가 새겨져 있었으나 '五月 日 營作鎭廳'(5월일영작진청)이라는 아랫부분만 판독할 수 있고 윗부분은 마멸되어 버려 언제 세웠는지 확인할 수 없다.
정기원은 순조9년(1809) 출생하여 전라좌도수사(水使), 충청도와 평안도의 병사(兵使), 삼도수군통어사(統禦使)를 지냈고, 철종14년(1863) 1월 제주방어사로 도임하여 당시 민란을 일으킨 주모자 강제검(姜悌儉)·김흥채(金興采) 등을 처형하고 난을 진압하여 민심을 수습하였으며, 이듬해 3월 제주를 떠났다. 그 후 고종8년(1871) 4월 을미양요(乙未洋擾) 때에는 강화도에 파견되어 진무사(鎭撫使)로 활약하였으며, 후에 총계사(摠戒使)·어기대장(御器大將)·훈련대장(訓練大將) 등 요직을 지냈다.(제주의 문화재 310쪽)
정기원 장군의 기념비는 이곳 외에 조천리 비석거리의 <使相鄭公起源永世不忘碑>, 김녕리 비석거리의 <使相鄭公起源善政碑>, 애월리의 <使相鄭公起源追思碑>, 와산리 동헌터의 <使相鄭公起源去思碑> 등이 있다.
판관강공재의거사비(判官姜公在毅去思碑)
규격은 45×95×13cm이다. 앞면에는 判官姜公在毅去思碑, 앞쪽 오른편에 〈政平訟理 三載一心〉(정평송리삼재일심), 왼편에 〈吏民俱便 追慕益深〉(이민구편추모익심)이라 음각되었다. 강재의(姜在毅) 판관은 헌종 14년(1848) 8월에 부임하여 철종 원년(1850) 2월에 체임되었다.
목사윤공구동청덕선정비(牧使尹公久東淸德善政碑)
건입동사무소 출입구 왼쪽에 목사선정비가 서 있었던 것을 2002년말 제주목관아지 복원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앞면에는 〈牧使尹公久東淸德善政碑〉(목사윤공구동청덕선정비)라고 새겨져 있고 뒷면은 판독이 불가능하다. 크기는 높이 105cm, 폭 69cm, 두께 36cm이다. 건립년대는 미상이나 1818년경으로 추정된다.
윤구동은 문신이며 목사겸방어사로 순조15년(1815) 5월 제주에 부임하여 순조17년(1817) 10월에 형조참의로 전출되었다. 재임중에 그는 공피전(供彼錢) 1,800냥을 마련하여 외국 선박이 표류했을 때 공궤(供饋)하는 비용으로 비치했는데, 뒤에 이를 還牟 1,088석으로 바꾸어 창고에 보관하게 하였다. 또 순조17년에는 본도에 흉년이 들자 육지에서 곡식을 들여와 도민을 구휼하였다. 그는 이 때에 환모조(還耗條) 2,500석을 미리 준비하여 흉년에 대비하는 등 청렴한 공직생활을 하였고 선정을 베풀었다. (제주시 비석일람 104쪽, 북제주군 비석총람 678쪽, 증보 제주통사 461쪽)
《작성 2004-10-17, 보완 2601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