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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6 이틑날
수 많은 사람과 사연을 실은 리장행 밤기차는 옥룡설산 만년설을 휘감고 불어오는 새벽 찬 공기를 가르며 플랫폼으로 미끄러지듯 들어서고 우리는 미리 준비해 둔 각자의 짐을 들고 리장역에 첫발을 내 딛는다.
드디어 리장이다. 리장에 대해 잠깐 언급해 보면
리장(여강,丽江), 언뜻 강을 연상하기 쉬우나, 이는 운남성 북쪽에 있는 해발 2,000-2,500m에 있는 분지로 소수 민족인 나시족(납서족,納西族)이 사는 자치현을 말한다. 리장의 뜻은 나시어로 '진사강이 머리를 돌리는 곳'이란 뜻을 지녔단다. 항상 만년설로 덮여 있는 해발 5596m의 옥룡설산(玉龙雪山) 기슭에 있는 이곳에서는 칭장고원에서 남쪽으로 흘러온 양자강의 상류인 금사강(金沙江)과 란창강, 그리고 누강이 윈난에서 합류한다. 그 '삼강병류' 지점에 맑은 물을 끼고 '동양의 베니스'라 불릴 만큼 아름다운 경관을 품은 곳이 리장이다.-[출처] [중국여행] 운남성 리장(丽江) 여행 - 밤의 낭만이 흐르는 리장고성(丽江古城)|
리장역 달대형 표지판 or 행선안내기? 직업본능상 한컷^^
리장역에 도착 한 기념으로 사진을 찍고 있는데 어디선가 외마디 비병이 들렸다. 돌아보니 함날자님이 다리를 절며 걸어오더니 주저 앉아 버렸다. 열차와 플랫폼 사이 간격이 넓어 철판으로 받쳐서 거기를 딛고 나오는데 함날자님이 나오다가 그만 다리가 빠져 정강이 쪽에 제법 큰 찰과상을 입었다. 그 여자 역무원이 철판을 대충 밟고 지지하고 있다가 함날자님이 밟는 순간 철판이 이격되어 버리는 바람에 다리가 빠져 버리고 만것이다. 상당히 당황 스러웠다. 부역장 정도로 보이는 남자직원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산제비형님은 여기는 뭐 보상규정없나?(이건 영어로 안하고 우리말로 했슴) 하고 말하는 사이 어느샌가 구급함을 들고 달려온 여역무원이 정성스레 함날자님의 다친 다리를 응급치료 해 줬다. 발빠른 응급조치가 없었다면 함날자님뿐만 아니라 모두가 불쾌한 마음으로 리장에서의 일정을 시작 할 뻔 했다. 중국은 아직 기관 쪽에 근무하는 사람들의 권위주의적 행태가 상당히 만연하다. 대도시 일수록 더한데 생각밖으로 리장역에 근무하는 직원들의 태도는 상당히 우호적이였고 미안한 마음을 우리가 떠나기 전까지 계속 내 비쳤다. 계속 미안하다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우리도 웃어 주면서 대신에 기념사진이나 하나 찍어 달라고 했다. 흔쾌히 찍어준 사진을 귀국해서 보니 요즘말로 멘붕이었다. 사진이 흔들렸다. 흔들려도 너무 흔들려 올리지도 못했다.
고통을 참고 있는 함날자님. 어느 날 밤 객잔에서 혼자 약 바르는 모습을 보면서 짠 했던 기억이 난다.
우여곡절 끝에 리장역을 벗어났다. 들어올땐 산제비님, 나갈땐 함날자님. 나중에 다 얘기거리로 남기기 위해 자작극을 펼쳤는지도 모른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제비형님은 그렇다쳐도 함날자님은 굳이 자해까지 하면서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어쨋든 내겐 충분한 소제거리가 되었으니- 량웨이 페이창간씨에(두분 대단히 감사합니다.)
리장역을 빠져 나온 후~
새로 건립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역 내외는 상당 한 규모였고 깨끗하게 정비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역주변에는 정말 쿤밍역과는 대조적으로 한산했고 상가나 식당등 제대로 된 건물은 찿아 볼래야 찿아 볼 수 없었다. 몇 몇 호객꾼들이 빵차를 타고 자기네 식당으로 가자고 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바쁠것도 없고 여행의 본질에 충실하게 하기 위하여 역주변 좌판에서 중국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식사를 하기로 했다. 오기 전 리장역에서 아침식사에 대해 검색해 봤던 바로 그 풍경이 역 맞은편에 펼쳐져 있었다. 중국의 아침식사는 특별한 게 없다. 중국인들은 주로 아침식사를 집에서 해먹는게 아니라 출근하면서 길거리에서 해결한다. 북경에서 주로 먹었던 따오샤오미엔(일종의수제비같은거),여우티아오(꽈배기)는 운남에서는 보기 힘들었지만 여긴 운남특산인 미씨엔이 있지 않은가? 미씨엔 몇그릇과 만두국.빠오즈,죽 등을 시켜 먹으며 장시간 이동으로 지친 몸을 달래고 있었다.
중국 여행동안 아침식사는 늘 이런 풍경이었다..
아침식사를 마친 후 중국에 오기 전 회장님이 예약 해 두었던 리장고성 내 객잔으로 찿아가야 할 일이 남았다. 역 앞이라 꿍처(공공버스)도 있었지만 리장고성 도착 후 짐을 들고 객잔을 찿아 다녀야 하는 불편함이 있었기에 빵차와 일반택시를 타고 객잔으로 출발했다. 큰 어려움 없이 예약해 두었던 리장가든인객잔에 도착했다. 아직 이른 시각이라 방이 덜 빠져 객잔 마당에서 각자 짐을 풀고 쉬었다. 당구를 얼마나 잘치는지 다산초당님은 큐대잡기 바빴다. 오늘은 특별한 일정이 없다.
특별한 일정이 없는게 아니라 고성내 구경을 하루종일 하도록 일정이 되어 있었다. 리장고성 구경만 며칠씩 한다는 이들도 있다.
자아~~이쯤되면 센스쟁이들은 올것이 왔구나 라고 감을 잡았을 것이다. 그렇다. 리장하면 고성, 고성하면 리장이니 리장고성에 대해 알아보고 가는 건 당연지사. 공부하는 셈 치고 지겹더라도 읽어주시길 빈다. 여러분의 견문확장에 필히 도움이 될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리장고성내 상업화가 되지 않은 곳
리장 관광의 핵심은 고성(古城)이다. 1996년 2월 3일 리장엔 규모 7.2의 지진이 덮쳤다. 신식 건물들은 폐허가 됐는데 고성의 800년전 지은 기와집들은 끄떡없었다. 고성은 199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록 되었다.
윈난성(雲南省) 리장고성은 칭기즈칸의 손자이자 몽골 5대 칸이었던 쿠빌라이 칸 시대에 세워진 도시로 송나라 말기와 원나라 초기에 걸쳐 나시족(納西族)이 건설한 도시로 지금까지 중국에서 가장 완벽하게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고성 중의 하나로 꼽힌다. 가로·세로 2㎞쯤 되는 규모에 3000개의 옛날 목조 가옥이 가득 차 있다. 곳곳에 수로가 나있고 164개 골목이 미로로 얽혀 있다.또한 8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리장고성은 예로부터 윈난성 남부의 시솽반나(西雙版納)에서 푸얼(普耳)을 지나 바오산(保山)과 따리(大理)를 거쳐 리장(麗江)과 상거리라(香格里拉), 라싸(拉薩)에 이르는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중심도시였다. 1천여년 전부터 리장은 차(茶) 교역의 중심지였다. 중국이나 아시아의 다른 고성이 옛 고성의 자취만 남은 유적이라는 개념이 강하다면 리장고성은 1천년이상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아온 나시족들이 현재까지도 거주하고 있는 ’살아있는’ 관광지라는 점에서 다르다. 그래선가 해마다 수천명의 외국인과 외지인들이 리장고성의 아름다움에 취해 몇 달이고 눌러앉아 사는 경우가 흔하다.
고성 내의 중심광장인 ’스팡제’(四方街)를 중심으로 주요 골목길을 정비하고 돌다리는 물론 130여곳에 이르는 나무다리를 모두 개보수했다. 또한 고성의 풍격에 어울리지 않는 최근 지어진 건축물을 철거시켰다. 이 같은 작업을 마무리하자 고성은 800여년 전의 옛모습을 회복하는 데 성공했다.
고성의 면적은 3만8천㎡에 이르며 약 3만여명의 나시족들이 직접 살고 있다. 나시족은 중국의 55개에 이르는 소수민족의 하나로 아직도 모계사회의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리장고성에서는 이 같은 나시족의 다채로운 문화를 직접 확인할 수 있다.
리장은 원래 윈난의 산골 중에서도 깊은 산골에 위치한, 그야말로 산골동네였다. 지리적으로 운귀고원과 티벳고원이 만나는 자리, 이 오래된 도시는 해발 2400m 에 위치해 있다. 귀가 먹먹하다. 운귀고원과 티벳고원이 만나는 곳에 위치한다는 것은 해발고도가 높다는 사실 이외에 한가지 더 다른 큰 영향을 미치는데, 그것은 바로 지진이다. 최악의 지진은 1996년에 발생했다. 리장고성이 각광을 받게 된 것은 1996년 지진피해 복구를 위해 리장을 방문한 외국인들이 옛 원형 그대로를 지키고 있던 리장고성의 나시족 문화를 접하면서부터였다. 그 후 이뤄진 세계문화유산 지정은 리장고성의 명성을 세계인에게 알리는 계기가 됐고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연간 3조~4조위안의 집중적인 투자가 이뤄지면서 리장고성은 중국 내 최고의 관광지로 발전했다.
1996년의 대지진은 리장의 신시가지, 즉 지금의 고성 밖을 폐허로 만들었다. 그리고, 고성은 남았다. 고성 밖이 한줌의 흙과 돌의 모습으로 사람들 앞에 되돌아 놓여 있을 때, 고성안의 나시족들의 목조 전통 가옥들은 거짓말처럼 말짱했다. 현대의 ‘기술’ 과 ‘과학’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그 나시족들이 간직한 ‘지혜’ 가 그토록 강렬했던 대지진을 견뎌낸 것이다. 그리고 리장고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 되었다. 리장 고성의 입구에는 거대한 물레방아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임을 나타내는 붉은색 벽이 있다. 그리고 물레방아 옆의 패방의’ 세계문화유산 리장 고성’ 이라는 글씨는 장쩌민 전 주석이 친필로 쓴 것이다. 그렇게 리장고성은 대지진을 견뎌낸 전설이 되었고,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이 되었고, 중국 제일의 관광지 중 하나가 되었다. 여전히 해발 2400m 의 산 위에 있지만 더 이상 이곳은 예전의 산골이 아니다. - 리장고성에 대해 가장 이해하기 쉬웠던 글이다. (출처, 리장지니게스트하우스)
상냥한 객잔 샤오지에(아가씨)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방은 비워졌고 방에 각자 짐을 보관 후 홀가분한 마음으로 리장고성 구경에 나섰다. 내일 호도협 트래킹을 위해 오늘 하루는 고성 구경하고 푹 쉬자는 회장님의 배려이기도 했다.
오전의 고성풍경은 마치 어릴적 살던 골목길을 연상 시킨다. 시간을 거슬러 온 듯한 장면에 입에선 저절로 자그만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지도를 들고 나왔지만 정말 골목은 미로 같았고 이리저리 걷다보니 쓰팡지에(사방가)가 나왔다. 대부분 길을 잃거나 사람과 헤어지거나 하면 이곳으로 오면 된다. 광장이라고 하지만 그다지 크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나시족 할머니들의 반복적인 전통춤이 멀리서 온 우리를 반겨주는듯 했다.
나시족 할머니들의 전통춤..춤사위는 그리 어렵지 않다. 간단한 동작을 계속 반복적으로 한다.
바람도리님이 어디서 샀는지 면튀김을 먹으라고 내민다. 안그래도 내가 면을 좋아하는 편이어서 바로 먹어 보았더니 그 맛이 아주 고소하면서도 식감이 좋은게 입에 딱 올라 붙었다.
나시족 할머니들의 춤을 구경하면서 우리는 인연이란게 이런거구나 라는 것을 느끼게 된 일이 있었으니, 그러니깐 쿤밍역에서 리장행 열차를 기다리던 중 중국꼬마가 있어 귀여워서 한국과자를 좀 주었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이 모자와 친하게 되고 이모자와 일행 한명이 리장에 간다는 소리까지 들었지만 정말 이들을 리장고성 쓰팡지에 에서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쿤밍역, 리장역, 리장고성내에서 도합 3번을 만나게 되는 중국일행들..인연맞죠? ㅋ
사진 맨 우측 휴대폰하는 여인이 리장에 사는데 이 두친구를 초청해서 리장을 구경시켜주는 형국이었다. 알보보니 이 3명의 여인은 처녀시절 어느호텔에서 같이 일했던 동료들이었는데 두명은 시집가고 우측에 약간 통통한 여인은 아직 처녀라고 했다.
이들이 우리 보고 자기들은 라스하이 라는 곳으로 구경가는데 같이 가보지 않겠냐고 물어본다.
언뜻 오기전에 운남성 검색해 보다가 조금 알게 되었고 우리 일행들에게 물어보니 어차피 오늘 하루는 고성에 머물건데 가보는것도 괜찮지 않는냐 라는 의견이 많아 그들과 같이 라스하이로 가게 되었다.
라스하이는 중국 윈난성[雲南省] 리장[丽江]에 위치한 고산호수다.. 위룽쉐산[玉龙雪山]과 후탸오샤[虎跳峡]에서 가깝다. 나시어[纳西语]에서 '라스하이[拉市海]'는 '새로이 발견된 황량한 평원'을 의미한다. 매년 초겨울이면 만 마리 이상의 철새가 날아와 겨울을 보낸다.
일정에 없던 뜻밖의 여정으로 설레이기 시작했다. 마침 리장으로 친구들을 초청한 여인의 남편이 빠오처(빵차) 기사였다.우리는 차 2대에 나눠타고 채 30분이 걸리지 않아 라스하이에 도착했다.
우기가 되면 말들이 노니는 초지는 물에 잠긴다..카메라에 호수를 다담지 못한게 못내 아쉽다.
우리는 단순히 라스하이 호수를 구경하려 했지만 그게 글쎄 단순하지가 못했다. 알고보니 여기는 호수뿐만 아니라 이 호수의 발원지인 산 정상까지 말 트래킹 상품이 있었던 것이다. 가는 장소에 따라 금액이 달랐다. 순간 난감했다. 일정에 없던 터라 생각지도 못한 예산이 소요될 위기?에 처했다. 내가 뭐라 할 입장이 되지 못했다. 아~ 여기 온것이 잘못된 선택인가? 순간 혼란스러웠지만 곧 회장님과 여러회원님들께서 여기까지 왔는데 제대로 구경하자 쪽으로 의견이 모아져 꽤 큰 금액을 지불하고 말 트래킹을 시작했다.
라스하이 농가를 지나 산 쪽으로 올라갔다. 말을 처음 타는 나로서는 좀 무섭기도 했고 영 자세가 나오질 않았다. 바로 앞에 가는 바람도리님은 두 손을 놓는 제스쳐도 취하면서 승마자격증이 있다는걸 은근히 자랑하고 있었다. 비탈진 산길을 아무런 불평없이 묵묵히 올라가는 말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말한테도 미안하고 말 트래킹 자체가 내겐 별로 탐탁치 않게 다가왔다. 얼마나 다녔는지 산길은 온통 말들이 밟은 자국으로 움푹 패여 있었고 그 위로 텁텁한 흙먼지가 피어 올랐다. 라스하이 발원지에서 휴식 겸 간단한 점심식사를 했다. 뭐 먹을거래봐야 구운감자와 볶음밥,미씨엔,차 밖엔 특별한 것이 없는 듯 했다. 허기진 배를 채우긴 했지만 시골 촌 아낙네들이 파는 음식들이 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돈 맛을 알아버렸나? 왠지 씁쓸하게 느껴졌다. 하기사 산제비님 마부는 아이폰을 들고 있었으니 우리가 매체를 통해 봤던 가난한 마방의 후예는 최소한 라스하이에는 없는 듯 했다.
말 트래킹 장면..하산 하는 모습..
여기가 라스하이 발원지다. 회장님이 포인트를 잘 잡으셨다^^
말을 타고 올라온 길로 되돌아 하산했다. 이후 라스하이 뱃놀이가 있었다. 고산지대라 그런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자외선이 강했다. 미모 망치는 줄 알았다. 쇠철판으로 만든 불안하기 그지없는 배에 15여명이 탔다. 어린 사공이 몇 번 배를 좌우로 흔들었다. 모두 비명을 지르며 좋아 했지만 난 솔직히 배가 전복될것 같아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거기에 더해 중국꼬마녀석 즐겁게 해준다고 산제비님이 배를 더 흔들어 버리는 바램에 정말 대략 난감했다. 사실 뱃놀이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다행이 배는 전복되지 않았다..
말놀이, 뱃놀이를 마친 우리는 나시전통가옥을 방문했다. 전통가옥앞에서 동파문자(나시족이 사용하는 일종의 상형문자)로 도배된 벽화를 배경으로 단체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산제비형님이 보이질 않는다. 차에서 자는지, 아니면 화장실 갔는지 보이질 않아 우리끼리 찍고 나시전통가옥안으로 들어가 그들의 시조와유래, 풍습과 생활상이 요약된 것들을 관람하고 리장고성보다 더 오래된 속하고진(束河古镇)으로 출발했다.
속하고진(束河古镇)는 수허구전으로 발음하고 리장시[丽江市] 시내에서 북쪽으로 7㎞, 바이사진[白沙镇]에서 3㎞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나시[纳西] 언어로 '사오우[绍坞]'라고 하는데, '높은 봉우리 아래에 위치한 촌락'이라는 의미이다. 나시의 선조들은 리장[丽江]지역에서 가장 먼저 거주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차마고도(茶马古道)에서 거의 완벽하게 보존되어 매우 중요한 장소로 여겨진다. 당대(唐代)에 개통된 차마고도(茶马古道)는 윈난[云南] 남쪽에서 출발하여 리장[丽江]을 지나 바로 티베트의 라싸[拉萨]에 이르는데, 약 천 여 년간 무역통로로 이용되었다.
수허[束河]는 리장[丽江] 평원에서 온전하게 보존된 역참으로써, 1997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리장구청[丽江古城]보다 작은 규모이나, 돌다리와 석판로(石板路), 상마스[上马石], 마궈터우[马锅头]의 정원, 룽취안사[龙泉寺]에 남겨진 명대(明代) 벽화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상당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라는 것은 귀국해서 더 자세히 알게 된 곳이다.
속하고진에서..웃는게 웃는게 아니다..
수허구전 후문 정도 되는곳에서 하차하여 입장 할려고 하는데 한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산제비형님이다. 2대의 차로 이동하면서 다녔는데 분명 우리차에는 없서서 그 차에 제비형님 없나?라고 물으니 어? 우리차에 없는데? 형님차에 없어요? 하는 되물음에 순간 모두 얼어 버렸다. 큰일났다. 도대체 차에 없으면 어디 있단 말인가?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맞다. 오기 전 나시전통가옥 앞에서 사진 찍을때 부터 없었던 것이다. 우리는 차에 있거나 화장실 간줄 알았는데.. 서로 자기가 탄 차가 아닌 다른 차에 제비형님이 탔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 낭패다. 상의 끝에 일행 일부는 수허고성 구경을 하기로 하고 지리개굴님이 빵차 기사와 함께 여기 오기 전 라스하이 매표소 부근으로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일행은 속하고진을 둘러 봤지만 마음이 편칠 않아 분위기가 상당히 가라앉아 있었고 산제비형님을 무사히 찿기만을 기도하고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규모면에서는 리장고성보다 확연히 작은 수허고성을 휙 둘러보고 나오는데 저기 멀리서 산제비님과 지리개굴님이 보이질 않는가? 아~ 다행이다..정말 다행이다.. 하마터면 머나 먼 타국에서 한사람 잃어버리고 우리끼리 귀국하는거 아닌가 싶었다. 너무 반가워서 껴안고 싶었지만 우리의 애를 너무 태워 밉기까지 했다. 산제비형님 왈, 뱃놀이 하고 나서 화장실 갔다 와보니 아무도 없데? 그래서 걍 거기 눌러 앉아서 맥주나 한잔 하고 있었지..내까지 또 움직이면 서로 길 헷갈려서 영영 이별 할 수도 있으니까..너무나 차분한 언변에 또 한번 놀랬으니 역시 고수다 싶었다. 빠오처 기사가 동행한 지리개굴님을 안심시킬려고 포도주를 건넸는데 얼마나 긴장했던지 한 때 술의 강자였던 지리개굴님은 포도주에 체해 그날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었다.
이산가족 상봉장면..근데 사진상으로 봐선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듯
또 한 편의 드라마를 쓴 우리는 택시기사가 추천한 중국식당으로 가서 훠구어(중국식샤브샤브)로 저녁식사를 했고 우리 숙소가 있는 리장고성으로 돌아왔다. 본격적인 호도협 트래킹과 옥룡설산 등반이 남았는데 슬슬 걱정이 앞섰지만 중국에서 만나 인연이 된 중국친구들과 고성의 화려한 불 빛아래 밤마다 펼쳐지는 전통 춤판에 같이 어울려 취기를 발산했고 그렇게 리장에서의 이틀째 밤은 깊어만 갔다.
밤이면 나시족과 외부관광객들이 함께 음악에 맞춰 전통춤을 춘다.
첫댓글 옛날(?) 생각나네요. 감사요~~~~
아이고~ 헤어지고 혼자 남으니 (말은 그리했지만 사실은 쪼리더라) 그래서 맥주 사 묵었지~ 그나저나 바쁜데 기억 더듬어 글 쓴다고 욕본다~~
첨에는 걱정 안했는데 다들 심각하니 저도 쓸쓸 불안해지더라구요..
아직 상처에 딱지가 남았있네요.
사실 사고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다치지는 않았지만 호도협 옥룡도 못가고 짐만 지킬뻔했습니다
그래도 그 때는 무지 아팠음 ㅠㅠ
그 날 얼굴은 안 보고 "안 아프다"라는 말만 믿었는데...실은 아팠던 걸 사진이 증명하네 ~, 아~~ 배상 받아야 되는데...일정과 잛은 영어(뒹국어) 땜시리~~ 그나저나 마눌님이 왜 뒹국서 맞고(까이고) 왔냐고 뭐라 안카더나???
수고 많슴..^^
ㅋㅋㅋ 잼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