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 stevfano"(4735, 스테파노스) 면류관, 왕관, 화관 [계2:10]
또한 명사‘스테파노스(Homer이래)’는 ‘스테포(둘러싸다)’에서 유래했으며,‘면류관,왕관’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말은 운동 경기에서 승리한 사람이 쓰는 월계관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어 ‘승리,축제,예배,공무나 명예,왕권이나 왕의 방문’을 의미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이때 머리에 꽃관이나 왕관이나 월계관을 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스테파노스’인 면류관은 ‘기쁨,슬픔,탁월’을 표현할 때도 역시 사용되었는데 왜냐하면 슬픔의 표현으로 머리에 어떤 띠와 같은 관을 썼기 때문이다.
1. 고전 헬라어 문헌의 용법.
명사 스테파노스(Homer 이래)는 스테포(stefw: 둘러싸다)에서 유래했으며, '면류관, 왕관'을 의미한다.
스테파노스는 운동 경기들에서 승리한 사람이 쓰는 월계관을 뜻하는 말로 사용되었으며, '승리, 축제, 예배, 공무나 명예, 왕권이나 왕의 방문'을 의미한 용어로 사용되었다.
스테파노스, 즉 면류관은 '기쁨, 슬픔, 탁월'을 표현하며, 밀폐된 면류관은 마술에 사용되기도 하였다.
2. 70인역본의 용법.
명사 스테파노스는 약 50회 나오며, 거의 항상 히브리어 아타라(관, 왕관, 화관)의 역어로 사용되었다.
이 단어는 '왕관'(삼하 12:20 등), 여왕의 관(렘 13:18), 귀족이 쓰는 관(에 8:15), 혹은 신랑이 쓰는 관(아 3:11)을 가리킨다. 관은 금과 은으로 만들기도 하고(시 21:3 슥 6:11) 꽃으로 만들기도 했다(겔 23:42).
이 단어의 가장 중요한 용법은 비유적 용법이며, 비유적으로 사용될 때, 영예와 권위를 나타낸다. 잠언에서 흰머리카락(잠 16:31), 손자(잠 17:6), 훌륭한 아내(잠 12:4), 지혜(잠 4:9 잠 14:24)는 관(면류관)으로 간주된다. 마지막 비유로, 사 28:5에서 여호와께서 남은 자의 관(면류관)이 되실 것이다! 그는 남은 자를 축복하실 것이며 그들의 자랑이 되실 것이다(겔 16:12).
이러한 은유는 면류관이 옮기울 것이라는 것과 같이 부정적인 면이 강조될 때도 사용된다. 슥 6:11에서 선지자는 바벨론 유수에서 귀환하는 남은 자들이 가져온 금과 은을 취하여 관(히브리어는 복수형임, 아마도 최상급, 즉 최종적인 관을 나타내는 것같음)을 만들고 그것을 제사장 여호수아 머리에 씌우라는 명령을 받는다. 이 관은 성전에 보관해야 한다(슥 6:14). 이와 같은 관 씌움은 메시야에 대한 상징이다. 여호수아는 그 왕관을 받음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제사장의 직무와 왕의 직무가 결합됨을 보여준다. 그리스도만이 그 관을 쓸 수 있다.
3. 신약성경의 용법.
명사 스테파노스는 신약성경에서 18회 나오며, 다음과 같이 사용되었다.
(a) 스테파노스는 '가시 면류관'에 대해 사용되었다.
마 27:29(병행구 막 15:17 요 19:2 요 19:5), "가시 면류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가로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찌어다 하며". 가시투성이의 초목으로 만든 이 면류관은 군인들에게 있어서 거짓 왕권을 의미했으며, 조롱하기 위한 모조품이었으며, 상처를 내어 고통을 일으키고 예수님을 경멸하려고 고안한 것이었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또한 예수님께서 곧 죽음을 이기실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영적 왕국을 다스리실 그리스도의 참된 왕권에 대한 증거가 되었다. 요한에 의하면 가시관을 쓴 자가 참 승리자였다(참조: 요 16:33 요 19:30 요 20:28).
(b) 스테파노스에 대한 바울의 비유적 용법.
필로와 마찬가지로 바울은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썩을 면류관의 비유를 사용하며, 그리스도인의 삶을 운동 경기에 비유한다. 비유의 초점은 목표를 위하여 힘쓰는 자기 절제이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고전 9:25).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경주에 자주 비유한다. 고전 9:24-26 상반절 뿐만 아니라 갈 2:2 갈 5:7 빌 2:16 빌 3:12-14도 참고하라.
형용사 아파다르토스로 수식되는 썩지 아니할 면류관은 스테파노스 테스 조에스(생명의 면류관)로서, 경기에서 승리자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종말론적 선물이다. 여기서 비유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은 없다. 이 비유는 딤후 4:8에서 바울 자신의 삶과 관련하여 다시 사용된다.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딤전 4:6)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전 4:7)고 하였다. 따라서 그에게는 호 테스 디카오쉬네스 스테파노스("의의 면류관"), 즉 "그 날에" 궁극적인 의롭다하심을 가져 올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다(참조: 고전 4:1-5). 이 면류관은 호 디카이오스 크리테스("의로우신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주실 것이며,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토이스 헤가페코시 텐 에피파네이안 아우투("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다(딤전 4:8). 따라서 이 면류관을 받는 전제 조건은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인데, 이 충성은 주의 나타나심에 근거하며,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여 완전히 충성을 바치는 그러한 충성이다.
-이 진술은 약 1:12 및 계 2:10과 유사하다. 딤후 2:5은 일반적인 규칙을 명확히 표명한다. 그리고 다른 비유들도 사용된다. 딤후 2:3과 딤후 2:4의 군사, 딤후 2:5의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자(아드레오), 딤후 2:6의 농부의 비유이다. 경기자에 대해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승리의 면류관을 얻으려면 법대로 경기해야 한다(노미모스 아드레인). 노미모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예수 그리스도와(딤후 2:8) 그의 사도(딤후 2:1 이하)로부터 명백히 알 수 있다.
면류관 비유는 바울에 의해 또 다른 방식에서 사용된다. 그는 공동체를 그가 주님 앞에 설 때 쓰는 면류관이라 부른다: 빌 4:1,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살전 2:19-20, "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20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수사 의문문 형식을 취한다음 확언의 가르(**)로 직접적으로 답변을 되풀이함으로써 생동감 있는 문체를 구사한다. 본문은 잠 12:4 잠 17:6과 같은 개념을 채용한다. 본문 말씀은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바울은 그와 모든 신자들이 궁극적으로는 주님에 의해 구원 받는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심판에서 그의 삶의 열매가 측정되고 판단 받을 것이다(고전 15:10 고전 3:11-15 고전4:1-5 고전 5:5 고전 9:5-18 고후 5:10 등). 바울은 단지 개인적으로 구원 받기만을 원하지 않는다. 그의 삶의 결과가 시험 받아 견디어내므로 그것에 대한 보상과 칭찬을 원한다. 그의 삶의 결과(공력)들이 견디어 낸다는 사실은 파루시아의 날에 그의 면류관이요 기쁨이요 소망이요 영광인 교회들로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면류관과 기쁨의 결합이다. 면류관은 기쁨을 표현한다. 그리고 또한 면류관과 영광의 결합도 주목할 만하다. 면류관은 영광의 표시요 외형이다. 소망은 면류관을 바라는 것이다. 이 면류관으로 바울은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영광과 칭찬을 받으므로, 영광스러운 면류관인 것이다.
(c) 승리와 생명의 면류관.
계 2:10에서 핍박과 고난의 위협을 받는 서머나 교회는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는 부름을 받는다. 이 말씀은 약 1:12에 나오는 축복의 말씀과 일치한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또 딤후 4:8도 유사하다. 고난 당하는 자들, 어떤 경우에는 순교까지도 당할지도 모르는 자들에게 주님이 직접 씌워주실 승리자의 면류관을 약속하는 이 세 말씀 사이의 내면적 관계는 권고의 공통적인 근거를 지시한다.
안 에핑겔리라토("약속된)라는 언급이 포함된 약 1:12은 주님의 말씀으로 여겨질 수 있는 확실한 약속을 나타낸다. "생명의 면류관"이 뜻하는 것은, 만일 그 면류관이 승리의 보상이라면 그것이 전달하는 내용물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과 유사한 것으로 생명나무의 비유가 있다(계 2:7). 우리는 면류관이 이 나무로 만들어진다고 상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생명은 그것으로 만든 관을 쓴 자로부터 사망이 결코 빼앗아갈 수 없는 생명이다. 이 면류관은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에게 충성하는 자들에게 주시는(도소, 계 2:10) 주님의 약속이자 선물이다(약 1:12 딤후 4:8). 이 충성은 공격에 저항하고 고난을 견디는 데서 나타난다.
계 3:7 이하는 빌라델비아 교회가 주님의 말씀과 인격(이름)을 굳게 붙들었다고(계 3:8 하반절) 증언한다. 그리하여 그 교회는 임박한 공격에 직면하여 "내가 또한 너를 지키리라"(계 3:10)는 약속을 받으며, 아울러 주께서 속히 임할 것이므로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나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는 권면을 받는다(계 3:11). 승리의 면류관은 약속된 선물이다. 주님의 말씀을 굳게 지킴으로써(계 3:8 계 3:10) 그것은 주님 안에 약속된 이 선물을 굳게 붙잡을 것이다. 그 표현 형식은 유대 지혜 문학의 형식을 취한다.
벧전 5:4에 따르면 생명의 면류관은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 즉 불멸성이 그 빛나는 성질의 구성 요소인 영원히 썩지 않는 잎사귀로 엮은 것이다. 생명과 빛은 어둠과 사망처럼 함께 속하는 것이다. 생명의 면류관은 빛의 면류관이고, 따라서 머리 둘레에 빛나는 후광으로 나타난다.
벧전 5:4은 공동체의 지도자들에게 주어진 것이다. 양떼를 돌보는 목자로써 그들은 본이 되어야 하는데, 그리하면 목자장이 곧 나타나실 때 승리와 생명의 면류관을 받을 것이다. 벧전 5:4은 바울의 진술들과 계 2:10에 속하는 부류의 말씀 중간에 위치한다.
(d) 하나님의 영예의 상징으로서의 면류관.
요한계시록에서 기자는 24보좌에 앉아 있는 24 장로들을 본다: "또 보좌에 둘려 이십 사 보좌들이 있고 그 보좌들 위에 이십 사 장로들이 흰 옷을 입고 머리에 금 면류관을 쓰고 앉았더라"(계 4:4). 여기서 "금 면류관"은 빛나는 형태의 면류관이다. 그들은 "세세토록 사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그 앞에 면류관을 던진다(계 4:10). 또 하늘에 있는 여자가 빛나는 광휘 가운데 나타난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열 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계 12:1).
이 여자에게 대적하여 적대적인 세력을 상징하는 큰 용이 일어나는데, 머리가 일곱이요 "그 머리에 일곱 면류관이" 있다(계 12:3). 용과 마찬가지로, 바다에서, 즉 그가 지배하고 관할하는 권세를 상징하는 바다에서 나오는(계 13:1) 그 짐승은 계 6:2에서 이기는 자로 불리운다: "면류관을 받고 나가서 이기고 또 이기려고 하더라"(계 6:2). 계 9:7에서 황충들은 면류관을 쓰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면류관의 이미지는 다소 약화되며, 황충들의 재앙을 묘사하는 모든 곳에서처럼 직유법이다: "그 머리에 금같은 면류관 비슷한 것을 썼으며"(계 9:7).
마지막으로 인자가 또한 구름 위에 앉았는데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다"(계 14:14). 그는 "그 머리에 많은 면류관 있는" 백마 탄 자로 나온다(계 19:12). 이 많은 면류관은 그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불리우는 자로 구별시켜 준다(계 1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