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2~1966)은 모든 사회의 경제적인 악순환을 과감히 시정하고 자주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기반을 추구했으며 구체적으로는 「전력.석탄.정유 등 에너지 산업의 개발」,「농업생산의 증대」,「에너지 산업 등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간접자본의 확충.강화」,「유휴자본의 활용」,「수출 증대를 도모하는 국제수지의 개선, 기술의 진흥」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 실시 5년동안 GNP의 연평균 성장률은 8.3%. 계획 착수 연도인 1962년의 3.1%에 비교하면 실로 놀라운 고도성장이었다. 국민 1인당 GNP는 계획 실시 한 해 전인 1961년 고작 4천만 달러였으나 여섯 배의 경이적 신장을 기록했다. 이 무렵의 구호가 「증산.수출.건설」이었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67~1971)은 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농업의 근대화에 주안점을 둔 기간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식량의 자급자족」,「철강.기계.화학공업에 중점을 둔 공업화」,「수출증진과 수입대체에 의한 국제수지 개선」,「고용증대와 인구증가의 억제 」,「국민소득의 향상」,「기술수준과 생산의 향상」이 목표였다.
이 기간에는 연 평균 19.5%의 성장을 기록하여 국민 1인당 GNP는 1971년 2백66달러에 달하여 1966년 GNP의 두 배를 넘었다. 그리고 수출은 1971년에 11억3천만 달러가 되어 당초 계획의 두 배를 넘겼으며 현대.선경.삼성 등의 재벌 대기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구호 역시 「근검.절약.저축」이었다.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개획
제3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2~1976)은 「중화학공업의 건설」,「농어촌의 근대화」, 「수출증대에 의한 국제수지의 개선」을 목표로 삼았다. 이 기간중에는 1973년 석유 파동으로 세계적 불황이 불어닥쳤다.
모든 선진국들이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으나 한국은 1974년에 8.7%,1975년에 8.3%,1976년 에 15.2%의 성장을 기록하여 국민 1인당 GNP는 1976년에 6백98달러로 1971년의 2.6배가 되 었다. 수출은 1976년에 78억 달러로 계획 당시의 2.2배가 되었다. 이때부터 밖으로는 「한 강의 기적」이라 불려지게 되었고 안으로는 「하면 된다」는 일종의 민족신앙이 자리잡게 되었다.
제4차 경제개발5개년계획
제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은 경제의 자립화와 산업 구조의 중화학 공업화가 주안점이었다. 그런데 계획의 중반에 박정희 대통령이 쓰러지고 제2차 석유파동(1980~1981년)과 정치혼란 등으로 80년에는 6.2%란 사상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4차 경제개발기간 통산의 성장률은 7%를 기록하여 일본의 4.7% 성장을 능가, 세계 최고를 자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