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며칠 전 갑작스레 닥친 한파로 서울에서는 첫눈 왔다며 흥겨워 할 때, 가격 상승의 기대를 가지고 수확을 미루어오던 단감 과수농가에서는, 애지중지 정성들여 키운 단감이 고스란히 나무에서 얼어버리는 손해를 감수해야했다. 농민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아 안타깝지만, 천재지변을 어찌하겠는가. 인간지사 세옹지마.... 올해의 막바지 단풍산행을 즐기기 위해 거제도 남단의 가라산으로 향하는 가불산의 회원들은 추위에 대비한 한겨울 외투와 방한모자까지 눌러쓴 모습들이다. 허나, 날씨는 바람도 없이 포근하고 하늘은 푸르다. 거제도의 최남단, 망산과 가라산이 이어지는 안부, 저구고개에서 10:30경 산행이 시작 되자 마자 제법 종아리에 힘이 들어가는 가파른 오름길을 만나게 되고, 한사람 두사람 외투를 벗지만, 스웨터같은 등산복이 땀으로 조금씩 젖어든다.
출발지에서 잠시 보이던 바다는 온데간데 없고, 온통 참나무 활엽수에 둘러쌓여 걷다보니, 육지의 깊은 산인 양, 섬인지 대간인지 분간되지 않는다.
등산로의 가랑잎이 산객들의 발길에 부스러져 온전한 모습은 잃었지만, 아주 가루되지는 않은 것으로 보아, 적당한 정도의 등산객이 찾는 곳임을 짐작케 하고, 사방에는 마싹 마른 낙엽들이 오므아 쥔 손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아 굴러다닌다. 온통 연갈색 세피아톤의 활엽수 속에 숨어있는 빨강색의 단풍나무는 잎 모양이 예쁘고, 색상도 곱다.
가파른 등산로를 따라 40분쯤 오르자, 거칠게 다듬어진 화강암 성곽의 일부가 드러나는 다대산 성터. 얼마나 긴 세월 얼마나 많은 선조들이, 왜적의 침범을 피해 이곳에서 몇 소쿠리의 애환을 남겼을까.... 세월은 무심하여 오늘날 잡초 우거지고 우리 같은 산객들이 아무 생각 없이 그 성곽을 밟고 넘어 정상으로 향한다.
성곽을 넘어서며 고개를 들어보니 하얀 바위산의 모습을 한 가라산이 마치 해인사를 품고 있는 가야산과 흡사하다. 그 옛날 철기를 잘 다루던 가야국은 합천 가야산에서 이곳 거제도 가라산까지 드넓은 영토를 호령했으니, 당당한 그들의 역사는 재조명 받아야 마땅하고, 이름도 가라산이라니, 가야국의 위세는 오늘날까지 면면히 흘러내려오고 있지 아니한가.
한동안, 부드러운 낙엽길이 정상으로 안내한다. 막바지 가라산 정상을 앞에두고, 바위암릉길과 흙길을 번갈아 지나며, 왼편을 보니 깍아지른 바위벼랑이 하얗게 세월의 때를 씻고 있고, 오른편으로는 바다로 뻗어나간 해금강쪽의 갈곶이 아련히 햇살아래 희미하다. 갓 12시를 넘길무렵, 드디어 가라산 정상. 한쪽은 축대를 쌓아 펑퍼짐한 광장이 조성되어 있다. 앉으려다 보니, 그곳은 둥치까지 낫질되어진 장미 밭이라는 것을 알게된다. 좀 이른감이 있지만, 정상이기에 산상오찬을 펼친다.
거제도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에 서서, 동서남북 휘휘 돌아보며, 지리공부를 시작한다. 서쪽 저 멀리 통영시가 숨어있고, 그 왼편으로 누운 섬이 한산도란다. 북으로는 우리가 가야 할 노자산과 갈색으로 단풍든 산줄기 중간중간에 바위봉우리들이 불쑥불쑥 솟아 오른게 보이지? 우리가 지나게 될 거야. 동편 산 발아래에 앉아있는 마을이 학동이고, 몽돌해변과 소나무숲이 해안선을 만들고, 외도 관광유람선 부두가 뾰족이 돌출되어 섬을 가리키네.. 저 바다 위에 떠있는 섬이 해상식물관광농원인 외도이고, 그 오른편을 따라가면 남한의 바다금강산이라는 해금강이야. 안내판에 따르면 용트림하는 청룡이 여의주를 입에 물고 있는 형국이라 설명했었지? 장황한 설명에 우진이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 인다. 설명보다는 그동안 공부하느라 갇혀서 답답했던 마음이 확 트인 바다한테서 위로를 받아 즐겁다는 표정이다. 가라산을 뒤로하고, 아름답지만 험한 바위 전망대를 두 세군데 지나며, 낙엽 덮인 부드러운 흙길을 밟고 암릉위 바윗길도 걷는다. 아슬아슬 벼랑위의 바위에 서서, 붉게 물든 산줄기가 비단처럼 부드럽게 흘러내리는 산세에 취하고, 잔잔한 바다 위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이 그려내는 한려수도의 아름다운 그림에 취한다.
자연스레 그룹을 형성한 회원님들의 표정마저도, 갯바람 갯내음에 그리고 산의 정취에 녹아들어, 때 묻지 않은 순수한 모습들이다. 한발짝 뒤로 한발짝 뒤로 하며 사진찍다가 멋진 놈 되었다는 한마디 농담에도 왁자하니 웃음바다가 된다.
오르기도 힘든 뫼바위에서는 하산길을 잘 못 택한 탓에 낭떠러지를 만나 빽코스, 맨 후미로 쳐진다. 하오 3시경, 자연휴양림에서 오르는 일가족이 우릴 추월 할 즈음 노자산 정상에 닿았고, 다시금 일행에 합류된다. 친절한 채랑님, 건네주는 한잔의 복분자 원액(?)과 안주에 힘입어 다시금 힘을 낸다.
오른쪽 무릎이 불편해서 맨 뒤로 따르지만, 민폐를 끼치지 않으려 애써 참으며 걷는 집사람이 안쓰럽다. 뫼바위를 우회하지 않은 게 후회된다. 산에서는 절대 무리해선 안된다는 사실, 다시 한번 겸손을 배운다. 노자산을 내려오는 길에 등산로 계단공사를 하는 인부를 보니,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네들은 우리가 고맙겠지. 등산객이 있으니, 계단을 만들고, 그들에게 일거리가 주어지고.....서로가 서로의 고객이고, 봉사자이고....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면 늘 감사하는 마음 지니고 살 수 있으리니.....
저수지가 없는 제주도에선 벼농사를 짓지 못한다. 거제도도 섬이지만, 사철 물이 흐르는 계곡이 있고 저수지가 있어 농사가 가능하다. 해양사 옆 계곡의 산천어 유영하는 작은 물줄기를 따라 산을 내려왔다.
하늘에 맞닿을 듯 키가 큰 송림숲 공원을 지나고, 억새가 둑을 둘러친 저수지를 애돌아 버스있는 곳에 닿으니 하산주 파티가 한창이다. 아직은 해가 중천에 떠서, 늦가을 추수가 끝 난 황량한 들판에 따사로운 햇살을 쏟아 붓어 주고 있다.
떡국 한그룻과 소주 두 잔에 얼큰한 취기가 올라와, 출발하자마자 잠에 떨어졌는데, 고성 휴게소에 들렀을 때에야 깨어나 하늘을 보니 둥그런 보름달이 어두워진 산하를 비추어 주고 있다. 달아달아 밝은 달아 이태백이 놀던 달아......둥근 저 달은 모두에게 온 세상에 골고루 한량없는 달빛을 주고 있다. 모두가 저랬으면, 모두가 저런 마음이라면....... 어릴 때에, 비스켓, 쵸코렡, 캬라멜, 껌, 사탕 등등 온갖 종류의 과자가 조금씩 담긴 종합선물세트가 그리도 좋을 수 없었다. 거제도 가라, 노자 산행은 한마디로 종합선물이었다. 그 안에는 바위 암릉길도 있었고, 낙엽길도 있었다. 오르막길도 있었고, 평탄하거나 내리막길도 있었다. 활엽수 길도 있었고, 소나무 숲길도 있었다. 바다와 섬도 있었고, 계곡과 저수지도 있었다. 초록색 대숲도 보았고 붉은 단풍도, 시원한 바람도, 후줄근한 땀 뺌도 있었다. 수고들 많으셨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