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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터 드러커가 말하는 기업의 사회적 역할
1. 시작하는 말
"사회 속에서 기업의 역할은 무엇인가?"
이 물음은 기업이라는 영리조직이 사회에 등장하면서, 지금까지 합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주요 과제들 가운데 하나이다. 기업(corporate) 또는 회사(company)라는 조직, 즉 주주·경영자·종업원 등 여러 개인들이 모여 영리적 책임을 나눈다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중세시대의 거의 모든 사업은 개인들 사이에 일어나는 자급자족적 거래였다. 거래되는 물품들은 대부분 가족 농장에서 경작된 것들로써 이것들을 시장에 내다 팔거나, 교환하거나, 공공기관에 제공하는 것 등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법인체는 17세기 서북 유럽에서 성장한 무역회사들에서 시작된다. 어느 개인 투자가가 항해 자금을 단독으로 전부 조달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나 컸기 때문에 그들은 합자회사(joint stock company)를 설립했다. 합작회사는 필요한 자금을 조달한 후에는 그것을 사고 팔고 할 수 있는 주식을 발행함으로써 투자자들을 영구적인 자본가로 만들었다.
19세기 중반, 유럽과 미국에서는 유한책임회사(Limited Company)가 유향했다. 그것은 정부의 권력과는 꽤나 다른 새로운 종류의 권력 기관이 되었다.
이 새로운 '기업'이라는 조직은 역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자율적인 기관으로서 국민 국가(nation state)의 중앙정부로부터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도 사회 속에 존재하는 권력 중심(power center)을 창조하였다. 즉 전례가 없는 순수한 혁신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그간 기업은 서로 다른 두 얼굴을 가지고 활동을 해 왔다. 경제위기나 노동자의 파업시 가차없이 해고나 폐업 등으로 대응하는 한편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생계를 해결할 수 있게 했다.
그러나 산업사회를 마감하고 새로운 지식사회·정보사회로 전환하고 있는 지금, 우리들은 다시한번 '사회속에서 기업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정립하지 않을 수 없다.
2. 기업의 사회적 책임론 대두
기업은 의식과 양심이 있는가?
기업은 사람이 아니므로 의식이나 양심이 없는가? 그렇지 않으면 기업도 사람처럼 의식이 있고, 그래서 도덕적으로 사회적 책임을 인식하는가?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역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첫째, 기업은 의식이 없고 단지 이익추구만 하는 조직이므로, 소비자·종업원·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에 대해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 있다. 법률가들은 일찍이 '인조인간'으로서 법인(기업)의 법률적 성격이 무엇인가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었다.
17세기 유명한 법률가 에드워드 콕은 다음과 같이 공언했다. "법인은 배반할 수 없으며, 불법을 저지를 수도 없다. 고로 파문을 당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혼이 없기 때문이다."
수필가 윌리엄 해즐리트는 1824년에 쓴 수필에 콕의 말을 생생하게 인용했다.
"법인체는 개인들보다 훨씬 더 추악하고 방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잘못을 저지를 수 있는 더 큰 힘을 갖고 있지만, 불명예와 처벌을 받을 필요는 훨씬 적기 때문이다. 법인은 수치를 느끼지 않으며, 후회하지도 않고, 자비를 베풀지도 모르며, 선행도 하지 않는다."
헤즐리트는 법인(기업)의 진화가 초래할 위험에 대해 경고를 했던 것이다.
둘째, 기업은 이익추구 조직 이상으로서 사고능력이 있다는 주장 또한 가능하다. 기업은 사람과 같으며, 기업주는 기업을 대표하는 대행자로서 인식능력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기업의 행위는 개인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윤리적 표준에 맞추어서 평가될 수 있다. 그리고 기업은 자기의 행동에 대하여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며, 사회속에서 '건전한 시민' 즉 '좋은 기업시민'(good corporate citizenship)이라야 한다는 주장이다.
케네스 굳패스터는 기업은 각자의 목표와 경제적 가치관과 전략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식도 있다고 보았다. 물론 기업을 사람과 꼭 같이 취급할 수는 없지만 기업을 인격적 조직으로 보는 견해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문제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한걸음 앞선 견해이다.
사회구성원으로서 기업
20세기 초반, 정치 사상적으로 자유방임적 자유주의가 쇠퇴하고, 기업의 규모가 커지고 그 영향력이 증대됨에 따라, 기업이나 경영자의 사회적 책임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기업윤리의 필요성이 논의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30년대 이후 미국에서는 거대 기업이 등장하여 정치로부터 경제의 자율성을 확보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는데, 조직화된 자본주의 단계에서는 거대 기업의 자율적 의사결정이 일반 시민에게 중대한 피해와 손실을 초래하는 경우가 종종있었다. 그로 인해 현대 산업국가에서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인정하는 새로운 경향이 대두되었다.
조직 이외에 누가 사회를 돌보고, 사회적 문제와 사회적 질병을 해결할 것인가? 여러 조직들이 모여서 사회를 만든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밀턴 프리드먼이 주장한 것처럼, "기업은 단 하나의 책임, 즉 경제적 성과만 내면 된다"고 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경제적 성과는 기업의 제 1차적 책임이다. 적어도 자본비용을 보상할 수 있는 수준의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사회적으로 무책임한 기업인 것이다.
그런 기업은 사회의 자원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경제적 성과는 기업 생존의 기초이다. 이것이 없으면 기업은 다른 어떤 책임도 수행할 수 없으며, 훌륭한 고용인·건전한 시민·좋은 이웃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교육이 학교의 유일한 책임은 아니고, 치료활동이 병원의 유일한 책임은 아니듯이 마찬가지로 경제적 성과가 기업의 유일한 책임은 아니다.
기업은 일반적으로 사회와 지역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책임을 진다. 예를 들면, 기업이 강으로 방류하는 오염물질이나 업무 수행이 야기하는 교통체증 등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기업을 포함하여 조직사회의 여러조직들은 사회문제 해결방안 모색의 책임이 있다. 그리고 조직사회의 조직들은 진정으로 사회적 문제를 조직의 기회로 만들 책임이 있다. 예를 들면 3M은「3P」(Pollution Prevention Pays)라는 공해예방프로그램으로 오히려 기업의 이익을 제고시키고 있다.
기업 권력에 상응한 기업 책임
자유주의적 기업관에 변화를 초래한 요인들 가운데 하나는 정치와 기업의 새로운 관계 즉 정경유착과 기업의 권력확대 현상이다. 기업의 권력이 커지고 그 영향력이 증대되자 그것에 상응하는 사회적 책임도 커지게 되었다. 따라서 기업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규범을 준수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첫째는 소극적인 책임으로서, "기업은 사람들의 정당한 이익 또는 권리를 보장하기위해서는,…을 해서는 안된다"라는 이익 침해 금지적 규범이다.
둘째는 기업의 적극적인 책임으로서, "기업은 사람들의 정당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서는…을 해야한다"라는 적극적인 시행 권장적인 규범이다.
이 두가지 규범이 현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공식화한 윤리적 규범이라 하더라도 이것들은 법률로서 명문화되지 않는 경우가 많으며, 기업이 자율적으로 준수해야 할 사회 윤리적인 영역에 속한다. 케이스 데이비스는 기업가의 권력에 대해서, "책임은 권력에 부수된다"라는 명제를 제창하여 사회적 책임의 원칙을 제안하고 있다.
3.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은 무엇인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범위와 정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무엇이며, 책임의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하는 물음도 아직까지 학자들간에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기업의 책임을 논할 경우, 기업의 경영책임 또는 경제적 책임이라거나, 법률적 책임 또는 윤리적 책임이라 하지 않고, 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하는가?
이런 모든 책임을 일괄하여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오늘날의 기업이 자본주의체제 하에서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사회적 역할을 다해야하는 제도적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윤리는 다같이 경영이념을 바탕으로하여 전개된다. 현대 사회의 주요한 사회적 제도로서 기업의 올바를 경영이념의 정립은 기업의 존재이유와 직결된다. 윤리
● 표 1|기업의 책임범위
적 타당성을 전제로 하지 않는 경영정책의 전개는, 사회의 궁극적 목표인 '행복의 증진'을 저해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존립기반을 상실하게 된다. 여기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란, "기업이 사회의 목적이나 가치에 비추어 스스로 바람직한 정책을 세우고, 결정을 하며, 행동을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기업의 행위가 문제가 될 때, 사회적 입장에서 그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활동은 원래 경제행위이므로 발생되는 문제를 경제적 책임으로 귀결한다거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이라 하면서도 그 내용은 법률적 책임이 되거나, 또는 경영자 개인의 경영책임으로 귀결되고 만다. <표1>
경영자의 사회적 역할
사회의 구성원, 그것도 가장 중요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업은 사회의 발전에 적극적으로 공헌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학자들, 예를 들면 엘튼 메이요, 드러커, 알돌프 벌리, 케이즈 등은 두 가지 기본적인 사항에 의견을 같이 했다.
첫째, 산업사회는 주로 대기업의 등장과 함께 인간적·사회적 문제가 심각하게 되었다는 점이고, 둘째, 경영자는 이러한 제반 문제들을 해결하거나 최소한 개선해 나아가야 할 책임이 있다는 점이다.
샌드라 홈즈의 조사에 따르면, 기업은 단기적 또는 장기적 수익성이 없다 하더라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데 협력해야하고, 경영자들도 기업의 사회참여를 바라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이 사회적 기대에 대해 부응한다는 것은 오히려 장기적 안목으로 볼 때,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 준다. 존슨 앤드 존슨사의 최고경영자 짐 버크는 윤리의식이 강한 기업들이 꾸준하게 이득을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사실 사회적 책임에 관심을 표시하는 기업들 가운데는 실용적인 이유가 전혀 배제된 것은 아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면 할수록, 앞으로 있을 정부의 간섭과 규제를 피할 수 있다. 그리고 일반 대중이나 정부가 기업에게 기대하는 요구에대해 적극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역행하는 것보다 낫다는 계산이 내포되어 있을 수 있다.
현대기업은 세 가지 성격, 즉 경제적 제도로서의 성격, 통치제도로서의 성격, 공장 공동체로서의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오늘날 기업의 경영자는 경제적·통치적·사회적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삼위일체적 존재여야 한다. <표2>
● 표 2|경영자의 사회적 책임
기업의 사회적 책임의 이론적 근거
기업의 경영자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중요시하여야만 하는 이론적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시장의 불완전성 때문에 독점이나 과점 또는 동업자들끼리의 기업집중 현상이 나타나고, 시장의 자동조절기능이 약화되어 결과적으로 소비자에게 불이익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둘째, 외부불경제(external diseconomies)는 국민복지수준을 낮추는 작용을 한다. 시장경제 속에서 각 기업이 이윤의 극대화를 목표로 행동함으로써 시장 내부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외부불경제라고 한다. 예를 들면, 공해방지 시설을 하지 않는 기업은 단기적으로 이익을 보겠지만, 그 결과 지역사회 전체에 불이익을 초래한다. 이러한 외부불경제를 유발하는 사회적 비용은 해당 기업이 부담해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 국민적 최저권(national minimum)의 보장문제이다. 하나의 시민으로서 모든 사람은(최저인금·여가·의료·녹지·교육·주택·도로·교통 등 생활환경에 있어) 최저의 복지수준을 보장받아야 한다. 이는 최저 시민권(civil minimum)이라고도 할 수 있다. 기업의 경제활동은 모든 사람에게 이와같은 최저생활을 확보하도록 운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감사와 사회보고
사회적 책임에 대한 논의에 더하여, 사회적 성과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점에서 사회감사(social audit)와 기업 사회보고(corporate social reporting) 또는 기업 사회회계(corporate social accounting)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사회의 요구에 대응하여 기업이 어느 정도의 사회적성과를 내었고, 사회적 책임을 수행하였는가 하는 것을 사회에 공시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기업의 사회보고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 이행 여부에 대해 관심이 있거나 이를 필요로 하는 집단 내지 잠재적 사용자에게 보고서를 제출하는 것이다. 예를들면, 미국의 GM은 '공공관계 분야의 발전에 관한 보고(Report on Progress in Areas of Public Concern)라는 제목으로 작성한 보고서를 메년 발표하고 있다.
오늘날 대기업들은 새롭게 제기되는 사회적 요구를 예상하고 있어야 하고, 새로운 요구에 부응할 수 있도록 작업조건과 경영방식을 개선하고, 경영전략적 측면에서 목표를 성취시킬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4. 지식사회 속에서 기업의 역할
21세기의 지식사회는 지식(knowledge)과 지식근로자(knowledge worker)에 기초한 사회이다. 손에 굳은 살이 박혀야만 '정직한 노동'이라고 불리웠던 전통적 사회에서는 대다수가 농부였거나, 또는 20∼30년 전까지도 그랬듯이, 근로자 대다수가 기계 운전공으로서 대부분 똑같은 일을 했던 사회였다. 그러나 현대는 모두가 서로 다른 작업을 하는 사회이다.
이것은 단지 '변화'라고 표현하는 것 이상으로 더 많이 달라진 것으로 '인간조건'의 변화라고 하는 편이 더 옳을 수 있다. 지식사회에서는 오래된 지역사회와 공동체-예를 들면 집성촌이나 향우회 또는 동창회 등-와 같은 혈연·지연·학연의 중요성은 차츰 사라진다. 지금까지는 어떤 사회적인 과제들도 지역공동체 안에서 (물론, 우선적으로 가족에 의해서) 해결되었다. 오래된 지역공동체의 모든 사회적 과제들은-잘 실행되었든 안되었든 간에-한곳에 뿌리박고 머물러 있는 개인과 가족들이 해결했다. 지금은 이러한 과제들이 더 이상 오래된 지역공동체에 의해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능력 조차도 없다. 사람들은 지역적 또는 사회적 신분을 유지하기위해 그들이 태어난곳에 더 이상 머물지는 않는다.
다시 한번 정리하자면 지식사회는 이동사회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지식사회의 핵심적인 요소는 이동성인데, 어디에 살건, 무엇을 하건, 누구와 사귀던 간에 그것은 일시적이고 유동적이다. 이제 지역공동체 대신에 새로운 공동체가 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사회는 응당 경쟁사회이다. 모든 사람이 지식과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므로 모든 사람은 자신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그리고 욕망을 달성하기위해 노력(경쟁)한다. 지식사회는 과거 어떤 사회보다도 "훨씬 많은 사람들이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 사회"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연히 과거 어떤 사회보다도 "많은 사람들이 실패할 수 있는 사회"이기도 하다.
사회 부문과 시민 정신
"누가 지식사회의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은 '정부'도 '고용 기관'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 부문'이다. 미국에서는 독립적이고 상호 경쟁적인 교회들이 중요한 사회 부문으로서 항상 존재해 왔다. 미국 교회는 지금도 미국의 자선기관에 기부되는 돈의 거의 절반 가까이를 내고 있으며, 개인들이 비영리 자원봉사활동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대상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 미국에서는 종교 이외의 부문들이 새로운 사회 부문활동을 하는 조직으로 등장하고 있다.
1990년대에 들어와서, 미국에서는 사회부문 활동을 하는 비영리기관 또는 자선기관들이 약 1백만 개나 등록되었다. 이런 조직을 '비영리조직' (NPO;Non Profit Organization)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그것은 법률적 용어이다. 미국 법에 의하면, 이러한 조직들은 소득세를 내지 않는다는 것 외에는 다른조직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들이 '비영리' 목적으로 조직되었는지, 아니면 '영리 목적'으로 조직되었는지 하는 것은, 그들의 기능과 행위와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관계가 없다. 1960년대 이후 미국의 많은 병원들은 '영리 목적'으로 출발하였으며 법적으로는 기업체와 같다. 그러나 그들은 전통적인 '비영리' 병원과 똑같은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법적 규정이 아니라 각 조직들이 각기 다른 목적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기업은 재화와 용역을 제공하고, 반대급부를 기대하며, 학교는 교육받은 학생들을 배출한다. 병원의 '산출'은 질병이 완치된 환자이다. 교회의 '산출'은 삶이 변화된 사람이다.
사회부문 조직들의 과제는 '인간과 사회의 건강'을 창조하며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또한 현대에 와서 이 조직들은 차츰 또 다른 중요한 목적에 기여하고 있다. "그들은 시민정신을 창조한다."
현대 사회의 정치체제는 너무 크고 복잡하므로 시민정신의 발휘, 즉 책임감있는 참여는 더 이상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년에 한 번씩 투표하고, 세금을 제때 잘 내는 것 뿐이다.
그러나 사회부문 기관의 자원봉사자로서 활동할 때 개개인은 남다른 일을 할 수 있다. 지식사회는 사회부문을 필요로 하고 있고, 사회부문은 자원봉사자를 필요로 한다. 특히 지식근로자들은 하나의 시민으로서 행동할 수 있는 활동영역, 즉 지역공동체를 만들 수 있는 활동영역을 필요로 한다. 그들이 근무하고 있는 영리조직은 그들에게 이런 기회를 주지 않기 때문이다. 현대의 선진 사회는 사회부문 속에서, 그리고 사회부문을 통해서, 책임감과 성취감이 있는 시민정신을 다시 창조할 수 있다.
사회공헌과 사회봉사활동
기업의 사회공헌과 사회봉사에 대한 필요성은 두가지 분야에서 증가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전통적으로 '자선 활동'(charity) 분야이다. 가난한자들·장애자들·고아들·전쟁의 희생자를 돕는 것이다.
둘째는 지역사회(또는 공동체)를 변화시키고, 인간을 변화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봉사 활동' 분야이다. 사회적 변동기에는 언제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증가한다. 이세상 어디에나 엄청난 난민들이 있다. 전쟁과 사회적 격변의 희생자들, 인종적·종족적·정치적·종교적 박해의 희생자들, 무능한 정부와 폭력의 희생자들이 있다. 또한 가장 안정되고 잘 짜여져 있는 사회라 할지라도 지식사회와 지식작업에 소외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사회와 사회구성원들이 새로운 기술과 지식의 근본적인 변화를 소화해 내는 데는 적어도 몇 년 또는 그이상의 시간을 필요로 할지도 모른다.
자선활동은 수천 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데 비해서, 봉사활동은 1백년 전부터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해서 급속히 퍼져나가고 있다. 앞으로는 자선을 베푸는 활동보다는 지역사회(공동체)를 좀 더 풍요롭게 하고 인간을 개조하려고 시도하는 봉사활동에 대한 요구가 훨씬 더 빨리 증가할 것이다. 그 이유는 모든 선진국에서 노인인구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고, 그들 대부분은 혼자 살고 있으며, 또한 혼자 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는 건강과 의료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여 건강을 위한 연구, 건강교육, 그리고 의료 및 치료시설의 증가가점점 더 요구되기 때문이다. 또한 성인들을 위한 평생교육의 수요도 늘어나고 있다. 결손 가정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봉사활동의 필요성이 발생하기도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이러한 요구들을 복지국가(welfare state)를 통해 충족시키려는 시도는 거의 실패하였다. 그간의 경험에서 얻은 첫 번째 결론은, 정부는 사회분야에 있어서 집행자 또는 경영자가 되기를 중단하고, 정책 수립자로서 한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분야와 마찬가지로, 사회분야에 있어서도 정부가 개입을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성취를위한 자원봉사 활동
개인, 특히 지식근로자는 의미있는 사회생활과 원활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기위해, 자기직무와 직장 이외의 공간에서 자신의 전문지식 분야 이외의 활동을 할 수 있는 장소를 필요로 한다. 그곳이 바로 사회부문으로서 자원봉사 활동이다.
"국가나 지방정부가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고, 개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스스로 실행하는 것이 미국인들의 자원봉사정신"이다.
미국의 지도층 인사들은 자신의 고향이나 성장 거점의 발전을 위해 봉사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갖고 있으며, 인재 발굴과 육성을 위해 항상 노력한다.
1997년 5월 21일 조지 부시 전 대통령은 워싱턴 교외의 델러스 공항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병원기 취항식에서 5분 남짓한 축사를 통해 "성공한 인생에는 다른 사람에 대한 봉사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병원기의 취항식에 잠시 얼굴을 내밀어 자리를 빛내는 것 자체가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후광을 이용한 봉사활동이다. 과거 미국의 많은 중산층들은 일정한 돈을 내는 것(소위 자선활동)으로 자신의 사회적 의무를 다한다고 생각했으나, 지금에 와선 점차 적극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선진국에 있어서는 자원봉사 활동의 전통이 복지국가의 등장에 의해 말살되어 버린 점도 간과할 수 없다.
예를 들면 과거 일본에서 사찰들과 신사(神社)들은 그 지방의 자원봉사자들이 솔선 참여하여 활발한 지역활동을 펴는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러나 1867년의 명치유신을 통해 종교가 정부의 기능 안에 통합되어 버리자 자원봉사자들과 사찰공동체 활동은 곧 사라져 버렸다.
영국에서는 19세기 내내 자선활동은 곧 지역사회의 봉사활동이었으며, 잘사는 사람들의 책임으로 간주되었다. 1878년 영국에서 창설된 구세군은 빅토리아 시대에 번창하던 지역봉사전통 가운데 지금까지 살아 남은 한 예이다. 1890년 이후 정부가 사회의 지배자라는 생각이 확산되자 자선활동은 거의 사라져 버렸다.
프랑스에서는 나폴레옹 집권 이후 애당초부터 정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어떤 공동체 활동도 음모로 간주되어 감시를 받았다(지금도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는 어떤 목적이든 사람들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달랐다. 미국교회의 다양한 교파들, 주·카운티·시 등 지방자치의 강조 그리고 개척 당시부터 고립된 생활을 한 정착민들의 공동체 전통이 미국에 있어 사회 활동의 정치화나 정부집중화를 늦추었던 것이다.
자원봉사자들은 이제 더 이상 남을 '돕는자들' (helpers)이 아니라 '동반자들' (partners)이다. 미국에 있어 봉사활동의 자원자수의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할 수 있었던 주된 이유는 봉사활동의 수요가 증가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원봉사자들이 스스로 지역사회를 찾고, 참여와 봉사의 기회를 찾아 나섰기 때문이다. 이들은 전문직업을 가진 남편들과 아내로써, 맞벌이 부부들이고, 30∼40대 중반이고, 교육수준이 높고, 풍요롭게 살며, 바쁜 사람들이다. 이들은 일을 즐기며, 효과적으로 활동 할 수 있는 곳에서 뭔가를 해보려는 필요를 느끼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자발적으로 지역 교회의 성경반을 운영하거나, 혹은 병원에서 퇴원한 노인을 방문하여 물리치료를 해주거나 한다. 퇴임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은 고향 조지아주 플레인즈의 침려교회를 종종 찾아가 주일교리반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자원봉사는 성과를 내는 것이다
미국 비영이기관 전국연합회의 회장인 브라이언 오코넬은 10년이내 미국 성인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억2천만 명이 일주일에 5시간 씩 비영리기관의 자원봉사로 활동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비영리 봉사활동을 하는 남녀 인력이 현재보다 두 배로 증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비영리기관의 잠재력이 현실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다음의 두가지가 해결되어야 한다.
첫째, 일반적인 비영리기관이라 하더라도 자기관리와 경영은 최고수준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봉사활동은 '좋은 의도'와 '순수한 마음가짐'만 있으면 된다고 믿고 있다. 성과와 결과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능력이 모자라는 사람이 단지 착한 마음으로 봉사한다면, 그것은 사회적 에너지를 분산시키거나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둘째, 비영리기관들은 자금조달 방법을 배워야 한다. 비영리기관 종사자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세상사람들은 동정심이 부족해지고 더 인색해지고 있다"는 것은 증거가 없다. 최근 몇 년동안 미국에서 현금은 개인소득의 2.5%에서 2.9%로 증가했다. 불행히도 많은 비영리기관들은 돈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 아직도 '필요성'(needs)을 외치고 다니지만 이제는 기업이나 일반 대중들은 '결과'(results)를 보고 기부를 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자선'에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회봉사를 '사 들이고' 있는 것이다.
● 표 3|좋은 기업 시민의 글로벌 패러다임
5. 맺는 말
기업윤리의 강조
앞으로 사회는 어떤 기업이 제공하는 상품의 질이나 창출하는 이익만으로 그 기업을 평가하지는 않는다. 어떤 기업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적절한 행동을 하고 있는가, 또는 타당한 노력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중요한 평가의 기준으로 삼을 것이다. 글로벌 경쟁이 진행되는 21세기에는 그것은 한층 더 명확해질 것이다.
선도적인 미국기업은 '윤리강령'을 적극적으로 공표하고 그 준수를 공약하고 있다. 윤리강령에는 윤리가 기업 이익보다 우선한다고 되어 있으며, 위반할 경우의 벌칙규정까지 명기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강령의 내용을 사원들에게 철저히 인식시키기 위해 사내 시스템도 확립되어 있다. 기업윤리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조직을 설치하고 경영으로부터 독립성을 보장하고 있다.
IBM은 윤리 판단의 중립성이 흔들리지 않는 법무담당관을 두고 있는데, 그는 일반 명령계통으로부터 독립되어 있다. 문제가 일어나면 현장의 관리자를 제치고 해당 업무를 집행한 담당 중역에게 의견을 말할 수 있다. IBM은 윤리관련 활동을 감시하는 '감사위원회'를 이사회 안에 가지고 있다.
한국의 기업은 이와는 전혀 다른 상황에 있다. 우선 윤리담당 조직을 두고 있는 회사가 적다. 있다고 하더라도 사장실 등의 감독 하에 있어 독립성을 유지하는 것이 사실상 어렵다. 기업의 세계화가 진전되는 가운데, 기업의 윤리규정에도 국제적 기준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지 않으면 공정한 국제사회를 구성하는 일원으로서 인정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표3>
봉사활동의 후원
"19세기는「기업의 시대」였고, 20세기는「정부의 시대」였으나, 21세기는「지역사회(공동체)의 시대」"가 될 것이다.
지식사회의 지식근로자는 아무리 보수가 좋고 만족스러운 직장이라 하더라도, 직장에서 하는 일과는 다른 어떤 일을 하면서, 스스로 맡은 사회적 책임을 다함으로써 행복감을 느끼고 있다. 이는 특히 성공한 사람들 사이에서 확산되어야 한다.
비영리조직체에서 무보수로 일하는 자원봉사자들에게, "보수를 받고 일하는 직장에서도 할 일이 많은데 왜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자원봉사자로서 무보수로 일을 합니까?" 라고 질문하면, 그럴 때마다 그들은 똑같은 대답을 한다. "비영리조직에서 하는 일은, 내가 무엇을, 왜 하는지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에 공헌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또한 조직의 한 구성원이라는 소속감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미국등 구미 선진국의 기업들은 대체로 세전 이익의 2%내외를 사회공헌 활동비로 할애하고 있다. 사회가 좋아지고 경제적으로 발전되면 일반 시민이 혜택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도 혜택을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업도 혜택을 보게 된다. 따라서 기업도 사회문제를 인식하고 그 해결을 위하여 공헌하고 노력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본의 경단련은 '1%클럽'을 만들어 세전 이익의 1%이상을 반드시 사회공헌 활동에 써달라고 회원사에 요청하고 있다. 일본의 많은 문화예술인들은 버블경제의 붕괴와 함께 기업 메세나(프랑스어로 예술문화를 보호·지원하는 것을 의미)가 쇠퇴해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다. 일본의 기업 메세나혐의회는 기업의 예술·문화지원활동의 활성화를 목표로 하는 일본 최초의 기업연합체로서 1990년 2월에 설립되었다. 발족 당시 이미 버블경제가 붕괴되기 시작하고 있었으나 그래도 경제적으로는 여우가 있었기 때문에 메세나는 그런대로 확산되었다. 그후의 심각한 장기적인 불황은 기업 메세나를 어렵게 할 것으로 추측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지금 일본에서 기업 메세나는 쇠퇴라기 보다는 착실하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기업의 본연적 활동이든 기업의 사회적 활동이든 간에 성과란 사용 가능한 자원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여 결과를 얻는 것이지, 가져오지도 못할 결과에 대한 기대와 약속을 늘어놓는 것이 아니다. 비영리조직에서도 성과는 계획되어져야 한다. 계획없이 시작한 비영리조직들은 성과를 거둘 수 없다.
17세기와 18세기 초 몇 사람의 예수회 신부들이 선교활동을 위해 중국에 숨어 들어가는데 성공했다. 그들은 어느 모로 보나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박해도, 고난도, 위험도 무릅쓴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단 몇 명의 중국 사람들이라도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수용하도록 끝없는 희망으로 노력을 계속했었다. 그러나 결과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들은 대단히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지만, 결과적으로 예수회는 뛰어난 인재만 소모한 것이었다. 그 후 예수회는 모든 면에서 탁월한 신부들을 성과가 없는 그런 곳에 '선교'라는 이름으로 보내는 일을 중단하였다. 1백2십여 년 전 젊은 여자 아이들을 위하여 벌인 교육사업이 비록 구세군의 첫 자선사업 활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에 와서는 그 필요성이 없어지자 구세군은 그 사업을 폐기했다.
이 에피소드에서처럼 비영리조직도 올바른 방법으로 추진되어야 하고, 반드시 성과를 내야만 한다. 또한 기업은 성과를 내는 비영리조직에 효과적으로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 그것이 지식사회 속에서 기업의 사회적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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