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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사랑 산사람] 홍성 오서산 | |
억새의 헤어진 수술 사이로 서해 낙조가 깃든다. 능선엔 다시 붉은 휘장이 드리우고 앞바다 통통배 기관음은 붉은 카펫 위에서 음표로 노닌다. 비릿한 해조음에 문득 시장기가 돌아온 산객들은 바삐 남당항(南塘港)으로 향한다. 노을 비켜선 파라솔 너머로 투명한 술잔이 앞다퉈 오가고 새조개 한 점 대하 한 접시에 부두는 덩달아 흥이 오른다. 해는 바다에 닿지 못한 채 은빛 비늘로 튕겨나고 취기 오른 나그네들의 수다는 밤바다 속으로 퍼져 나간다. 둥지로 돌아온 오서산 까마귀가 바삐 제 짝을 부를 때 새 소리에 놀란 노을만 공연히 빨간 여운을 털어낸다.
◆보령`청양`홍성과 접경…새우젓`김`대하 유명=오서산의 오서(嗚棲)는 ‘까마귀가 서식하는 산’이라는 뜻. 기독교 국가에서 까마귀는 악마로 통하고 유럽이나 중국에서도 흉조로 분류된다. 우리나라에서는 부모의 은혜를 잊지 않는다 하여 반포조(反哺鳥), 효조(孝鳥)로 불리고 새끼를 끔찍이 위한다고 해서 자오(慈烏)라고도 한다. 호두를 도로에 떨어트려 차가 지나가면 알맹이를 쪼아 먹을 정도로 지능도 높다고 한다. 앞으로 ‘새대가리’라고 비하하거나 ‘까마귀 고기를 먹었나’라고 비유했다가 부리에 쪼여도 할 말이 없을 듯싶다. 오서산은 보령`청양`홍성 3개 자치단체와 접경하고 있다. 주 등산로는 대부분 홍성군 광천에 집중되어 있다. 오서산을 말하면서 광천을 빼놓을 수 없다. 광천은 우리나라 새우젓 집산지 중의 하나. 조선시대 말엽부터 옹암포(독배마을)에서 젓갈시장이 형성되어 1970년대에는 하루 100여 척의 어선들이 들어올 정도로 서해 물류의 요충지였다. 21번 국도변에 자리 잡은 독배마을은 새우젓 숙성 토굴로 유명하다. 옛 폐광 터를 개조한 이 굴은 총 30여 개에 이른다. 이 천혜의 저장시설 덕에 광천은 근방에서 남부럽지 않은 풍요를 누렸다. 오죽하면 당시에 ‘광천 독배로 시집 못 간 내 팔자’란 유행가가 있을 정도였다. 오서산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삼국시대. 삼국사기 32권 ‘제사’ 편에는 오서산이 전국에 제사를 지내던 명산 중의 하나로 기록되었고 백제 멸망 후 오서산 일대는 복신(福信), 도침(道琛) 등 유민들이 나당연합군에 저항했던 백제 부흥운동의 중심지였다. 풍수가들은 이 산이 지세는 낮지만 여기서 시원(始原)된 물이 북쪽으로 역류해 풍수적으로 강단 있고 지조 있는 인물이 많이 나오는 형국이라고 말한다. 이 때문인지 한용운, 이응로, 김좌진, 윤봉길, 추사 김정희 같은 야성(野性)이 강한 인물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금북정맥의 중심, 호서지방의 최고봉 자랑=금강의 북쪽에서 서해를 향해 달려온 금북정맥은 수몰 직전 산을 하나 일으켜 세우니 바로 오서산이다. 정맥의 적자답게 사방 100리에서 최고봉을 자랑한다. 토정 이지함 선생도 산을 둘러보고 “호서(湖西)의 산 중에 이만한 산이 없다”고 칭찬한 바 있다. 오서산 등산로는 크게 두 가지. 광천 상담리에서 정암사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와 광성마을에서 공덕고개~내원사를 거쳐 정상으로 오르는 코스다. 상담마을에서 20분쯤 가볍게 오르면 정암사가 나온다. 백제 무왕 때 무렴 국사가 창건한 천년고찰이다. 절 입구엔 웅장한 문루가 문턱을 경계로 승속을 가른다. 정암사 임도가 끝나면 이제 본격적인 등산 시작. 길은 급경사를 이어 놓으며 종아리를 압박한다. 노고에 대한 보답이라도 하는 듯 산은 가끔씩 전망을 열어준다. 산객들의 발길을 쉽게 들이지 않으려는 산의 저항은 오서정 터까지 계속된다. 정자 뒤편엔 ‘쉰질바위’가 있다. 쉰은 50이고 질은 길(사람의 키 정도)이니 바위 높이를 환산해보면 80m쯤으로 추측된다. 드디어 오서정 터. 얼마 전 이 자리에는 제법 운치 있는 정자가 하나 있었다. 아담했던 정자는 최근 전망 데크로 새 단장했다. 꽤 큰 규모여서 웬만한 해맞이 행사 정도는 감당할 수 있는 규모다.
◆낙조에 잠긴 천수만`안면도`원산도 풍경 일품=이제부터 능선 길. 산은 사방을 열어 전망을 펼친다. 쌀쌀한 바닷바람을 등지고 천수만이 은빛으로 일렁인다. 시선을 먼바다로 던지면 청정바다 수면 위로 안면도, 원산도가 모습을 드러낸다. 수평선 낙조 속에서 시시각각 옷을 바꿔 입는 간척지 풍경도 장관이다. 오서산의 거침없는 조망은 바다 쪽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옛날 해도(海圖)가 부실했던 시기에 오서산은 주변을 오가는 선박들의 등대구실을 했다. 전망 데크에서 정상으로 향하는 남쪽 길을 택해 오른다. 완만한 길 위로 펼쳐진 억새능선을 걷는다. 수술을 모두 떨어뜨리고 빈 줄기만 바람에 흔들거리지만 오서산 억새는 전국 억새 산 중 제법 명품 반열에 든다. 규모는 작아도 서해바다를 배경으로 펼쳐진 은빛 군무가 높은 평점을 받은 덕이다. 드디어 정상. 조개 모양을 한 비석이 일행을 맞는다. 등정 감격도 잠시. 정상석을 두고 벌이는 자치단체의 알력에 눈살이 찌푸려진다. 보령시와 광천JC는 따로따로 표지석을 세웠다. 뒷전으로 밀린 옛날 비석까지 합하면 모두 3개의 정상석이 늘어서 있는 셈이다. 금북정맥이 힘차게 뻗어간 공덕고개 입구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틀어 광성리 쪽으로 하산 길을 잡는다. 동쪽 사면을 타고 이어지는 광성리 코스는 인적도 드물고 길도 흐릿하다. 임도를 따라 내려오며 오서산성의 흔적을 더듬는다. 성터에 기대 복신과 도침의 일대기에 대해 생각한다. 왕족과 불교지도자였던 그들은 왕조 교체기에 구 왕조와의 의리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 왕족들에게 새 왕조는 한편으로 기회였다. 통일신라에 협조만 하면 지방 토족으로서의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백제의 정통을 내세우며 산성을 쌓고 피로 맞섰다. 대열을 흩트리지 않고 끝까지 왕조와 운명을 함께했다. 이 또한 굽힘을 모르는 까칠한 산세 탓인가.
◆별미=광천 새우젓, 광천 맛김, 남당항 대하. 광천에는 ‘오서삼미(三味)’가 있다. 독배마을 토굴에서 나오는 새우젓은 빛과 향에서 전국 최고로 친다. 남당항 대하도 지금이 제철이다. 1마리당 1천원 안팎이면 싱싱한 소금구이와 회를 즐길 수 있다. ◆가는 길=경부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회덕JC에서 유성JC까지 진행한 후 당진~대전고속도로로 바꿔 탄다. 예산`수덕사IC에서 내려 21번 국도를 타고 홍성시내를 우회해 광천읍으로 진행한다. 광천읍에서 담산리로 가서 오서산 표지판을 보고 진행한다.
글`사진 한상갑기자 arira6@msnet.co.k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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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공식트위터 @dgtwt / 온라인 기사 문의 maeil01@msnet.co.kr 기사 작성일 : 2011년 12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