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인노는 젊어서는 무인으로 노년에는 문인가객으로 살았다. 그는 무소유의 삶과 생각의 걸림이 없었던 자유인으로
살다 생을 마감했다. 무덤 비석의 머리부분인 개첨석은 하늘을 나는 형상을 하고 있어 그의 사상만큼이나 자유분방해
특색있다. 박인노의 묘소는 도계서원 뒷편에 자리해 있다. 정훈진 기자
박인노가 노년에 머문 입암서원은 여헌 장현광과 함께 입암리의 아름다운 산수를 스물아홉수의 시조로 지 은곳이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0호로 지정돼 있다.
◆ 조홍시가로 맺은 한음 이덕형과 우정
32세의 노계 박인노는 고향 친구 복재 정담과 함께 임란의병에 가담하고 영천성 탈환전투를 치른다.
승전 용사가 된 노계는 스스로 무인이 되고자 지금은 나라가 어지러운 때이니 먼저 나라를 구하리라 하고 굳게 결심한다.
전란이 수그러드는가 했지만 다시 정유재란이 발생하자 노계는 강좌절도사 성윤문을 따라 수군에 종군하면서 절도사의
지도력을 칭송하고 전쟁 피로를 달래주는 ‘태평사’를 짓는다.
칼과 더불어 붓을 지니고 다녔던 노계는 전장의 사선을 넘나들면서도 시정(詩情)을 잃지 않았던 것이다.
선조 32년인 1599년에 지루하던 전쟁이 끝나면서 노계는 무과를 거쳐 수문장, 선전과 그리고 거제도의 조라포 만호로 나아
간다. 무인으로 출발하여 조그마한 변방을 감당하는 하급관리가 된 것이다.
그즈음 노계가 잠깐 고향을 다녀가는 길에 때마침 한음 이덕형이 노계의 고향 북안을 찾게 된다.
1601년, 4도도체찰사로서 경상도 지역의 전쟁피해를 살피고 민심을 달래던 한음이 영천시 북안면 도유동, 구룡산 서북 자락에
있는 자신의 시조묘역을 참배하러 왔던 것이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노계는 당시 사회의 출중한 지도자요 선조의 총애를 받으면서 임란 뒤를 수습하는 한음을 만나 통성명이라
도 나누고 싶었다. 우연한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동갑인데다 시(詩)로써 우정을 다져나가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반중 조홍 감이 고아도 보이나다
유자 안이라도 품엄즉도 하다마는
품어가 반기리 업슬새 글노 설워하나이다(노계집 권3)
문밖에는 늦은 봄 햇살에 나부끼는 연둣빛 감잎들이 더없이 아름답다.
음식상을 앞에 놓고 한음과 마주 앉은 노계는 마침 상 위에 오른 홍시를 보자 시적 감흥을 물리칠 수가 없어 조홍시가를 읊조린
것이다. 한음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누구 못지않게 효자이던 그는 일순의 감동을 어찌할 줄을 몰랐다. 서로의 시심을 알아본 두 사람은 술잔을 주고받으면서 백 년
지기의 우정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광주(廣州)를 본관으로 하는 이덕형의 시조는 당(唐)이다. 고려말(1368년·공민왕 17년) 신돈의 비행을 비판한 아들 둔촌을 따라
영천으로 피신하여 살다 생을 마쳤다.
그가 묻힌 묘소는 남쪽으로 멀리 병풍을 두른 듯한 사룡산을 바라 불 수 있고, 여명과 일몰이 빛으로 출렁거리는 도유지를 품고
있다. 청 푸른 도래솔로 둘러싸인 널찍한 묘소 바로 위에는 둔촌의 친구 천곡(최원도)의 어머니 묘가 자리한다. 지역사람들은
그곳(廣州李氏始祖墓)을 두고 광릉이라 부른다.
둔촌과 천곡의 우정이야기는 초등학교 교과서에서 읽혀질 만큼 널리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1611년(광해군 3년), 한음이 관직을 사퇴하고 고향인 사제(莎堤;한강 상류의 북한강과 남한강이
맞닿는 용진강 일원)에서 쉬고 있을 때 노계도 뒤따라가 사제곡(莎堤曲)과 누항사(陋巷詞)를 부르면서 외로움과 회한을 달래곤
했다.
늘고 병이 드러 해골을 빌리실새
한수동 따흐로 방수심산하야
용진강 디내올나 사제 안 드라드니
제일강산이 임자 업시 버려느나
펑생 몽상이 오라하야 그러턴지
수광산색이 녯 낫츨 다시 본 듯
무정한 산수도 유정하야 보이나다.(사제곡 2절)
◆ 여헌과 함께 부른 입암이십구곡
학덕이 높고 고향 친구인 복재 정담은 누구보다도 노계를 가까이 이해하였다. 정담은 노계에게 성주 출신의 한강 정구를
만나게 해준다. 영남의 거유 퇴계와 남명의 학풍을 고루 아우른 정구는 당대의 석학이었다.
1619년(광해 12년), 59세에 든 노계는 한강을 만나 울산 초정과 동래에서 온천욕을 즐기면서 그해 여름과 가을을 유감없이
즐긴다.
신농씨 모른 약을 이 초정의 숨겨던가
추양이 쬐오는데 물 속의 잠겨시니
증점의 욕기기상을 오늘 다시 본덧하다(욕우울산초정가,노계집 권3)
노계의 지적 호기심과 탐미적인 유랑성은 나이와 무관하였다.
동래에서 돌아온 노계는 고향에 오래 머물 겨를도 없이 지필묵을 챙기고 말 먹이를 살핀다. 입암(立巖)으로 나설 요량이다.
영천시 동북의 영천댐에서 청송 방면으로 10㎞ 거리에 있는 구암산과 민봉산 등 가파른 산지군들로 둘러싸인 입암(포항시
죽장면 입암리)은 해발 500m의 지역에 위치해 있다.
물이 좋고 바위와 계곡이 아름다운 그곳에는 여헌 장현광이 임진왜란을 피하려 왔다가 산수에 매료되어 눌러 산다는 풍문을
들어온 터였다.
한강이나 복재로부터 자주 여헌의 인물됨과 학덕을 들어왔던 노계는 여헌과의 만남을 그리 낯설게 여기지 않는다. 노계는
여름날의 긴 하루해가 넘어가고 어둠이 몰려들 무렵 입암에 도착하였다.
이미 일흔여섯의 나이, 온몸에 밀려오는 피로감을 물리칠 수 없었다. 선잠으로 밤을 보내고 아침 일찍 만할당(萬活堂 :
입암서원(立巖書院) 부속건물)의 여헌을 만났다.
한음을 만나던 청년 시절이나 한강과 유람하고 다니던 중년과는 달랐다. 또한 예닐곱 살 웃도는 여헌이지만 그리 편한
인물이 아니기도 하였다. 그러나 천성이 걸림 없는 노계는 상대를 또한 자유롭게 이끌어내는 재간이 있었던 것일까.
노계는 아무런 작위를 하지 않고 마치 마음을 비우듯이 내려놓는다.
무하옹(無何翁)이라 불리는 그의 호(號)가 말해주듯이 어떻게 하지 않음에서 함(作爲)을 얻어낸다고 할까. 마침내 노계는
여헌과 함께 입암의 아름다운 산수를 찬미하는 스물아홉 수의 시조(立巖二十九曲)을 짓는다.
무정히 서는 바회 유정하야 보이나다
최령한 오인도 직립불의 어렵거늘
만고에 곳게 선 저 얼구리 고칠 적이 업나다.(입암, 노계집 권3)
자그마한 맞배집인 만활당과 개울가의 선바위(立巖)에 기댄 일제당 마루에는 늘 사람들로 붐볐다. 맑은 훈기가 감돌았다.
여헌을 중심으로 동봉 권극립 등 몇몇 지우들이 절차탁마하면서 학문을 정진하고 다른 한편 생업을 개척해 나간 것이다.
특히 동봉은 여헌이 자유롭게 강학해 나갈 수 있도록 숙식을 비롯한 경제적인 여건을 마련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노계도 그들과 함께 공부하고 창작하는 일에 전념하였다.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입암서원 앞에 있는 노목의 은행나무와 동봉선생기념비, 그리고 노계선생시비가 400여 년 전, 마치
무릉도원과 같은 입암곡에서 의기투합하여 생활하던 사나이들의 훈훈한 우정을 엿보게 해 준다.
◆ 귀향, 노계가(蘆溪歌)를 부르다
“하얗게 센 백발을 날리면서 자연산수를 찾는 일이 너무 늦은 줄 알지마는 일생 품은 뜻을 풀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병자년
봄날에 새 옷과 대지팡이와 짚신을 갈아 신고 마침내 노계마을(蘆溪谷)을 찾아드니 다행스럽게도 제일 아름다운 강산이
주인도 없는 채 버려져 있구나.
옛날부터 지금까지 세상을 피하여 숨어서 사는 사람과 벼슬을 거절한 사람들이 많고 많건만 하늘이 아끼고 땅이 숨겨두었다가
나에게 내주려고 남겼는가 보다.”(노계가 1절)
82세의 천수를 다할 때까지 노계는 좋은 사우(師友)를 찾아다니면서 시담을 즐겼다. 사람과 일상을 시와 가사로 빚어 담았고
발길 닿는 곳의 자연을 찬미하였다. 생각의 걸림이 없는 그는 대자유인이었다.
머물러 있지 않은 바람과 같았다. 그의 전반생이 무인이었다면 후반생은 독서와 유람과 창작에 몰두한 문인 가객이었다.
노계는 가사 9편과 시조 68수를 남긴다.
이 작품을 수록한 ‘노계집’은 3권2책으로 이루어지며 판목수량은 99장이다. 1974년 경상북도무형문화재 제68호로 지정된
이 판목은 1904년에 제작된 것으로 현재 안동의 한국국학진흥원에서 보존하고 있다.
도계서원은 노계가 돌아가신 60여년이 지난 후, 1707년(숙종 33)에 지방의 선비들이 노계의 학덕을 기리고자 세웠다.
대랑산(大朗山)에 있는 노계묘소 건너편 언덕에 소박한 건축물을 상양하고 춘추제향을 올리고 있다.
서원 경내에는 심재완, 서원섭 등의 노계의 시가연구자들이 세운 시비가 두 개나 있다.
세월이 더할수록 그의 가사문학과 시문학이 빛을 더해 나간다. 무소유의 질박한 그의 삶에서 오히려 향기가 배어나고
따스한 훈기가 전해진다.
그런데도 노계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싸해진다. 그가 남긴 감동과 서정 어린 문학작품에 비하여 서원이나 종택 혹은 그를
평가하는 가시적인 것과 체감되는 것들이 너무 미미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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