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울산두레교회 수요예배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 무엇인가를 물었을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배하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사실 예배는 교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의 알파와 오메가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활동에서 예배를 빼버린다면 교회는 사회봉사단체나, 교육단체나, 친목을 도모하는 모임 이상의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에 대한 관심과 열의가 없이는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다른 일에도 참된 관심과 열의를 가지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배가 어떻게 드려지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교회의 모든 활동을 판단할 수 있는 시금석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대한 관심과 열의는 우리 신앙의 잣대가 되기도 합니다. 그것은 예배의 대상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생활에는 뚜렷한 질서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삶의 우선순위에서 예배가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어야 합니다. 집을 세울 때에도 큰 기둥을 먼저 세우고 작은 기둥들을 덧붙여야 하는 것처럼 이렇게 우리 삶에서 예배에 대한 우선순위가 확립되어 있을 때 다른 모든 부분들이 조화와 균형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 공동체가 하나님을 예배하는 모습에는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예배의 순서에 따라, 예배를 섬기는 봉사자들과 예배의 참여자들이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하는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예배 모습 가운데는 특이한 것이 있었습니다. 예배 중에 방언과 통역과 예언의 순서가 있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예배는 찬양과 기도, 말씀, 그리고 함께 떡을 떼는 것이 보편적인 모습이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고린도교회에서의 예배 모습은 다른 교회에서는 잘 찾아보기 어려운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고린도 교회에는 신령한 은사를 가진 많은 성도들이 있었고 그 은사를 교회 안에서 잘 활용하기 위한 모습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함께 읽으신 말씀 26절에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어찌할까? 어쩌면 좋겠느냐?”는 말이 왜 있는 것일까요? 고린도 교회의 예배에 무질서한 면이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각각 자기의 은사를 드러내려고 하다가 예배를 무질서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들에 대하여 절제하고 너무 지나치게 행동하지 말고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질서라는 것은 순서를 알아야 되고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하며 자제할 줄 아는 것입니다. 은사가 있고, 열심이 있다고 해서 질서를 존중하지 않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것입니다. 자제할 줄 모르는 열심은 오히려 공동체에 해가 되는 것입니다.
1. 사랑의 질서를 따라야 합니다.
은사를 받았다할지라도 그것이 하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며, 그것이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에 덕을 세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은사를 구하되 사랑을 따라 구하라고 말했습니다. “은사를 나타내되 사랑으로 나타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은사를 주신 목적은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기 신앙의 우월성을 나타내거나, 하나님과의 남다른 관계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은사의 목적은 자신에게 덕을 세우며, 교회에도 덕을 세워서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를 가진 사람들은 무엇보다도 질서를 존중해야만 덕을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유명한 전도자 무디 선생이 한번은 예배를 인도하면서 어떤 남자에게 기도를 요청했습니다. 그런데 모처럼 기도할 기회를 얻은 그 남자는 너무나 오랫동안 기도를 했습니다. 통상적으로 공중기도는 3분 이내에 마치는 것이 예배의 질서입니다. 3분이 넘으면 그때부터는 기도가 아니라 설교라고 합니다. 의욕이 과해서 사사로운 마음이 기도에 첨가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3분이 아니라 5분, 10분이 지나도록 기도가 그치지 않자 무디는 그 사람의 기도가 예배에 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배의 질서를 해친다고 판단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우리의 형제가 기도를 마칠 때까지 다 같이 찬양합시다.” 그러자 잠시 후에 그 남자는 기도를 마무리 지었다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의 덕목 중에 가장 큰 것은 사랑입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 덕목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에 첫째는 사랑입니다. 은사의 원리는 사랑입니다. 은사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결코 자기중심적이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사람들은 형제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만족을 위해서 은사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를 과시하기 위해서 은사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25절에 보면 은사를 통해서 궁극적으로 드러나야 하는 것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참으로 우리 가운데 계신다.”고 전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베풀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은사를 가진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을 대리하여, 하나님께서 시키시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을 가져야만 합니다. 은사를 받은 것이, 직분으로 섬기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가리개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영광을 구석구석 비추는 반사판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진 모든 은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랑의 동기로 사용될 때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여서 내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드러나게 하는 주님의 일꾼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은사나 교회의 직분은 서열이 아닙니다.
교회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각각의 지체는 지체대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집사가 열심히 봉사하면 장로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꼭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나라 교회에서는 직분을 서열로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이러한 생각은 세상 방식을 그대로 교회에 받아들였기 때문에 생겨난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장로는 권사위에 있고, 권사는 집사위에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교회에서는 계급이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됩니다. 오히려 직분은 더 많이 섬겨야 하는 위치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의 순서는 전도대상자가 제일 섬김을 많이 받아야 하고, 그 다음에는 세례교인, 그 다음에는 서리집사, 그 다음에는 권사와 안수집사, 그 다음에는 장로, 그 다음에는 목사의 순서인 것입니다. 그런데 직분과 은사에 따라 서열이 생긴다면 이미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 주어진 직분과 그에 따른 은사는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 계급을 형성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이 열심히 움직이면 손이 되고, 손이 열심히 움직이면 눈이 하면서 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열심히 일하여 발이 눈이 되겠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는 사람마다 각기 받은 은사와 달란트에 따라 직분이 다양한 것입니다. 장로가 할 일 따로 있고, 집사와 권사가 할 일이 따로 있고, 교사가 할 일 따로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아무나 선생님이라는 인사를 들으려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선생으로 불리는 사람에게는 그 책임이 더 크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직분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달란트가 많아지거나 적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신 달란트대로 충성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사와 달란트에 욕심을 내려고하기보다 받은 은사와 달란트를 귀하게 여기고, 열심히 충성하여서 많은 열매를 맺어야 하겠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방언의 은사를 가지는 것이 신앙적으로 높은 서열을 가지는 것으로 생각을 했으며 방언의 은사를 동경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는 방언의 은사를 가진 사람만 필요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이 방언만 하고 있다면 도리어 알지 못하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들어와서 보고는 “미쳤다”고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 바울의 생각입니다. 도리어 초신자들이나,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알아듣지 알아듣는 말”을 하는 사람의 역할이 더 필요한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은사나 직분의 목적이 복음을 위하여 사람들을 섬기는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에게 어떤 은사나, 어떤 직분이 있든지 오직 그것으로 사랑으로 봉사하는 것이 교회의 덕을 세우고, 유익을 이루는 길인 것을 알고 자신의 맡은 일에 충성되게 일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전체의 조화를 존중해야 합니다.
성령의 은사는 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질서 있는 방식으로 사용되어져야 합니다. 특히, 공적인 예배는 적당한 방식, 즉 아름다움, 질서, 영적 동기와 내용이 있는 가운데서 드려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질서를 무시하고서는 결코 교회의 덕을 세울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은사를 억제하고자 하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습니다. 교회에는 여러 지체들이 있습니다. 그 각각의 지체는 지체대로 중요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일도 아주 중요하게 여겨야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나타낼 때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우라는 것이며 이를 위해서 품위 있고 질서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교회의 질서와, 성도의 품위를 유지하기 위한 몇 가지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방언으로 말할 때에는 차례대로 하라는 것입니다. 통역이 없으면 예배시간에는 잠잠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이 예언 할 때는 잠잠히 듣고 분별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특히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말했습니다. 말씀에 오해가 없기 위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특별한 설명이 필요합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여성들이 지나치게 행동한 부분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교훈을 주려고 하는 뜻이지, 보편적으로 모든 여성들에게 적용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성도로서 우리들이 지녀야 할 태도에 관해서는 “품위”라고 표현했고, 외적인 태도에 관해서는 “질서”로 표현 했습니다.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세상의 사람에서 거룩한 백성으로, 죄의 종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사망의 몸에서 생명의 몸으로” 품위가 높아진 것입니다. “질서와 무질서, 화평과 분쟁”을 서로 대조해서 사용하는 뜻은 품위 있는 삶의 모습을 더 부각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 품위를 잘 지켜서 유지하는 것이 우리들에게는 축복입니다. 그리고 성도의 품위 있는 삶은 질서 있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품위를 교회에서나, 세상에서 질서 있는 삶으로 드러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자녀로 삼아 주셨습니다. 성도라는 거룩한 이름을 주셨습니다. 우리의 품위는 하나님이 높여주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질서 있는 신앙생활로써 그 품위를 잘 지켜나가는 성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 예배의 우선순위를 가집시다. 직분으로 섬기는 사명을 감당합시다. 하나님의 은사가 사랑과 더불어 역사하므로 공동체의 조화를 이루고 교회의 덕과 질서를 세우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